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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앞둔 전현직 대통령들의 광폭 행보
[경제일보] 6·3 지방선거가 막판으로 향하면서 선거판의 주어가 바뀌고 있다. 시장·도지사, 구청장·군수, 지방의원과 교육감을 뽑는 선거인데 정작 뉴스의 앞자리는 지역 후보가 아니라 전현직 대통령들이 차지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구·충청권 등에서 국민의힘 후보 지원 행보를 이어갔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국민의힘 후보 지원 대열에 섰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조국 조국혁신당 후보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며 간접 지원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재명 대통령도 부산 방문과 지역 현안 발언을 두고 야권으로부터 선거 개입성 행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직 대통령도 시민이다.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다. 현직 대통령도 국정을 수행해야 한다. 지역 행사에 참석하고 민생 현장을 찾는 일 자체를 선거 개입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말과 정치적으로 바람직하다는 말은 다르다. 특히 지방선거는 지역의 삶을 결정하는 선거다. 버스 노선, 재건축, 산업단지, 돌봄, 하수관, 학교 급식, 지역 병원, 청년 일자리 같은 문제가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선거 막판의 장면은 다시 ‘누가 어느 전직 대통령의 손을 잡았는가’, ‘현직 대통령에게 힘을 실을 것인가, 견제할 것인가’로 흘러가고 있다. 지방선거가 대통령 선거의 연장전처럼 변질되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후보 검증이다. 어느 후보가 지역 재정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 공약에 필요한 전력·용수·부지·예산 계획이 있는지, 지난 임기 동안 무엇을 했고 무엇을 못했는지 따지는 질문은 뒤로 밀린다. 대신 전직 대통령의 등장, 지지층 결집, 진영 간 감정전이 선거판을 덮는다. 유권자는 지역의 미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중앙정치의 대리전을 치르는 관객으로 밀려난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의 행보는 특히 신중했어야 했다. 두 전직 대통령은 국가 최고권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각각 사법적 판단과 정치적 심판의 무게를 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겨레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5월 31일 국민의힘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섰고, 당 안팎에서 중도층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보수 지지층 결집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방선거의 품격을 높이는 일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행보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직접 마이크를 잡고 유세차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조국 후보 관련 게시물에 반복적으로 반응한 행위는 정치적 신호로 읽힐 수밖에 없다. 문 전 대통령이 조국 조국혁신당 후보 관련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른 사실이 도마위에 올랐다. 전직 대통령의 손짓 하나, 클릭 하나는 일반 시민의 그것과 무게가 다르다. 지지자들에게는 메시지가 되고 반대편에는 도발로 받아들여진다. 전직 대통령이 침묵할 자유도 있지만, 말하지 않음으로써 남기는 정치적 공간도 있다. 그 무게를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현직 대통령의 행보는 더 엄격한 기준 위에 놓인다. 대통령은 특정 정파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국가 전체의 대표다. 이재명 대통령이 부산에서 바다의 날 행사에 참석하고 “부산을 대한민국 해양 수도로 육성하겠다”고 밝힌 행보를 두고 야권과 일부 언론은 선거를 앞둔 지역 방문의 정치성을 문제 삼았다. 물론 대통령은 지역 정책을 말할 수 있다. 국가균형발전과 지역경제는 대통령의 책무다. 그러나 선거 직전, 격전지에서, 후보들의 공약과 맞물리는 메시지가 나올 때는 국정과 선거운동의 경계가 흐려진다. 대통령의 발언은 곧 행정력과 예산의 신호로 읽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는 원래 생활정치의 무대다. 중앙 권력의 찬반투표가 아니라 주민 삶의 관리자를 뽑는 선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일정에 따르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은 5월 21일부터 6월 2일까지 진행된다. 이 기간 유권자는 후보자 토론, 공약, 지역 현안 대응 능력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선거 막판으로 갈수록 지역 공약보다 전직 대통령의 이동 경로가 더 큰 뉴스가 되고 있다. 이것은 지방자치의 후퇴다. 동양 고전 <논어>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말이 있다. 정치가 공동체의 의로움보다 진영의 이익에 밝아질 때 선거는 시민의 판단을 돕는 절차가 아니라 감정을 동원하는 기술로 전락한다. 전현직 대통령들의 광폭 행보는 각 진영에는 유리한 계산일 수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의 관점에서는 위험한 유혹이다. 대통령의 이름은 지역 후보의 부족한 정책을 가리는 장막이 되어선 안 된다. 지금 유권자에게 필요한 것은 전직 대통령의 향수가 아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찬반 감정만도 아니다. 우리 동네의 낡은 도로를 누가 고칠 것인지, 산업 전환기에 지역 일자리를 누가 지킬 것인지, 청년이 떠나는 도시를 어떻게 붙잡을 것인지, 복지 지출을 감당할 재정 구조를 누가 만들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지방선거의 주인공은 대통령이 아니라 주민이어야 한다. 선거판의 중심은 청와대나 전직 대통령 사저가 아니라 골목, 시장, 학교, 공장, 병원, 버스정류장이어야 한다. 정당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전직 대통령의 후광에 기대는 정치는 손쉽다. 그러나 손쉬운 정치는 대개 시민에게 비싼 대가를 남긴다. 후보 경쟁력이 부족하면 전직 대통령을 부르고, 공약 검증이 부담스러우면 정권 심판론이나 정권 지원론을 앞세우는 방식은 지방정치를 황폐하게 만든다. 지역 후보가 대통령의 대리인이 되는 순간, 지방자치는 중앙정치의 하청으로 전락한다. 이번 선거에서 전현직 대통령들이 남긴 장면은 한국 정치의 오래된 병을 다시 보여준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보다 제도를, 지역보다 중앙을, 정책보다 진영을 앞세운다. 대통령의 그림자가 너무 길면 지방정치는 그늘에 갇힌다. 유권자가 보아야 할 것은 전직 대통령의 손짓이 아니라 후보의 손에 들린 예산표와 실행계획이다. 선거는 과거의 지도자를 소환하는 의식이 아니다. 앞으로 4년의 생활을 맡길 사람을 고르는 절차다. 전현직 대통령들은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 정당은 후보를 앞세워야 한다. 후보는 대통령의 이름 뒤에 숨지 말고 자기 지역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유권자는 진영의 북소리보다 생활의 질문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지방선거를 지방선거답게 만드는 길이다.
2026-06-01 16: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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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치 실종시킨 여야 대표, 선거 끝나면 책임져야 한다
[경제일보] 6·3 지방선거가 막판으로 치닫고 있다. 선거일은 2026년 6월 3일, 사전투표는 5월 29~30일 진행된다. 지방선거라면 본래 시민의 하루를 묻는 선거여야 한다. 내 집 앞 도로를 누가 고칠 것인가. 지역 산업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청년 일자리와 돌봄, 교통, 주거, 지방재정의 해법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번 선거판에서 유권자가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정책이 아니라 적대의 언어였다. 여당은 야당을 심판하자고 외쳤고, 야당은 정권을 견제하자고 맞받았다. 지방정부를 뽑는 선거가 중앙정치의 대리전으로 변질됐다. 그 책임의 맨 앞에는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있다. 정 대표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민주당의 가장 강한 기반에서 터졌다. 전북도지사 선거다. 전북은 오랫동안 민주당의 텃밭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 이원택 후보와 민주당 출신 무소속 김관영 후보가 맞붙으면서 선거는 ‘민주당 대 국민의힘’ 구도가 아니라 ‘민주당 내부 분열’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실제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선거전이 민주당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전라일보가 조원씨앤아이에 의뢰해 2026년 5월 25~26일 전북특별자치도 거주 만 18세 이상 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휴대전화 가상번호 ARS 방식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김관영 후보 51.9%, 이원택 후보 35.3%로 집계됐다. 두 후보 격차는 16.6%포인트로, 표본오차 ±3.1%포인트(신뢰수준 95%)를 넘어섰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또 새전북신문이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5월 21~22일 전북 거주 만 18세 이상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무선 가상번호 ARS 100% 방식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김관영 후보 47.3%, 이원택 후보 38.7%로 나타났다. 격차는 8.6%포인트로 95% 신뢰수준의 표본오차 ±3.1%포인트를 벗어났다. 이 정도면 단순한 지역 선거의 변수가 아니다. 정청래 지도부의 공천, 통합, 갈등 관리 능력에 대한 심판이다. 김관영 후보가 무소속으로 당선된다면 정 대표는 정치적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민주당이 가장 강해야 할 곳에서 민주당 후보가 패한다면 그것은 후보 개인의 패배에 그치지 않는다. 당 대표가 텃밭을 관리하지 못했고, 내부 갈등을 봉합하지 못했으며, 유권자에게 납득 가능한 공천의 명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선거 막판 전북이 민주당 전체 리더십의 시험대가 된 셈이다. 다만 “이원택 후보가 10%포인트 이상 이기지 않으면 정 대표가 물러나야 한다”거나 “2~3%포인트 차 신승도 책임론을 피하기 어렵다”는 여권 일각의 목소리도 새어나온다. 전북에서 민주당 후보가 압승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정 대표에게는 치명적이다. 텃밭에서조차 당심과 민심이 갈라졌다면 당 대표는 먼저 자신의 언어와 방식, 공천과 선거 전략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 대표의 더 큰 문제는 선거의 품격을 높이지 못했다는 데 있다. 민주당 대표라면 지방선거를 지역정책 경쟁으로 끌고 갔어야 했다. 전북에서는 새만금, 산업, 농생명, 금융중심지, 인구소멸 대응을 놓고 싸웠어야 한다. 서울에서는 주거와 교통, 재정과 복지를 놓고 경쟁했어야 한다. 그러나 선거판에는 ‘심판’과 ‘응징’의 언어가 앞섰다. 정 대표는 국민의힘 공천을 향해 ‘윤 어게인 공천’ ‘내란 맞춤형 공천’이라는 강한 표현을 썼다. 물론 야당 공천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여당 대표의 언어가 매일같이 전투 구호로 흘러가면, 지방선거는 사라지고 정쟁만 남는다. 장동혁 대표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국민의힘은 이번 선거에서 정권 견제론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견제론만으로는 중도층을 설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장 대표는 선거 전부터 당내 책임론에 시달렸다. 국민의힘 내부에서 지도부 책임론과 선거 전략을 둘러싼 내홍이 커졌고, 일부 후보들이 중앙당과 거리를 두는 흐름까지 나타난 게 사실이다. 장 대표의 방미를 두고도 ‘지방선거에 도움이 되느냐’는 논란이 제기됐다. 선거를 앞둔 당 대표가 지역 민심의 한복판에 있어도 모자랄 때, 당 안팎에서 ‘미국에 지방선거 표가 있느냐’는 비판이 나왔다면 이미 리더십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장 대표는 보수 결집에는 일정한 효과를 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거는 결집만으로 이길 수 없다. 특히 지방선거는 중도층, 생활형 유권자, 지역 현안에 민감한 무당층을 설득해야 한다. 정권 견제 구호가 아무리 선명해도 유권자의 밥상과 일자리, 교통과 집값에 대한 답이 약하면 표의 확장성은 막힌다. 장 대표 체제의 국민의힘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 보수 재편, 중도 확장이라는 숙제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그런데 선거 막판까지 당의 얼굴은 새로움보다 분열에 가까웠고, 메시지는 생활보다 이념에 가까웠다. 한동훈 전 대표의 부산 출마 또는 선전 여부가 장 대표 책임론의 또 다른 뇌관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장 대표의 선거 리더십과 한 전 대표의 독자적 경쟁력이 비교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만약 부산 북구갑 선거에서 한 전 대표가 선전하고, 국민의힘 전체 성적표가 기대에 못 미친다면 장 대표의 입지는 급격히 좁아질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이 패배한다면 “누가 당의 간판이었느냐”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여야 대표의 공통된 실패는 선거를 ‘국민의 삶’이 아니라 ‘자기 진영의 생존’으로 끌고 갔다는 점이다. 정청래 대표는 민주당의 압도적 기반을 통합의 장으로 만들지 못했고, 장동혁 대표는 보수의 분노를 중도 확장의 언어로 바꾸지 못했다. 한쪽은 텃밭 분열을 방치했고, 다른 한쪽은 외연 확장에 실패했다. 둘 다 선거를 크게 만들었지만, 정작 지역을 크게 만들지는 못했다. 정치는 말로 시작하지만 결과로 심판받는다. 《논어》에 “군자는 말을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려 한다”는 뜻의 구절이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은 말이 넘친다. 그러나 유권자가 원하는 것은 거친 말의 승리가 아니라 책임 있는 행동의 결과다. 지역을 살리겠다는 정책, 갈등을 줄이겠다는 태도, 상대 진영 유권자까지 설득하겠다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여야 대표는 그 기본을 놓쳤다. 선거가 끝나면 양당은 변명부터 찾을 것이다. 민주당은 ‘무소속 변수’를 말할 것이고, 국민의힘은 ‘불리한 구도’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는 유리한 판에서만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운 판에서 판을 바꾸라고 세운 자리가 당 대표다. 정청래 대표가 전북을 잃거나 신승에 그친다면, 그것은 민주당의 오만과 내분 관리 실패에 대한 경고다. 장동혁 대표가 지방선거에서 패한다면, 그것은 보수가 중도층을 설득할 언어를 잃었다는 판정이다. 이번 지방선거를 망친 책임은 후보들에게만 있지 않다. 정쟁을 키우고 정책을 밀어낸 여야 대표에게 더 크다. 선거가 끝난 뒤 두 대표가 해야 할 일은 남 탓이 아니다. 성적표가 참담하다면 물러나는 것이 책임 정치의 출발이다. 정치는 자리를 지키는 기술이 아니라 책임지는 윤리다. 그 상식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번 지방선거의 진짜 패자는 어느 당 후보가 아니라 한국 정치 전체가 될 것이다.
2026-05-29 16: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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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지방선거 사전투표 시작…후보 자질·정책 잘 따져 주권 행사해야
[경제일보] 6·3 지방선거의 문이 먼저 열린다. 사전투표는 29일과 30일 이틀 동안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된다. 유권자는 주소지와 관계없이 전국 사전투표소 어디에서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투표소에 갈 때는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등 본인 확인이 가능한 신분증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지방선거는 대통령선거보다 덜 뜨겁고, 국회의원 선거보다 덜 주목받는다. 그러나 시민의 삶에는 오히려 더 가까운 선거다. 버스 노선과 배차 간격, 재개발과 재건축, 학교와 돌봄, 골목상권과 지역 일자리, 청년 주거와 노인 복지, 쓰레기 처리와 하천 정비가 모두 지방정부의 손을 거친다.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지방의원과 교육감을 누구로 뽑느냐에 따라 한 도시의 4년이 달라진다. 지방선거를 ‘작은 선거’로 여기는 순간, 우리 일상의 큰 결정권을 남에게 맡기는 셈이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가 가장 먼저 따져야 할 것은 후보의 자질이다. 자질은 말솜씨가 아니다. 선거운동 기간에 얼마나 크게 외쳤는지도 아니다. 공직을 맡을 만한 도덕성, 이해충돌을 피할 수 있는 절제, 예산을 다룰 능력, 주민의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있는 태도, 위기 때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품격이 자질이다. 지방권력은 중앙권력보다 감시의 눈이 느슨해지기 쉽다. 단체장과 지방의회가 한 정당으로 쏠리면 견제 장치도 약해질 수 있다. 그래서 유권자는 후보의 전과, 재산 형성 과정, 병역·납세, 과거 공직 수행 평가, 막말과 혐오 발언 여부까지 차분히 살펴야 한다. 정책은 더 냉정하게 봐야 한다. 선거 때마다 지역마다 ‘철도 신설’ ‘산단 조성’ ‘청년 일자리’ ‘무상 복지’ ‘관광도시 도약’ 같은 말이 쏟아진다. 듣기 좋은 공약일수록 더 물어야 한다.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중앙정부 권한인지 지방정부 권한인지 구분했는가. 이미 추진 중인 사업을 이름만 바꿔 새 공약처럼 내세운 것은 아닌가. 임기 4년 안에 가능한 사업인가. 주민 갈등을 조정할 방안은 있는가. 좋은 공약은 화려한 문장이 아니라 숫자와 일정, 책임 주체가 분명한 약속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책·공약마당에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참여한 정당과 후보자 측이 제출한 정책·공약 자료가 게시돼 있다. 선관위는 선거 진행 중에는 후보자 공약 정보를 제공하고, 선거 종료 뒤에는 당선인 공약 정보를 제공한다고 안내하고 있다. 유권자가 마음만 먹으면 정당의 10대 정책, 후보자별 공약, 지역별 쟁점을 비교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 있는 셈이다. 사전투표는 단순히 ‘미리 하는 투표’가 아니다. 바쁜 직장인, 자영업자, 돌봄 노동자, 출장·이동이 많은 유권자에게 참정권의 문턱을 낮추는 제도다. 선거일 당일 일정이 불확실하다면 사전투표는 주권을 놓치지 않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다만 편리해진 만큼 더 신중해야 한다. 투표소에 들어가기 전 후보 이름과 정당 기호만 볼 것이 아니라, 최소한 내 지역의 핵심 현안과 후보별 해법은 확인해야 한다. 지방선거의 위험은 ‘묻지마 투표’다. 중앙정치에 대한 분노나 호감만으로 지방정부를 선택하면 지역의 구체적 문제는 뒤로 밀린다. 여당을 도와야 한다는 구호도, 야당을 견제해야 한다는 구호도 유권자의 판단 기준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시장과 도지사, 구청장과 군수, 지방의원은 중앙정치의 대리인이 아니라 주민의 생활을 책임질 일꾼이다. 정당을 보되 인물을 함께 보고, 구호를 듣되 실행 능력을 따져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 했다. 정치의 바탕은 신뢰라는 뜻이다. 오늘의 지방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뢰는 선거운동 차량의 확성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신뢰는 후보의 삶, 말과 행동의 일관성, 공약의 실현 가능성,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유권자가 그 신뢰를 검증하지 않으면, 선거 뒤 실망할 권리도 약해진다. 이번 지방선거는 지역의 미래를 정하는 선거다.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도시, 집값과 교통난에 눌린 수도권, 산업전환의 갈림길에 선 제조업 도시, 교육과 돌봄 부담이 커진 모든 지역이 각자의 해법을 기다리고 있다. 이 과제들은 진영의 함성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숫자를 아는 행정,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 미래를 설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29일과 30일 사전투표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워도, 한 표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민주주의는 거창한 연설보다 평범한 시민의 기표에서 완성된다. 후보의 자질을 따지고,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살피고, 내 지역의 4년을 누구에게 맡길지 숙고해야 한다. 투표는 권리이자 책임이다. 사전투표의 시작은 유권자에게 묻고 있다. 당신의 도시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그 답은 정당도, 여론조사도, 선거 구호도 대신해줄 수 없다. 오직 시민의 한 표만이 답할 수 있다.
2026-05-29 10: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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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8000시대…이제 다음을 준비하자
[경제일보] 코스피 8000시대가 열렸다. 숫자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시장의 공기는 달라졌다. 5000선 돌파 때는 기대가 앞섰고, 6000선에서는 의심과 환호가 엇갈렸다. 7000선을 지나 8000선을 넘자 이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어디까지 오를 것인가’가 아니라 ‘이 상승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가 2026년 5월 26일 종가 기준 사상 처음 8000선을 돌파했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55% 오른 8047.51에 마감했고, 삼성전자는 2.22%, SK하이닉스는 5.72% 상승했다. 다음 날에도 반도체 대형주는 신고가 행진을 이어갔다. 5월 27일 SK하이닉스가 처음으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넘어섰고, 한국 코스피가 올해 들어 세계 주요 지수 가운데 가장 강한 흐름을 보였다. 이번 랠리의 주역은 단연 반도체다. 인공지능 서버, 고대역폭메모리,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다시 한국 증시의 심장부로 밀어 올렸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수출 엔진이고, 기술 주권의 방파제이며, 자본시장의 가장 강력한 실적 근거다. 주가가 오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과거 유동성 장세와 달리 이번 상승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익 전망 상향과 산업 슈퍼사이클이라는 실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시장은 언제나 축포 소리 속에서 다음 위험을 키운다. 로이터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코스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육박하고, 기술주가 향후 이익 전망의 대부분을 떠받치는 구조가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한 달간 코스피 상장사의 17%만 주가가 올랐고, 반도체 ‘투톱’ 쏠림이 뚜렷하다. 지수는 8000인데, 체감 수익률은 투자자마다 크게 다르다. 이것이 8000시대의 첫 번째 역설이다. 코스피 8000은 끝이 아니라 시험대다. 시장이 한 단계 더 성숙하려면 주가 상승을 제도 상승으로 연결해야 한다. 주주친화 정책은 선택이 아니라 자본시장 신뢰의 기본 조건이다.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이 지배주주의 지배력 강화에만 쓰이고 일반주주는 의사결정의 주변부에 머문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이름만 바꿔 다시 돌아온다. 주가가 올랐다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주가 상승은 개혁을 미룰 이유가 아니라 개혁을 완성할 기회다. 그런 점에서 상법 개정과 자본시장 개혁은 더 속도를 내야 한다. 이미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집중투표제 확대, 감사위원 분리선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은 시장의 기대를 키운 핵심 재료였다. 한국의 개정 상법이 새로 취득한 자사주를 일정 기간 내 소각하도록 해 자사주가 지배력 방어 수단으로 활용돼 온 관행을 겨냥했다. 다만 제도는 법전에 적힌 문구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실질적 주주환원으로 이어지는지, 물적분할과 중복상장 과정에서 기존 주주의 이익이 보호되는지, 국민연금과 기관투자자가 수탁자 책임을 제대로 행사하는지, 불공정거래에 대한 처벌이 시장의 공포가 될 만큼 강한지까지 봐야 한다. 자본시장 개혁은 지수를 올리는 이벤트가 아니라 시장의 습관을 바꾸는 일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수익의 다각화다. 반도체가 한국 증시의 앞문을 열었다면, 다음 방은 전력기기, 원전, 조선, 방산, 자동차, 로봇, 바이오, 금융, 콘텐츠, 인프라 기업들이 채워야 한다. AI 시대의 반도체 수요는 전력망과 냉각장치, 데이터센터, 소재·부품·장비, 보안, 클라우드 서비스로 이어진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반도체 주가만의 축제로 끝낼 것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 전체의 투자 기회로 넓혀야 한다. 금융권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은행 예금과 부동산에 갇혀 있던 가계 자산을 생산적 자본으로 이동시키려면 장기투자 상품, 배당형 상품, 연금계좌, ISA, 퇴직연금의 질을 높여야 한다. 개인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기 급등주를 따라붙는 통로가 아니라 산업 성장의 열매를 장기적으로 나눠 갖는 구조다. 레버리지 ETF와 신용융자가 시장의 불쏘시개가 될 수는 있어도, 국민 자산 형성의 기둥이 될 수는 없다. 특히 빚투의 확산은 경계해야 한다. 최근 한국 증시 랠리가 개인투자자의 신용거래와 레버리지 상품으로 더 가팔라지고 있으며, 증거금 부채가 크게 늘었다. 거래대금이 늘고 계좌가 불어나는 것은 시장의 활력이다. 그러나 빚으로 산 주식은 작은 조정에도 큰 손실을 만든다. 상승장에서는 모두가 용감해 보이지만, 하락장에서는 레버리지가 먼저 무너진다. 정부도 시장의 환호에 취해선 안 된다. 세제 혜택, 배당소득 과세 정비, 장기투자 유인, 불공정거래 근절, 공시 투명성 강화는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특정 지수 목표를 앞세워 시장을 관리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시장은 방향을 제시받을 수는 있어도 끌려가서는 안 된다. 자본시장 선진화의 핵심은 정부의 손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선명해지고, 기업과 투자자가 그 규칙을 신뢰하는 데 있다. 기업도 달라져야 한다. 주주환원은 주가가 오를 때만 내놓는 시혜가 아니라 자본 조달의 대가다. 배당을 늘리고, 불필요한 자사주는 소각하며, 자본비용보다 낮은 수익률의 투자는 과감히 접어야 한다. 총수 일가의 지배권 방어보다 기업가치 제고가 우선이라는 원칙이 자리 잡아야 한다. 8000시대의 기업은 더 이상 ‘한국 시장이라서 이 정도면 된다’고 말할 수 없다. 글로벌 자금은 한국 기업을 삼성전자·SK하이닉스만으로 보지 않는다. 이사회, 공시, 배당, 승계, 소수주주 보호까지 함께 본다. 고전은 늘 흥분한 시대에 차가운 생명수 역할을 한다. <맹자>에는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다. 번영의 순간에 위험을 생각하는 나라와 기업은 오래 간다. 반대로 좋은 시절이 계속될 것이라 믿는 순간, 시장은 가장 비싼 수업료를 요구한다. 코스피 8000시대에 필요한 태도는 도취가 아니라 절제다. 비관이 아니라 준비다. 한국 증시는 오랫동안 저평가의 늪에 갇혀 있었다. 기업은 돈을 벌어도 주주는 소외됐고, 지배구조는 복잡했으며, 불공정거래 처벌은 약하다는 불신이 컸다. 이제 그 늪에서 빠져나올 기회가 왔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문을 열었고, 자본시장 개혁은 그 문을 닫히지 않게 만드는 경첩이다. 문이 열렸다고 집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코스피 8000은 한국 경제에 주어진 상장이 아니다. 숙제장이다. 첫 줄에는 반도체 경쟁력을 더 키우라고 적혀 있다. 둘째 줄에는 주주친화 정책을 되돌리지 말라고 적혀 있다. 셋째 줄에는 특정 업종 쏠림을 넘어 산업과 수익의 지평을 넓히라고 적혀 있다. 넷째 줄에는 개인투자자의 열기를 장기 자산 형성의 문화로 바꾸라고 적혀 있다. 지금 필요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코스피 8000을 자축하되 8000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음 단계의 한국 자본시장은 더 높은 지수가 아니라 더 깊은 신뢰로 증명돼야 한다. 반도체가 끌어올린 시장을 제도가 떠받치고, 주주가 믿는 기업이 자금을 끌어오며, 국민의 자산이 생산적 투자로 흐를 때 비로소 코스피 8000은 일시적 기록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새 출발선이 될 것이다.
2026-05-28 1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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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된 전직 대통령까지 나선 보수, 표 결집할까
[경제일보] 6·3 지방선거 막판, 보수 진영의 선거판에 뜻밖의 장면이 등장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구 칠성시장에 이어 충청권까지 발걸음을 넓히며 국민의힘 후보 지원에 나섰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3일 추경호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와 대구 칠성시장을 찾은 데 이어 25일 충북 옥천의 육영수 여사 생가와 대전, 충남 공주 산성시장 등을 방문했다. 이후 PK(부산·경남)와 강원 방문도 예고된 상태다. 박 전 대통령은 보수 정치의 상징적 인물인 동시에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다. 한때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보수의 영광과 상처를 함께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지방선거 접전지에 직접 등장했다는 것은 국민의힘이 이번 선거를 단순한 지방권력 경쟁이 아니라 보수 생존의 총력전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선거 초반 분위기는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 우세였다. 이재명 정부 출범 1년 평가론과 여당 프리미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 진영의 수세가 겹치며 민주당 압승론까지 거론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판세는 단순하지 않게 변했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 흐름은 서울과 영남권, 충청권 등에서 경합지가 늘고 있다. 초반 ‘여당 독주’ 구도가 막판 ‘혼전’ 구도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 전 대통령의 등장은 이 흐름 위에 얹힌 정치적 촉매다. 그는 긴 연설을 하지 않아도 보수 핵심 지지층에게 강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인물이다. 특히 대구·경북, 충청 일부 지역에서 박 전 대통령의 존재감은 아직 작지 않다. ‘정권을 빼앗겼다’는 위기감, ‘보수가 더 밀리면 안 된다’는 방어 심리, ‘그래도 우리가 남이냐”는 보수정서가 그의 방문을 계기로 다시 결집할 수 있다. 국민의힘 입장에선 절박한 선택이다. 선거 막판 승부는 중도 확장과 지지층 결집의 균형에서 갈린다. 여당이 압승 분위기에 취해 투표율 관리에 실패하면 보수 결집은 실제 의석과 지방권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사전투표가 5월 29~30일 진행되고, 5월 28일부터는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된다. 박 전 대통령의 순회 일정이 바로 그 직전 집중되는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박근혜 카드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다. 탄핵의 기억은 아직 한국 정치의 현재형이다. 보수 내부 결집에는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중도층과 청년층에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국민의힘이 미래 비전보다 과거 상징에 기대는 정당으로 비친다면 박 전 대통령의 등장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름이 모든 선거에서 통하는 주문은 아니다. 정치는 기억의 싸움이자 미래의 경쟁이다. 박 전 대통령을 불러낸 보수의 선택은 과거 지지층을 깨우는 데는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선거는 결국 주민의 삶을 묻는 선거다. 교통, 주거, 일자리, 지방재정, 산업전환, 돌봄의 해법을 내놓지 못한 채 상징 정치만 앞세우면 유권자는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민주당도 안심할 처지가 아니다. 상대가 탄핵된 전직 대통령까지 앞세웠다고 해서 도덕적 우위만 강조하는 선거로는 부족하다. 여당은 지방권력을 맡길 만한 정책 능력과 책임 있는 재정 구상을 보여줘야 한다. 민심은 여당의 오만에도, 야당의 회귀 본능에도 냉정하다. 박 전 대통령의 지원유세는 보수층 결집의 강도를 높일 것이다. 접전지에서는 몇 퍼센트포인트의 투표율 차이가 승패를 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제한적이고 양면적이다. 보수 핵심층을 깨우는 동시에 탄핵의 기억도 함께 깨운다. 국민의힘이 이 장면을 승부수로 삼으려면 박근혜라는 이름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왜 지금 자신들이 지방권력을 맡아야 하는지 정책으로 답해야 한다. 이번 선거의 본질은 과거의 귀환이 아니다. 지방의 미래를 누가 더 책임 있게 설계할 수 있느냐다. 탄핵된 전직 대통령까지 유세장에 나선 장면은 보수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절박함만으로는 선거를 이길 수 없다. 결집은 시작일 뿐이다. 승패를 가르는 마지막 질문은 여전히 유권자의 삶이다.
2026-05-26 11: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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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당한 국민통합위원장의 고언에 귀 기울여야
[경제일보]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이석연 위원장이 청와대 행정관으로부터 경고성 이메일을 받았다며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했다. 국정과제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대통령 보고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중대한 사안임을 엄중히 고지한다”는 표현이 쓰였다는 것이다. 대통령 직속 부총리급 위원장에게 실무 행정관이 이런 문구를 보낸 것은 공직사회 상식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대통령실은 경위를 신속히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물론 대통령 보고와 국정과제 자료 제출은 중요하다. 그러나 행정에도 절차와 품격이 있다. 이 위원장은 최근 국민통합위와 본인의 행보에 불필요하게 관여하고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 반복됐다고 주장했다. 행정관 개인의 과잉인지, 윗선의 기류가 반영된 것인지는 확인돼야 한다. 다만 사실이라면 출범 1년을 앞둔 이재명 정부의 공직 기강과 참모 문화에 경고등이 켜진 셈이다. 이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에서 법제처장을 지낸 보수 성향 인사다. 그럼에도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재명 후보 진영에 합류했고, 현 정부 출범 이후 국민통합위원장을 맡았다. 이는 이재명 정부가 ‘내 편만의 정부’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목소리까지 듣겠다는 상징적 인사였다. 국민통합은 비슷한 사람끼리 악수하는 행사가 아니다. 불편한 사람의 말을 제도 안으로 들이는 일이다. 그런 이 위원장이 여권의 정책 추진 방식에 쓴소리를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법 왜곡죄와 사법개혁 3법 추진 방식에 대해 위헌 소지와 숙의 부족을 지적했다. 최근 대통령 자문회의·위원회 간담회에서도 “집단사고의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토론과 반대 의견 개진 없이 내려진 결정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귀에 거슬릴 수 있지만 정권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말이다. 어느 정부든 지지율이 높고 선거 승리가 예상될 때 가장 위험하다. 국정 동력은 강해지지만 내부 견제는 약해진다. 참모들은 대통령의 생각을 앞질러 읽고, 관료들은 반론보다 순응을 택한다. 여당은 속도를 미덕으로 삼고, 반대 의견은 개혁의 발목 잡기로 몰기 쉽다. 그러나 숙의 없는 속도는 개혁이 아니라 독주가 될 수 있다. 국민통합위원회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대통령이 놓칠 수 있는 민심, 여당이 외면하는 반론, 관료사회가 말하지 못하는 위험을 전달해야 한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반복하는 기관이라면 국민통합위원회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통합의 본질은 동원과 일사불란이 아니라 조정과 경청이다. 이재명 정부가 성공하려면 보수 인사를 장식품처럼 써서는 안 된다. 통합의 상징으로 영입했다가 막상 불편한 말을 하면 거리를 두는 방식은 곤란하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사람은 박수치는 참모만이 아니다. 대통령의 판단이 빗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이번 이메일 논란은 단순한 말투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실이 자문기구를 협력 파트너가 아니라 하급 집행기관처럼 여기는 문화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공직사회에서 절차와 예우는 행정 질서를 지탱하는 기본이다. 그것이 무너지면 권한은 쉽게 오만으로 흐른다. <논어>에는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는 말이 있다. 군자는 서로 다르더라도 조화를 이루지만, 소인은 겉으로 같아 보여도 속으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통합은 모두가 같은 말을 하는 상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의 규칙 안에서 조화를 찾는 과정이다. 대통령실은 이메일 작성 경위와 지시 라인, 국민통합위와의 소통 과정에 부당한 압박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단순한 문구 실수라면 사과와 재발 방지로 바로잡아야 하고, 윗선의 의중이 반영됐다면 더 엄중한 조치가 필요하다. 자문기구의 독립성과 직언 기능도 보장해야 한다. 국민통합은 선거 때 필요한 수사가 아니다. 나라를 운영할 때는 지지층의 열광보다 반대편의 우려를 듣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이석연 위원장의 고언은 여권에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통합의 출발점이다. 이재명 정부가 진정으로 국민 모두의 정부가 되려 한다면 지금 귀 기울여야 할 말은 칭찬이 아니라 경고다.
2026-05-22 09: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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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노사 성과금 갈등,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
[경제일보] 삼성전자 노사 갈등이 가까스로 파국을 피했다. 총파업 예고를 하루 앞둔 지난 20일 노사가 2026년 임금협상 잠정 합의안을 도출하면서 반도체 생산 차질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단 멈춰 섰다. 다만 오는 22∼27일 이 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투표라는 절차가 남아 있는 만큼 이를 완전한 종결로 단정하기는 이르다. 이번 잠정 합의는 정부의 적극적 중재 속에 이뤄졌고, 투표가 가결되면 협상이 공식 타결된다. 문제는 합의 그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균열이다. 삼성전자 노사 갈등의 핵심은 성과급이었다. 노조는 성과급 산정 기준과 배분 방식의 제도화를 요구했고 회사는 경영환경과 사업부별 실적, 글로벌 경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돌아왔고, 인공지능(AI) 열풍이 삼성전자의 실적을 밀어올린 것은 사실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매출 133조9000억원, 영업이익 57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반도체(DS)부문은 AI 고부가 제품 판매 확대와 메모리 가격 상승으로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냈고 HBM4와 차세대 저전력 메모리 모듈 양산도 시작했다. 그러나 좋은 실적이 곧 무제한의 성과급 요구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성과는 나눠야 한다. 하지만 성과 배분은 기업의 미래 투자, 주주 책임, 협력사 생태계, 국가경제에서의 역할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삼성전자는 한 기업이지만 동시에 한국 제조업과 수출, 고용, 자본시장 신뢰를 떠받치는 핵심 축이다. 반도체 라인이 멈추면 한 회사의 손익계산서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소재·부품·장비 기업, 물류, 전력, 협력업체, 지역경제, 금융시장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 노사 갈등은 일반적인 임단협 갈등과 차원이 다르다. 삼성전자 구성원들이 더 나은 보상과 투명한 성과급 기준을 요구할 권리는 당연하다. 고성과를 낸 조직이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문제는 요구의 수준과 방식이다. 성과급이 경영 성과와 연동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기업의 중장기 투자 여력과 위기 대응 능력을 훼손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도체 산업은 오늘 벌어 내일 나누는 장사가 아니다. 수십조 원의 선행 투자가 필요하고 기술 세대가 바뀔 때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더 우려되는 것은 노노 갈등이다. 성과급 갈등은 같은 회사 안에서도 사업부별 이해관계를 가른다. 반도체 부문이 초과 성과를 냈다고 해서 전사 구성원이 같은 방식으로 나눠야 하는지, 사업부별 기여도와 위험 부담을 어떻게 반영할지, 장기 투자에 필요한 내부 유보를 어느 정도 인정할지에 대한 논쟁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 논쟁이 공동체의 원칙을 세우는 방향이 아니라 ‘누가 더 가져갈 것인가’의 다툼으로 흐르면 조직 내부 신뢰가 무너진다. 기업의 경쟁력은 기술과 설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구성원 간 신뢰, 경영진에 대한 신뢰, 성과 배분의 예측 가능성이 함께 있어야 한다. 삼성전자의 갈등은 다른 대기업 노사관계에도 파장을 주고 있다. 카카오 노조는 카카오 본사를 포함한 5개 법인에서 파업 찬반 투표가 모두 가결됐다고 밝혔다. 카카오 노조는 경영 쇄신, 책임 경영, 고용 안정, 공정한 성과 보상과 이익 분배 등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성과급 배분 구조가 갈등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카카오 본사가 실제 파업에 나서면 창사 이래 첫 본사 파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상징성이 작지 않다. 노사 갈등의 확산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불안과 맞물려 더 무겁다. 지금 한국경제는 겉으로는 반도체 훈풍을 타고 있지만 속으로는 성장 체력이 빠르게 약해지고 있다. IMF는 올해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1.9%로 전망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100대 지표에서도 2026년 1분기 경제성장률은 1.7%로 제시돼 있다. 단기 경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는 노동공급과 내수 기반을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는 2025년 합계출산율을 0.80명, 출생아 수를 25만4500명으로 집계했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2025년 20.3%에서 2072년 47.7%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외 리스크도 크다. IMF는 2026년 세계경제가 중동전쟁의 충격 속에서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고 진단했다. 제한적 충돌을 가정해도 세계 성장률은 2026년 3.1%, 2027년 3.2%로 둔화될 것으로 봤고 원자재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 기대, 금융 여건 긴축이 세계경제의 회복력을 시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미국의 관세정책과 공급망 재편, 기술 패권 경쟁이 겹치면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제조기업은 비용과 시장 양쪽에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역시 하반기 전망에서 글로벌 관세와 지정학적 불확실성 등 다양한 리스크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 내부의 성과 배분 갈등이 장기화하면 국가경제의 부담은 커진다. 한국경제는 지금 새로운 성장동력을 충분히 발굴하지 못한 채 반도체 의존도를 다시 키우고 있다. AI 반도체 호황은 분명한 기회지만 이것이 영구적 안전판은 아니다. 메모리 가격은 사이클을 탄다. HBM 경쟁은 기술과 수율, 고객 인증에서 매 분기 승부가 갈린다. 중국의 추격, 미국의 규제, 대만의 파운드리 우위, 일본의 소재·장비 부활까지 감안하면 한국 반도체 산업은 호황기일수록 더 냉정해야 한다. 노조도 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노동의 몫을 키우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훼손하는 요구는 결국 노동의 기반도 약하게 만든다. 성과급은 권리의 언어만으로 풀 수 없다. 책임의 언어가 함께 있어야 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고성과를 낸 직원들에게 ‘어렵다’는 말만 반복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성과급 산정 기준을 더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업부별 성과와 전사 기여를 어떻게 반영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불투명한 보상 체계는 언제든 불신을 낳고, 불신은 파업보다 더 오래가는 비용을 만든다. 노조와 회사가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 노동은 노동의 권리를 말하고, 경영은 경영의 책임을 말해야 한다. 다만 그 다름이 기업의 존속과 국가경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충돌로 가서는 안 된다. 삼성전자 노사 합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성과급 제도의 투명성, 사업부별 기여도 반영, 장기 투자 재원 확보, 위기 시 고통 분담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 성과가 클수록 배분의 원칙은 더 정교해야 한다. 호황일수록 미래 투자와 위험 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국경제는 지금 운 좋게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길목에 서 있다. 그러나 저출산, 잠재성장률 하락, 내수 부진, 대외 불확실성이라는 구조적 문제는 그대로다. 삼성전자 노사 갈등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지금의 성과를 오늘 모두 나눌 것인가, 아니면 내일의 경쟁력을 위해 원칙 있게 나눌 것인가. 성과 배분은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경제의 기둥을 흔드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삼성전자 노사는 이번 합의를 계기로 ‘더 많이 가져가는 협상’이 아니라 ‘더 오래 살아남는 협상’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삼성전자에도, 노동자에게도, 한국경제에도 이롭다.
2026-05-21 09: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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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민주주의 흔들…전과 이력에 무투표 당선까지
[경제일보] 지방선거는 민주주의의 말단이 아니라 뿌리다. 대통령 선거가 국가의 방향을 묻는다면, 지방선거는 주민의 삶을 묻는다. 중앙정치의 거창한 구호보다 시민의 하루에 더 가까운 선거가 지방선거다. 그런데 6·3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이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정책 경쟁은 뒤로 밀리고 정쟁과 네거티브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후보자의 지역 비전보다 중앙당의 심판론과 진영 구호가 더 크게 들린다. 일부 지역에서는 공천 갈등과 흠집 내기가 선거 초반부터 정책 논의를 밀어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정쟁만이 아니다. 후보자의 전과 이력, 무투표 당선 증가, 낮은 경쟁률이 겹치면서 지방선거 직선제 자체에 대한 회의론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직선제를 흔들자는 말은 위험하다. 선거의 문제가 있다고 해서 선거를 줄이는 것은 민주주의의 치료가 아니라 후퇴다. 그러나 지금의 지방선거가 주민에게 충분한 선택권과 검증권을 보장하고 있는지는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후보 등록 결과, 총 2349개 선거구에 7829명이 등록해 평균 경쟁률은 1.8대 1에 그쳤다. 지방선거 무투표 선거구는 307곳, 무투표 당선 대상자는 513명으로 알려졌다. 기초단체장 3명과 지방의원 510명이 사실상 투표 없이 당선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적지 않은 지역에서 유권자의 선택지가 사라진 셈이다. 무투표 당선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제도다. 후보자가 선출 정수와 같거나 그보다 적으면 투표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다. 행정 비용을 아낀다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비용은 회계장부로만 계산할 수 없다. 선거는 단순히 당선자를 정하는 절차가 아니다. 후보가 주민 앞에 나와 공약을 설명하고, 상대 후보와 토론하며, 지역 언론과 시민사회의 검증을 받는 과정 전체가 민주주의다. 무투표 당선이 늘어난다는 것은 이 검증 과정이 통째로 생략되는 지역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특정 지역의 예외가 아니라 구조적 현상으로 굳어질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다. 지역 정치가 특정 정당의 텃밭으로 고착되면 공천이 곧 당선이 된다. 유권자는 본선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정당 내부 공천 결과를 사후 승인하는 위치로 밀려난다. 이 경우 지방자치는 주민자치가 아니라 정당자치가 된다. 주민의 눈치를 봐야 할 지방정치가 중앙당과 지역 조직의 눈치를 보게 된다. 후보자 전과 문제도 가볍지 않다. 물론 모든 전과를 같은 잣대로 볼 수는 없다.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 집회 관련 전과처럼 시대적 맥락을 따져야 할 사안도 있다. 오래전 경미한 사건을 이유로 공직 진출 자체를 봉쇄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나 음주운전, 사기, 폭력, 성범죄, 선거범죄 등은 다르다. 공직자는 권한을 위임받는 사람이다. 법을 만드는 사람, 예산을 다루는 사람, 인허가와 감사를 감시하는 사람에게 법 경시의 이력이 반복된다면 유권자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중앙선관위 선거관리통계시스템에 등록된 지방의원 예비후보 6867명 중 2477명, 즉 36.1%가 전과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과가 있는 광역의원 예비후보의 범죄 경력 중 교통 관련 범죄가 50.4%로 가장 많았고, 폭행·상해 등 폭력 범죄, 집시법 위반, 재산 범죄, 선거 범죄 등이 뒤를 이었다. 이 숫자는 유권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정당은 공천 과정에서 무엇을 검증했는가. 지역사회는 후보자의 이력을 충분히 알고 있는가. 후보자는 전과 사실을 단순히 신고 의무로만 처리할 것이 아니라 주민 앞에서 설명했는가. 공직 후보자의 전과 공개는 낙인을 찍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유권자가 판단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장치다. 그렇다면 정당과 후보자는 그 정보가 공보물 한쪽의 작은 글씨로 묻히지 않도록 더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지방선거의 정쟁화도 이 문제를 키운다. 선거가 정책 경쟁으로 흐르면 후보자의 역량, 도덕성, 공약 이행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그러나 선거가 중앙정치의 대리전이 되면 지역 후보는 진영의 깃발 뒤로 숨는다. 유권자도 사람을 보기보다 당을 보게 된다. 그러는 사이 전과 이력은 정당 색깔에 가려지고, 무투표 당선은 지역주의의 그늘 속에서 정상처럼 지나간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지방정부는 이제 단순한 행정기관이 아니다. 지역 산업전략을 짜고, 기업 유치를 설계하고, 도시 인프라와 주거 정책을 집행한다. 인구 감소, 지방 소멸, 청년 유출, 고령화, 산업 전환은 모두 지방정부의 역량과 직결된다. 이런 시대에 지방선거가 정쟁과 무관심 속에 치러진다면 지역경제의 미래도 흔들린다. 유권자가 후보자의 공약을 따져 묻지 못하고, 후보자가 경쟁 없이 의회에 들어가면 예산 감시와 정책 검증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해법은 직선제 축소가 아니다. 오히려 직선제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일이다. 먼저 정당 공천의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 전과 이력이 있는 후보를 무조건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중대 범죄와 반복 범죄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특히 음주운전, 성범죄, 사기, 폭력, 선거범죄 등 공직 윤리와 직접 충돌하는 전과는 정당이 먼저 설명 책임을 져야 한다. 무투표 당선 지역에 대한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 무투표 당선 자체를 모두 금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투표 당선 예정자라도 주민 공개 질의, 정책자료 제출, 지역 언론 토론 또는 설명회 참여를 의무화하는 방안은 검토할 수 있다. 투표가 없더라도 검증까지 없어져서는 안 된다. 특정 정당 독점 지역에서 경쟁이 사라지는 문제를 줄이기 위해 지방의회 선거구와 공천 구조도 손봐야 한다. 유권자도 책임을 나눠야 한다. 후보자의 전과, 재산, 병역, 세금 체납, 공약은 선관위 정보공개 시스템과 공보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방선거는 ‘잘 모르는 사람을 찍는 선거’가 되어선 안 된다. 중앙정치에 대한 호불호만으로 지방 권력을 위임하면 그 피해는 중앙이 아니라 지역이 받는다. 이번 지방선거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지 묻는 시험대다. 정쟁은 선거의 소음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선거의 전부가 돼선 안 된다. 전과 이력은 법적 신고사항일 수 있지만, 그것이 도덕적 검증을 대신할 수는 없다. 무투표 당선은 법적 절차일 수 있지만, 그것이 주민의 선택권 상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무관심한 선거, 경쟁 없는 선거, 검증 없는 공천이 반복될 때 서서히 약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직선제 회의론이 아니라 직선제 정상화다. 주민에게 선택권을 돌려주는 것, 후보에게 설명 책임을 묻는 것, 정당에 공천 책임을 지우는 것. 그것이 풀뿌리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는 출발점이다.
2026-05-20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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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정책 선거, 피해는 시민에게
[경제일보] 6·3 지방선거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유권자는 지역의 향후 4년을 맡길 시장·도지사·구청장·군수·지방의원·교육감을 골라야 한다. 그런데 정작 선거판에서 시민이 확인해야 할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일자리, 교통, 주거, 교육, 돌봄, 지방재정, 산업전환 같은 의제는 뒤로 밀리고, 상대를 흠집 내는 말싸움과 진영 결집 구호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방선거는 본래 가장 생활에 가까운 선거다. 대통령 선거가 국가의 방향을 묻는 선거라면, 지방선거는 시민의 하루를 묻는 선거다. 출근길 버스 배차 간격을 줄일 사람은 누구인가. 낡은 원도심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아이를 맡길 학교와 돌봄 인프라는 충분한가. 청년이 지역을 떠나지 않고 일할 산업 기반은 있는가. 고령층의 병원 접근성은 어떻게 높일 것인가. 자영업자의 임대료와 골목상권 문제를 누가 풀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지방선거의 본질이다. 정책 경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역별로 교통망 확충, 산업단지 조성, 공항·철도·도청 이전, 지방세 활용 방안 등 크고 작은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문제는 공약의 존재가 아니라 공약의 검증이다.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 것인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한은 어떻게 나뉘는지, 이미 추진 중인 사업과 충돌하지 않는지, 임기 안에 실현 가능한지 따지는 장면이 드물다. 선거가 정쟁으로 흐르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숫자다. 예산 총액, 사업 기간, 지방채 부담, 민간투자 조건, 행정 절차, 법적 근거 같은 숫자와 제도가 뒷전으로 밀린다. 그 빈자리를 구호가 채운다. ‘반드시 해내겠다’, ‘심판해야 한다’, ‘정권을 지켜야 한다’,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만 시민의 삶을 바꾸는 설계도는 아니다. 지역 행정은 열정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도로 하나, 학교 하나, 병원 하나를 세우는 데도 예산과 인허가, 주민 수용성, 장기 운영비가 따라붙는다. 정쟁은 그 복잡한 문제를 한 줄 구호로 단순화한다. 정쟁 선거의 폐해는 분명하다. 첫째, 행정의 우선순위가 뒤틀린다. 후보는 지역의 구조적 문제보다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 쉬운 이슈를 선택한다. 둘째, 공약의 품질이 낮아진다. 재원과 실현 가능성보다 표를 얻기 쉬운 장밋빛 약속이 늘어난다. 셋째, 선거 이후 협치가 어려워진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 선거는 당선 뒤에도 의회와 집행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을 가로막는다. 결국 시민은 더 비싼 행정비용을 치른다. 특히 올해 지방선거는 경제 환경이 녹록지 않은 가운데 치러지고 있다. 고물가의 기억은 아직 생활비 곳곳에 남아 있고,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와 에너지 가격 불안, 미국의 통상정책 변화, 지역 제조업의 산업전환 압박도 크다.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지만,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역 산업 생태계를 어떻게 바꿀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어떻게 지원할지, 청년층의 주거와 일자리를 어떻게 연결할지, 고령화 지역의 의료·돌봄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에 따라 지역의 생존력이 달라진다. 정당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방선거 때마다 중앙당은 지역 일꾼을 말하지만 실제 선거운동은 중앙 정치 구도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여당은 국정 안정론을, 야당은 견제론을 앞세운다. 물론 지방정부도 중앙정부 정책과 예산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중앙 프레임이 지역 의제를 집어삼키는 순간, 지방선거는 시민의 생활 선거가 아니라 정당의 중간평가 이벤트로 전락한다. 후보들도 달라져야 한다. 상대의 약점을 말할 수 있다. 선거는 경쟁이고 검증은 필요하다. 그러나 검증과 네거티브는 다르다. 검증은 공직 수행 능력, 이해충돌, 재정 운용, 정책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일이다. 네거티브는 시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감정의 소모전이다. 후보가 상대를 공격하는 데 쓴 시간만큼, 시민은 자신의 삶을 바꿀 정책을 들을 기회를 잃는다. 언론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말싸움은 기사화하기 쉽고 강한 표현은 제목이 된다. 그러나 지역 유권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공약의 비교표와 재원 검증, 후보의 행정 경험, 기존 사업의 연속성과 수정 가능성에 대한 분석이다. 지방선거 보도는 누가 누구를 비판했는지보다, 그 비판이 사실인지, 대안은 있는지, 비용은 얼마인지까지 물어야 한다. 시민에게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 돈은 어디서 마련하겠다는 것인가’, ‘임기 안에 가능한가’, ‘실패하면 무엇을 조정할 것인가’ 등을 물어야 한다. 정쟁의 소음은 큰 목소리로 번지지만 정책의 힘은 구체적인 질문에서 자란다. 유권자가 구호보다 숫자를 요구할 때 후보는 달라진다. 이번 지방선거의 핵심은 어느 정당이 더 크게 이기느냐만이 아니다. 선거 이후 시민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느냐다. 교통난이 줄고, 빈 상가가 채워지고, 지역 병원이 버티고, 학교가 안정되고, 청년이 떠나지 않는 도시를 만들 수 있느냐가 본질이다. 그 일을 하라고 지방권력을 맡기는 것이다. 정책 선거가 실종되면 피해는 추상적인 국민에게 가지 않는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 학원비를 걱정하는 부모, 매출 부진에 버티는 자영업자, 일자리를 찾아 떠날지 고민하는 청년, 병원까지 한 시간을 가야 하는 노인에게 간다. 정쟁의 비용은 늘 생활인의 지갑과 시간과 기회로 청구된다. 6·3 지방선거는 아직 늦지 않았다. 남은 기간만이라도 여야와 후보들은 중앙정치의 칼날을 거두고 지역의 장부를 펼쳐야 한다. 누가 더 세게 공격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정확히 진단하고, 더 현실적인 해법을 내놓고, 더 책임 있게 실행할 수 있는지를 겨뤄야 한다. 지방선거의 주인은 정당이 아니라 시민이다. 선거판의 언어가 다시 시민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선거가 끝난 뒤에도 지역이 남고, 행정이 남고, 미래가 남는다.
2026-05-19 16: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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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대표의 거친 입이 정책 선거를 가리고 있다
[경제일보] 6·3 지방선거가 22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는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지방의원을 뽑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국 14곳에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도 함께 치러진다. 지방권력과 의회 권력 일부가 동시에 재편되는 선거다. 그만큼 이번 선거의 중심에는 지역의 미래와 주민의 삶이 놓여야 한다. 그러나 선거전은 벌써 본령에서 벗어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선거 지원 전면에 나섰지만, 두 대표의 언어는 정책보다 공세에 가깝다. 주민 생활을 바꿀 공약 경쟁보다 상대 진영을 겨냥한 날 선 말들이 선거판을 덮고 있다. 여야 대표가 정책 선거를 이끄는 조정자가 아니라 정쟁을 키우는 확성기가 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실제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최근 국민의힘 공천을 두고 ‘윤 어게인 공천’이라고 비판하며 국민의힘을 ‘내란 정당’ ‘내란 맞춤형 공천’이라고 몰아붙였다. 또 ‘제2의 내란 공천을 국민들이 심판할 것’이라는 취지로 발언했고, 일부 인사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옥중 공천’이라는 표현도 썼다. 정 대표의 발언 수위가 높아지면서 정책 경쟁 대신 말싸움만 남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국힘 장동혁 대표의 언어도 다르지 않다. 장 대표는 민주당과 이재명 대통령을 겨냥해 ‘범죄단체’ ‘수괴’ 등의 표현을 쓰며 이번 지방선거를 정권 심판의 장으로 규정했다. 또 민주당이 추진하는 이재명 대통령 관련 공소 취소 논란을 두고 범죄 지우기를 막는 선거라며 “주권자의 분노로 심판해야 한다”고 했다. 이 사안을 사법 파괴로 규정하며 지방선거 심판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안보 현안까지 선거 공방의 소재가 되고 있다. HMM 나무호 피격 사건을 두고 국힘은 정부가 책임을 축소하거나 숨기는 것 아니냐며 공세를 폈고, 장 대표는 정부 발표를 비꼬는 발언까지 했다. 이에 민주당 측에서는 국민 안전보다 정치적 공격이 먼저냐며 반발했다. 국힘의 책임론 공세에 민주당은 “전형적 정쟁 몰이”라고 맞서는 모양새다. 물론 선거에서 공방은 불가피하다. 정권과 야당에 대한 평가도 지방선거의 일부다. 그러나 여당 평가만이 전부가 돼선 안된다. 지방선거는 대통령선거도, 총선도 아니다. 주민이 사는 지역의 살림꾼을 뽑는 선거다. 도지사와 시장은 산업단지를 설계하고 교통망을 놓고 병원과 학교와 돌봄 체계를 챙긴다. 군수와 구청장은 쓰레기, 주차, 복지, 안전, 골목상권 문제를 매일 다룬다. 이런 선거가 여야 대표의 거친 말싸움에 묻힌다면 피해자는 결국 주민이다. 이번 선거의 쟁점은 이미 분명하다. 수도권은 집값과 전월세 부담, 교통난, 재건축·재개발 갈등, 청년 주거가 핵심이다. 비수도권은 청년 유출, 산업 기반 약화, 지방대 위기, 필수의료 공백, 생활 인프라 붕괴가 절박하다. 농어촌은 고령화와 인구소멸, 응급의료와 돌봄 공백이 생존의 문제다. 14곳 국회의원 재보선 역시 중앙정치의 전리품이 아니라 지역 대표성을 다시 세우는 선거여야 한다. 민주당은 균형발전과 행정수도, 지방 산업 확산을 말한다. 국힘은 주거 안정과 규제 완화, 감세와 공급 확대를 내세운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상대 당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자기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설명하는 일이다.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 것인지, 지방정부 권한으로 가능한 일은 무엇인지, 중앙정부와 국회 협력이 필요한 과제는 무엇인지, 임기 안에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밝혀야 한다. 구호가 아니라 숫자, 비난이 아니라 일정표가 필요하다. 정청래 대표와 장동혁 대표는 선거판의 공격수가 아니라 책임 있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 지지층을 자극하는 말은 쉽다. 상대 진영의 허물을 들추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말로 지역 병원이 생기지 않고 청년이 돌아오지 않으며 낡은 도심이 살아나지 않는다. 여야 대표가 해야 할 일은 후보들에게 지역 공약을 더 구체화하라고 요구하고 허황된 약속을 걸러내며 주민 앞에서 검증 가능한 정책 경쟁을 만들도록 이끄는 일이다. 유권자도 냉정해야 한다. 분노를 표로 표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누가 우리 지역을 제대로 바꿀 것이냐”다. 우리 동네 교통망은 어떻게 개선되는가. 전월세와 주거비 부담은 어떻게 줄어드는가. 아이를 키울 시설은 충분한가. 응급실과 필수의료는 유지되는가. 청년이 떠나지 않을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런 질문이 유세장의 중심에 서야 한다. 6·3 지방선거와 재보선은 정쟁의 무대가 아니라 생활정치의 시험대다. 여야 대표가 앞장서 선거를 정쟁으로 물들이면 후보들의 정책은 사라지고 주민의 삶도 뒷전으로 밀린다. 거대 양당 대표는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꿔야 한다. 지역의 미래를 말하지 않는 지방선거는 지방선거가 아니다. 여야는 국민을 바라보고 후보들은 주민과 소통하며 남은 22일을 정책 경쟁의 시간으로 되돌려 놓아야 할 것이다.
2026-05-12 09: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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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공장은 선거 현수막 위에 지어지지 않는다
[경제일보] 선거철만 되면 기이한 신기루가 피어오른다. 삽을 뜰 부지도, 흘려보낼 물도, 끌어올 전기도 없는데 현수막 위엔 어느 날 갑자기 ‘삼성 반도체 유치’라는 거창한 활자가 박힌다. 기업의 의사조차 묻지 않은 일방적인 구애이자 선언이다. 말은 깃털처럼 가볍고 공장은 태산처럼 무겁다. 표는 오늘 당장 필요하겠지만, 반도체 팹(Fab)은 10년 뒤의 미래를 내다보고 짓는 국가적 명운이 걸린 유기체다. 최근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 후보들이 다투어 내놓는 반도체 공약은 위험천만하다. 대구와 광주, 전남 등지에서 들려오는 ‘10조원 규모 시설 유치’ 소식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작 현장은 비명에 가깝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용인과 평택을 축으로 수백조원대 투자를 확정하고 초격차를 위한 속도전에 돌입한 상태다. 기업의 경영 논리와 정치의 선거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가 산업을 말하는 것은 마땅한 책무다. 수도권 쏠림과 지역 소멸의 절벽 앞에서 반도체라는 전략 자산을 지역의 미래와 연결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권장돼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의 천박함에 있다. 정치가 기업을 부르는 것과, 기업의 이름을 빌려 표를 구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행위다. 반도체 공장은 축구장 몇 개 넓이의 땅에 콘크리트 건물을 세운다고 돌아가는 단순 시설이 아니다. 전력과 용수, 도로와 폐수 처리, 송전망과 협력사 생태계, 그리고 고도로 훈련된 인재와 교육·의료·주거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인공 도시’다. 팹 하나를 짓는다는 것은 도시의 거대한 혈관계를 새로 이식하는 일과 같다. 하지만 선거판에서는 이 복잡한 산업 생태계가 한 줄의 시원한 구호로 증발해 버린다. “우리 지역에 삼성을 가져오겠다”는 호언장담 뒤에 실질적인 책임은 어디에도 없다. 정부 자료가 증명하는 숫자의 무게를 보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완공되는 2053년까지 필요한 전력은 10GW(기가와트) 이상이다. 하루에 쓰이는 물만 133만 톤에 달한다. 인구 300만 인천시민이 쓰는 물의 양을 반도체 공장 하나가 삼키는 꼴이다. 송전선로 하나를 까는 데만 수조 원의 예산과 주민 설득이라는 고차방정식이 필요하다. 이 엄중한 숫자 앞에서 정치인의 ‘공장 유치’라는 말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10GW의 전력은 말로 끌어올 수 없고, 100만 톤의 물은 현수막 사이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산업정책에는 정교한 지도가 있고, 냉정한 숫자가 있으며, 명확한 비용 분담과 책임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반면, 선거용 공약에는 오직 ‘이름’만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단어인 ‘삼성’,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합해 환상을 팔 뿐이다. 하지만 자본은 애향심이나 표심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고객과 납기, 수율과 원가, 전력의 안정성이라는 차가운 계산기 위에서만 투자의 발길을 옮긴다. 그 계산기에서 숫자 하나만 어긋나도 수십조의 투자는 멈춰 선다. 지방의 절박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수도권의 비대화가 지역의 골목을 비워내고 있는 현실은 뼈아프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기업의 투자 결정을 선거용 땔감으로 쓰는 행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지역 발전을 원한다면 기업의 이름보다 ‘조건’을 먼저 내밀어야 한다. 송전망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용수는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대학은 어떤 인재를 키워낼 것인가. 이 치열한 고민이 빠진 유치는 공약(公約)이 아니라 공염불에 불과하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정명(正名)’을 말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일이 성취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 정치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정명이다. 기업의 독립적 의사결정을 마치 지자체가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이름부터 틀렸다. ‘유치’라고 부르기 전에 ‘조성’이라 해야 하고, ‘공장’을 약속하기 전에 ‘인프라’를 약속해야 한다. ‘삼성’을 외치기 전에 ‘전기’를 말하는 것이 순리다. 정치권의 무책임한 한마디는 기업에겐 치명적인 ‘리스크’가 된다. 외국 투자자들은 투자처가 바뀌느냐고 묻고, 협력사는 짐을 싸야 하느냐며 동요한다. 기업이 사실무근이라 밝히면 정치권과 각을 세우는 꼴이 되고, 침묵하면 거짓 공약을 묵인하는 셈이 된다. 기업 관계자들이 쏟아지는 문의 전화에 본업을 망칠 지경이라는 토로는 결코 엄살이 아니다. 이제 원칙을 세울 때가 됐다. 첫째, 특정 기업명을 적시한 공약은 반드시 사전 협의 여부를 공개해야 한다. 둘째, 대규모 산업 공약에는 전력·용수·재원 계획 등 구체적인 데이터가 첨부돼야 한다. 셋째, 선거관리 기구가 이러한 경제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가전략산업의 위상을 빌린 공약이라면, 그에 걸맞은 무게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부와 정치는 인프라를 닦고 규제를 걷어내는 조력자여야 하며, 기업은 그 토대 위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를 결정하는 주체여야 한다. 이 경계가 허물어질 때 산업정책은 계획경제의 아류가 되고, 선거 공약은 경영에 대한 오만한 월권이 된다. 반도체는 대한민국이 세계와 ‘맞짱’ 뜰 수 있는 마지막 성벽이다. 이 성벽은 정치 구호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다. 엔지니어의 밤샘과 장비의 정밀도,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고독한 결단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결정체다. 그 숭고한 성벽을 선거판의 배경 그림으로 소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무례한 일이다. 정치가 할 일은 삼성을 현수막에 올리는 것이 아니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이 땅에 더 깊고 안전하게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전력과 물, 그리고 사람의 길을 여는 것이다. 반도체 공장은 표밭이 아니라 국가의 심장이다. 선거가 끝나고 후보가 떠나도 송전탑은 서 있어야 하며, 구호가 사라져도 엔지니어는 출근해야 한다. 정치권에 묻는다. 진정 반도체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기업의 이름부터 내려놓고 전력망 도면부터 펼쳐라. 그것이 산업을 대하는 정당한 ‘상식’이다.
2026-05-08 13: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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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에서 탄 것은 배 한 척이 아니다
[경제일보] 지난 4일 저녁, 호르무즈 해협에서 대한민국 선사 HMM이 운항하는 벌크선 ‘나무호’가 폭발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고, 선박은 두바이항으로 예인되며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즉각 이란의 소행이라 단정했고, 우리 외교부는 신중한 태도로 현장 감식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 긴박한 뉴스들 사이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읽어내야 할 것은 범인의 정체나 파공의 크기가 아니다. 그것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아홉 시간이나 떨어진 저 머나먼 이국의 좁은 바다가 사실은 우리 경제의 심장과 실핏줄로 연결된 ‘대동맥’이라는 서늘한 자각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지도 위에서는 인색하게 그어진 한 줄기 가느다란 물길에 불과하다. 하지만 산업의 눈으로 그곳을 투시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곳은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석유화학 원료와 선박 보험료, 해상 운임과 환율, 그리고 우리네 거실의 전기요금과 시장 바구니 물가가 한데 엉켜 지나가는 거대한 에너지의 통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하루 평균 2000만 배럴의 원유가 이곳을 통과한다. 세계 석유 소비량의 5분의 1이 이 좁은 목구멍을 지나며, 그중 80% 이상의 목적지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제조 국가들이다. ‘호르무즈가 기침을 하면 한국 경제는 독감을 앓는다’는 비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제조 강국’이라는 자부심 아래 눈부신 성장을 일궈왔다.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반도체 공장은 평택과 용인에 위용을 자랑하고, 자동차 공장은 울산과 광주에서 쉼 없이 돌아가며, 거대한 조선소들은 거제와 영암의 바다를 메우고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기계 장치들을 돌리는 근원적인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반도체 라인을 움직이는 전기의 연료, 화학 공장의 젖줄인 나프타, 철강 용광로를 달구는 에너지는 모두 저 위태로운 바닷길을 타고 들어온다. 여기서 우리는 뼈아픈 역설을 마주한다. 제조 강국은 필연적으로 ‘수입 강국’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수출품은 화려하게 포장돼 항만을 떠나지만, 한국의 생산 능력은 그보다 훨씬 앞서 항만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원자재의 물결 위에 서 있다. 바닷길이 흔들리면 공장도 흔들린다. HMM 나무호의 화재를 단순히 해운사 한 곳의 불운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약점을 비추는 섬뜩한 조명탄이다. 정부가 이번 사고에 대해 신중을 기하는 것은 타당하다. 안보 위기일수록 국가는 비명보다 사실을 먼저 붙들어야 한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편승해 말을 앞세우면 선박의 화재는 외교적 난제로 번지고, 이는 곧 통상 압력과 에너지 비용 상승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특히 호르무즈 같은 예민한 바다에서는 말 한마디가 보험료가 되고, 그 보험료는 즉시 물류비용과 물가로 전이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해상 리스크를 평소 산업 정책의 본류(Mainstream)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산업 정책을 논할 때 떠올리는 단어들은 대개 세액 공제, 보조금, 규제 완화, 인력 양성 같은 것들이다. 물론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공장이 아무리 훌륭하고 기술이 초격차를 유지한다 한들, 그 공장으로 향하는 항로가 불안하면 모든 공정은 무너진다. 원료는 늦어지고, 에너지는 비싸지며, 제품의 납기는 흔들린다. 진정한 의미의 공급망은 공장 담장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해협과 항만의 안전, 보험 시장의 안정성, 해군력의 투사 범위, 그리고 세련된 외교와 비축 시스템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묶여 있을 때 비로소 안전한 공급망이라 부를 수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경고하듯 호르무즈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에너지 병목’이다. 이 숫자의 무게 앞에서 ‘중동 리스크’라는 말은 너무 가볍다. 이것은 정유사나 해운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와 철강이 한배를 탄 공동체의 운명이다. 손자는 손자병법 첫머리에서 “전쟁은 나라의 큰일이며, 생사와 존망이 달린 길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오늘날의 산업 국가에 있어 바닷길 또한 그와 같다. 항로는 단순한 물류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생산과 물가와 일자리가 흐르는 혈맥이다. 혈맥이 막히면 장기가 괴사하듯, 항로가 흔들리면 민생이 흔들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에너지와 핵심 원자재의 비축 체계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 비축은 평상시에는 불필요한 비용처럼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국가의 생존 시간을 벌어주는 유일한 장치다. 아울러 특정 지역과 항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조달 다변화 전략을 더 치밀하게 짜야 한다. 원가가 조금 더 들더라도 ‘안전한 대안’을 확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가장 저렴한 비용이다. 마지막으로 해운, 보험, 금융, 국방, 외교를 하나로 묶는 ‘범정부 해상 공급망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산업 정책의 범주에 해군력과 해상 보험 정책이 포함돼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권도 이 사건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정쟁의 소재로 삼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선박이 바다에서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 ‘비상시 대체 항로는 준비되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 실질적인 시스템이 없는 구호는 공허할 뿐이다. HMM 나무호의 불은 꺼졌지만, 그 불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여전히 뜨겁게 살아있다. 우리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라는 화려한 성적표를 자랑해왔다. 그러나 제조 강국의 진정한 실력은 공장 안의 효율성만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위기의 바다를 통과해 원료를 들여오고, 거친 파도를 뚫고 제품을 내보내며, 예기치 못한 비용 충격을 견뎌내는 맷집까지가 진짜 산업 경쟁력이다. 호르무즈에서 탄 것은 선박 한 척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온 ‘안전한 바닷길’이라는 안일한 환상도 함께 그을렸다.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업 정책은 공장 부지를 닦고 세금을 깎아주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물과 전기, 사람과 원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오가는 바닷길을 지키는 일, 그것이 바로 국가가 해야 할 산업 정책의 본질이다. 한국 경제의 목줄이 바다에 걸려 있다면, 그 바다를 지키는 일 또한 엄중한 ‘산업의 이름’으로 명명돼야 마땅하다.
2026-05-07 09: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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