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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일 때는 공소취소, 장관 후보 되니 '권한 없다'
[경제일보]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러나 임명권자에게만 책임지는 자리는 아니다. 검찰과 교정, 출입국, 인권과 형사사법 행정을 총괄하고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까지 떠맡는 자리다. 그래서 법무부 장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과의 적절한 거리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3일 이재명 대통령 관련 사건의 공소취소 논란에 선을 그었다. 김 후보자는 “법무부 장관으로서 공소취소를 할 직접적인 권한도 없고 검찰총장을 통해 지휘할 생각도 지금 없다”고 밝혔다. 개별 사건의 공소유지는 공판검사의 권한이며 이를 존중하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문제는 과거 발언과의 간극이다. 김 후보자는 의원 시절 이 대통령 사건의 공소취소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해왔다. 관련 의원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았고, 이 대통령 사건은 국가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도 폈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뒤에는 “법과 원칙에 따라 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정치인의 입장이 공직에 따라 달라지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국회의원과 법무부 장관은 역할과 책임이 다르다. 의원은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자리지만 장관은 법과 절차를 집행하는 자리다. 오히려 장관 후보자로서 과거 정치적 주장과 거리를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말 한마디로 우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권한의 유무보다 신뢰의 문제다. 법무부 장관에게 직접 공소를 취소할 권한이 없다는 설명은 맞다. 현행 체계에서 개별 사건의 공소유지와 취소는 검사가 판단한다. 다만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을 지휘·감독하며,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한다. 이 때문에 장관의 과거 정치적 입장과 현재의 태도는 형사사법 시스템의 신뢰와 직결된다. 더욱이 대상이 현직 대통령의 형사사건이라면 기준은 한층 엄격해진다. 법무부 장관이 과거 대통령 사건의 공소취소를 주장했다면 국민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장관이 된 뒤에도 같은 판단을 유지하는가. 검찰이 다른 결정을 내릴 경우 이를 그대로 존중할 것인가. 대통령과 여권의 정치적 이해보다 형사사법 절차를 앞세울 수 있는가. 김 후보자가 답해야 할 대목도 여기에 있다. 공소취소가 법적으로 가능하냐는 논쟁만으로는 부족하다. 장관으로 취임한 뒤 대통령 사건과 관련해 어떤 원칙을 적용할지, 이해충돌 우려가 생길 경우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절제할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법치주의는 법 조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과정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검찰이 대통령 사건의 공소를 유지하든 취소하든 국민이 그 결정을 정치적 압력의 결과로 받아들이면 형사사법의 신뢰는 흔들린다. 장관이 실제로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과거의 정치적 발언이 결정 과정 전체에 의심을 덧씌울 수 있다. 그래서 권력기관의 장에게는 법에 적힌 권한보다 더 넓은 자기 절제가 요구된다. 로마 공화정 시기 법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원칙 가운데 하나가 ‘법은 사람보다 오래가야 한다’는 사고다. 통치자의 이해에 따라 법이 흔들리는 순간 공화정의 토대도 함께 흔들린다고 봤다. 오늘날 법무부 장관에게 요구되는 원칙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대통령과 정치권의 사정이 바뀌어도 형사사법의 기준은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장관은 대통령의 참모이면서 동시에 법치의 관리자다. 두 역할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앞세우느냐가 중요하다.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 법무행정의 목표로 읽히는 순간 장관의 독립성은 약해진다. 반대로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이라도 법과 절차 앞에서는 거리를 둘 수 있다면 신뢰는 유지된다. 우리 정치에서 법무부 장관과 검찰을 둘러싼 논란이 반복된 이유도 이 경계가 자주 흐려졌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검찰 인사와 수사 방향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졌고, 여권은 검찰개혁을, 야권은 권력수사를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검찰과 법무부는 정치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갔다. 정치적 사건이 생길 때마다 장관의 말과 검찰의 판단이 정쟁의 소재로 소비되는 구조가 굳어진 셈이다. 이제는 이 악순환을 줄여야 한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과거 정치적 발언을 문제 삼는 데서 멈출 일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취임 이후 대통령 사건을 비롯한 정치적 사건에서 어떤 원칙을 적용하느냐다. 구체적 사건에 대한 불필요한 발언을 자제하고 검찰의 법적 판단을 존중하며, 지휘권 행사 기준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태도가 관건이다. 국회 인사청문회도 같은 기준에서 접근하는 편이 낫다. “공소취소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단답형 공방보다 대통령 사건에서 장관의 이해충돌을 어떻게 관리할지, 수사지휘권 행사의 기준은 무엇인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떻게 보장할지를 묻는 편이 생산적이다. 김 후보자가 “지휘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것은 방향 자체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국민이 궁금한 것은 현재의 말보다 취임 이후의 행동이다. 의원 시절의 정치적 주장을 장관이 된 뒤에도 법과 원칙보다 앞세운다면 우려는 현실이 된다. 반대로 정치적 이해와 거리를 두고 형사사법 절차를 존중한다면 과거 발언과의 간극도 설명력을 얻는다.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대통령의 법률대리인이 아니다. 정권의 이해를 지키는 자리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으로 형사사법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관리하는 것이 본래의 책무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봐야 할 것도 결국 그 점이다. 과거의 발언 자체보다 앞으로 어떤 기준을 지킬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대통령과의 정치적 거리를 스스로 확보하고, 법과 절차를 흔들지 않는 태도로 국민에게 답해야 한다. 법무부 장관에게 요구되는 신뢰는 강한 권한 행사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통령과 가까울수록 법 앞에서는 더 멀리 서는 절제에서 나온다.
2026-09-04 16: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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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 20조 선납 제안…전력망 책임은 누구 몫인가
[경제일보] 수백조원을 들여 반도체 공장을 지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첨단 팹은 거대한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반도체 경쟁이 기술과 자본의 싸움인 동시에 전력망 경쟁인 이유다. 하지만 그 전력망을 깔 돈이 부족해지자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5년치 전기요금을 먼저 내달라는 카드를 꺼냈다. 한전이 제안한 규모는 삼성전자 20조원, SK하이닉스 5조원이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낸 전기요금 약 4조1000억원과 9000억원을 기준으로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치를 계산했다. 선납금은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 등에 투입하고, 기업에는 국고채 금리보다 높은 수준의 이자를 제공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다만 참여 여부와 금리, 금액과 기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한전도 ‘제안’ 단계임을 분명히 했다. 전기요금 선납제 자체도 새로운 제도는 아니다. 지난해 선납액은 약 3900억원이었고, 대부분 공공기관이 이용했다. 기업이 미래에 낼 전기료를 먼저 내고 한전은 그 돈을 필요한 설비에 투자하며 기업은 이자를 받는 구조라면 금융거래로서 성립할 여지는 있다. 적기에 전력망이 완공되지 못해 수십조원짜리 공장이 서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이해관계가 있다. 문제는 규모와 목적이다. 3900억원 수준이던 선납제도를 단숨에 25조원짜리 전력망 조달수단으로 바꾸면 제도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 25조원은 한전 연간 매출의 4분의 1에 가까운 돈이다. 전기요금 납부 편의를 위한 제도가 사실상 국가 핵심 인프라를 조달하는 금융수단으로 변하는 셈이다. 한전이 이 방안을 고민하는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기 가동과 호남 클러스터 건설 등에 따른 추가 전력수요는 20.6GW로 추산되고, AI 데이터센터까지 더하면 필요한 전력이 더 늘어난다. 한전은 당초 2038년까지 전력망에 72조8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었지만 투자 수요는 더 커졌다. 반면 한전의 연결 기준 부채는 지난 6월 말 210조7000억원에 달한다. 올해 상반기에만 이자비용으로 2조1000억원을 썼다. 공기업의 재무제표와 국가 산업정책의 시간표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삼성과 하이닉스가 쓰는 전기니 두 회사가 망을 깔면 된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된다. 전력망은 공장 안의 생산설비가 아니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산업단지와 도시로 실어 나르는 국가 기간시설이다. 지난 7월 시행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도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 전기를 공급하는 주요 송·변전설비를 ‘국가기간 전력망 설비’로 규정하고 있다. 법의 목적부터 전기에너지의 안정적 공급과 국가 주요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력망을 조기에 확충하는 데 있다. 국가가 스스로 ‘기간망’이라고 이름 붙인 인프라의 책임을 특정 기업의 현금 여력에 의존해 해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반대편 원칙도 분명하다. 막대한 전기를 사용하는 대기업이 자신 때문에 추가로 발생하는 인프라 비용을 한 푼도 부담하지 않겠다는 논리 역시 설득력이 없다. 10GW, 20GW의 새로운 수요가 생기면 발전설비뿐 아니라 송전선과 변전소, 계통보강 비용이 따라온다. 그 비용을 일반 가정과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전기 소비자에게 똑같이 떠넘기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제5편에서 개인이나 소수에게 맡길 수 없는 공공사업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을 국가의 책무로 봤다. 동시에 도로와 교량 같은 시설의 비용은 이용자에게 받는 통행료로 충당할 수 있다고 했다. 250년 전에도 공공 인프라의 책임과 이용자의 비용부담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었던 셈이다. 지금 필요한 것도 ‘국가가 전부 낼 것이냐, 기업이 전부 낼 것이냐’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누가 어느 비용을 왜 부담하는지에 대한 원칙이다. 국가 전체가 이용하는 기간 송전망과 장거리 간선망은 국가와 한전이 책임지는 것이 맞다. 반면 특정 산업단지나 초대형 수요처 때문에 추가로 필요한 전용선로와 변전소, 접속설비에는 원인자·수익자 부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여러 기업과 지역이 함께 혜택을 보는 계통보강 비용이라면 수익 범위에 따라 분담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 선이 먼저 그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한전이 재무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현금이 많은 기업을 찾아가 몇 년 뒤 받을 전기료를 미리 달라고 하는 방식이 관행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오늘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지만 내일은 데이터센터, 배터리, 철강·석유화학 기업이 대상이 될 수 있다. 국가 인프라 투자비가 전력 수요자의 현금 보유액이나 협상력에 따라 결정되는 구조는 산업정책도, 요금정책도 아니다. 더구나 한전은 독점적인 송·배전망 사업자다. 기업 입장에서는 “싫으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으로 거래의 자발성이 완전히 확보됐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새 공장에 제때 전기를 공급받아야 하는 기업과 그 전력을 공급할 사실상의 유일한 사업자가 20조원 규모의 선납을 협상한다면 일반적인 금융거래보다 훨씬 엄격한 절차와 기준이 필요하다. 따라서 선납제를 확대하려면 세 가지 안전장치가 먼저다. 선납금은 해당 전력망 건설에만 쓰도록 별도 관리해야 한다. 기업별 부담액은 전력 사용량과 추가 계통투자 비용 등에 따른 객관적 산식으로 정하고 동일한 조건의 대규모 수요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공사가 늦어지거나 전력 공급 일정이 어긋났을 때 선납기업이 부담할 위험과 보상 원칙도 계약 단계에서 명확히 해야 한다. 한전의 재무문제와 전력망 투자 문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선납금으로 한전채 발행을 줄이는 효과가 생길 수는 있다. 하지만 과거 전기요금 정책과 연료비 급등으로 쌓인 210조원대 부채를 반도체 기업의 미래 전기료로 메우는 것이 목적이 돼서는 곤란하다. 반도체 전력망에 들어갈 돈과 한전의 누적 재무부담을 한 통장에 넣는 순간 비용 부담의 원칙은 흐려진다. 정부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정부는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용인과 호남에 대규모 클러스터를 추진하고 있다. 기업에는 수십조원, 수백조원 규모의 투자를 주문하면서 정작 공장을 돌릴 전력망은 한전과 기업이 돈을 마련해 알아서 깔라는 식이어서는 산업정책이라 하기 어렵다. 공장 유치는 국가전략이고 송전망은 기업 사정이라는 식의 역할 분담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의 속도는 전력망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 주민 수용성 문제와 송전선로 인허가를 풀고 장기 전력수요를 예측해 기간망을 미리 확보하는 일은 개별 기업이 대신할 수 없는 국가의 몫이다. 올해 시행된 국가기간전력망법이 5년마다 30년 단위의 장기 전망을 담은 전력망 기본계획을 만들도록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혜자가 되는 전력설비 비용을 일정 부분 부담하는 방안은 검토할 수 있다. 조건이 합리적이고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면 전기료 선납도 하나의 재원조달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순서는 분명해야 한다. 먼저 국가가 어떤 전력망을 언제까지 책임질 것인지 정하고, 그 다음 특정 수요자가 추가로 발생시킨 비용의 몫을 투명하게 계산해야 한다. 한전의 재무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 순서를 거꾸로 세워서는 안 된다. 전기는 기업이 돈을 내고 사는 상품이지만, 그 전기가 흐르는 국가기간망은 대한민국 산업의 기반이다. 상품의 값을 기업에 받을 수는 있다. 더 많이 쓰는 기업에 더 많은 인프라 비용을 부담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가 제때 준비하지 못한 기간망의 책임까지 ‘5년치 전기료 선납’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에 청구해서는 안 된다. 25조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보다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은 그것이다. “한국의 전력망은 누구의 책임인가.”
2026-09-04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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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억 달러 장외매입, 외환당국은 왜 설명하지 않나
[경제일보] SK하이닉스가 지난 7월 미국 자본시장에서 조달한 265억 달러가 한국 외환정책의 원칙을 묻는 문제로 번졌다. 로이터 등의 보도대로라면 외환당국은 SK하이닉스의 조달금 가운데 약 200억 달러를 장외에서 사들였다. 우리 돈 27조원이 넘는 규모다. 현재까지 정부와 한국은행, SK하이닉스는 이 거래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거래 시점과 환율, 구체적인 계약 방식도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매입 사실과 목적을 정부가 공식 확인한 것처럼 단정할 단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보도가 던지는 질문은 가볍지 않다. SK하이닉스의 조달금은 AI 반도체 생산능력 확충을 위한 공장과 설비 투자 등에 투입될 예정이다. 문제는 이 거액의 달러가 국내로 유입되는 과정이다. 상당액을 원화로 바꾸면 외환시장에는 그만큼의 달러 매물이 쏟아진다. 또 달러 공급이 갑자기 불어나면 원화 가치에는 단기간에 상당한 상승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 최근 시장 상황도 민감했다. 원화는 지난 6월 말 달러당 1550원 안팎까지 밀린 뒤 두 달 사이 12% 넘게 반등했다. 이 국면에서 수백억 달러의 일회성 물량까지 더해지면 변동성이 급격히 커질 수 있다. 외환시장은 방향보다 속도에 더 쉽게 다친다. 원화가 경제의 기초체력을 반영해 서서히 오르는 것과 특정 기업의 대규모 자금 이동 때문에 며칠 사이 급격히 치솟는 것은 다르다. 수출기업은 환율을 전제로 가격과 손익을 짜고, 수입기업은 결제계획을 세우며, 외국인 투자자는 환차손익을 계산한다. 예측 가능한 변화에는 적응할 수 있지만 급격한 쏠림에는 대응할 시간이 없다. 로이터 보도대로 외환당국이 SK하이닉스 물량의 상당 부분을 장외에서 받아냈다면, 시장 충격을 완화하려는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로이터 역시 원화의 급격한 강세를 누그러뜨리고 외화 여력을 보강하려는 성격으로 이번 거래를 전했다. 외환당국이 최근 상당한 규모의 달러를 시장에 공급해 온 것은 확인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당국은 원화 약세가 심했던 지난해 4분기 224억6700만 달러, 올해 1분기 136억2800만 달러를 외환시장에서 순매도했다. 두 분기 동안 풀어놓은 달러만 360억 달러를 넘는다. 그만큼 외화 대응 여력을 다시 보강할 유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은 가능하다. 원화가 급락할 때 달러를 팔아 속도를 늦췄다면, 반대로 대규모 달러 공급으로 원화가 급등할 때 일부를 다시 흡수하는 것은 외환시장 안정이라는 정책 목적에도 부합한다. 따라서 시장안정 차원의 매입이었다면 정책적 명분은 충분하다. 쟁점은 매입 자체가 아니다. 외환당국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200억 달러를 움직였느냐다. 시장인가, 특정 환율인가. 외환정책은 본래 한 가지 긴장을 품고 있다. 환율은 시장에 맡겨야 하지만 시장이 한쪽으로 급격히 쏠릴 때는 당국이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원하는 환율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시장안정은 환율 수준을 관리하는 정책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개입에는 선이 필요하다. 외환당국이 지켜야 할 것은 환율의 특정한 ‘수준’이 아니라 시장의 ‘질서’다. 원화가 어느 수준에서 거래돼야 하는지는 기본적으로 시장이 판단할 몫이다. 수출기업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원화를 의도적으로 약하게 만들거나, 물가를 잡겠다고 특정 환율을 사실상의 목표로 삼는 것은 정부가 시장가격을 대신 정하는 일이다. 시장의 가격발견 기능을 흔들 뿐 아니라 교역 상대국과의 환율 갈등을 자초할 수도 있다. 반대로 일회성 대규모 외화 유입 등으로 수급이 단기간에 한쪽으로 쏠릴 때 그 충격을 완화하는 것은 당국의 역할이다. 환율의 수준은 시장이 정하되, 그 가격을 찾아가는 시장의 질서는 당국이 지켜야 한다. 이번 200억 달러 거래를 따져봐야 할 기준도 여기에 있다. 로이터 보도대로 265억 달러 가운데 약 200억 달러를 외환당국이 흡수했다면 전체의 4분의 3이 넘는다. 시장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일시적 조치였다면 개입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크지 않다. 수백억 달러가 한꺼번에 현물환시장으로 쏟아지는 것을 피하는 것은 중앙은행과 외환당국이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선택이다. 그렇다고 200억 달러라는 숫자의 무게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의 거래라면 어떤 원칙이 적용됐는지는 물어야 한다. 다른 기업이 같은 규모의 외화를 들여와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 것인가. 무엇보다 외환당국이 개입에 나서는 수급 충격의 기준은 무엇인가. 현재 공개된 정보만으로 이번 거래를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로 규정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런 거래가 반복될 때 적용할 보편적 기준이다. 한국 외환시장의 수급 구조는 이미 달라졌다. 거래 규모가 커졌다면 외환정책의 규칙도 그에 맞춰 정교해져야 한다. 그래서 이제 외환개입에도 ‘사후 설명의 원칙’이 필요하다. 한국 외환당국은 현재 외환 순거래액을 일정한 시차를 두고 공개한다. 과거와 비교하면 투명성이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얼마를 사고팔았는지는 알 수 있어도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외환개입의 세부 내용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개입 시점과 가격, 규모를 공개하면 시장이 당국의 대응 패턴을 역이용할 수 있다. 때문에 외환정책에는 불가피하게 비밀이 필요하고 정책당국의 재량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비밀이 필요하다는 것과 불투명해도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거래가 끝난 뒤 설명이 비어 있는 자리는 추측과 개입설이 차지한다. 이번에도 200억 달러라는 거대한 거래가 정부 발표가 아니라 외신의 익명 취재를 통해 알려졌다. 거래의 세부 조건은 공개하지 않더라도 정책 목적과 판단 원칙 정도는 사후에 설명할 필요가 있다. 시장 변동성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앞서 사용한 외화 여력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정책적 판단이 있었는지 말이다. 외국환평형기금도 마찬가지다. 외평기금은 외환시장이 급격히 흔들릴 때 충격을 완충하기 위해 존재한다. 시장 안정을 위해 재량 있게 운용할 필요가 있는 특수한 자금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필요할 때 수십조원을 움직인 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아도 되는 돈은 아니다. 거래 세부를 공개할 수 없다면 최소한 대규모 장외거래의 목적과 운용 원칙, 기금에 미치는 영향 정도는 국회가 사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외환정책에는 두 가지 절제가 함께 필요하다. 시장에 개입하되 가격을 정하려 해서는 안 되고, 비밀을 지키되 원칙까지 감춰서는 안 된다. 200억 달러 매입이 단기적인 수급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외환시장 안정이라는 정책목표에 부합할 수 있다. 반면 원화 가치를 일정 수준 아래로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외환당국이 설명해야 할 것은 개별 거래의 세세한 조건이 아니라 바로 이 경계다. ‘논어’ 안연편은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즉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 했다. 금융시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환율은 숫자로 표시되지만 그 숫자를 떠받치는 것은 결국 정책에 대한 신뢰다. 외환당국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언제나 외환보유액인 것은 아니다. 예측 가능한 원칙 역시 강력한 외환정책 수단이다. SK하이닉스가 미국 자본시장에서 265억 달러를 조달한 것은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만든 성과다. 그 거대한 자금이 국내 외환시장에 일시적인 충격을 줄 우려가 있었다면 당국이 이를 완충하는 것 역시 정책의 영역이다. 다만 시장안정이라는 이름이 모든 개입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외환당국이 지켜야 할 것은 특정한 환율이 아니라 환율이 제 가격을 찾아갈 수 있는 시장의 질서다. 로이터가 보도한 200억 달러 거래가 사실이라면 이제 당국이 밝혀야 할 것도 거기에 있다. 왜 개입했고, 어떤 원칙을 적용했으며, 같은 상황이 다시 오면 어떤 기준으로 움직일 것인가. 시장에는 비밀이 필요하다. 정책에는 원칙이 필요하다. 외환당국이 지켜야 할 마지막 자산은 달러가 아니라 그 원칙에 대한 신뢰다.
2026-09-03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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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의 전화 한 통, 민원인가 압력인가
[경제일보] 국회의원에게 민원은 일상이다. 지역 주민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행정기관에 전달하고, 기업의 규제 애로를 정부에 설명하는 것도 의원의 역할이다. 문제는 어떤 사안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국회의원 시절 코로나19 치료제 임상시험 승인을 추진하던 업체와 관련해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처장에게 신속한 처리를 요청하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보도된 문자에는 식약처 내 담당 부서가 언급됐고, “담당 실무자들이 좀 빠르게 처리할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는 취지의 내용도 포함됐다. 김 후보자는 민원을 전달했을 뿐 부정한 로비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관련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김 후보자가 업체 측으로부터 직접 뇌물을 받은 것은 아니라며 2024년 기소유예 처분을 한 것으로 보도됐다. 법원 판결문에도 해당 행위를 곧바로 부정한 청탁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판단이 담겼다. 현 단계에서 위법성을 단정할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법적 처벌 여부와 공직자로서 적절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핵심은 국회의원의 민원 전달이 어디까지 허용되고, 어느 지점부터 권력의 압력으로 작동하느냐다. 의약품 임상시험은 일반 민원과 다르다. 국민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고 전문적인 과학 판단이 요구된다. 승인 여부와 자료 보완은 정치권이 아니라 규제기관과 전문가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결정할 사안이다. 국회의원이 식약처장에게 직접 ‘빨리 처리해달라’고 요청하면 무게가 달라진다. 의원은 정부를 국정감사하고 예산을 심사하며 법률을 만드는 권한을 가진다. 형식은 민원 전달이라 해도 행정기관에는 압박으로 읽힐 여지가 크다. ‘승인해달라’와 ‘빨리 검토해달라’는 표현도 다르지만 처리 속도 자체가 행정 판단의 일부다. 특정 사건을 먼저 챙기게 하는 순간 공정성 논란은 피하기 어렵다. 물론 신속한 행정은 필요하다. 규제 때문에 기술개발과 사업화가 지연되는 문제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특정 의원의 전화로 속도를 높일 것이 아니라 모든 기업에 동일한 기준과 처리 시한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고쳐야 한다. 그것이 규제 혁신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관행이 기업에 잘못된 신호를 준다는 점이다. 정상 절차와 기술력보다 정치권과의 연결이 문제 해결에 더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기업은 연구개발보다 인맥과 로비에 비용을 쓰게 된다. 정치권 주변에는 내가 의원과 장관을 안다는 브로커가 몰려든다. 대관과 로비 논란이 반복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기업은 정부기관에 직접 설명하기 어렵다고 느끼고 정치인이나 전직 관료를 찾는다. 이들이 고위공직자에게 연락하면 해당 민원을 다른 민원과 똑같이 취급하기 어려워진다. 정치와 행정 사이의 회색지대가 그렇게 생긴다. 현행 청탁금지법과 이해충돌방지법만으로 이 문제를 모두 가려내기도 어렵다. 금품이 오가지 않고 노골적으로 허가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부정청탁 여부가 쉽게 갈리지 않는다. 그래서 접촉의 투명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국회의원이 특정 기업이나 개인의 인허가·제재 관련 민원을 전달할 경우 접촉 사실과 주요 내용을 기록하는 방식이다. 의약품 허가, 금융 인허가, 공정거래 조사, 세무조사, 수사처럼 독립적 판단이 중요한 분야에는 더 엄격한 기준이 요구된다. 국회의원에게도 선은 분명해야 한다. 민원을 전달한다면 ‘규정과 절차에 따라 검토해달라’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적절하다. 특정 기한이나 담당자를 찍어 속도를 요구하면 행정기관에는 다른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번 사건에서 정치후원금 제공 시도와 주변 인물들의 금전 관계를 둘러싼 주장도 나오고 있지만 확인된 사실과 정치권 주장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김 후보자가 업체로부터 직접 뇌물을 받았다고 단정할 근거는 현재 확인된 내용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문에 이번 논란을 개인의 유무죄 공방으로만 끝내서는 곤란하다. 같은 구조가 남아 있으면 또 다른 의원과 기업, 정부기관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논어>에는 군자는 말에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의 가르침이 반복된다. 권력자의 말은 명령이 아니어도 주변의 행동을 바꾼다. 오늘날 국회의원의 문자 한 통, 기관장에게 건 전화 한 통도 다르지 않다. 공직자의 영향력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 ‘한번 봐달라’는 말이 실무자에게는 ‘반드시 챙겨라’는 지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 무게를 먼저 계산해야 한다. 정치인이 기업의 어려움을 듣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민과 기업의 목소리를 행정부에 전달하는 것은 국회의 기능이다. 다만 그 과정이 특정인의 절차를 앞당기는 통로로 변질되는 순간 민원은 특혜 논란으로 바뀐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치권과 행정기관 사이의 접촉을 더 투명하게 만들고 전문 규제기관이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회의원의 전화 한 통은 가볍지 않다. 그 무게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평범한 국민의 민원은 뒤로 밀리고 행정의 공정성도 흔들린다. 권력에 가장 먼저 필요한 덕목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영향력을 절제하는 태도다.
2026-09-03 09: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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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의 국회, '국가의 시간' 아껴야
[경제일보] 국회의 시간과 산업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국회에서 법안 한 건이 한 회기 미뤄지는 것은 단지 다음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면 될 일처럼 치부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변전소 하나, 산업용수 관로 하나, 공장 인허가 하나가 늦어지는 사이 경쟁국에서는 생산라인이 돌아가고 고객사의 공급망이 굳어진다. 정치에는 다음 회기가 있지만 산업에는 놓치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있다. 22대 국회 후반기 첫 정기국회가 지난 1일 막을 올렸다. 12월 9일까지 꼭 100일이다. 8·30 개각에 따른 장관 인사청문회, 부동산 정책과 사법개혁 법안, 세제 개편에 역대 최대 규모인 821조원짜리 2027년도 예산안까지 한꺼번에 국회 문턱을 넘는다. 여당은 국정과제 입법과 확장재정을 뒷받침하겠다고 하고, 야당은 ‘입법 독주’와 ‘포퓰리즘 예산’을 막겠다며 벼르고 있다. 충돌할 사안이 적지 않다. 다툴 것은 다퉈야 한다. 세금과 부동산, 형사사법 체계를 바꾸는 법에는 서로 다른 철학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821조원의 나랏돈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도 야당이 매섭게 따져야 한다. 다수당이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도,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로 시간을 끄는 것도 모두 경계할 일이다. 하지만 모든 법안을 같은 정치의 시계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조정식 국회의장은 개회사에서 ‘1년을 미룬 법이 10년의 격차를 만든다’며 반도체·AI·첨단바이오 같은 국가전략기술 관련 입법을 서둘러 달라고 했다. 통상과 대외경제 입법에서는 여야가 ‘원팀’으로 움직이자는 주문도 내놨다. 표현이 다소 과장돼 보일 수 있지만 문제의식은 정확하다. 세계의 기술경쟁은 국회의 의사일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더구나 정부는 내년 예산부터 산업의 속도를 크게 높이겠다고 돈을 걸었다. 2027년도 정부 예산안은 올해보다 12.8% 늘어난 821조원이다. 이 가운데 반도체·피지컬AI·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프로젝트와 관련 인프라·기술개발에 21조300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정부 연구개발 예산안도 39조5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1.2% 늘렸다. 돈만 놓고 보면 한국이 AI와 첨단산업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는 분명하다. 문제는 예산의 속도와 법의 속도가 다르면 돈도 기다린다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만 해도 전력과 용수, 산업단지와 건축 문제를 풀기 위해 전기사업법·수도법·물관리기본법·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건축법 등의 손질이 주요 과제로 거론되고 있다. 반도체 공장에 수십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기업이 있어도 전력과 물을 공급할 제도와 시설이 제때 따라오지 못하면 장부 위 투자는 공장이 되지 못한다. AI 데이터센터 역시 GPU를 사놓는다고 만들어지는 산업이 아니다. 전력망과 부지, 냉각설비와 인허가가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여기에 한국 정치의 오래된 습관이 끼어든다. 여야가 크게 충돌하는 법안 하나가 상임위를 붙잡으면 그와 직접 관계없는 법안까지 함께 기다린다. 원내 협상이 틀어지면 본회의 일정 전체가 흔들리고, 서로 상대 당 법안에 조건을 붙이기 시작하면 민생·산업법안도 협상카드가 된다. 정치에는 모든 것을 한 묶음으로 흥정하려는 유혹이 있다. 그 비용은 국회가 아니라 국민과 기업이 낸다. 공장 착공이 늦어지고, 신규 채용이 밀리고, 기업의 투자금은 해외로 옮겨갈 수 있다. 스타트업은 규제가 정리될 때까지 사업모델을 바꾸고, 지역에서는 산업단지 지정만 기다리다 토지가 묶인다. 법안이 국회 서랍에서 보낸 시간은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국가의 대기시간’도 비용이다. 이번 정기국회가 해야 할 일은 법안을 많이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법은 충분히 싸우고, 어떤 법은 싸움과 분리해 빨리 처리할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여야가 국가전략산업과 민생 인프라에 대해서는 별도의 ‘초당적 신속처리 트랙’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회법상 신속처리안건, 이른바 패스트트랙을 남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여야 원내지도부가 정기국회 초기에 합의 가능한 법안을 추려 상임위 심사와 공청회, 법사위 검토, 본회의 처리 시한을 미리 정하자는 것이다. 기준도 까다롭게 세우면 된다. 첫째, 특정 기업이나 계층에 특혜를 주기보다 국가 전체의 산업 기반과 직결되는 법이어야 한다. 둘째, 여야가 정책목표 자체에는 큰 이견이 없고 방법론만 조정하면 되는 법이어야 한다. 셋째, 처리 지연에 따른 경제적 비용과 해외 경쟁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안전·환경·노동권을 속도라는 이름으로 우회하지 않아야 한다. 신속한 입법은 졸속 입법과 같은 말이 아니다. 전력망 건설을 서두른다고 주민의 재산권과 환경 검토를 생략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 경쟁력을 이유로 노동기준을 백지수표처럼 풀어주는 것도 곤란하다. 필요한 것은 심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심사의 끝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기업과 국민에게 가장 큰 부담은 엄격한 규제 자체보다 결론이 언제 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일 때가 많다. 여당의 책임이 먼저 무겁다. 다수 의석을 갖고 있는 만큼 ‘속도’를 ‘독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내놓은 법이라고 원안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국가의 시간을 줄이는 방법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도 1일 국무회의에서 ‘정부안이 언제나 옳거나 완벽할 수 없다’며 국회의 지적과 대안을 검토해 필요하면 입법과 예산에 반영하라고 주문했다. 여당이 새겨들을 말이다. 야당도 달라야 한다. 정부 정책을 검증하는 것과 정책을 멈춰 세우는 것은 다르다.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송전망이나 AI 데이터센터의 기반시설까지 정권의 성패와 연결해 지연시키면 정권이 아니라 한국 기업이 경쟁국에 뒤처진다. 잘못된 조항을 고치되 필요한 법은 통과시키고, 그 결과를 다음 선거에서 평가받는 것이 책임 있는 야당의 모습이다. 국회는 벌써 대비되는 두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정기국회 첫날 행정안전위원회에서는 지방자치법·소방기본법 등 여러 법안이 여야 논의를 거쳐 처리된 반면, 중대범죄수사청 관련 법안에서는 여야가 충돌했다. 정치적 이해가 첨예한 법과 합의 가능한 법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비자’ 심도편에는 ‘법여시전즉치 치여세의즉유공(法與時轉則治 治與世宜則有功)’이라는 구절이 있다. ‘법이 시대와 함께 변하면 다스려지고, 제도가 세상 형편에 맞으면 성과가 난다’는 뜻이다. 2000년도 더 된 문장이지만 기술이 몇 달 단위로 바뀌는 지금의 국회에 오히려 더 절실하다. 법은 산업보다 앞서기 어렵다. 적어도 산업의 발목을 붙잡을 만큼 뒤처져서는 안 된다. 이번 정기국회에는 821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예산보다 더 귀한 자원이 하나 있다. 100일이라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정쟁의 밀도를 높이는 데 쓸 것인지, 대한민국이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는 데 쓸 것인지가 국회의 성적표가 될 것이다. 여야가 모두 합의하는 법만 처리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민주주의에는 갈등이 필요하고, 때로는 오래 토론해야 할 문제도 있다. 다만 반도체와 AI가 세계시장에서 하루를 다투고 있는데 국회가 정치적으로 결론 내지 못한 다른 문제 때문에 전력망과 산업용수 법안까지 세워두는 것은 민주적 숙의가 아니라 행정적 낭비에 가깝다. 법안 처리 건수 몇 백 건을 자랑하는 국회보다 대한민국이 기다리는 시간을 몇 달 줄인 국회가 더 유능하다. 12월 9일 정기국회가 문을 닫을 때 국민이 보고 싶은 것도 그것이다. 여야가 몇 번 이겼는지가 아니라 공장과 기업, 청년과 지역이 얼마나 덜 기다리게 됐는가. 정기국회 100일의 진짜 경쟁은 법안 숫자가 아니다. 국가의 시간을 누가 더 아껴줬느냐의 경쟁이어야 한다.
2026-09-02 12: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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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821조 풀고 한은은 금리 올린다…한국경제 어디로 가나
[경제일보] 내년 나라살림 규모가 821조원에 이른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7년도 예산안은 올해보다 12.8%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청년, 국방·미래산업에 대규모 재정을 투입한다는 구상이다. 반도체 호황 등에 힘입어 세수가 크게 늘면서 정부는 미래투자에 속도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보고 있다. 같은 시기 한국은행은 반대 방향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지난달 27일 기준금리를 2.75%에서 3.00%로 올렸다. 수출 호조와 내수 회복으로 성장세가 예상보다 강한 데다 물가가 상당 기간 목표 수준을 웃돌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가계부채와 부동산시장 등 금융안정 위험에도 계속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금리 인상이 불가피할 수 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물론 금리 결정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독립적 권한이다. 대통령이 금리의 방향을 미리 제시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는 발언은 중앙은행 독립성 측면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금 한국경제가 확장재정과 긴축통화를 동시에 요구받는 복잡한 상황에 놓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겉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정부는 821조원의 재정을 풀어 경기를 떠받치고 미래산업에 투자한다. 한국은행은 금리를 올려 소비와 대출, 투자 등 총수요와 신용 팽창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쪽에서는 액셀을 밟고 다른 쪽에서는 브레이크를 밟는 모양새다. 하지만 재정 확대와 금리 인상이 항상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어디에 돈을 쓰느냐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인프라, 전력망, 연구개발, 인재 양성처럼 경제의 공급능력을 높이는 분야에 투자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지출은 단기적으로 수요를 늘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산성과 공급능력을 높여 물가 압력을 완화하고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반대로 현금성 지원과 소비 진작, 효과가 불분명한 지역 사업처럼 즉각적인 수요를 키우는 지출이 대규모로 늘어난다면 한국은행의 긴축 효과와 충돌할 수 있다. 정부가 재정으로 수요를 끌어올리고 중앙은행은 금리로 이를 억제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다. 결국 821조원이라는 총액보다 구성표를 봐야 한다. 정부는 이번 예산을 ‘생산적 재정’이라고 설명한다. 그 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미래투자와 소비성 지출을 명확히 구분해 보여줘야 한다. AI와 반도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모두 생산적 투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정부 지원이 민간투자를 끌어냈는지, 기술 경쟁력을 높였는지,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만들었는지가 기준이 돼야 한다. 더구나 지금 물가 상황도 편하지 않다. 8월 소비자물가는 전년보다 3.1% 올랐다. 휴대전화 요금의 기저효과라는 일회성 요인이 크게 작용했지만 식료품·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도 3.4% 상승했다. 국제유가 상승까지 겹치면서 물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기 어렵다. 세계 금리 환경도 달라지고 있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장기 국채금리가 함께 상승하면서 정부와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이 높아지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와 재정 상황, 국채 공급 확대, 에너지 가격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한국만 저금리 환경으로 쉽게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까지 빠르게 팽창하면 통화정책의 부담이 커질 위험이 있다. 정부 지출 확대가 총수요와 물가를 추가로 자극한다면 한국은행이 높은 금리를 더 오래 유지하거나 추가 인상을 검토해야 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 비용은 가계와 기업이 먼저 체감한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이자가 높아지고 자영업자의 금융비용도 늘어난다. 기업은 설비투자를 할 때 더 높은 자금조달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정부가 재정을 확대해 경기와 투자를 살리려는데 높은 금리가 민간의 투자와 소비를 누르는 역설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지난 6월 말 가계신용이 2019조8000억원에 달한 한국에서는 금리 상승이 가계의 이자 부담과 소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줄 수 있다. 재정이 만들어내는 경기 부양 효과의 상당 부분이 가계의 이자 부담 증가로 상쇄되는 상황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정책 효과가 충돌하지 않도록 조율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정부와 한국은행이 같은 방향으로만 움직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통화정책은 물가와 금융안정을 보고 움직이고, 재정은 성장잠재력과 사회적 필요까지 고려한다. 역할이 다르다. 문제는 서로의 정책 효과를 무력화할 정도로 강도가 엇갈릴 때다. 정부가 할 일은 명확하다. 재정 확대를 선택한다면 공급능력을 늘리는 투자에 더 집중해야 한다. AI·반도체·전력망·국방기술·연구개발처럼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분야에는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다. 대신 단순 소비성 지출과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지원사업은 줄이는 편이 맞다. 기존 사업 구조조정도 함께 가야 한다. 총지출이 12.8% 늘어난 상황에서 정부가 정말 불요불급한 사업을 얼마나 덜어냈는지 국민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새 사업은 늘리고 기존 사업은 그대로 남겨둔다면 ‘생산적 재정’은 결국 확장재정을 포장하는 이름으로 끝날 수 있다. 한국은행 역시 금리 인상의 속도를 세밀하게 조절해야 한다. 7월과 8월 두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올린 만큼 물가와 가계대출, 부동산시장뿐 아니라 자영업과 중소기업의 자금 사정도 함께 살펴볼 시점이다. 또 하나 짚을 것은 대통령의 역할이다. 정부는 재정과 산업정책을 책임지고, 금리는 한국은행이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대통령이 금리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할수록 시장은 중앙은행이 정치적 압력을 받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금리 결정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은행이 물가를 안정시키는 동안 재정정책이 불필요하게 물가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821조원 예산과 3% 기준금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경제 상황에 따라 이런 정책 조합이 필요할 수도 있다. 관건은 821조원이 어디로 가느냐다. 생산성을 높이고 민간투자를 끌어내는 지출이라면 높은 금리의 부담을 이겨내며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자산이 될 수 있다. 반면 소비와 단기 부양에 재정이 집중되면 금리 인상 압력을 키우고 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을 높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경제정책은 액셀과 브레이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둘을 함께 써야 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운전자가 어디로 가려는지 분명히 알고 두 장치를 정교하게 조절하는 일이다. 지금 한국경제가 확인해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다. 821조원을 쓰면서 물가는 잡고 성장잠재력은 높이며 가계와 기업의 금융 부담까지 관리할 수 있느냐다. 확장재정과 긴축통화의 동시 운용이 성공하려면 돈의 규모보다 쓰임새, 금리의 수준보다 정책 간 조율이 먼저다.
2026-09-02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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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청 615명 철회, 준비 안 된 개혁의 대가는 국민이 치른다
[경제일보] 중대범죄수사청에 가겠다고 신청했던 검찰 인력 615명이 막판에 지원을 철회했다. 당초 2376명이던 특례임용 신청자는 1761명으로 줄었다. 신청자의 4명 중 1명꼴이다. 중수청 정원 2874명과 비교하면 최종 신청자는 61.3%에 그친다. 철회자 대부분은 검찰 수사관으로 알려졌다. 중수청이 맡을 부패·경제·마약·방위사업·사이버범죄 등은 숙련된 수사 경험이 필요한 사건들이다. 계좌를 추적하고 압수수색 자료를 분석하며 사건 기록을 다뤄온 실무 인력이 출범 직전에 대거 발을 뺀 셈이다. 정부는 경찰과 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등을 경력채용하고 공소청 공무원을 상대로 내년 4월 말까지 추가 특례임용을 하겠다고 한다. 중수청은 오는 10월 2일 출범한다. 출범은 10월인데 인력 충원은 내년 4월까지다. 사람을 제대로 채우기도 전에 문부터 열겠다는 얘기다. 1761명도 실제 근무 인원은 아니다. 정부는 근무 희망지와 경력, 전문성 등을 따져 다시 임용 대상을 정한다. 출범 당일 중수청에서 일할 사람은 지금보다 줄어들 수 있다. 숫자를 채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경험 많은 수사 인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번 철회 과정만 봐도 준비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다. 검찰 구성원에게 중수청으로 갈지 공소청에 남을지 선택하라고 했지만 철회 시한인 8월 31일까지 공소청 직제는 확정되지 않았다. 어느 기관에서 일할지 결정하라면서 그 기관의 정원과 보직, 근무지, 승진이 어떻게 될지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철회 시한을 앞두고 공소청의 정원 감축 폭이 예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직제안 윤곽이 알려지자 상당수 수사관이 잔류 쪽으로 돌아선 것으로 전해졌다. 중수청과 공소청을 만드는 법은 지난 3월 제정됐다. 시행일도 10월 2일로 정했다. 그런데 중수청의 조직과 정원, 인사 기준을 담은 하위법령은 8월 18일에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출범 45일 전이었다. 형사소송법은 더 늦었다. 검사의 수사 권한을 없애고 보완수사 요구와 재수사 요구 절차를 손질한 개정법은 8월 4일 공포됐다. 시행까지 두 달도 남지 않은 때였다. 수십 년간 이어온 수사와 기소의 관계를 바꾸면서 현장에서 적용할 법을 출범 직전에야 확정했다. 형사사건은 간판을 바꾸고 사람을 옮긴다고 그대로 이어지는 일이 아니다. 사건을 누가 맡을지, 압수수색과 계좌추적은 어떻게 이어갈지, 부족한 수사는 어디에 다시 맡길지, 사건 기록과 증거물은 어떻게 넘길지 하나라도 엇박자가 나면 수사가 늦어진다. 수사가 늦어지면 피해자는 기다려야 한다. 증거가 사라질 수 있고 피의자 신병 확보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구속 사건에서는 하루가 피의자의 신체 자유와 직결된다. 정부 조직 하나를 바꾸는 문제와 차원이 다르다. 검찰 개혁의 명분이 준비 부족을 덮어주지는 못한다. 수사와 기소를 나누겠다고 결정했다면 법과 직제, 인사와 전산, 사건 이관 절차를 먼저 갖춰 놓았어야 한다. 사람을 배치하고 실제 사건을 놓고 문제를 확인한 뒤 문을 여는 것이 순서다. 정부는 그 반대로 가고 있다. 10월 2일이라는 날짜를 먼저 정해놓고 사람과 조직, 절차를 그날에 맞추고 있다. 출범 한 달을 남겨놓고 인력이 흔들렸고 공소청 직제도 늦어졌다. 부족한 인력은 출범 뒤에도 계속 뽑겠다고 한다. 615명 철회는 우연히 튀어나온 숫자가 아니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선택을 재촉하자 현장의 사람들이 움직인 결과다. 정부가 중수청 출범에 필요한 조건을 먼저 갖췄다면 이런 대규모 철회가 나왔을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더 큰 문제는 10월 2일 이후다. 중수청과 경찰, 공소청 사이에서 사건이 오가고 보완수사가 늦어지면 피해는 곧바로 국민에게 간다. 정부는 조직을 만들었다고 발표하면 끝이지만 피해자는 사건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개혁의 성패는 검찰청 간판을 예정된 날짜에 내리는 데 있지 않다. 범죄를 제대로 수사하고 피해자를 제때 보호하는 데 있다. 수사가 늦어지고 사건이 밀린다면 이름을 무엇으로 바꿨든 실패다. 준비가 부족하면 일정을 늦추는 것이 책임 있는 행정이다. 날짜를 지키기 위해 수사기관부터 열고 부족한 사람과 절차를 뒤에서 채우는 것은 개혁이 아니다. 졸속이다. 정부가 10월 2일 중수청 간판을 다는 데 성공하더라도 수사가 늦어지고 사건이 표류한다면 그 대가는 정부가 치르지 않는다. 사건 당사자와 범죄 피해자, 결국 국민이 치른다. 615명 철회가 보여준 것은 인력 부족만이 아니다. 준비되지 않은 개혁을 밀어붙였을 때 누가 그 비용을 떠안게 되는지다.
2026-09-02 10: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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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68.7% 증가, 숫자가 너무 좋아서 더 걱정되는 이유
[경제일보] 숫자만 보면 한국 경제는 눈부시다. 8월 수출이 982억5000만달러다. 1년 전보다 68.7% 늘었다. 역대 월간 수출 3위다. 6월과 7월에 이어 석 달 연속 900억달러를 넘겼다. 무역수지는 347억5000만달러 흑자다. 더 놀라운 것은 반도체다. 466억5000만달러를 팔았다. 1년 전보다 209% 늘었다. 역대 최대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열풍이 한국의 반도체 공장을 거대한 수출 기계로 만들고 있다. 컴퓨터 수출도 419.5% 뛰었다. 정부가 경기를 낙관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제조업의 생산과 설비투자는 살아 있고 수출은 기록을 다시 쓰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숫자가 국민의 장바구니에도 반영되고 있는지 잘 봐야한다. 최근 발표된 7월 산업활동동향을 보면 답은 간단하지 않다. 소매판매는 전월보다 2.4% 줄었다. 전년 같은 달과 비교해도 0.8% 감소했다. 서비스업 생산은 전월보다 1.3% 감소했다. 설비투자만 7.5% 늘었다. 기업이 생산시설에는 돈을 쓰는데 소비자는 지갑을 닫는 모습이다. 더 불편한 숫자도 있다. 6월 말 가계신용은 2019조8000억원이다. 사상 처음 2000조원을 넘어섰다. 한 분기 만에 25조9000억원이 늘었다. 집을 사기 위한 돈도, 생활과 투자를 위한 대출도 함께 증가했다. 수출이 잘되는데 소비는 왜 힘든가. 한국 경제의 오래된 병이다. 수출과 내수가 서로 다른 경제처럼 움직인다. 반도체와 대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번 돈으로 성장하지만, 그 돈이 국내 서비스업과 자영업, 가계소득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연결고리는 약하다. 특히 이번 수출 증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욱 그렇다. 반도체가 전체 증가분을 압도한다. 자동차는 29.8% 감소했고 선박도 45.9% 줄었다. 20대 주력 품목 가운데 14개가 증가했지만 모든 산업이 같은 속도로 좋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반도체 호황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순간 위험해진다. 지금의 수출을 끌어올리는 가장 강력한 힘은 AI다. 미국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계속되고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한국의 수출은 더 늘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AI 투자 사이클이 꺾이거나 공급망이 재편되면 한국 경제 전체가 동시에 흔들릴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수출 기록을 축하하는 것과 동시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돈이 국내에서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얼마나 많은 중소기업의 매출을 늘리고, 얼마나 많은 가계의 소득으로 돌아가는지를 따져야 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성장률’보다 ‘성장의 전달 과정’을 봐야 한다. 수출기업이 돈을 벌었다고 국민의 삶이 자동으로 좋아지는 시대는 지났다. 대기업의 투자와 중소기업의 매출, 임금과 소비, 지역 상권이 연결되지 않으면 수출 1000억달러 시대도 일부 산업의 기록에 그칠 수 있다. 정부 역시 “수출이 좋다”는 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소비가 왜 다시 꺾였는지, 가계가 왜 빚을 늘리고 있는지, 건설과 자영업의 체감경기는 왜 회복이 더딘지를 함께 설명해야 한다. 한국은행의 8월 소비자심리지수도 104.5로 전월보다 2.3포인트 떨어졌다. 경제 전체에 온기가 퍼지고 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수출 기록을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호황을 어떻게 내수의 회복으로 연결할 것인지 답을 찾는 일이다. 반도체가 벌어온 달러가 기업의 곳간에만 머물지 않고 투자와 임금, 협력업체의 성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동네 식당의 매출과 자영업자의 소득, 청년의 일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982억달러의 수출은 분명 대단한 기록이다. 하지만 경제에서 더 중요한 숫자는 따로 있다. 그 기록이 국민의 삶을 얼마나 바꿨느냐는 숫자다. 수출이 이렇게 좋은데도 국민이 경기를 좋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문제는 국민의 체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구조에 있는지도 모른다. 숫자가 너무 좋을 때 오히려 경제의 그늘을 더 꼼꼼히 살펴야 하는 이유다.
2026-09-01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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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라인 갈아치우면 정책도 달라지나
[경제일보]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을 설계해 온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이 물러났다. 김 실장은 지난달 31일 사의를 밝혔고 이재명 대통령은 1일 사표를 수리했다. 이 정부 초대 정책실장으로 부동산과 산업정책, 대미 관세협상 등을 조율해 온 핵심 참모가 출범 1년3개월여 만에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앞서 이 대통령은 재정경제부와 국토교통부 등 6개 부처 장관을 교체하는 중폭 개각도 단행했다. 시점도 예사롭지 않다. 리얼미터가 지난달 24~28일 전국 유권자 25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평가는 38.9%로 나타났다. 취임 후 처음 30%대로 내려왔고 7주 연속 하락했다. 조사기관은 집값과 전월세 불안 등을 지지율 하락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정권이 국정 동력을 잃을 때 인적 쇄신은 오래된 처방이다. 장관과 참모를 바꾸면 국민에게 변화의 신호를 줄 수 있고 조직에도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정책 실패에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인사는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사람을 바꾸면 정책도 달라지느냐다. 김 정책실장 개인의 공과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최근의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다. 부동산과 세제, 금융, 재정 같은 핵심 정책은 정책실장 한 사람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실과 관계부처, 여당, 관료조직이 함께 논의하고 대통령의 최종 판단을 거쳐 실행된다. 결과가 좋을 때는 ‘정부의 성과’라 하고 문제가 생기면 장관이나 참모 한두 명의 책임으로 정리한다면 같은 오류는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집값을 안정시키고 투기를 억제하겠다는 목표 자체에 반대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공급과 금융, 세제 정책이 시장에 어떤 신호를 줬는지다. 대출을 억제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실수요 지원을 확대하고, 공급을 강조하면서도 재건축·재개발이나 토지 활용 문제를 놓고 정책 메시지가 엇갈리면 시장은 혼란스러워진다. 정책을 만든 사람을 바꾸기 전에 이런 엇박자가 왜 생겼는지부터 찾아야 한다. 세제도 마찬가지다. 부동산시장이 움직일 때마다 세율과 공제, 대출규제를 꺼내 들면 국민은 정책의 원칙보다 다음 규제가 무엇일지를 먼저 생각한다. 정책이 시장의 기대를 안정시키는 대신 정부 발표 때마다 새로운 불확실성을 만드는 구조라면 담당 장관 교체만으로 신뢰가 회복되기 어렵다. 재정정책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생산적 재정을 내세우며 AI와 미래산업, 청년과 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필요한 방향이다. 그러나 지출 확대와 국가채무 관리, 기존 사업 구조조정의 원칙이 동시에 제시되지 않으면 결국 돈을 더 쓰겠다는 메시지만 시장에 남을 수 있다. 산업정책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커지는 문제를 경계해야 한다. 반도체와 AI부터 SMR·양자·우주·바이오까지 정부가 미래산업을 선정하고 금융과 세제, 연구개발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전략산업 육성은 필요하지만 정부가 산업의 승자를 모두 골라주려 하면 민간의 판단과 경쟁이 약해질 수 있다. 어느 선까지 정부가 개입하고 어디서부터 시장에 맡길 것인지 원칙이 분명해야 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정책 하나하나보다 정책을 만드는 방식에 있을 수 있다. 한국의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실로 정책 결정이 집중되기 쉽다. 장관은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책임자지만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전달되는 순간 다른 의견을 내기 어렵다. 청와대가 방향을 정하면 부처는 세부안을 만드는 집행기관으로 밀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구조에서는 정책실장과 장관을 아무리 유능한 인물로 바꿔도 한계가 있다.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올라가는 조직에서는 정책 실패가 반복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게 “이 정책은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속도를 늦춰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대통령의 철학을 가장 빠르게 실행하는 참모만큼 그 정책의 위험을 냉정하게 경고하는 참모도 필요하다. 장관 역시 대통령실의 지시를 받아 적는 자리가 돼선 곤란하다. 경제부처 장관이라면 시장과 기업, 가계의 현실을 근거로 대통령에게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국토부 장관은 집값이 정부의 기대와 다르게 움직이면 그 원인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정책 수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 수정에 대한 정부의 인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한번 발표한 정책을 고치는 것을 실패나 후퇴로 받아들이면 잘못된 정책을 오래 끌고 가게 된다. 상황이 달라졌거나 부작용이 확인됐다면 빨리 수정하는 것이 오히려 책임 있는 정부다. 다만 여론이 나빠질 때마다 정책을 뒤집는 것도 답은 아니다. 수정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부동산이라면 집값과 거래량, 입주 물량, 가계대출과 전월세 가격 등 사전에 정한 지표를 기준으로 정책을 평가할 수 있다. 재정사업이라면 투자 대비 생산성과 민간투자 유발 효과, 일자리 창출 같은 성과를 측정하면 된다. 정책을 발표할 때부터 어떤 결과가 나타나면 유지하고, 어떤 결과가 나타나면 수정하겠다는 기준을 공개하는 방식도 검토할 만하다. 정부의 체면보다 정책 효과를 앞세우는 구조다. 여당의 역할도 중요하다. 집권당이 정부 정책을 무조건 방어하면 민심의 경고가 대통령실에 전달될 통로가 사라진다. 여당은 야당보다 먼저 정부 정책의 허점을 찾아내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대통령을 돕는 길이다. 이번 인사가 책임 회피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김 정책실장이 스스로 사의를 밝혔고 대통령이 이를 수용한 만큼 새로운 경제라인이 정책을 다시 정비할 기회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장관과 참모들이 기존 정책을 원점에서 점검한다면 인적 쇄신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얼굴만 바꾸고 정책 결정 구조가 그대로라면 개각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지지율 38.9%라는 숫자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한 차례 여론조사를 국정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다만 7주 연속 하락이라는 흐름은 정부가 국민이 느끼는 불안을 돌아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 신호에 대한 답이 사람 몇 명을 바꾸는 데 그쳐서는 부족하다. 정권의 실패는 흔히 사람과 정책,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만든다. 사람을 바꾸는 것이 가장 빠르고 눈에 잘 보인다. 정책을 고치는 것은 더 어렵고,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렵다. 그렇지만 어려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같은 장면을 다시 보게 된다. 이번 개각과 정책실장 교체가 진정한 쇄신이 되려면 새 경제팀에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주고 대통령실도 다른 목소리를 듣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잘못된 정책은 체면을 따지지 않고 수정하고, 효과가 없는 사업은 접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누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뉴스만이 아니다. 집값과 생활비 부담이 줄고 일자리가 늘고 기업이 투자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다. 인사의 성패도 결국 그 결과에서 판가름 난다. 사람을 바꾸는 것으로 국정 쇄신은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또 다른 인사만 기다리게 된다. 이번 개각이 남겨야 할 진짜 변화는 새 얼굴이 아니라, 잘못된 정책을 스스로 발견하고 고칠 수 있는 정부 시스템이다.
2026-09-01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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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살인사건을 혐중의 불쏘시개로 삼아선 안 된다
[경제일보] 경북 경산에서 벌어진 중국인 여성 유학생 살인 사건은 잔혹하다. 경찰에 따르면 중국인 대학 강사 정모씨는 자신의 수업을 들었던 25세 중국인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해 경북과 경기 등 여러 곳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허위 실종신고를 하고 여장을 한 채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들고 이동하며 수사에 혼선을 주려 했다는 혐의도 있다. 경찰 수사에서 혐의가 입증된다면 죄질에 맞는 엄중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사건 보도에 붙은 댓글을 보면 정씨보다 중국을 먼저 문제 삼는 글이 적지 않다. ‘중국인은 원래 저렇다’는 말부터 중국인 무비자 입국을 허용한 뒤 강력범죄가 늘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정씨는 단체관광객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국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강사다. 이번 사건을 무비자 입국과 연결하는 것부터 사실과 맞지 않는다. 사건의 실체를 따지기도 전에 국적부터 앞세우는 반응이 적지 않다는 점은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의 경제 보복과 한한령, 서해 불법조업, 김치와 한복을 둘러싼 논란, 일부 중국인의 기초질서 위반까지 불만이 쌓여왔다. 중국 정부의 정책이 우리 국익과 충돌한다면 비판해야 하고 불법행위에는 법대로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에 대한 불만과 중국인 한 사람이 저지른 범죄를 섞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살인 혐의를 받는 사람이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중국인 전체의 성향을 말하는 것은 사실에도 맞지 않고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반감이 개인의 범죄를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2023년 체류인구 대비 피의자 비율은 내국인이 2.36%, 중국인이 1.65%였다. 8대 강력범죄에서도 내국인은 인구 대비 약 0.047%, 중국인은 0.031%였다. 중국인 피의자의 절대 숫자가 외국인 가운데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체류 외국인 가운데 중국인이 가장 많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한국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흉악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정유정은 과외 앱을 통해 만난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유기했고, 고유정 사건과 연쇄살인 사건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 사건을 근거로 한국인 전체가 잔혹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범죄자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사실이 한국인의 성향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피의자와 피해자의 국적을 함께 놓고 보면 혐중으로 번지는 반응이 얼마나 거친 일반화인지 드러난다. 피의자 정씨만 중국인이 아니다. 살해당한 25세 여성도 중국인이다. ‘중국인은 원래 저렇다’는 댓글 속에서는 정씨의 중국 국적은 크게 남고 피해자의 중국 국적은 사라진다. 같은 나라에서 온 한 사람은 살인과 시체손괴 혐의를 받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타국에서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을 중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같은 범주에 넣으면 피해자에게까지 범죄자의 그림자를 씌우게 된다. 국적 하나로 피의자와 피해자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보는 것은 어느 나라 여권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했느냐다. 정씨가 피해자를 왜 살해했는지, 범행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한 과정과 범행 뒤 행적이 수사와 재판의 대상이다. 그 사실을 밝혀 정씨에게 책임을 물으면 된다. 형사책임은 행위자에게 묻는다. 가족이라고 대신 처벌하지 않고 같은 지역 출신이라고 책임을 나누지도 않는다. 같은 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임을 함께 물을 수도 없다. 현실의 중국인은 범죄 기사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국내 대학에서 공부하고 기업과 공장에서 일하며 한국 사람들과 매일 부딪쳐 살아간다. 중국은 우리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고 양국의 기업과 사람도 경제와 생활 곳곳에서 이미 깊게 얽혀 있다.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중국인의 대부분은 경찰서나 법정이 아니라 학교와 직장, 시장과 거리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중국 정부가 잘못하면 중국 정부를 비판하면 되고 중국인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한국 법으로 처벌하면 된다. 국가에 대한 비판과 개인의 범죄는 그렇게 나눠서 볼 일이다. 5000만명이 사는 한국에서도 흉악범은 나온다. 인구가 훨씬 많은 중국에서 흉악범이 나왔다고 중국인 전체의 성향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 한국인 한 명이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한국인 전체를 같은 눈으로 본다면 우리도 불쾌할 수밖에 없다. 정씨의 혐의는 정씨에게 물으면 된다. 살인 혐의도,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했다는 혐의도, 수사를 속이려 했다는 혐의도 정씨의 몫이다. 그 범죄 혐의를 중국인 전체의 죄로 돌려 혐중의 불쏘시개로 삼을 일은 아니다.
2026-09-01 08: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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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국가책임' 9년, 끝까지 책임진 건 가족이었다
[경제일보] 생활고와 간병 부담에 짓눌린 50대 남성이 친형을 살해하고 80대 어머니에게도 흉기를 휘둘렀다. 수원지법은 살인과 존속살해미수 혐의로 기소된 이 남성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범죄의 결과만 놓고 보면 무거운 형이 선고될 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법원이 형을 정하면서 적시한 사정은 따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남성은 부친이 숨진 뒤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정신질환이 있는 형을 혼자 부양했다. 직장까지 그만두면서 생계가 어려워졌고 간병 스트레스도 극심해졌다. 재판부는 이런 사정을 양형에 참작했다. 형사재판은 피고인의 책임을 묻는 절차다. 법원이 간병 부담과 생활고를 참작했다고 해서 살인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판결문에 적힌 양형사유는 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무너졌는지를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기록한 대목이다. 정부가 읽어야 할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다. 2017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치매환자를 본인과 가족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며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지겠다고 했다. 정부는 ‘치매 국가책임제’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치매안심센터를 전국에 설치하고 의료비 부담을 낮추며 장기요양 지원을 확대했다. 치매를 더 이상 한 집안의 문제로 두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름부터 무거웠다. ‘지원 확대’도 아니고 ‘관리 강화’도 아닌 ‘국가책임’이었다. 정부가 스스로 책임의 범위를 넓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9년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이 실제 가정에서 어디까지 작동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당연하다. 문재인 정부가 물러나고 윤석열 정부를 거쳐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다. 정권은 두 번 바뀌었고 치매 관련 조직과 사업, 예산은 계속 늘었다. 그런데 치매환자를 먹이고 씻기고 병원에 데려가고 밤새 지켜보는 마지막 책임은 아직도 가족에게 남아 있다. 정부 조사에서도 치매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절반 가까이가 돌봄 부담을 호소했다. 경제적 부담과 정신적 소진도 반복해서 확인됐다. 정부가 몰랐던 문제가 아니다. 수년 전부터 통계에도 잡히고 정책보고서에도 적혀 있던 문제다. 이번 용인 사건은 그 숫자가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치매 노모와 정신질환 형을 한 사람이 동시에 돌봤다. 간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뒀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쳤다. 복지행정의 관점에서 보면 위험신호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치매환자와 정신질환자가 한 집에 있고 보호자는 한 명뿐이다. 그 보호자가 생업까지 포기했다. 소득도 줄고 외부와의 접촉도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정도 상황을 국가의 돌봄망이 붙잡지 못했다면 제도가 어디에서 끊겼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치매안심센터가 몇 곳인지, 상담을 몇 건 했는지는 행정 보고서에 필요한 숫자다. 국가책임제의 성적표는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보호자 한 사람이 간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생계까지 흔들릴 때 국가가 그 집 안으로 들어갔는지, 하루 몇 시간이라도 돌봄을 대신했는지, 버틸 수 없는 상태에 이른 보호자를 다른 제도와 연결했는지가 성적표가 돼야 한다. 국가는 치매환자를 등록하고 검진하고 상담하는 일에는 상당한 체계를 갖췄다. 정작 가족이 무너지지 않도록 책임을 나눠 갖는 부분은 여전히 허술하다. 국가가 책임진다고 했지만 밤을 새운 사람은 가족이었고 직장을 그만둔 사람도 가족이었다. 생활비와 간병비를 걱정하며 끝까지 버틴 사람 역시 가족이었다. 그래서 ‘치매 국가책임제’와 지금의 현실 사이에는 간단히 넘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국가는 환자를 관리했지만 가족은 환자의 삶을 떠안았다. 국가가 제도를 만들었지만 가족은 자신의 직업과 소득, 일상을 내놓았다. 책임의 가장 무거운 부분이 여전히 가족에게 남아 있다면 간판만 국가책임제인 셈이다. 이재명 정부도 이 문제에서 전임 정부를 바라볼 처지가 아니다. 정부가 바뀌면 장관과 정책 이름은 바뀌지만 국가의 약속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치매 국가책임제를 계승하고 지역사회 통합돌봄을 확대하겠다면 문재인 정부가 내건 ‘국가책임’이라는 미완의 약속도 함께 넘겨받은 것이다. 새로운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지원 대상자가 몇 명 늘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혼자 중증환자를 돌보는 사람, 간병 때문에 생업을 포기한 사람, 생활비가 끊긴 가정부터 찾아내야 한다. 도움을 신청하러 찾아오는 사람만 지원하는 복지로는 이미 지쳐 쓰러진 사람을 잡아낼 수 없다. 법의 시간과 복지의 시간도 다르다. 형법은 범죄가 벌어진 뒤 책임을 묻는다. 복지행정은 범죄나 극단적인 선택, 가족 붕괴가 벌어지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사후에 정확하게 처벌하는 국가보다 사전에 한 가정을 붙잡는 국가가 훨씬 어렵지만 ‘국가책임’을 내걸었다면 그 어려운 일을 하겠다는 뜻이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범행이 벌어진 뒤 국가 시스템은 정확하게 작동했다. 경찰은 피고인을 체포했고 검찰은 기소했으며 법원은 증거와 양형사유를 따져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형사사법기관은 각자의 절차에 따라 역할을 했다. 문제는 그 전에 작동했어야 할 국가의 돌봄망이다. 살인사건의 판결문에 ‘치매를 앓는 모친과 정신질환이 있는 형을 홀로 부양했다’는 문장이 남았다. 간병 때문에 직장까지 그만둔 한 사람이 가족을 죽이는 순간까지 갔다. ‘치매는 국가가 책임진다’고 선언한 지 9년이 된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정책은 발표할 때가 아니라 국민이 가장 어려울 때 평가받는다. 센터의 숫자도, 예산의 규모도, 지원 실적도 한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면 다시 따져봐야 한다. ‘국가책임제’라는 이름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국가가 책임진다던 9년 동안, 끝까지 버티고 끝내 무너진 것은 가족이었다.
2026-08-30 12: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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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노사, 임금표 너머 '미래 일자리'를 봐야
[경제일보] 현대자동차 노사가 길었던 줄다리기를 일단 멈췄다. 지난 5월 상견례 이후 111일 만이다. 지난 24일부터 이어진 밤샘 교섭 끝에 마련된 잠정합의안에는 월 기본급 10만원 인상, 성과금 400%와 1270만원, 주식 15주, 복지포인트 50만원 등이 담겼다. 내년 하반기 200명, 2028년 300명 등 기술직 500명을 새로 뽑는 방안에도 합의했다. 오는 31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과하면 올해 임금협상은 마무리된다. 숫자만 놓고 보면 적지 않은 보상이다. 노조는 올해 조합원 1인당 임금 인상 효과를 4084만원 정도로 추산한다. 좋은 성과를 낸 기업이 그 과실을 노동자와 나누는 것은 시장경제에서도 자연스럽다. 숙련된 노동력과 안정적인 노사관계 역시 기업 경쟁력을 만드는 자산이다. 기업의 성과가 주주와 경영진에게만 돌아가고 현장을 지킨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지속 가능한 협력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번 합의를 ‘얼마를 더 받았느냐’의 문제로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현대차 노사가 마주한 진짜 협상은 오히려 이제부터다. 자동차 산업의 판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교섭 과정에서 노조는 60시간 파업했고, 생산라인 기준 가동 중단 시간은 120시간에 달했다. 지난 21일에는 2016년 이후 10년 만에 하루 8시간 전면파업까지 벌어졌다. 업계는 약 5만5200대가 생산 차질을 빚었고, 이를 판매단가로 환산한 매출 차질 규모가 2조3000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한다. 이 수치를 실제 영업손실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갈등의 비용이 회사와 조합원만이 아니라 협력업체·고객·지역경제로 번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것은 권리다. 회사가 비용과 경쟁력을 따지는 것도 경영의 책무다. 문제는 두 요구가 해마다 파업을 거친 뒤에야 절충되는 구조다. 임금협상의 승자가 누구인지 가리는 동안 생산이 멈추고 협력업체가 일감을 걱정한다면 노사 모두가 얻은 것보다 잃는 것이 커질 수 있다. 이번 잠정합의에서 그래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성과금 400%보다 다른 곳에 있다. 현대차 노사는 피지컬 인공지능(AI)과 로보틱스 같은 미래 기술의 도입이 기업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데 공감하고, 신사업과 신기술 추진 경과를 투명하게 공유하며 산업 전환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제조 경쟁력 강화와 제도 개선에도 함께 나서기로 했다. 임금표 밖으로 노사협상의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이 합의가 제대로 실행된다면 올해 임협에서 가장 값진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을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자동차 회사를 넘어 로봇과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중심 제조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현대차는 2028년부터 미국 조지아 메타플랜트에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투입할 계획이다. 초기에는 부품 서열작업부터 시작해 검증을 거쳐 조립 등으로 활용 범위를 넓힌다는 구상이다. 노조 역시 이번 교섭 과정에서 AI·자동화 확산에 따른 고용안정을 주요 문제로 제기했다. 이 변화 앞에서는 ‘자동화를 막을 것이냐, 받아들일 것이냐’는 식의 논쟁부터 낡았다. 자동화를 막으면 일자리가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다. 경쟁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한국 공장의 원가 경쟁력이 떨어지면 생산물량 자체가 해외로 이동할 수 있다. 반대로 로봇을 많이 넣으면 기업이 자동으로 경쟁력을 얻는 것도 아니다. 공정을 이해하고 로봇을 운용하며 데이터를 분석하고 품질을 관리할 숙련된 사람이 없다면 첨단설비도 비싼 쇳덩이에 불과하다. 결국 미래의 노사협상은 ‘사람이냐 로봇이냐’가 아니라 ‘사람이 로봇과 함께 어떤 더 높은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냐’를 다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산직 500명 신규채용 합의는 반갑다. 청년들에게 질 좋은 제조업 일자리를 열고 세대교체의 숨통을 틔운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숫자를 채우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새로 들어올 인력의 직무가 앞으로 10년 뒤에도 필요한 일인지까지 설계해야 한다. 미래 공장에 필요한 생산직의 모습은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다.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생산공정을 이해하면서 로봇과 자동화설비를 다루고, 설비 데이터를 읽어 고장을 예측하며 품질 문제를 현장에서 해결하는 노동자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기존 직원에게도 같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기술이 바뀔 때마다 일자리 감소부터 걱정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재교육과 직무전환을 통해 새로운 공정으로 이동할 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 고용안정의 가장 좋은 방법은 없어지는 일을 억지로 붙들어두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일을 기존 노동자가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임금 문제 역시 이제 생산성과 떼어놓고 논의하기 어렵다. ‘임금이 오르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단순 공식은 맞지 않는다. 높은 임금을 받는 숙련인력이 높은 생산성과 품질을 만들어낸다면 기업에는 오히려 이익이다. 노동자가 회사의 성장에 기여하고 그 성과를 공정하게 배분받는 구조는 장기적인 신뢰를 만든다. 반면 생산성과 무관하게 고정비만 계속 높아지고, 파업에 따른 생산중단이 반복되며, 해외 공장보다 국내 생산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글로벌 기업은 결국 어디에서 생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계산한다. 국내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선의만으로 국내 생산을 유지하지는 않는다. 현대차 역시 녹록한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기차에서는 중국 업체와 가격·기술 경쟁이 격화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현지 생산 확대가 요구된다. 원자재와 공급망, 관세, 환율까지 경영환경을 흔드는 변수도 적지 않다. 회사와 노조가 임금협상에서 생산성을 함께 말해야 하는 까닭이다. 성과급을 생산성과 기계적으로 연동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자동차 품질과 기술개발, 브랜드 가치처럼 단순한 시간당 생산대수로 계산하기 어려운 성과도 많다. 하지만 노사가 ‘성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협상한다면 동시에 ‘다음 성과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도 협상해야 한다. 생산성이 얼마나 개선됐는지, 품질 경쟁력을 어떻게 높일지, 신기술 도입으로 줄어드는 직무와 늘어나는 직무가 무엇인지, 직원 재교육에는 얼마를 투자할 것인지, 국내 공장의 역할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까지 노사 테이블 위에 올라와야 한다. 협력업체도 빠져서는 안 된다. 현대차 공장이 파업하면 부품업체 생산라인도 영향을 받는다. 완성차 노동자는 성과금을 받지만 협력업체 노동자는 원청의 생산중단으로 일감을 잃는 구조라면 산업 전체의 노사 상생이라 부르기 어렵다. 노사협상의 비용이 공급망의 가장 약한 곳으로 전가되지 않게 하는 책임도 대기업 노사에게 있다. ‘주역’ 계사전에는 ‘이인동심 기리단금(二人同心 其利斷金)’이라는 구절이 있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해관계가 다른 노사가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좋은 일자리를 다음 세대까지 이어가겠다는 목표만큼은 함께할 수 있다. 올해 임협은 아직 잠정합의다. 조합원 투표라는 마지막 절차도 남아 있다. 가결된다면 노사는 길었던 갈등을 수습하고 다시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생산라인이 다시 돌아간다고 협상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전기차와 로봇, AI가 공장을 바꾸는 속도는 임금협상 주기보다 빠르다. 앞으로의 노사관계는 매년 기본급 몇 만원과 성과금 몇 퍼센트를 놓고 싸우는 데 머물 수 없다. 청년을 어떤 일자리로 뽑고, 기존 숙련인력을 어떤 기술자로 바꾸며, 자동화로 높아진 생산성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더 큰 의제가 돼야 한다. 좋은 성과를 나누는 것은 필요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눌 성과가 계속 만들어지는 회사를 함께 만드는 일이다. 현대차 노사의 다음 협상 테이블에는 임금표와 함께 생산성, 직무전환, 청년고용, 로봇과 AI의 시간표가 나란히 놓여야 한다. 그것이 노동자의 몫도 지키고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도 지키는 길이다.
2026-08-26 08:4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