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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조선소의 은퇴 풍경, 숙련이 떠나면 제조업 미래도 흔들린다
[경제일보] 거제 조선소에서 정년퇴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삼성중공업 노사는 지난 9월 임금협상에서 올해 정년퇴직자의 계약직 재고용 기간을 기존 1년에서 최대 2년으로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퇴직 예정자를 위한 교육 연수 프로그램도 추진한다. 수십 년간 현장을 지켜 온 숙련 인력의 경험을 정년과 함께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취지다. 조선업의 경쟁력이 선박 수주 실적뿐 아니라 사람에게 축적된 기술을 얼마나 오래 유지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변화다. 거제의 협력업체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고용노동부가 2024년 공개한 일터혁신 사례에 따르면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사내 협력업체인 하성기업은 60세 이상 근로자 5명의 고용을 연장하고 멘토로 전환해 젊은 직원들에게 현장 기술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또 다른 협력업체인 신호기업은 숙련 근로자를 만 65세까지 촉탁직으로 재고용할 수 있는 평가제도를 설계했다. 정년 이후에도 숙련을 활용하고 후배 양성에 참여하도록 하는 현장의 해법이다. 이 사례들은 한국 조선업이 풀어야 할 과제를 압축한다. 일감이 늘어나는 시기에 경험 많은 인력이 은퇴하고, 그 자리를 채울 신규 인력은 충분한 숙련을 갖추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정년퇴직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오랜 경험과 기술이 함께 사라지는 상황은 줄일 수 있다. 한국 조선업은 LNG 운반선과 고부가가치 선박을 중심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주 성적이 곧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선박을 계약하는 능력과 계약한 선박을 정해진 품질과 납기에 맞춰 건조하는 능력은 서로 맞물려 있다. 후자를 떠받치는 핵심 자산이 숙련 인력이다. 조선소의 생산 현장은 수많은 기술과 경험이 결합하는 공간이다. 정밀한 용접과 배관, 전장 작업, 대형 블록의 조립, 엄격한 품질 검사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흔들리면 전체 공정에 영향을 미친다. 도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금속의 변형이나 작업 순서의 미세한 차이, 사고의 징후를 알아채는 판단은 오랜 현장 경험에서 나온다. 자동화 설비와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있지만 모든 숙련을 단기간에 대체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첨단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공정을 이해하고 예외 상황에 대응할 사람이 필요하다. 숙련공의 은퇴를 단순한 인원 감소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문제는 인력난이 하루아침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업은 오랜 기간 수주 호황과 불황을 반복했다. 특히 2010년대 중반 수주 감소와 구조조정 과정에서 상당한 인력이 현장을 떠났고, 일부는 다른 산업으로 이동했다. 이후 수주가 회복됐지만 떠난 인력을 다시 확보하고 새로운 숙련공을 양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2026년 상반기 조선업 고용은 전년 동기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됐다. 전체 고용이 급감하지 않더라도 고숙련 직종의 인력 부족과 세대교체 문제는 별도로 나타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고용 인원 확대가 아니라 직종별 숙련 수준과 연령구조, 향후 퇴직 규모를 함께 살피는 인력정책이다. 청년들이 조선소 취업을 주저하는 현실도 임금과 근로조건, 경력 전망을 함께 놓고 봐야 한다. 위험하고 고된 작업을 감수하면서도 숙련에 따른 보상이 충분하지 않고 장기적인 고용 안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새로운 인력이 현장을 선택할 유인은 약해진다. 특히 원청과 협력업체 사이의 처우 격차는 숙련 인력의 양성과 유지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다. 조선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협력업체가 숙련 근로자에게 적정한 보상을 제공할 여력을 갖추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수주 호황의 성과가 원청의 실적 개선에 그치지 않고 협력업체의 경영 안정과 노동자의 처우 개선으로 이어지는지도 따져볼 일이다. 삼성중공업 협력업체의 숙련 등급 평가와 정년 후 재고용 사례는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경험과 기술을 평가하고, 그에 맞는 직무와 보상을 마련하면 숙련 인력의 이탈을 줄일 수 있다. 다만 제도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실제 고용 연장 규모와 기술 전수 성과, 후배 근로자의 숙련도 향상까지 확인해야 한다. 외국인 근로자의 역할도 중요해졌다. 이들은 이미 조선업 생산을 떠받치는 핵심 인력의 일부다. 인력 부족을 외국인 근로자의 문제로 돌리거나 단순히 저렴한 노동력으로만 바라봐서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 삼성중공업은 해외 현지 훈련센터에 기술 지도 인력을 파견하고 직종별 맞춤 교육과 기량평가를 실시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을 국내 현장의 안전관리, 언어 지원, 장기적인 숙련 향상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국인 근로자 역시 기술을 축적하고 경력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생산성과 품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정부와 기업이 추진할 과제는 분명하다. 우선 은퇴 숙련공의 경험을 조직의 자산으로 남기는 체계를 확대해야 한다. 정년 이후 재고용을 단순한 인력 부족 해소 수단으로만 활용해서는 안 된다. 고숙련 근로자가 현장 교관이나 멘토로 활동하며 젊은 근로자에게 기술을 전수하도록 직무를 설계해야 한다. 교육 성과에 대한 평가와 적정한 보상도 뒤따라야 한다. 숙련 전수는 개인의 선의에 맡길 일이 아니다. 기업은 공정별 핵심 기술과 작업 경험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숙련 등급에 따른 교육과 자격 인증을 정비해야 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중소 협력업체가 이러한 제도를 운영할 수 있도록 교육비와 인건비, 훈련시설 등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둘째, 숙련에 대한 보상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 오래 근무했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보상을 지급하자는 것이 아니다. 작업의 난도와 품질, 안전관리 능력, 후배 양성 기여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임금과 경력에 반영하자는 것이다. 기술을 익힐수록 처우가 개선되고 경력이 성장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청년들도 조선소를 장기적인 일터로 선택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원·하청 간 공정한 거래와 적정한 작업 대가가 뒷받침돼야 한다. 협력업체가 숙련 인력을 양성할 여력조차 확보하지 못한다면 원청의 인력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수주 계약부터 생산 현장에 이르는 비용과 책임의 배분을 점검하고, 불공정한 거래 관행이 확인되면 바로잡아야 한다. 셋째, 스마트 조선소 전환을 숙련 인력의 가치를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로봇과 자동화 기술은 고위험 용접과 중량물 운반, 밀폐 공간 작업 등에서 노동자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기술 도입이 현장의 경험과 분리되면 새로운 장비를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 숙련공이 공정 개선과 자동화 설계에 참여하고, 그 경험이 디지털 데이터로 축적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업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자동차와 철강, 기계, 반도체 장비 등 한국 제조업의 여러 분야에서도 숙련 인력의 고령화와 기술 계승은 중요한 과제다. 생산설비를 새로 들이는 것만큼 그 설비를 이해하고 운영할 사람을 키우는 일에도 투자해야 한다. 정책의 방향은 이미 일부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년퇴직자의 재고용 기간을 늘리고, 고령 근로자를 멘토로 활용하며, 직종별 교육과 숙련 평가를 강화하는 시도들이다. 이제는 이러한 사례가 일부 기업의 개별적인 노력에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조선업 인력정책의 성과를 신규 채용 인원뿐 아니라 숙련 인력의 유지율과 기술 전수 실적, 청년 근로자의 장기근속, 산업재해 예방 성과 등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기업도 수주 실적과 생산성만큼 숙련 인력 양성에 대한 투자와 성과를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거제 조선소의 정년퇴직자 재고용 확대는 산업 현장에 던지는 메시지가 작지 않다. 숙련은 퇴직과 함께 사라져야 할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넘겨야 할 생산 역량이라는 점이다. 정년을 앞둔 근로자가 후배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젊은 근로자가 그 기술을 바탕으로 더 나은 공정을 만드는 현장이야말로 제조업 경쟁력의 토대다. 수주는 오늘의 실적이지만 숙련은 내일의 경쟁력이다. 한국 조선업이 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이어가려면 선박을 수주하는 능력만큼 사람을 키우고 기술을 계승하는 능력도 증명해야 한다. 거제의 도크에서 시작된 숙련의 세대교체가 한국 제조업의 미래를 가를 수 있다.
2026-10-23 15: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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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상품권의 거품을 걷어라… 혈세 쓴 책임부터 물어야
[경제일보] 온누리상품권 부정 유통으로 환수하기로 한 돈 40억4000만원 가운데 정부가 실제 거둔 금액은 5억3300만원이다. 나머지 35억700만원은 아직 납부되지 않았다. 2024년 하반기 부정 유통 조사에서 117건의 위반 행위가 적발됐지만 현재까지 환수가 결정된 가맹점은 11곳에 그쳤다. 이달 국정감사를 앞두고 공개된 중소벤처기업부 자료에 담긴 내용이다. 정부는 올해 말까지 납부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위반 행위를 찾아내는 일부터 부당이득을 실제 거둬들이는 과정까지 정부의 관리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온누리상품권은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살리겠다며 2009년 도입한 제도다. 소비자가 할인된 가격으로 상품권을 구입하면 정부가 그 차액을 재정으로 부담한다. 정부 지원으로 소비를 유도하고 소상공인의 매출을 늘리겠다는 취지였다. 시행 18년째를 맞았지만 정작 국민 세금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였는지, 영세 상인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됐는지를 둘러싼 의문은 여전하다.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온누리상품권 결제액은 3조3369억원에 달했다. 이 가운데 73.7%인 2조4592억원이 상위 10% 가맹점에 집중됐다. 상위 1% 점포의 결제액만 1조2455억원으로 전체의 37%를 차지했다. 더불어민주당 장철민 의원이 중기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특히 결제액 상위 10곳 가운데 5곳은 의약품 취급점이었다. 전통시장과 영세 상인을 지원하겠다며 투입한 예산의 혜택이 실제 어디로 흘러갔는지 따져볼 대목이다. 결제액이 특정 점포에 집중되는 현상은 부정 유통과 별개로 살펴야 할 정책 설계의 문제다. 매출 규모가 큰 점포에 소비가 몰릴 수 있지만, 국민 세금까지 투입하는 지원사업이라면 영세 상인의 소득과 상권 전체의 매출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검증해야 한다. 상품권으로 물건을 구매했다는 사실만으로 새로운 소비가 발생했다고 볼 근거도 부족하다. 평소 현금이나 카드로 구매하던 소비자가 결제 수단만 바꿨다면 정부 예산은 기존 소비에 할인 혜택을 제공한 셈이다. 정부도 뒤늦게 제도 손질에 나섰다. 지난 6월 시행령을 개정해 연매출 30억원을 초과하는 점포의 신규 가맹을 제한하고 부정 유통에 따른 과징금을 부당이득의 최대 3배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달 1일에는 전통시장 이용자에게 할인과 환급을 합쳐 최대 10%의 혜택을 제공하는 개편안도 발표했다. 그러나 부정 유통으로 발생한 이익을 충분히 회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인 혜택부터 확대하는 방식에는 재정 관리의 허점이 남는다. 현행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에는 이미 부정 유통을 조사하고 가맹점 등록을 취소하거나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있다. 법률상 제재 수단을 추가하는 작업에 앞서 기존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위반 행위가 반복됐는데도 이를 조기에 발견하지 못했다면 감독 체계를 점검해야 한다. 부당이득 환수가 지연되는 경우에도 원인과 징수 절차를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 행정의 성과는 적발 건수와 처분 규모에 그치지 않고 실제 환수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 국회가 손봐야 할 부분도 여기에 있다. 정부가 매년 온누리상품권의 부정 유통 적발 현황과 환수 결정액, 실제 징수액, 미납 사유를 국회에 보고하도록 법률에 규정할 필요가 있다. 환수 실적이 부진하면 그 원인을 분석해 개선 계획까지 제출하도록 해야 한다. 반복적인 감독 소홀이나 위법한 업무 처리가 확인된 경우에는 감사와 관계 법령에 따른 책임 추궁이 뒤따라야 한다. 법적 근거를 갖춘 정보 분석과 정기적인 가맹점 점검으로 이상 거래를 조기에 포착하는 일도 중요하다. 예산의 효과를 검증하는 작업 역시 강화해야 한다. 상품권 발행액과 사용액, 가맹점 수는 행정 실적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정부가 살펴야 할 대상은 지원 전후의 실제 매출 변화와 신규 고객 유입, 영세 점포의 소득 증가, 지역별 수혜 격차다. 상품권 사용이 가능한 점포와 그렇지 않은 점포의 매출 변화를 비교하고, 할인 지원이 종료된 이후에도 소비가 유지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 결과를 공개해 다음 연도 예산 편성과 국회 심사에 반영한다면 효과가 떨어지는 사업에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관행도 줄일 수 있다. 골목상권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필요한 지원도 다시 살펴야 한다. 소비자에게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과 상인의 경영 능력을 높이는 방식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큰 효과를 내는지 비교할 필요가 있다. 공동 배송과 온라인 판매, 노후시설 개선, 상품 개발 등은 상인이 고객을 확보하고 영업비용을 줄이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정부가 지원한 상품권을 모두 사용한 뒤에도 손님이 다시 찾는 시장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재정 지원의 성과는 그런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치권은 경기 침체 때마다 온누리상품권 발행 확대를 민생 대책으로 내세워 왔다. 할인율을 높이면 소비자는 당장 혜택을 누리고 정부는 눈에 보이는 실적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재정 부담과 부정 유통의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지원을 늘리겠다는 발표에는 관심이 쏠리지만 이미 집행한 예산을 어떻게 관리했고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따지는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작았다. 국민의 세금에는 사용 목적과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온누리상품권도 예외일 수 없다. 정부는 부정 유통으로 빠져나간 돈을 끝까지 추적해 환수하고, 영세 상인에게 돌아간 실질적인 혜택을 수치로 증명해야 한다. 국회는 그 결과를 예산 심사와 법률 개정에 반영해야 한다. 새로운 할인 혜택을 약속하기 전에 이미 쓴 돈의 행방부터 밝히고, 발행 실적을 자랑하기 전에 상인들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보여줘야 한다. 국민 세금을 쓰는 권한만 누리고 그 결과에는 책임지지 않는 재정 운용을 더는 용납해서는 안 된다.
2026-10-23 1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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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3% 동결, 한은의 숨 고르기와 정부의 숙제
[경제일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22일 기준금리를 연 3.00%로 동결했다. 지난 7월과 8월 두 차례 연속 금리를 올린 뒤 인상 효과를 점검하기 위해 한 차례 숨을 고른 것이다. 그러나 이번 동결을 긴축 종료의 신호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물가 상승 압력과 가계부채 부담이 여전한 데다 환율과 대외 경제 여건의 불확실성도 남아 있다. 반도체 수출을 중심으로 경기 회복세가 뚜렷해지고 있지만 자영업자와 취약 차주가 체감하는 금융 부담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이번 결정은 한국 경제가 처한 복잡한 현실을 보여준다. 금리를 더 올리면 물가와 자산시장 과열에 대응할 여지가 커지지만 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도 늘어난다. 반대로 금리를 내리면 차입 비용을 낮추고 내수를 뒷받침할 수 있으나 가계대출 확대와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이 아니다. 금통위가 이번에 주목한 것은 앞선 두 차례 인상의 파급효과다. 7월 16일 연 2.50%에서 2.75%로, 8월 27일 다시 3.00%로 올린 금리가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다. 단기간에 0.50%포인트를 인상한 만큼 추가 조치에 앞서 시장의 반응을 살피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다만 동결이 곧 통화정책의 방향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가 상승 압력이 지속되거나 금융 불균형이 심화한다면 추가 긴축이 필요할 수 있다. 반대로 경기 여건이 예상보다 빠르게 악화한다면 다른 판단을 내려야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금리의 향방을 미리 단정하는 일이 아니라 경제지표와 위험 요인에 따라 일관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고민은 성장과 물가의 흐름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데 있다. 반도체 수출 호조로 성장 전망이 개선되고 내수에도 회복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회복의 온기가 경제 전반에 고르게 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출 대기업과 내수 중심 중소기업, 안정적인 소득을 가진 가계와 빚 부담이 큰 자영업자의 사정은 다르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화정책의 효과도 균등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같은 금리 수준이라도 부채가 적은 기업에는 감당할 만한 비용이지만, 차입 의존도가 높은 자영업자에게는 생존을 좌우하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금리 인상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충격이 어디에 집중되는지 살펴야 하는 이유다. 환율 문제도 단순하지 않다. 원·달러 환율은 한국과 미국의 금리 차이뿐 아니라 국제 금융시장의 위험 선호, 미국의 통화정책, 에너지 가격과 자본 흐름 등 여러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금리를 올린다고 원화 가치가 반드시 안정되는 것도 아니고, 금리를 내린다고 곧바로 환율이 급등하는 것도 아니다.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통화정책을 무리하게 운용한다면 국내 경기와 금융시장에 예상하지 못한 부담을 줄 수 있다. 결국 금리 하나로 물가와 환율, 가계부채와 내수를 동시에 안정시키겠다는 기대부터 버려야 한다. 한국은행은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위한 통화정책을 수행하되, 정부가 해결해야 할 구조적 문제까지 떠안을 수는 없다.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가계부채 관리다. 주택가격 상승 기대가 되살아나고 소득 증가 속도를 웃도는 대출 확대가 이어진다면 통화정책의 부담은 커진다. 금리가 높아도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강하면 차입 수요는 쉽게 줄지 않는다. 반대로 금리 부담만으로 주택 수요를 억누르려 한다면 실수요자와 취약 차주가 먼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정부는 주택 공급과 대출 규제, 금융소비자 보호 정책을 일관되게 운영해야 한다. 주택시장 상황에 따라 규제를 급격히 완화하거나 강화하는 방식으로는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어렵다. 상환 능력에 맞는 대출 관행을 정착시키고, 부동산 시장의 불안을 자극하지 않는 공급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취약 차주에 대한 대응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일시적인 매출 감소나 경기 부진으로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에게는 채무조정과 재기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회생 가능성이 낮은 부실까지 반복적인 만기 연장과 신규 대출로 덮는 것은 문제를 뒤로 미루는 일이다. 금융지원은 정상화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하고,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부문에는 질서 있는 정리와 전환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 재정정책 역시 통화정책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을 활용하더라도 그 효과가 일시적인 소비 확대에 그치거나 가계부채와 자산가격의 불안을 키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재정 여력을 어디에 투입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특히 반도체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성장세를 경제 전반의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하는 일이 시급하다. 인공지능과 로봇, 바이오, 에너지 등 미래 산업에 대한 투자 여건을 개선하고, 중소기업의 기술 혁신과 인력 확보를 지원해야 한다. 노동시장과 인허가 제도, 규제 체계의 비효율도 개선해야 한다. 성장잠재력을 높이지 못한다면 금리를 낮춰도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한국은행과 정부의 역할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중앙은행은 정치적 요구나 단기적인 시장 기대에 휘둘리지 않고 경제지표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정부는 통화정책의 효과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재정·금융·주택 정책의 일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성장과 물가, 금융안정 사이의 균형을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결정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시장과 경제주체의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금리 동결을 저금리 시대로 돌아가는 출발점으로 해석해 무리하게 대출을 늘리는 것은 위험하다. 가계는 변동금리 대출과 상환 일정을 점검하고, 기업은 차입 만기와 현금흐름을 관리해야 한다. 투자자 역시 금리 전망만을 근거로 빚을 활용한 위험자산 투자를 확대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금융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특정한 금리 수준보다 앞으로의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는 태도다. 금리가 더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확산하면 부채를 줄여야 할 시기에 오히려 차입이 늘어날 수 있다. 반대로 추가 인상 가능성만 과도하게 부각되면 소비와 투자가 필요 이상으로 위축될 수 있다. 한국은행이 정책 판단의 기준을 명확히 설명하면서도 특정한 금리 경로를 섣불리 약속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경제의 연착륙은 기준금리 동결 한 번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물가와 금융안정을 지키면서 취약계층의 충격을 줄이고, 생산성과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정책 조합이 필요하다. 한국은행은 독립적인 통화정책으로 경제의 균형을 지키고, 정부는 구조개혁과 재정·금융정책을 통해 그 부담을 나눠야 한다. 이번 동결은 경제의 위험이 사라졌다는 선언이 아니다. 앞선 긴축의 효과를 확인하고 다음 정책을 준비할 시간을 확보한 결정이다. 그 시간을 부채 확대와 단기 부양에 허비한다면 다음 금리 결정의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연착륙의 성패는 한국은행이 금리를 어디까지 올리느냐보다 정부가 구조적 문제를 얼마나 바로잡느냐에 달려 있다.
2026-10-22 11: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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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공 숫자에만 매달리는 3기 신도시, 집만 짓고 길과 일자리는 언제 만들려나
[경제일보] 정부가 오는 2030년까지 3기 신도시 물량의 90퍼센트를 착공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치솟는 집값과 전세난에 지친 무주택 서민과 청년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일지 모른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정부의 부동산 대책과 행정 현장을 지켜본 입장에서 이 숫자가 주는 무게감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착공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는 뜻일 뿐, 당장 국민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 완성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1기와 2기 신도시가 들어설 때도 정부는 늘 화려한 공급 숫자를 앞세웠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파트 단지는 금세 솟아올랐지만, 서울로 이어지는 철도와 도로는 입주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제자리를 걸었다. 분양 대금에 이미 수조 원의 광역교통개선분담금이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부처 간 칸막이와 지자체의 인허가 갈등 속에 길 뚫는 일은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김포 골드라인의 숨 막히는 출근길이나 동탄과 검단 주민들이 입주 초기에 겪어야 했던 극심한 교통난은 행정의 무책임이 낳은 뼈아픈 실패 사례다. 지금의 3기 신도시 역시 이 오래된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양주 왕숙이나 하남 교산, 고양 창릉, 부천 대장 등 주요 지구에서 사전청약을 받았던 수많은 당첨자가 본청약 지연으로 속을 태우고 있다. 문화재가 발굴되거나 법정보호종이 발견되어 공사가 멈춰 서고, 자잿값과 인건비가 치솟으면서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민간 건설사들이 사업성을 이유로 첫 삽조차 제때 뜨지 못하는 곳이 수두룩하다. 공사비가 오르니 당초 약속했던 분양가는 수천만 원에서 억 단위로 뛰었고,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에 당첨을 포기하는 서민들까지 속출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가 90퍼센트 착공이라는 목표만 다그치면 현장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숫자를 채우기에 급급해 보상이나 기반 시설 문제가 덜 복잡한 곳부터 밀어붙이게 되고, 정작 막대한 예산과 정교한 조율이 필요한 광역급행철도(GTX)나 지하철 연장 사업은 또다시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땅만 파놓고 정작 공사는 지지부진하거나, 허허벌판에 아파트만 덩그러니 지어놓고 입주민들에게 몇 년씩 불편을 감수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약속을 어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정한 주거 안정은 공급 물량을 채우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도시 안에서 온전히 삶을 꾸릴 수 있는 여건을 갖추는 데서 출발한다. 아침마다 두 시간씩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 시달리며 서울로 출근하고 밤늦게 잠만 자러 돌아오는 도시는 서울의 집값 수요를 결코 분산시키지 못한다. 판교가 성공한 신도시로 꼽히는 이유는 아파트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일할 수 있는 탄탄한 기업 터전을 함께 일구었기 때문이다. 3기 신도시가 거대한 잠자리 도시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일자리와 교통망이 주택 입주 시점에 맞춰 함께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지자체장이 바뀌거나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남발되는 보여주기식 기업 유치 양해각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양해각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기업이 실제로 땅을 매입하고 공장과 연구소를 세울 수 있도록 세제 혜택과 과감한 규제 완화를 법과 제도로 뒷받침해야 한다. 철도와 도로 역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라는 구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해마다 공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예산은 제때 투입되고 있는지 소상히 공개하고 지연될 경우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분명히 가려야 한다. 집을 짓고 도시를 만드는 일은 한 정권의 실적을 채우기 위한 단기 사업이 아니다. 청년들이 감당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에 내 집을 마련하고, 출퇴근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며,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닦는 백년대계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착공 비율을 앞세워 성과를 홍보하려는 유혹을 내려놓아야 한다. 공사가 왜 늦어지는지, 치솟는 분양가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입주 날 아침 주민들이 타고 갈 전철은 제때 개통될 수 있는지부터 정직하게 점검하고 해답을 내놓는 것이 행정이 지켜야 할 기본이다.
2026-10-21 16: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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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분노가 던진 경고, 미래세대는 정치권의 현금인출기가 아니다
[경제일보] 지난해 네팔에서는 청년들의 분노가 정권을 흔들었다. 부패와 특권, 청년 실업에 쌓인 불만이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모로코에서도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국제축구대회 개최를 위한 시설에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면서 병원과 학교는 제대로 돌보지 않는 정부를 향한 항의였다. 두 나라의 사정은 달랐지만 청년들이 겨냥한 것은 자신들의 삶보다 권력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정치였다. 한국 정치도 이 경고를 가볍게 여길 처지가 아니다. 집값은 청년들의 소득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도 쉽지 않다.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청년이 늘어나는 동안 정치권은 현금 지원과 각종 보조금 확대를 경쟁적으로 약속한다. 당장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은 필요하지만 돈을 어디서 마련할 것인지, 그 비용을 누가 갚을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정치권이 선거를 의식해 지출을 늘리면 그 혜택은 현재의 유권자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재정 적자가 쌓여 국가채무가 증가하면 원리금을 갚아야 할 부담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선거에서 표를 얻은 정치인은 몇 년 뒤 자리를 떠날 수 있지만 국가가 발행한 국채는 정권이 바뀐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권은 오늘의 표를 얻기 위해 돈을 쓰고, 그 빚은 내일의 납세자에게 떠넘기고 있다. 저출생과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한국에서 이러한 재정 운용은 더욱 위험하다. 경제활동에 참여해 세금을 낼 인구는 줄어드는데 연금과 의료, 노인복지에 들어가는 돈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경제성장률까지 낮아지면 재정 수입은 줄고 지출 압박은 커진다. 지금의 지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걷거나 빚을 늘리는 선택을 반복할수록 미래세대의 부담은 무거워진다. 정부가 편성한 2027년도 예산안은 총지출 820조9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2.8% 증가했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확대에 힘입어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0.1%로 줄고 국가채무비율도 48.3%로 낮아질 전망이다. 그러나 국가채무 총액은 올해 본예산 기준 1413조8000억원에서 1519조8000억원으로 증가한다. 채무비율은 낮아지더라도 빚의 절대 규모는 106조원 늘어나는 셈이다. 세수 증가에 힘입은 재정지표 개선을 장기적인 건전성 회복으로 받아들이기는 이르다. 반도체 산업의 호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고 경기 침체로 세수가 줄어들면 재정 여건은 빠르게 악화할 수 있다. 한 번 도입한 복지제도와 지원사업은 수혜자가 늘어날수록 축소하기 어려워진다. 지출을 확대하는 정치적 결정은 쉽지만 이를 줄이는 과정에서는 거센 반발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해 발표한 장기재정전망도 심각하다. 당시 법령과 제도가 유지될 경우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25년 47.8%에서 2072년 173%까지 상승할 것으로 추산됐다. 이후 정책 변화에 따라 실제 수치는 달라질 수 있지만 저출생과 고령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국가재정이 얼마나 큰 압박을 받게 되는지 보여준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새로운 지원책을 쏟아낸다. 여야 모두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다가도 자신들이 추진하는 사업에는 예외를 두려 한다. 집권하면 재정 확대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야당이 되면 국가채무 증가를 비판한다. 국가재정을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운용하면서 그 부담은 다음 세대에 넘기는 행태다. 재정준칙을 법률로 강제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9월 29일 국민의힘 김상훈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국가채무비율을 GDP 대비 60% 이내로 관리하고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원칙적으로 3% 이내로 제한하도록 했다. 국가채무비율이 60%를 넘으면 적자 한도를 2%로 낮추고 준칙을 지키지 못한 정부에는 재정건전화 대책과 이행계획을 제출하도록 했다. 법률에 기준을 정해 놓는 것으로 재정 운용의 책임까지 확보할 수는 없다. 경기 침체나 대규모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가 지출을 늘려야 할 때도 있다. 다만 예외를 적용한다면 그 사유와 재정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정상화 시한과 계획을 국회에 제출하도록 해야 한다. 독립적인 재정평가를 통해 정부의 세입 전망과 지출계획을 검증하고 시정조치의 이행 여부도 공개해야 한다. 예외와 유예를 반복하면서 준칙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편법부터 막아야 한다. 국회 역시 재정 운용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선거를 앞두고 각종 지원책과 감세 법안을 경쟁적으로 발의하면서 정작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현행 비용추계 제도를 보완해 재정 부담이 발생하는 법률에는 구체적인 재원 조달 방안까지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지출에 상응하는 재원을 마련하거나 기존 지출을 조정하는 페이고(Pay-as-you-go) 원칙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민에게 혜택을 약속할 권한을 가진 국회가 그 비용에 대한 책임까지 회피해서는 안 된다. 국민연금은 정치권의 개혁 지연이 미래세대에 어떤 부담을 남기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개정된 국민연금법에 따라 보험료율은 기존 9%에서 올해 9.5%로 올랐고 2033년에는 13%에 도달한다. 명목소득대체율도 올해부터 43%로 높아졌다. 18년 만에 이뤄진 개혁으로 기금 소진 시점은 늦춰졌지만 장기적인 재정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정부 추계에 따르면 이번 개혁을 반영한 국민연금 기금 소진 시점은 2064년이다. 기금운용 수익률이 목표대로 높아지면 2071년까지 늦출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계는 인구구조와 경제성장률, 투자수익률에 따라 달라진다. 기금 소진 시점을 늦추는 데 성공했더라도 그 이후 연금급여를 어떻게 지급할 것인지, 필요한 재원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현행 제도에서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보험료를 납부할 청년들이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부담을 더 많이 떠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개혁으로 보험료율을 올리면서 소득대체율도 높였지만 세대별로 부담과 혜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관한 논의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재 연금을 받는 세대와 앞으로 가입할 청년의 이해관계가 다른 만큼 보험료율과 급여 수준을 정할 때 세대별 영향을 함께 따져야 한다. 정치권이 연금개혁을 미룬 책임도 가볍지 않다. 2007년 개혁 이후 보험료율을 다시 조정하기까지 18년이 걸렸다. 그동안 출생아 수는 줄고 고령인구는 증가했다. 연금 재정의 장기적인 불안이 예고됐지만 국민에게 보험료 인상이나 급여 조정을 요구하는 결정은 번번이 뒤로 밀렸다. 개혁을 늦춘 정치권이 부담해야 할 정치적 비용은 작았지만 그 사이 후속 세대가 감당해야 할 재정적 부담은 커졌다. 국민연금법에도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도록 후속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현행법은 5년마다 재정계산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정 전망이 법률에 정한 관리 기준을 벗어나면 정부가 일정 기간 안에 조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국회에도 심의 일정과 처리 경과를 공개하도록 해 연금개혁을 지연시킨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국민이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세대별 보험료 부담과 예상 연금급여를 비교해 공개하는 제도도 도입할 만하다. 청년과 중장년, 고령층이 각각 얼마나 부담하고 어떤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지 같은 기준으로 산출해야 한다. 보험료 인상의 부담이 저소득층과 고용이 불안정한 청년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지원책을 마련하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 국가의 연금 지급 보장은 이미 법률에 명시됐다. 이제는 그 약속을 이행할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을 차례다. 재정 건전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청년 지원이나 필요한 복지까지 무조건 줄여서는 곤란하다. 청년의 주거 안정과 일자리, 교육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으로 경제의 성장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복지 지출 역시 국가의 책무다. 반면 효과가 불분명한 사업이나 선거를 의식한 일회성 지원에는 엄격한 검증이 따라야 한다. 정부가 돈을 쓰기로 결정했다면 그 사업이 어떤 성과를 낼 것인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재원이 필요할 것인지부터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재정준칙과 연금개혁을 법으로 강제하자는 주장은 국회와 정부의 정당한 정책 결정권을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만큼 그에 따르는 책임도 법률에 규정하자는 것이다. 재정준칙을 지키지 못한 정부는 시정계획을 제출하고, 연금 재정이 악화되면 개혁안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국회도 선거와 정파적 이해를 이유로 심의를 무작정 미룰 수 없도록 제도적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권은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충분한 논의와 국민적 공감대는 중요하다. 그러나 합의를 이유로 결정을 미루는 동안에도 국가채무의 이자는 쌓이고 연금 재정의 부담은 증가한다. 다음 선거를 의식해 개혁을 연기하는 정치가 반복된다면 그 피해는 정치권이 아닌 미래의 납세자와 연금 가입자에게 돌아간다.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온 청년들의 분노는 오늘의 정치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한국 정치도 당장의 지지율과 선거 승리를 위해 재정을 운용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채무와 연금 지급 의무는 정권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권이 회피한 책임을 미래세대가 세금과 보험료로 감당하는 일도 더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국민은 선거에서 자신의 이해를 대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현재의 정치권이 그들의 몫까지 마음대로 쓸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다. 미래세대에 남길 부담을 결정하는 정치라면 그 책임부터 법으로 지게 해야 한다.
2026-10-20 1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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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권 전환, 정치적 일정보다 군사적 조건이 먼저다
[경제일보]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이 다시 한미 안보 현안의 중심에 섰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9일 전작권을 조기에 돌려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한국군이 전작권을 행사할 능력을 충분히 갖췄으며 한미 간 협의도 대체로 긍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취지다. 그러나 전환 시점과 군사적 준비 수준을 둘러싼 한미의 시각차도 드러나고 있다. 전작권 전환은 한국군의 자율성과 책임을 확대하는 국가적 과제다. 한국군이 한미 연합방위를 주도할 역량을 갖추는 것은 바람직한 목표다. 다만 목표의 정당성과 추진 시점의 적절성은 구분해야 한다. 안보정책의 성패는 전작권을 얼마나 빨리 넘겨받았느냐가 아니라, 전환 이후에도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유사시 연합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논란은 그 기준을 다시 묻게 한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 등 변화한 안보환경을 거론하며 전작권 전환에 필요한 평가 기준의 변화를 언급했다. 이에 국방부 대변인은 조건이 계속 달라진다면 전환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개인적 견해를 밝혔다. 다만 국방부는 한미가 합의한 조건에 따라 전환을 추진한다는 공식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양측의 발언만으로 한미동맹에 균열이 발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평가 기준에 대한 시각차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된다. 군사적 조건을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지, 달라진 위협을 기존 평가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부터 충분히 협의해야 한다. 전작권 전환은 이미 한미가 합의한 조건과 검증 절차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 한국군의 연합방위 주도 능력,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 한반도와 역내 안보환경 등이 주요 판단 기준이다. 미래연합사의 지휘능력 역시 기본운용능력(IOC), 완전운용능력(FOC), 완전임무수행능력(FMC) 등 단계별 검증을 거친다. 국방부는 올해 FOC 검증과 전환 로드맵 마련을 추진해 왔다. 조기 전환을 목표로 필요한 능력을 신속히 확보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평가를 통과하기 위해 기준을 낮추거나 검증 절차를 형식적으로 운영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군사적 준비를 앞당기는 것과 준비가 끝난 것처럼 판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 지점에서 대통령과 국방부의 책임이 분명해진다. 대통령은 전작권 전환의 전략적 방향을 제시하고 한미동맹의 안정성을 유지할 최종적인 정치적 책임을 진다. 국방부 장관은 필요한 전력과 인력, 지휘통제체계를 확보할 책임이 있다. 합동참모본부와 각 군 지휘부는 실제 작전 수행능력을 전문적으로 평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고해야 한다. 군의 판단이 정치적 일정에 맞춰져서는 안 된다. 평가 과정에서 미흡한 능력이 확인됐다면 보완 계획을 마련하고 필요할 경우 전환 시점도 조정해야 한다. 반대로 조건을 충족했는데도 정치적 논쟁만으로 전환을 지연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기준은 어느 정권에나 같아야 한다. 전작권 전환 이후의 지휘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필요하다. 전환은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연합사 해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미가 구상한 미래연합사 체제에서는 한국군 장성이 사령관을, 미군 장성이 부사령관을 맡는다. 중요한 것은 지휘권자의 국적 자체보다 양국 군이 하나의 연합작전 체계 안에서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느냐다. 한국군이 연합작전을 주도하더라도 미국의 정보·감시·정찰 자산과 확장억제, 전략자산 운용 및 증원전력과의 연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도화하는 상황에서는 조기 경보와 지휘통제, 미사일 방어, 연합 대응 절차를 빈틈없이 갖춰야 한다. 자주국방과 한미동맹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군의 독자적 능력을 강화하면서 동맹의 군사적 효율성을 유지하는 것이 전환의 본래 취지에 부합한다. 정부가 제시해야 할 것은 전환 시점만이 아니다. 어떤 조건을 충족했고 어떤 능력을 보완해야 하는지, 전환 이후의 연합방위태세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 물론 군사적 평가 결과를 모두 공개할 수는 없다. 작전계획과 정보자산의 성능, 전력상의 취약점은 엄격히 보호해야 한다. 다만 평가 절차와 주요 단계의 진척, 전력 확보 계획, 예산 집행 현황 등 국민이 정책의 적절성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는 가능한 범위에서 공개할 필요가 있다. 국회도 비공개 보고 등 적절한 절차를 통해 검증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정책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할 기준도 미리 세워야 한다. 우선 한미가 합의한 핵심 조건을 충족했는지가 출발점이다. 전환 과정에서 지휘·통제의 공백이 발생하지 않는지, 연합작전의 신속성과 효율성이 유지되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과 미국의 확장억제 및 지원체계가 약화하지 않는지 역시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핵심 전력 확보가 지연되거나 예산을 투입하고도 필요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사업 관리의 책임을 따져야 한다. 평가 결과를 왜곡하거나 중대한 위험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누락했다면 그 경위도 규명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위험이 현재 모두 발생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정부의 정책 방향을 비판하는 것과 아직 확인되지 않은 안보 실패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정치권의 태도도 중요하다. 여당은 전작권 전환을 정권의 성과로만 설명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야당 역시 전환 자체를 안보 불안과 동일시하기보다 구체적인 군사적 조건과 검증 절차를 따져야 한다. 국가안보를 둘러싼 논쟁이라면 어느 쪽이 더 강한 구호를 외치는지가 아니라 어느 주장이 더 확실한 근거를 갖췄는지로 판단해야 한다. 전작권 전환을 늦추는 것만이 신중한 정책은 아니다. 필요한 군사능력을 갖췄는데도 결정을 미루는 것은 한국군의 책임성과 자율성을 확대할 기회를 놓치는 일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준비가 부족한데도 정해진 일정에 맞추기 위해 전환을 서두른다면 그 위험은 군과 국민이 감당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 검증이다. 대통령은 정책 결정의 이유와 위험 관리 방안을 설명하고, 국방부는 전력 확보와 연합방위태세 유지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군 지휘부는 정치적 고려에 흔들리지 않고 작전능력을 평가해야 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사실관계와 원인을 조사하고, 직무상 잘못이 확인된 경우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전작권 전환은 정권의 자존심을 세우는 사업도, 무조건 막아야 할 정치적 논쟁거리도 아니다. 대한민국이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스스로 연합방위를 주도할 능력을 갖췄는지 입증하는 과정이다. 전환 시점을 앞당기는 데 성공하더라도 억제력과 연합방위태세가 약해진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 없다. 반대로 합의한 조건을 충족하고 안보 역량을 강화했다면 그것이야말로 국가가 책임 있게 이뤄낸 전작권 전환이다.
2026-10-20 13:5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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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투의 악순환, 증권사와 감독당국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경제일보] 증시가 급락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반대매매다. 빚을 내 주식을 산 투자자가 담보유지비율을 지키지 못하면 증권사는 약정에 따라 보유 주식을 처분한다. 주가 하락이 담보 부족을 부르고, 반대매매가 추가 매도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구조다. 시장이 크게 흔들릴 때마다 개인투자자의 손실을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최근 국내 증시에서도 신용거래 위험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4일 기준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33조7057억원으로 집계됐다. 8월 초 약 27조4000억원까지 줄었던 잔고가 두 달여 만에 6조3000억원가량 늘었다. 증시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도 빚을 활용한 투자가 상당한 규모로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신용융자 자체가 잘못된 금융거래는 아니다. 투자자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금을 빌릴 수 있고, 증권사는 관련 규정과 계약에 따라 신용을 제공한다. 반대매매 역시 담보 부족에 대응하는 정상적인 위험관리 절차다. 그러나 신용거래가 빠르게 확대되고 시장의 변동성이 커진다면 그 위험이 적절하게 관리되고 있는지는 별도로 따져야 한다. 금융당국의 역할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 금융감독원은 이미 지난 6월 24일 증권사 최고위험관리책임자(CRO) 간담회에서 신용융자와 미수거래 증가에 따른 위험을 경고했다. 당시 주요 10개 증권사의 일평균 반대매매 규모는 지난해 100억2000만원에서 올해 5월 373억6000만원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감원은 증권사들에 기계적인 위험관리에서 벗어나 시장 상황을 고려한 선제적 대응체계를 구축하라고 주문했다. 투자자가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수거래가 발생하거나 이를 사실상 유도하는 영업 관행도 자제하도록 했다. 감독당국이 위험을 몰랐거나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사전 경고 이후 증권사들의 신용공여 관리가 얼마나 개선됐는가. 위험이 다시 누적되는 과정에서 감독과 점검은 실효성 있게 작동했는가. 경고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감독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신용융자 증가율과 담보 부족 계좌, 종목별 신용거래 집중도 등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위험이 커지는 구간에서 적절한 대응이 이뤄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감독의 성과는 발표한 대책의 숫자보다 실제 위험을 얼마나 줄였는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증권사도 마찬가지다. 신용융자는 증권사에 이자 수익을 가져다주는 금융서비스다. 그러나 수익을 얻는 만큼 신용공여에 따르는 위험을 관리할 책임도 무겁다. 고객의 상환 능력과 담보자산의 변동성, 특정 종목에 대한 신용거래 집중도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특히 급락장에서 투자자가 감당할 손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용거래를 이용하면 주가 하락에 따른 손실이 자기자금 투자보다 빠르게 확대될 수 있다. 담보 부족이 발생했을 때 추가 납입 기한과 반대매매 조건, 실제 처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손실도 명확하게 알려야 한다. 계약서에 관련 내용을 적어 놓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이뤄졌다고 볼 수는 없다. 투자자가 핵심 위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거래 이후에도 담보 부족과 강제 처분 가능성을 적시에 통지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다만 반대매매를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것도 해법은 아니다. 담보 부족 상태를 방치하면 투자자의 손실이 더 커지거나 증권사의 건전성이 악화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반대매매를 무조건 막는 조치가 아니라 신용공여 단계에서 위험을 줄이고, 처분 절차의 예측 가능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일이다. 개인투자자의 책임 역시 분명하다. 빚을 내 주식을 사는 결정은 수익을 확대할 기회를 얻는 동시에 손실 위험도 키우는 선택이다. 주가가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만으로 대출을 늘리거나 담보유지 조건과 이자 부담을 충분히 계산하지 않았다면 그 판단에 따른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금융당국이나 증권사가 모든 투자 손실을 보전할 수는 없다.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은 자본시장의 기본이다. 그러나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것과 금융회사의 설명 의무, 감독당국의 위험관리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치권도 신용거래 관련 제도의 실효성을 살펴야 한다. 국회는 증권사별 신용공여 위험관리 체계와 반대매매 절차, 투자자 보호 조치가 현장에서 어떻게 운영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금융당국이 위험을 경고한 이후 어떤 조치를 취했고, 증권사들이 이를 얼마나 이행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제도 개선은 시장의 안정성과 투자자의 선택권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지나치게 경직된 규제는 정상적인 신용거래까지 위축시킬 수 있다. 반대로 위험이 빠르게 누적되는데도 형식적인 경고에 그친다면 감독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된다. 무엇보다 위험이 커지는 시점과 규제가 작동하는 시점 사이의 간극을 줄여야 한다. 특정 종목이나 투자자군에 신용거래가 과도하게 집중되는지를 살피고, 필요하다면 증권사별 위험관리 기준과 스트레스 테스트의 실효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번 증시 변동성이 모든 신용거래의 위험을 현실화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감독 실패나 증권사의 위법행위가 확인됐다고 볼 근거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사전 경고 이후에도 신용융자 잔고가 다시 33조원대로 확대됐다는 사실은 기존 관리체계가 충분했는지 점검할 이유가 된다. 시장이 오를 때는 신용거래의 편익이 부각되고, 급락할 때는 반대매매의 고통이 드러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투자자의 책임만 강조하는 처방에는 한계가 있다. 금융당국은 위험을 얼마나 일찍 파악하고 관리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증권사는 신용공여의 수익에 상응하는 위험관리와 설명 책임을 다해야 한다. 투자자 역시 빚을 활용한 투자의 손실 가능성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빚투의 악순환을 끊는 출발점은 손실이 발생한 뒤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다. 위험이 커지는 과정에서 누가 무엇을 알고 있었고, 어떤 조치를 취했으며, 그 조치가 실제로 작동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자본시장의 신뢰는 그 책임을 분명히 할 때 회복된다.
2026-10-19 10: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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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은 뒷전, 정쟁에 갇힌 국정감사
[경제일보] 국정감사가 반환점을 향해 가고 있지만 국회 곳곳에서 들리는 것은 정책을 둘러싼 토론보다 여야의 거친 공방이다. 지난 15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공공기관장 인사자료 제출 문제로 여야가 충돌하면서 감사가 여러 차례 중단됐다. 같은 날 법제사법위원회에서도 대법관 재제청 문제 등을 둘러싸고 고성과 막말이 오갔다. 국정감사가 국민에게 보여줘야 할 장면인지 되묻게 한다. 국정감사는 헌법 제61조에 근거한 국회의 권한이다. 행정부와 공공기관의 정책 집행을 살피고 예산 낭비와 제도적 문제를 밝혀내는 것이 본래 목적이다. 정부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정책을 추궁하고 잘못된 행정을 바로잡는 일에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올해 국감에서도 정치적 공방이 감사의 실질적인 진행을 가로막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에서 불거진 공공기관장 인사자료 제출 논란은 그 자체로 검증할 가치가 있는 사안이다. 기관장의 전문성과 직무 수행 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자료 요구는 국회의 정당한 감시 활동에 속한다. 동시에 개인정보 보호와 자료 제출 범위에 관한 법적 기준도 존중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쟁점을 합리적인 절차로 조정하지 못해 본질의가 지연됐다는 점이다. 자료 제출의 필요성과 범위를 명확히 판단하고 감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것 역시 국회의 책임이다.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관 재제청 논란도 사법부의 독립과 국회의 감시권이 맞닿은 중요한 사안이다. 여야가 치열하게 논쟁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고성과 막말이 앞서면 정작 확인해야 할 법적 쟁점과 제도 개선 과제는 흐려진다. 국정감사에서 충돌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를 모두 정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정부의 부당한 행위를 밝혀내기 위한 강한 추궁은 필요하다. 문제는 논쟁의 목적이 사실 확인과 정책 개선인지, 상대 진영에 정치적 타격을 주는 데 있는지다. 여당은 정부의 잘못을 무조건 방어해서는 안 된다.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는 것과 정책 실패를 감싸는 것은 다르다. 야당 역시 의혹 제기만으로 견제의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비판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정책을 문제 삼았다면 실행 가능한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 국민이 국정감사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세금이 제대로 쓰였는지, 정부의 정책이 당초 목표를 달성했는지, 잘못된 행정으로 누가 피해를 봤으며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다. 이번 국감에서도 금융권 해킹과 고객정보 보호, 국립대병원 인력난 등 국민 생활과 직접 연결되는 현안이 다뤄졌다. 이러한 문제는 국회가 감사 이후까지 추적해야 할 과제다. 금융기관의 정보보호 체계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의료인력 부족으로 발생한 진료 공백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 구체적인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 국정감사의 가치는 의원이 얼마나 날카롭게 질문했느냐보다 그 질문이 어떤 변화를 이끌었느냐에서 드러난다. 경제적 관점에서도 국회의 책임은 무겁다. 한국 경제는 저출생과 고령화, 생산성 둔화라는 구조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인공지능을 둘러싼 기술 경쟁은 기업의 투자와 혁신을 재촉하고 있다. 국회가 관련 법률과 제도 개선을 장기간 미룬다면 기업과 국민의 정책 예측 가능성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경제적 어려움을 정치권의 정쟁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기업 투자에는 경기와 금리, 글로벌 수요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그러나 국회가 해결해야 할 제도적 불확실성을 방치하는 것은 경제에 불필요한 부담을 더하는 일이다. 정치적 갈등이 불가피하다면 그 갈등을 정책의 우열을 가리는 생산적인 경쟁으로 바꿔야 한다. 서로 다른 해법을 놓고 논쟁하되 효과와 비용을 비교하고, 국민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의회정치의 역할이다. 국정감사의 운영 방식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상임위원회별로 핵심 감사 과제와 정책 성과 지표를 명확히 정하고, 정부가 제출한 자료와 답변을 체계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자료 제출을 둘러싼 분쟁은 법률과 절차에 따라 신속하게 처리하고, 필요한 경우 비공개 열람 등 합리적인 대안도 활용할 수 있다. 감사 이후의 사후 관리도 강화해야 한다. 국정감사에서 제기된 지적 사항이 정부의 시정 조치로 이어졌는지, 예산과 제도가 실제로 개선됐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국정감사 결과보고와 시정요구 처리 절차가 형식적인 문서 제출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회의 감시권은 강해야 한다. 동시에 그 권한을 행사하는 과정에도 절제와 책임이 따라야 한다. 정부의 자료 제출 거부와 부실 답변에는 엄정하게 대응하되, 국회의원 역시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사실처럼 단정하거나 감사 시간을 정치적 공방에 소모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공자는 <논어> ‘안연’편에서 정치의 본질을 바름에 두었다. 오늘의 국회에도 필요한 기준이다. 상대를 이기는 것만으로 정치를 잘했다고 평가받을 수는 없다. 국민의 삶을 개선할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여야가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는 것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정감사에서 최소한의 공통 목표마저 잃어서는 안 된다. 국정감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은 기간 국회가 보여줘야 할 것은 더 자극적인 폭로나 더 큰 목소리가 아니다.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고 국민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성과다. 정쟁에서 이기는 국회보다 국정의 잘못을 고치는 국회가 필요하다. 국정감사의 성적표는 여야의 승패가 아니라 국민에게 남긴 변화로 평가받아야 한다.
2026-10-16 09: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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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호황에 취한 정부, 민생은 무너진다
[경제일보] 반도체가 잘나간다고 한국 경제까지 잘나가는 것은 아니다. 수출은 늘고 기업 실적은 뛰는데 일자리가 부족하고 소비가 얼어붙었다면 무슨 소용인가. 반도체 실적에 환호하는 동안 청년은 취업 문턱에서 좌절하고, 자영업자는 생존을 걱정한다. 수출의 온기와 민생의 한파가 따로 논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기둥이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 집약도가 높은 산업의 호황이 대규모 고용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인공지능(AI)과 자동화가 확산할수록 생산성과 일자리가 함께 늘 것이라는 기대도 경계해야 한다. 반도체에 더 많은 지원을 쏟는 것만으로 성장과 고용을 해결할 수는 없다. 반도체가 벌어들인 부가가치를 경제 전반으로 확산할 성장축이 필요하다. 답은 서비스산업에 있다. 콘텐츠와 관광, 뷰티, 금융, 물류는 기술과 창의성을 결합해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분야다. K-콘텐츠와 K-뷰티가 이미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국내 기업은 낡은 규제와 부처 간 칸막이에 발목이 잡혀 있다. 고용을 떠받치는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면 양질의 일자리와 내수 회복도 기대하기 어렵다. 제조업만으로 성장과 고용을 모두 해결하겠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의 장기 표류가 이를 상징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개인정보 보호는 지켜야 하지만 이를 이유로 혁신의 문을 닫아걸 수는 없다. 공공성이 중요한 분야는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관광·콘텐츠·물류 등은 불합리한 규제와 중복 인허가부터 정비해야 한다. 규제를 무조건 풀자는 것이 아니라 지킬 원칙과 고칠 규제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여야가 이해집단의 눈치만 보며 입법을 미루는 동안 기업은 투자를 늦추고 청년은 기회를 잃는다. 정부 지원도 달라져야 한다. 중소 서비스기업의 AI 도입과 인력 재교육을 돕되, 장비 구매나 일회성 보조금에 그쳐서는 안 된다. 업무시간 단축과 비용 절감, 매출 증가 등 생산성 개선으로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 콘텐츠·뷰티·관광 기업에는 지식재산권 보호와 해외 유통망, 금융·마케팅 지원을 연결하고, 직업훈련은 수료 인원이 아니라 실제 취업과 임금 상승으로 평가해야 한다. 예산 집행 실적이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가 정책의 성적표여야 한다. 서비스산업 혁신은 제조업을 희생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반도체 기술을 서비스와 연결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수출의 성과가 투자와 소비, 고용으로 이어지게 하자는 것이다. 제조업의 기술이 서비스 혁신을 이끌고 서비스기업의 창의성이 다시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특정 산업의 호황에 경제 전체가 매달리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경제의 성적표는 주가나 수출액만으로 매길 수 없다. 청년이 일자리를 얻었는지, 중소기업이 성장했는지, 가계의 소득과 소비가 나아졌는지를 봐야 한다. 반도체 대기업의 실적이 좋아졌다고 경제정책까지 성공한 것은 아니다. 수출 통계 뒤에 숨어 민생의 부진을 외면하는 것은 경제운용이 아니라 책임 회피다. 반도체 호황은 정부의 공이 아니라 산업이 만든 기회다. 정부가 이 기회에 취해 서비스산업 개혁을 미룬다면 오늘의 수출을 자랑하는 대가로 내일의 일자리를 잃게 된다. 반도체 성과를 자랑하기 전에 민생부터 살려라. 정부의 성적표는 수출액이 아니라 국민의 일자리와 소득으로 매겨야 한다.
2026-10-15 17: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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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청의 독립, 권력의 선의에 맡길 수 없다
[경제일보] 법의 권위는 권력자의 의지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데서 나온다. 힘 있는 사람이라고 감싸지 않고, 힘없는 사람이라고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성경 레위기 19장 15절도 재판에서 공의를 지킬 것을 강조한다. 법 집행의 공정성이 흔들리면 수사기관은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 지난 14일 열린 김지용 초대 중대범죄수사청장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남긴 질문도 결국 여기에 있다. 지난 2일 출범한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은 검찰에 집중됐던 중대범죄 수사 기능을 분리해 새로운 형사사법체계를 구축한다는 취지로 설립됐다. 그러나 수사와 기소를 분리했다고 해서 수사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저절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조직의 간판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의 부당한 개입을 막고 수사권 남용을 통제할 제도적 장치다. 이번 청문회에서는 김 후보자의 과거 검찰 재직 당시 감찰 민원 처리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 직무배제 반대 성명 참여 경위 등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김 후보자는 감찰 민원을 묵살했다는 의혹을 부인하며 당시 관련 절차에 따라 처리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직무배제 반대 성명에 참여한 데 대해서는 당사자의 소명 절차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후보자의 과거 행적과 정치적 중립성을 검증하는 것은 국회의 당연한 책무다. 다만 의혹은 구체적인 사실과 증거로 판단해야 한다. 후보자의 해명 역시 같은 기준으로 검증받아야 한다. 어느 진영에 가까운 인물인지를 따지는 데 그친다면 정작 국민이 확인해야 할 수사기관장의 자질과 독립성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청문회에서 더욱 주목할 대목은 행정안전부 장관의 지휘·감독권이다. 중수청법 제6조는 행안부 장관이 중수청장과 소속 직원을 일반적으로 지휘·감독하되,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중수청장만을 지휘·감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장관의 감독권 자체가 법률에 근거한 권한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지휘와 감독을 정치적 외압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반대로 법률상 권한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행사가 언제나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윤호중 행안부 장관은 지난 11일 임은정 광주지방중수청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했고, 중수청은 이튿날 관련 절차에 착수했다. 감찰의 필요성과 적법성은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다만 이번 사례는 장관의 감독권이 어떤 기준과 절차에 따라 행사되고, 그 적절성을 누가 검증할 것인지라는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수사기관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정당한 감독까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감독권이 개별 사건의 수사 방향이나 결론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는 통로가 돼서도 안 된다. 법률이 허용한 지휘권과 정치적 개입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권한 행사에 대한 기록과 사후 통제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 권력의 선의에 기대는 제도는 권력이 바뀔 때마다 흔들릴 위험이 있다. 수사 독립을 청장 개인의 소신이나 조직 내부의 결의에만 맡길 수 없는 이유다. 우선 인사 절차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현행 제도에는 후보추천위원회와 청장 임기 규정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추천위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정치적 독립성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위원회 구성의 객관성과 심사 기준의 투명성을 높이고, 후보자의 전문성과 도덕성, 정치적 중립성을 일관된 기준으로 검증해야 한다. 청장의 신분을 보호하되 법률에 따른 정당한 책임 추궁 절차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사건 배당과 수사 진행 과정 역시 외부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운영돼야 한다. 객관적인 배당 기준을 마련하고 담당자 교체나 수사 종결에는 합리적인 사유를 기록하도록 해야 한다. 사건의 특수성과 수사 전문성을 고려한 예외가 필요하더라도 그 판단 근거는 남겨야 한다. 표적 수사나 부당한 사건 지연, 선택적 수사 논란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수사권이 커질수록 통제의 책임도 무거워진다.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는 법원의 영장 심사와 적법절차를 엄격히 따라야 한다. 수사 과정에서 위법행위가 발생하면 실효성 있는 구제와 책임 추궁이 뒤따라야 한다. 국회 역시 기관 운영과 권한 남용 여부를 감시하되 개별 사건의 수사 결론을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독립은 감시받지 않을 권리가 아니다.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수사하되 법과 절차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하게 책임지는 것이 수사기관의 독립이다. 중수청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조직의 실질적인 수사 역량이다. 김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인력 확보율이 약 66%, 물적 인프라 확보 수준은 60∼70% 정도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기관이 법률상 권한을 갖췄더라도 인력과 시설, 전문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 수사 공백을 막기 위한 인력 확보와 전문성 강화도 서둘러야 한다. 중수청 개혁의 성패는 과거 검찰의 문제를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권력의 향배에 따라 수사 강도가 달라지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선택적으로 처리한다는 의혹이 반복된다면 조직 개편의 의미는 퇴색한다. 수사와 기소의 분리가 새로운 권한 집중이나 책임 회피로 이어지지 않도록 기관 사이의 역할과 통제 절차를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국회 인사청문회도 본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후보자의 자질과 과거 행적을 철저히 검증하되 같은 기준을 여야 모두에게 적용해야 한다. 의혹을 제기할 때는 근거를 제시하고, 해명에는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절차가 뒤따라야 한다. 청문회가 정치적 공방에만 머문다면 국민이 판단할 정보는 오히려 부족해진다. 공직 후보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정 권력자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을 지킬 의지다. 특히 중대범죄를 수사하는 기관의 수장이라면 정치적으로 불편한 사건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중수청은 정권의 칼도, 정치권의 방패도 돼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독립 선언이 아니다. 지휘·감독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권한 행사의 근거를 기록하며, 위법하거나 부당한 개입에는 책임을 묻는 제도다. 동시에 수사권 남용으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장치도 갖춰야 한다. 진리와 정의의 저울을 권력자의 손에 맡겨둘 수는 없다. 새 수사기관에 대한 평가는 조직을 얼마나 크게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권력 앞에서도 법과 원칙을 지켰느냐로 내려질 것이다. 중수청의 독립은 권력의 선의가 아니라 권력조차 함부로 넘을 수 없는 제도적 경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2026-10-15 10: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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