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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는 남았는데 시효는 끝났다…기술침해 시계는 누가 맞추나
[경제일보] 기술에는 흔적이 남았지만 형사책임을 물을 시간은 지났다는 판단이 나왔다. 카카오의 음성통화 서비스 ‘보이스톡’에 다른 기업의 비공개 소스코드가 사용된 사실을 확인하고도 경찰이 공소시효 만료 등을 이유로 사건을 불송치한 것이다. 개발자의 손을 떠난 코드가 오랫동안 제품 안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디지털 산업에서 범죄의 종료 시점을 어디로 볼 것인지, 오래된 질문이 새로운 무게로 돌아왔다. 최근 경기남부경찰청은 카카오 법인과 개발자들의 영업비밀 침해 의혹에 대해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통신 솔루션 기업 네이블이 2024년 2월 고소한 사건이다. 경찰은 지난해 5월 카카오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뒤 보이스톡 소스코드를 분석했고, 네이블이 자체 작성한 비공개 코드가 개발에 사용된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코드 사용 사실의 확인이 곧바로 범죄 성립의 확인을 뜻하지는 않는다. 경찰은 초기 개발자들이 담당 부서를 떠난 2013년 무렵과 2014년 5월 1일을 영업비밀 사용행위의 종료 시점으로 봤다. 이를 기준으로 10년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판단이다. 이후 후임 개발자들이 해당 코드의 영업비밀 침해 가능성을 알고도 사용했다는 증거 역시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네이블의 판단은 다르다. 보이스톡이 2024년 10월까지도 해당 소스코드를 사용했으므로 침해행위가 이전에 끝났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지난 9일 이의신청을 제기했고, 사건은 수원지검의 재판단을 받게 됐다. 카카오는 문제의 코드가 영업비밀이 아니며 공개된 오픈소스 등을 이용해 쉽게 작성할 수 있는 유틸리티성 코드라고 반박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카카오의 기술 탈취가 법적으로 확정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경찰의 불송치가 법원의 무죄 판결인 것도 아니다. 검찰의 검토와 향후 절차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여지도 있다. 다만 이번 사건은 특정 기업의 형사책임을 넘어 기술 보호제도의 근본적인 질문을 남긴다. "침해 여부를 확인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기술을, 법은 어떤 시간표로 보호해야 하는가." 소스코드는 공장에서 사라진 설계도와 다르다. 복제해도 원본이 그대로 남는다. 가져간 흔적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고, 코드가 어떤 경로로 다른 제품에 들어갔는지는 외부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수백만 줄의 프로그램 가운데 일부가 사용됐다면 원본과 대상 제품을 확보한 뒤 전문적인 분석을 거쳐야 비로소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그사이 서비스는 개선되고 담당 개발자는 바뀐다. 코드는 다른 모듈과 결합하고 제품은 새로운 버전을 거듭한다. 최초의 작성자와 현재의 운영자가 달라지는 일도 흔하다. 이런 산업의 특성은 공소시효와 만날 때 복잡한 법적 문제를 만든다. 형사소송법 제252조는 공소시효가 범죄행위가 종료한 때부터 진행한다고 규정한다. 이번 사건에서 경찰과 네이블의 판단이 갈리는 지점도 바로 그 종료 시점이다. 초기 개발자가 프로젝트에서 떠났을 때 사용행위가 끝난 것인지, 이후에도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사용이 계속됐는지를 따져야 한다. 코드가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범죄가 계속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후임자가 그 출처를 몰랐다면 고의에 관한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반대로 최초 개발자의 부서 이동만으로 이후 모든 행위가 법적으로 단절됐다고 볼 수 있는지도 구체적인 증거에 따라 검토할 문제다. 디지털 기록의 존속과 범죄행위의 존속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이번 사건에서 검찰이 살펴볼 쟁점 역시 그 경계에 있다. 공소시효 제도 자체를 불필요한 장벽으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증인은 사라진다. 기록의 맥락이 없어지면서 피의자 역시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워진다. 국가가 무기한 형사처벌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도록 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과 방어권을 위한 장치다. 기술 침해가 늦게 발견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건의 시효를 발견 시점부터 계산한다면 반대편 문제가 생긴다. 수십 년 전의 개발행위까지 끝없이 형사책임을 묻는 구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형사처벌의 증거 기준과 방어권을 약화시키는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침해가 은밀할수록 책임을 물을 기회가 줄어드는 결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다. 범죄가 늦게 드러나는 기술의 특성과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가의 처벌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원칙 사이에서 어떤 기준이 적절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공소시효의 길이만큼 중요한 문제가 있다. 증거를 얼마나 빨리, 제대로 확보할 수 있느냐다. 피해를 주장하는 기업이 경쟁사의 소스코드를 직접 열어볼 수는 없다. 내부 자료에 접근하려면 법적 절차와 기술 분석이 필요하다. 작은 기업이라면 전문인력과 소송비용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다. 침해 의혹을 발견한 뒤 핵심 증거를 확보하기까지 시간이 흐르면 기술의 권리관계를 가릴 기회도 좁아진다. 이번 사건에서 경찰은 2024년 고소 이후 압수수색과 코드 분석을 진행했다. 이미 오래된 의혹을 다루는 수사였다는 점은 디지털 증거 확보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기술 보호제도의 실효성을 논할 때 시효 연장과 함께 전문 수사역량, 신속한 증거보전 절차, 코드의 출처와 변경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관리가 거론되는 이유다. 형사책임과 민사책임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부정경쟁방지법 제10조와 제11조는 영업비밀 침해행위에 대한 금지·예방 청구와 손해배상책임을 별도로 규정한다. 형사사건의 불송치가 민사상 책임의 유무를 자동으로 확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민사에서도 영업비밀 해당성과 침해행위, 손해 등의 요건을 입증해야 하며 적용되는 기간 제한도 따로 검토해야 한다. 기술을 지키는 방법이 형벌 하나뿐일 수 없는 까닭이다. 침해가 확인됐다면 사용을 중지시키거나 손해를 회복할 수 있는 절차가 중요하고, 침해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기업과 개발자가 부당한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한비자’ 유도편에는 ‘법불아귀 승불요곡(法不阿貴 繩不撓曲, 법은 귀한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나무에 맞춰 휘지 않는다)’이라는 말이 있다. 기술 분쟁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기업의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판단이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 피해를 주장하는 기업이 작다는 이유로 증거 없이 상대방의 죄를 인정해서도 안 된다. 법이 해야 할 일은 어느 기업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권리관계를 제때,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절차를 제공하는 것이다. 카카오와 네이블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검찰의 재판단이 남아 있고, 코드 사용 사실과 영업비밀 침해죄의 성립 여부 역시 구분해서 살펴봐야 한다. 그 결과와 별개로 우리 산업이 마주한 과제는 선명하다. 기업의 핵심 자산이 물리적인 설비에서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으로 옮겨갈수록 침해의 발견과 증명에는 이전과 다른 어려움이 생긴다. 기술에는 오랜 흔적이 남고 법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다. 그 두 시간의 간극에서 권리 보호와 방어권을 함께 지킬 수 있는지가 이번 사건이 남긴 질문이다. 코드가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하는 일만큼, 그것이 어떤 법적 책임으로 이어지는지 제때 판단할 수 있는 제도가 중요하다. 기술강국의 조건은 기술을 많이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기술의 권리를 둘러싼 분쟁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법적 기반에도 달려 있다.
2026-09-18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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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 광물외교, 악수는 끝났다…이제 광물이 와야 한다
[경제일보] 서울에서 손을 맞잡았다고 광물이 한국 공장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광산에서 원료를 캐내고, 정제시설에서 산업용 소재로 가공한 뒤 국경과 바다를 건너 수요 기업에 공급하기까지는 긴 시간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자원외교가 공동선언보다 어려운 이유다. 한국과 중앙아시아 5개국이 16일 서울에서 첫 다자 정상회의를 열었다.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정상은 이재명 대통령과 ‘서울선언’을 채택하고 핵심광물·에너지 공급망 협력에 뜻을 모았다. 정상회의를 2년마다 개최하고 산업장관 협의체도 신설하기로 했다. 한국의 기술과 중앙아시아의 자원을 연결할 정상급 협의의 틀을 마련한 것이다. 외교적 의미는 분명하다. 자원 확보는 기업의 구매계약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광업권과 투자 인허가, 수출규제와 통관, 도로와 철도 건설에는 자원 보유국 정부의 협조가 필요하다. 정상 간 합의는 민간기업이 넘기 어려운 제도적 장벽을 낮추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번 회의와 연계한 비즈니스 서밋에서도 19건의 협력 양해각서(MOU)가 체결됐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카자흐스탄 국립야금광석연구소는 희소금속 분야의 단계별 공급망 협력모델을 발굴하기로 했다. 별도의 기업 상담회에서는 1400만 달러 규모의 수출계약도 성사됐다. 다만 이 계약은 소비재 등 여러 분야를 포함한다. 핵심광물의 구매량과 인도 시점을 확정한 실적으로 계산할 수는 없다. 협력 문서에 서명하는 것과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광물외교의 실질적인 경제적 성과를 판단하려면 외교적 합의가 어느 단계까지 사업으로 이어졌는지 살펴봐야 한다. 탐사 결과가 투자 결정으로 이어졌는지, 채굴한 원료를 어디에서 정제할 것인지, 한국 기업이 어느 가격에 얼마를 구매하기로 했는지, 실제 납품은 언제 시작되는지가 그 기준이다.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지하자원만으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광산에 자원이 묻혀 있다는 사실과 경제성 있는 광물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부터 다르다. 품위와 매장량을 확인하고 사업성을 검증해야 한다. 채굴권을 확보한 다음에는 전력과 용수, 도로와 철도를 갖춰야 한다. 광석을 캤더라도 산업용으로 가공하지 못하면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생산에 곧바로 사용할 수 없다. 중국의 공급망 지배력이 보여주는 교훈도 이 대목에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글로벌 핵심광물 전망 2026’에 따르면 중국의 2025년 희토류 정제시장 점유율은 약 85%였다. 희토류를 제외한 주요 에너지 광물에서도 세계 최대 정제국의 평균 점유율은 2023년 70%에서 2025년 72%로 높아졌다. 지난해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 강화로 일부 해외 자동차업체가 생산시설 가동률을 낮추거나 일시적으로 공장을 멈춘 사례도 나타났다. 광산을 확보해도 정제를 중국에 의존한다면 공급망의 취약성은 온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원료의 생산국을 다변화하는 것과 최종 산업소재의 공급처를 다변화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광물을 한국에서 정제하는 것이 유일한 답인 것도 아니다. 광물의 종류와 생산 규모, 현지 전력비와 환경규제, 한국 기업의 기술력을 따져 가공시설의 입지를 정해야 한다. 중앙아시아 현지에서 경제성 있게 정제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식도 가능하다. 자원 보유국의 이해관계도 중요하다. 중앙아시아 국가들 역시 원료만 수출하는 경제에서 벗어나 가공산업과 제조업을 육성하려는 수요가 있다. 한국이 광물을 확보하고 현지에는 일자리와 기술, 설비가 남는 협력 구조라면 장기적인 사업 기반을 마련할 여지가 커진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양측이 원료 교역을 넘어 탐사부터 최종 제품 제조까지 이어지는 협력을 강조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여기에 중앙아시아 특유의 물류 문제가 더해진다. 내륙의 광산에서 생산한 광물을 한국으로 들여오려면 여러 나라의 철도와 도로, 통관·환적 체계를 거쳐야 할 수 있다. 광산 개발비뿐 아니라 운송비와 운송 기간, 경유국의 정책 변화까지 공급계약의 경제성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광산 지분을 확보한 기업이 반드시 안정적인 공급처까지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운송로가 막히거나 정제시설이 지연되면 장부상의 자원은 생산현장의 원료가 되지 못한다. 이런 사업을 추진할 때 정부와 기업의 역할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정상외교는 자원 보유국과의 협의 통로를 마련하고 투자·통관·물류와 같은 제도적 문제를 다룰 수 있다. 그러나 매장량과 품위, 정제수율, 생산원가와 판매가격을 검증하는 일은 개별 사업의 경제성 판단에 속한다. 특히 자원사업은 초기 투자비가 크고 회수 기간이 길다. 외교적 합의가 사업의 위험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수요기업의 장기구매 계약이 없는 광산은 생산을 시작하고도 판로를 걱정할 수 있다. 반대로 구매처가 확실해도 정제 기술과 운송 조건이 맞지 않으면 약속한 가격에 납품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번 협력의 진척은 MOU 체결 건수와 함께 탐사, 사업성 검증, 투자 확정, 정제시설 건설, 장기구매 계약, 실제 인도 물량을 구분해 살펴볼 때 확인할 수 있다. ‘순자’ 권학편에는 ‘불적규보 무이치천리(不積蹞步 無以致千里)’라는 구절이 있다. 작은 걸음을 쌓지 않으면 천 리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다. 자원외교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정상회의가 첫걸음이라면 광산 개발과 정제시설, 물류망과 구매계약은 그다음 걸음이다. 어느 하나를 건너뛰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없다. 다음 한·중앙아 정상회의는 2028년 카자흐스탄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번에 마련한 정상급 협력체계의 진척을 살펴볼 자연스러운 시점이기도 하다. 그때는 협력 문서가 몇 건 더 늘었는지만으로는 사업의 진행 상황을 알기 어렵다. 어느 광산에서 탐사가 끝났고, 어떤 기업이 투자를 확정했으며, 정제시설과 물류망은 어디까지 구축됐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구매계약이 체결됐다면 광종과 물량, 공급기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 선적이 이뤄졌다면 성과는 더욱 구체적이다. 이번 정상회의를 두고 공급망 다변화가 이미 완성됐다고 평가하기는 이르다. 반대로 아직 광물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외교적 합의의 의미를 부정할 수도 없다. 장기 자원사업에는 그에 걸맞은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이 달라지는가다. 자원외교의 최종 목적은 광산에 한국 기업의 이름을 새기거나 협약서에 서명을 남기는 데 있지 않다. 한국 산업이 필요할 때 필요한 광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데 있다. 서울에서 맺은 약속은 이제 광산과 정제시설, 철도와 항만에서 구체적인 사업으로 이어질 차례다. 중앙아 광물외교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회담장이 아니라 공급망의 마지막 현장, 한국의 공장이다.
2026-09-17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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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청문회가 또 부동산 검증장 됐다…정책능력은 언제 묻나
[경제일보] 국방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뜨거웠던 것은 북한 핵도 전시작전통제권도 아니었다. 집과 상가였다. 16일 강신철 후보자 청문회에서 야당은 서울 천왕동 철거민 특별공급과 장남의 7억원대 상가 매입, 재산신고 누락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강 후보자는 특별공급은 정상적인 보상이었고 장남 상가를 신고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불찰이라고 답했다. 여야는 이 문제를 놓고 상당한 시간을 공방으로 보냈다. 검증할 사안이다. 고위공직자 후보자가 부동산을 어떤 방법으로 취득했는지, 세금을 제대로 냈는지, 특혜를 받은 것은 없는지, 재산을 빠뜨리지 않고 신고했는지는 따져야 한다. 국방부 장관이라고 예외일 이유도 없다. 다만 청문회는 거기서 끝날 수 없다. 국방부 장관에게 맡길 것은 7억원짜리 상가가 아니라 군과 국방예산이다. 북한 핵·미사일에 어떻게 대응할지, 전작권 전환을 어떻게 볼지, 병력 감소와 초급간부 부족을 어떻게 풀지까지 같은 강도로 물었어야 한다. 하루 전 열린 청문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형일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후보자에게는 17년 동안 보유한 과천 아파트에 실제 거주한 기간이 약 4개월이라는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이소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에게도 서울 홍제동 아파트를 장기간 실제 거주하지 않고 보유한 문제가 따라붙었다. 당사자들의 해명과 여야의 반박이 이어졌고 부동산은 두 청문회의 중심 쟁점이 됐다. 경제부총리라면 부동산 문제를 피해 갈 수 없다. 세금과 주택정책을 다루는 자리인 만큼 후보자의 주택 보유 방식과 정책 사이에 모순이 없는지도 살펴야 한다. 그러면 경제도 그만큼 물어야 한다. 잠재성장률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지, 확장재정과 국가채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기업 투자를 어떻게 살릴 것인지 묻는 것이 경제부총리 청문회다. 중기부 장관에게도 집을 언제 샀는지만 물을 수는 없다. 문을 닫는 자영업자와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중소기업, 벤처 투자 위축에 어떤 해법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홍지선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를 사면서 금융기관과 장모에게 돈을 빌린 과정이 검증 대상에 올랐다. 국토부 장관이라면 자신의 집을 어떻게 사고 보유했는지가 정책 판단과 무관할 수 없다. 그와 함께 서울 집값을 어떻게 안정시킬지, 주택 공급을 어디서 얼마나 늘릴지, 교통과 철도 정책을 어떻게 끌고 갈지도 따져야 한다. 국토부 장관 청문회가 아파트 매입 경위만 묻고 끝난다면 그것도 반쪽짜리 검증이다. 국회는 이미 17년 전 같은 문제를 짚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009년 우리 인사청문회가 후보자의 도덕성과 개인 신상에 관한 질문에 많은 시간을 쓰면서 공직 수행능력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상원 인준청문회와 비교하면서 한국은 후보자의 과거를 살피는 ‘회고적 평가’에 치우친 반면 미국은 정책과 향후 계획을 따지는 ‘전망적 평가’의 비중이 높다고 분석했다. 후보자를 도덕성·정책능력·리더십이라는 세 기준으로 평가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17년 전 국회가 스스로 내놓은 진단이다. 당시 보고서는 의원의 질의 방식도 문제로 들었다. 주어진 발언시간 대부분을 의원이 사용하면서 후보자가 충분히 답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후보자의 답보다 의원의 폭로가 앞서는 청문회가 되기 쉽다는 뜻이다. 정책을 캐묻으려면 의원도 공부해야 한다. 국방장관 후보자에게 군 구조개편을 묻고 답변의 허점을 파고들려면 국방정책을 알아야 한다. 경제부총리 후보자의 성장정책을 검증하려면 숫자와 경제정책을 들여다봐야 한다. 부동산 등기부 한 장에서 시작하는 공방보다 품이 많이 든다. 재산 검증은 당연히 해야 한다. 부동산 투기나 탈세, 위장전입, 특혜, 허위 재산신고가 있다면 끝까지 확인해야 한다. 다만 부동산은 장관을 검증하는 한 항목일 뿐이다. 청문회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집이 몇 채인지, 얼마에 샀는지만 알고 청문회장을 나선다면 국민은 후보자의 재산 상태는 알 수 있어도 그 사람이 장관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장관 한 사람이 움직이는 예산은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에 이르고 수많은 공무원과 산하기관이 그 판단에 따라 움직인다. 국방장관의 판단 하나는 안보와 군의 운용을 바꾸고 경제부총리의 판단 하나는 기업과 가계에 영향을 준다. 중기부 장관의 결정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생존과도 연결된다. 장관 후보자에게 필요한 검증은 과거의 부동산 거래만이 아니라 앞으로 내릴 판단의 수준까지 포함해야 한다. 그런데 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질문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후보자가 몇 채를 가졌는지, 얼마에 샀는지, 몇 달을 살았는지는 청문회가 끝난 뒤에도 또렷하게 남는다. 정작 그 사람이 장관이 되면 무엇을 할지는 잘 남지 않는다. 집을 어떻게 샀는지는 끝까지 캐묻는다. 나라 일을 어떻게 할지는 그만큼 묻지 않는다. 지금 인사청문회의 가장 큰 빈틈은 거기에 있다.
2026-09-17 09: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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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58년 만의 파업, '회사가 버틸 수 있는 합의' 찾아야
[경제일보] 포스코의 ‘58년 무분규’ 기록이 끝났다. 지난 9일 창사 이후 처음으로 생산현장에서 부분파업이 벌어진 데 이어 16일 오전 7시부터는 닷새간 120시간의 2차 부분파업에 들어갔다. 15일 노사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았지만 기본급과 성과보상을 둘러싼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회사는 대체인력을 투입해 현재 생산에는 차질이 없다고 밝혔다. 파업의 역사성이 눈길을 끌지만 더 무거운 질문은 따로 있다. “앞으로도 충분히 벌고, 투자하고, 고용할 수 있는 회사로 남을 것인가.” 지난 교섭에서 노조는 기본급 7.1% 인상과 격려금 600%, 우리사주 50주, 명절상여금 200% 등을 요구했다. 회사는 기본급 2% 인상, 목표달성 격려금 350만원, 지역사랑상품권 50만원 등을 제시했다. 회사 측은 노조 요구안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큰 재무 부담이 생긴다고 주장하고 있고, 노조는 요구안은 협상을 통해 조정할 수 있는데 사측이 부담만 지나치게 부각한다고 맞서고 있다. 임금뿐 아니라 현장 인력과 안전, 근무환경에 대한 불만도 쟁점이다. 노동자가 회사의 성과를 나누자고 요구하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다. 쇳물은 고로가 만들지만 좋은 철강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 포항과 광양제철소를 세계적인 생산기지로 키운 데에는 설비와 기술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현장을 지켜온 숙련 노동자의 몫이 있다. 실적이 좋아졌다면 노동자가 그 과실을 공유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원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올해 2분기 포스코홀딩스의 연결 영업이익은 8190억~8200억원 수준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가량 증가했다. 노동자들이 “회사가 벌었는데 왜 우리의 몫은 작냐”고 묻는 배경을 이해할 만하다. 다만 숫자를 한 꺼풀 벗겨보면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포스코 철강사업 자체의 2분기 영업이익은 2740억원이었다. 전분기보다는 28.6% 늘었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는 46.6% 줄었다. 그룹 전체 이익 증가는 이차전지소재의 흑자전환과 에너지·인프라 사업의 호조가 상당 부분 떠받쳤다. ‘포스코그룹이 돈을 잘 번다’는 말과 ‘국내 철강사업의 체력이 충분하다’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니다. 바깥 환경은 더 거칠다. OECD는 올해 세계 철강산업의 과잉 생산능력이 2025년 6억4000만톤에서 2028년 7억4500만톤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 철강수요 증가율은 2030년까지 연평균 0.9% 정도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중국 철강업체들은 내수 부진 속에서 2025년 사상 최대인 1억3100만톤을 해외시장에 내보냈다. 2020년보다 153% 늘어난 규모다. 싸고 많은 철강이 세계시장으로 쏟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철강은 여기에 탈탄소라는 두 번째 파도를 동시에 넘어야 한다. 포스코는 최근 광양제철소에 국내 최대 규모의 전기로를 완공했고, 포항에는 2028년 준공을 목표로 연산 30만톤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하이렉스(HyREX) 실증설비를 추진하고 있다. 2030년까지 상용화 기술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국내 탄소감축 압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미룰 수 없는 투자다. 결국 지금의 임금협상은 몇 퍼센트를 올릴 것인가만의 싸움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성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와 미래의 경쟁력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를 동시에 협상해야 한다. 여기에는 구분이 필요하다. 좋은 실적으로 생긴 성과는 성과급과 일회성 보상을 통해 노동자와 충분히 나눌 수 있다. 회사가 잘 벌었는데 “산업이 어렵다”는 말만 반복하며 노동자의 몫을 지나치게 줄이는 것 역시 정당하지 않다. 반면 기본급처럼 한번 올라가면 경기가 꺾여도 계속 지급해야 하는 고정비는 다르게 봐야 한다. 철강처럼 경기에 민감한 산업에서 호황기의 이익을 기준으로 고정비를 계속 높이면 불황이 왔을 때 결국 구조조정 압력으로 돌아올 수 있다. 성과는 나누되 고정비는 회사가 불황에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회사도 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 경쟁력이라는 말을 노동자에게 임금 양보를 요구하는 편리한 명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비용 절감이 필요하다면 경영진과 조직부터 효율성을 증명해야 하고, 노동자가 양보한 몫이 정말 탈탄소 설비와 고부가가치 강재, 안전과 자동화에 투자되는지도 보여줘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자에게 산업전환의 비용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전기로와 수소환원제철, AI와 로봇이 확대되면 제철소의 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줄어드는 직무가 생기고 새로운 직무도 나타날 것이다. 회사가 자동화를 추진하면서 노동자에게 고용불안만 남긴다면 기술혁신은 노사 갈등을 키울 뿐이다. 임금협상 테이블에 그래서 직무전환과 재교육, 숙련인력 재배치, 신규기술 교육, 안전투자까지 올라와야 한다. 노조도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기존 직무와 인력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고용안정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장기적으로 일자리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세계 철강업체가 저탄소 생산과 자동화로 원가를 낮추는데 한국 공장만 변화하지 못하면 기업은 국내 생산을 줄이거나 해외 투자를 확대할 수밖에 없다. 지켜야 할 것은 특정 작업 방식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가 계속 존재할 수 있는 회사다. ‘주역’ 계사하전에는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구절이 있다. 상황이 다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길이 열리며, 그래야 오래간다는 의미다. 지금 한국 철강산업에 이보다 잘 맞는 말도 드물다. 중국의 과잉생산과 보호무역, 탈탄소 전환은 과거의 경영 방식과 노사관계로 버티기 어려운 변화를 만들고 있다. 회사만 변할 수도 없고 노동자에게만 변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파업을 ‘노조의 무리한 요구’ 또는 ‘회사의 임금 억제’라는 단순한 구도로 볼 수 없다. 노사 모두 자신들의 계산서에는 근거가 있다. 노동자는 지난 성과와 숙련의 몫을 묻는다. 회사는 철강사업의 수익성과 앞으로 들어갈 막대한 투자비를 걱정한다. 둘 가운데 하나만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누가 더 가져가느냐’의 협상에서 ‘회사를 어떻게 오래 가게 할 것이냐’의 협상으로 테이블을 넓히는 일이다. 기본급은 물가와 생산성, 철강사업의 지속 가능한 수익성을 기준으로 조정하고, 초과이익은 성과급을 통해 더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 대신 노사는 탈탄소·자동화 투자와 연결된 고용·직무전환 계획을 함께 만들 필요가 있다. 경영성과가 좋아지면 노동자의 몫도 커지고, 생산성이 높아지면 그 성과가 다시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회사에도 이익이고 노동자에게도 더 오래가는 안전망이다. 포스코의 58년 무분규가 깨진 것 자체를 실패라고 할 필요는 없다. 노조의 파업권은 법이 보장한 권리이고, 갈등을 드러내는 것 또한 노사관계의 한 과정이다. 진짜 실패는 산업의 구조가 바뀌는데도 노사가 과거 방식의 협상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데 있다. 포스코가 지금 지켜야 할 것은 ‘무분규 58년’이라는 기록이 아니다. 노동자에게는 성과를 공정하게 돌려주고, 회사에는 다음 불황과 산업전환을 견딜 체력을 남기는 합의다. 좋은 임금협상은 어느 한쪽이 많이 얻는 합의가 아니다. 노동자도 버틸 수 있고 회사도 버틸 수 있어 다음 협상 때도 함께 앉을 수 있는 합의다. 창사 58년 만의 첫 파업 뒤 포스코 노사가 찾아야 할 답도 결국 거기에 있다.
2026-09-16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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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이 넘칠 때가 재정의 진짜 시험대다
[경제일보]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기업의 장부를 넘어 나라 곳간까지 바꾸고 있다. 정부가 예상한 내년 국세수입은 584조4000억원. 올해 본예산보다 크게 늘어난다. 법인세와 소득세가 동시에 증가하는 배경에는 AI 반도체 호황이 자리 잡고 있다. 정부는 이 가운데 최근 10년의 내국세 추세를 웃도는 추가 세수 162조3000억원을 떼어 ‘미래대응기금’을 만들겠다고 했다. 숫자가 워낙 크다 보니 먼저 하나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162조3000억원 전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이 직접 낸 세금이라는 뜻은 아니다. 정부가 추세선을 웃도는 전체 내국세 증가분을 계산한 금액이고, 반도체 호황은 그 세수 급증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반도체가 번 세금’이라는 표현이 던지는 질문은 유효하다. 호황기에 갑자기 늘어난 세수는 누구의 돈인가. 지금 살아 있는 국민이 당장 써도 되는 돈인가. 아니면 경기가 꺾인 뒤를 위해 남겨둬야 할 돈인가. 더 멀리 보면 아직 세금을 낼 나이조차 되지 않은 미래세대에게도 일정한 몫이 있는 돈인가. 이형일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13일 국회에 제출한 인사청문회 답변에서 짚은 것도 같은 문제다. 그는 대외 불확실성과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려면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했다. 동시에 국가채무와 의무지출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재정 여력을 떨어뜨리고 잠재성장률과 미래세대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두 말은 모순되지 않는다. 경기가 무너질 때 재정은 과감하게 써야 한다. 민간이 움츠러들고 기업이 투자를 미룰 때 정부까지 지갑을 닫으면 불황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세수가 예상보다 크게 늘어난 호황기에는 일부를 남겨야 한다. 불황에 쓸 수 있는 정부가 되려면 호황기에 다 쓰지 않는 정부여야 한다. 이것이 재정의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대응기금이라는 발상 자체는 평가할 대목이 있다. 정부는 162조3000억원 가운데 45조4000억원을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인재 분야에 쓰고, 12조5000억원으로 신규 국채 발행을 줄일 계획이다. 가장 큰 몫인 104조4000억원은 당장 쓰지 않고 여유자금으로 적립한다. 전체 기금의 64%가량이다. 세수가 더 들어왔다고 한 해에 모두 지출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더구나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AI 붐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메모리 가격이 떨어지고 투자 사이클이 꺾이면 기업이익과 법인세는 빠르게 줄어든다. 세수는 내려가는데 한 번 시작한 복지와 보조금, 기관과 사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재정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일시적인 돈으로 영구적인 지출을 만드는 일이다. 올해만 들어오는 10조원을 근거로 매년 10조원이 필요한 사업을 시작하면 호황이 끝나는 순간 그 차이는 빚이 된다. 세금을 올리거나 다른 지출을 줄이지 않는 한 결국 국채가 빈자리를 메운다. 때문에 미래대응기금의 성패도 ‘얼마를 담았느냐’보다 어떤 돈을 어디까지 쓸 수 있게 하느냐에서 갈릴 것이다. 45조4000억원의 사업지출 가운데 AI와 전략기술, 인재 양성처럼 미래의 생산성을 높이는 투자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 오늘의 반도체 호황에서 나온 세금으로 다음 산업을 만드는 것은 세대 간 이전이라기보다 세대 간 투자에 가깝다. 반면 한번 시작하면 끊기 어려운 경상적 복지와 반복성 지원사업을 초과세수에 기대어 늘리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반도체 가격은 내려가도 법으로 정해진 의무지출은 내려가지 않는다. 반도체 사이클은 꺾여도 정부 사업에는 사이클이 없다. 바로 이 점에서 104조4000억원의 여유자금이 중요하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이 돈은 향후 세수 결손이나 예상하지 못한 재정 수요가 발생할 때 재정을 보강하는 일종의 ‘저수지’ 역할을 하게 된다. 방향은 합리적이지만 정부는 일정한 범위에서 추가경정예산을 거치지 않고 기금운용계획 변경을 통해 대응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들고 있다. 신속성은 커지지만, 100조원이 넘는 자금에 행정부의 재량이 커진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돈을 쌓아두는 것만으로 미래세대의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 꺼낼 수 있는지, 무엇에 쓸 수 있는지, 누가 결정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세수 결손이 어느 정도일 때 사용할 것인지, 경기침체의 기준은 무엇인지, 미래투자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업까지 허용할 것인지 법과 제도로 선을 그어야 한다. 특히 기금의 여유자금이 그때그때 정부가 원하는 사업을 담는 별도 예산처럼 운용돼서는 안 된다. 노르웨이의 경험은 참고할 만하다. 노르웨이는 석유와 가스에서 들어오는 정부 순수입을 정부연기금 글로벌(GPFG)에 넣고 해외에 투자한다. 재정에는 기금의 원금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대신 장기적으로 예상 실질수익률에 해당하는 수준을 기준으로 활용한다. 현재 그 기준은 약 3%다. 핵심은 석유로 갑자기 부자가 된 한 세대가 자원을 모두 소비하지 않고 금융자산으로 바꿔 후대와 나누겠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의 반도체 세수와 노르웨이의 석유 수입을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석유는 땅에서 한 번 꺼내 쓰면 사라지는 국민 자산이고, 반도체 기업의 이익과 세금은 혁신과 생산 활동에서 생긴다. 정부가 기업이 낸 세금을 영구적으로 묶어둘 이유도 없다. 하지만 배울 원칙은 있다. 일시적으로 크게 들어온 돈을 평상시의 소득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 노르웨이는 석유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한국 재정도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기’ 왕제편에는 ‘국무구년지축왈부족(國無九年之蓄曰不足)’이라는 구절이 있다. ‘나라에 아홉 해를 버틸 비축이 없으면 부족한 것’이라는 의미다. 이어 3년을 농사지으면 1년치 식량을 남기고, 9년이면 3년치를 비축해야 한다고 했다. 풍년에 남겨 흉년을 견딘다는 오래된 국가운영의 원칙이다. 2500년 전 곡식창고가 오늘의 재정기금으로 바뀌었을 뿐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의 2027년 예산안은 총지출이 820조9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2.8% 늘어난다. 동시에 정부는 미래대응기금과 국채 발행 축소를 통해 내년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48.3%로 낮추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적극적인 지출과 재정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구상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원칙이 필요하다. 우선 경기순환으로 생긴 초과세수와 경제의 기초체력에서 생긴 구조적 세수를 구분해야 한다. 일시적 초과세수는 상시 지출의 재원으로 잡아서는 안 된다. 또한 초과세수의 사용 순서를 정해야 한다. 미래 성장투자, 재정안정 적립, 국가채무 축소 사이의 기준을 사전에 만들어 정권과 경기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기금에서 돈을 꺼내는 조건도 엄격해야 한다. 불황이나 세수 급감 때는 과감하게 쓰되 단순히 예산을 더 쓰기 위한 우회 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오늘의 호황을 내일의 고정비로 바꾸지 않는 것이다. 반도체 기업이 잘 벌어 세금이 많이 들어온 것은 축하할 일이다. 그 돈으로 AI와 첨단산업을 키우고 청년에게 기회를 만들며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나라 살림은 기업의 분기 실적과 달라야 한다. 기업은 좋은 해에 성과급을 더 줄 수 있다. 국가는 좋은 해의 세수를 보고 수십 년 동안 지급해야 할 약속을 쉽게 늘려서는 안 된다. 앞으로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연금과 의료, 돌봄 지출은 계속 커질 가능성이 높다. 지금 늘어난 돈을 모두 현재의 소비에 써버리면 다음 세대는 호황의 혜택은 누리지 못한 채 그때 만들어진 지출 의무만 넘겨받을 수 있다. 반도체가 벌어준 추가 세수는 현 정부의 돈도, 현 세대만의 돈도 아니다. 호황을 만든 기업과 노동자의 성과에서 나왔지만 국가의 세금이 된 순간 현재와 미래의 국민 모두를 위해 써야 할 자원이 된다. 재정이 돈이 들어올 때보다 그 돈이 사라진 뒤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언젠가 끝난다. 그때도 남아 있어야 할 것은 새로 만든 지출의 청구서가 아니라, 다음 위기를 견딜 재정 여력과 다음 산업을 만들어낼 자산이다. 돈이 많이 들어왔을 때 많이 쓰는 정부보다, 돈이 사라질 때를 준비하는 정부가 더 유능하다. 162조3000억원 미래대응기금의 진짜 이름값도 거기서 판가름 날 것이다.
2026-09-14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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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베 관계, 투자 협력을 넘어 미래를 함께 만들어야
[경제일보] 한국과 베트남 관계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2022년 양국 관계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이후, 이제 양국 협력의 성과를 교역액이나 외국인직접투자(FDI), 관광객 수만으로 평가해서는 부족하다. 숫자 뒤에는 이미 서로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두 사회가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은 35만명을 넘고,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20만명에 이른다. 다문화가정도 약 10만 가구에 달한다. 두 나라는 더 이상 정상 간 회담이나 정부 간 협정으로만 연결된 관계가 아니다. 서로의 가정과 학교, 일터와 지역사회 속에 이미 깊게 자리 잡았다. 수교 30년을 넘어선 지금, 전략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한·베 관계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답은 양해각서(MOU)를 몇 건 더 체결하느냐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미 맺은 합의와 약속을 얼마나 현실의 성과로 만들고, 그것을 양국 국민에게 새로운 부가가치로 돌려줄 수 있느냐다. ◆‘베트남에 투자’에서 ‘베트남과 함께 성장’으로 지난 수십 년간 한·베 경제협력은 비교적 분명한 공식 위에서 움직였다. 한국 기업은 자본과 기술을 들고 베트남에 공장을 세웠고, 베트남은 토지와 노동력, 인프라를 제공했다. 이 모델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베트남에는 산업화와 성장의 동력을 제공했고, 한국 기업에는 생산기지와 시장 확대의 기회를 열었다. 하지만 지금의 베트남은 더 이상 저임금 노동력을 앞세운 생산기지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기술 이전과 연구개발(R&D) 역량 확보, 청정에너지 전환, 글로벌 가치사슬의 상위 단계 진입을 원한다. 최근 양국이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첨단기술 인력 양성 등을 주요 협력 의제로 올리고 있는 것도 이런 변화와 맞닿아 있다. 하나의 가공공장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기술 생태계는 사람을 키우고 기업을 바꾸며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높인다. 현지 인재를 길러내고, 혁신기업을 촉진하며, 지속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제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한국이 베트남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가”가 아니라 “한국과 베트남이 세계시장에 내놓을 어떤 기술과 제품을 함께 만들어낼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AI와 반도체, 협력의 질을 가르는 시험대 AI와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 협력은 한·베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의 질을 가늠하는 시험대다. 베트남은 고급 기술인력의 질을 높이고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려 한다. 한국은 글로벌 첨단산업 경쟁 속에서 기술 인력 부족과 공급망 재편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러나 협력 방식까지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한국이 연구와 설계를 맡고 베트남은 조립과 패키징만 담당하는 구조라면 한계가 분명하다. 베트남 엔지니어가 설계와 연구, 소프트웨어, 데이터 분석 등 지식집약적 가치사슬에 단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협력은 ‘첨단기술 하청’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진정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면 한국은 베트남을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라 공동 R&D 거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 역시 기술을 받아들이고 함께 혁신할 수 있도록 제도와 인프라, 교육과 인재 기반을 준비해야 한다. 협력의 평등성은 선언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치사슬의 어느 단계까지 함께 들어가느냐에서 드러난다. ◆ODA와 지방협력도 ‘규모’보다 ‘실질’ 양국 지방정부 간 직접 협력이 확대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인프라와 물류, 스마트시티, 첨단농업 등 협력 분야도 넓어지고 있다. 다만 이런 확대일수록 현실적이고 냉정한 접근이 필요하다. 공적개발원조(ODA)나 지방정부 차원의 민관협력(PPP) 사업은 투입된 자금의 규모나 시설의 첨단성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지역 주민이 실제로 접근할 수 있는지,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 삶의 질 개선으로 연결되는지를 봐야 한다. 국제수준의 병원이나 학교도 현지 주민이 이용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가치는 제한적이다. 따라서 지역개발 협력은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지역에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한 뒤 금융과 기술을 붙여야 한다. 순서가 바뀌면 협력은 성과보다 외형을 좇게 된다. ◆민간외교, 제도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한·베 관계에는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사회의 실제 움직임이 공식 외교보다 빠르다는 점이다.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베트남 노동자,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베트남 학생, 다문화가정의 구성원,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중소기업과 현지 협력업체 관계자들이 이미 양국을 잇는 ‘현장 외교관’ 역할을 하고 있다. 판 아인 선 베트남우호친선단체연합(VUFO) 회장의 문제의식도 이와 맞닿아 있다. 민간교류가 단순한 문화행사와 친선방문을 넘어 경제·사회적 가치를 함께 만들어내는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외교는 길을 열고 제도를 만든다. 그러나 그 길을 실제로 움직이는 주체는 기업과 대학, 지방정부와 시민이다. 정부 간 합의가 아무리 많아도 기업이 움직이지 않고 연구자가 연결되지 않으며 지역사회가 체감하지 못하면 관계는 오래가기 어렵다. 반대로 민간의 교류와 신뢰가 쌓이면 제도는 그것을 따라 움직인다. ◆다음 30년의 설계자는 청년 세대 앞으로 한·베 관계의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낼 주체는 양국의 젊은 세대다. 수많은 유학생과 엔지니어, 기자, 청년 기업가들이 두 나라를 오가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두 언어를 구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양국의 기업문화와 사회심리, 생활방식까지 함께 이해한다. 이보다 강한 연결망은 만들기 어렵다. 한국에서 베트남어 교육을 확대하고, 베트남에서 한국어 교육을 강화하는 것, 공동 연구 프로그램을 늘리고 청년 창업과 혁신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부수적인 교류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30년의 한·베 관계를 떠받칠 인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다. 무역협정과 투자협정은 정치·경제 환경에 따라 수정될 수 있다. 그러나 함께 공부하고 일하며 쌓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포괄적 전략 동반자’의 의미를 다시 세울 때 30여 년간 이어진 ‘한국이 투자하고 베트남이 받아들이는’ 협력 모델은 이미 충분한 역할을 했다. 다음 단계는 달라야 한다. 함께 투자하고, 함께 연구하며, 함께 인재를 키우고, 함께 세계시장으로 나아가는 구조다. 베트남에는 한국의 산업화 경험과 자본, 기술, 글로벌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한국에는 베트남의 성장하는 시장과 전략적 지리, 젊고 역동적인 인적자원이 필요하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이렇게 분명한 관계라면 한쪽은 투자자, 다른 한쪽은 수용자라는 오래된 구도에 머물 이유가 없다.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의 진짜 성적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협력했는가’에 있지 않다. “두 나라가 함께했기 때문에 비로소 만들어낼 수 있었던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가.” 앞으로 한·베 관계의 30년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 돼야 한다.
2026-09-10 17: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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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은 사람 아닌 제도를 보고 해야 한다
[경제일보] 헌법에는 권력을 주는 조항만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을 자신을 위해 고치지 못하도록 막는 조항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28조 2항이 그렇다.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은 그 헌법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 짧은 한 문장이다. 그러나 이 조항에는 권력과 헌법의 관계에 대한 무거운 원칙이 들어 있다. 헌법을 고칠 수는 있어도 자신을 위해 고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프랑스를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9일 파리 동포간담회에서 자신의 임기를 직접 언급했다. 취임 초 정상외교 일정을 많이 잡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저의 임기는 헌법상 명확하게 제한돼 있기 때문에” 정상외교를 빨리 시작해야 효과를 오래 누릴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정상외교에 관한 설명이었지만 정치권에서 대통령 4년 중임·연임제 개헌과 현직 대통령의 향후 거취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라 주목받았다. 대통령의 말은 원칙적으로 옳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하고 중임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더 중요한 것은 앞서 말한 제128조다. 대통령 임기 연장이나 중임 변경을 위한 개헌은 개헌 제안 당시 대통령에게 효력이 없도록 못 박았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개헌이 현직 권력자의 집권 연장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그런데 최근 개헌 논의는 이 단순한 원칙에서 자꾸 벗어난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 또는 연임제로 바꾸는 권력구조 개편을 언급하면서 개헌을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임기를 단축할 수 있다는 기존 입장도 재확인했다. 야권에서는 중임제와 임기 단축이 결합할 경우 현직 대통령의 향후 재출마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반대편에서는 연임제 개헌의 경우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반론이 나온다. 개헌의 필요성보다 ‘이재명 대통령이 다시 출마할 수 있느냐’가 정치적 관심사가 돼버린 셈이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개헌은 대통령 한 사람의 임기를 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대통령과 국회, 정부와 사법부가 어떤 관계를 맺고 국가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결정하는 국가의 기본설계다. 지금 개헌한다면 그 기준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가 아니라 2030년, 2040년의 대한민국에 어떤 권력구조가 필요한가여야 한다. 1987년 헌법이 만들어진 지 거의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크게 변했다. 경제 규모도, 인구 구조도, 지방의 현실도 달라졌다.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 역시 1987년과 같지 않다.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장단점도 충분히 경험했다.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다음 선거를 의식해야 하고 임기 후반에는 급격한 레임덕이 나타나는 문제, 국회의원 임기와 대통령 임기가 엇갈리면서 선거가 사실상 상시화되는 문제도 있다. 반대로 4년 중임제는 국민에게 대통령을 한 번 더 평가할 기회를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권력 집중이 장기화할 위험도 있다. 그러니 논의할 것은 많다. 대통령 임기만 고칠 일도 아니다. 대통령의 권한을 어디까지 조정할 것인지, 국회의 견제 기능은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 국무총리의 역할은 어떻게 할 것인지, 감사원과 검찰·경찰 등 권력기관의 독립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지방분권과 기본권, 국민투표와 개헌 절차도 논의 대상이다.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4년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대한민국의 권력구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개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람을 먼저 놓고 제도를 설계하는 일이다. 동양 고전 <한비자>에는 “법불아귀(法不阿貴)”라는 말이 나온다. 법은 귀한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법의 적용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2000여 년 전의 말이지만 헌법 논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좋은 헌법은 좋은 지도자를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권력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좋은 헌법이다. 그래서 헌법 제128조 2항의 정신은 중요하다. 헌법을 고치는 사람이 그 결과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개헌의 정당성을 지키는 일종의 ‘이해충돌 방지장치’다. 헌법을 바꾸는 정치세력과 그 헌법의 혜택을 받는 정치세력을 분리해야 개헌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생긴다. 여야 모두 이 원칙 앞에서는 한발 물러서야 한다. 여권은 개헌 논의를 현직 대통령의 정치 일정과 연결할 여지를 스스로 차단해야 한다. 야권 역시 모든 개헌 논의를 ‘집권 연장 시도’라고 규정하며 정치적 의심부터 앞세우는 태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실제 현행 헌법에는 현직 대통령의 임기 연장과 중임 변경을 제한하는 조항이 존재한다. 개헌 논쟁은 그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대통령도 이번 발언을 한 걸음 더 분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임기는 헌법상 제한돼 있다”는 언급에서 그칠 게 아니라 개헌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권력구조가 자신의 정치적 거취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불필요한 논란을 줄이고 개헌 논의를 제도의 문제로 되돌릴 수 있다. 개헌에는 더 중요한 관문도 있다. 헌법 제130조에 따르면 개헌안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고, 이후 국민투표에서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가 투표해 투표자 과반수가 찬성해야 확정된다. 어느 한 정당이나 대통령 혼자 밀어붙일 수 없는 구조다. 헌법 자체가 개헌을 ‘합의의 정치’로 설계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누가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갈 수 있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떤 대통령제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4년 연임제와 중임제의 장단점을 공개적으로 비교하고 대통령·국회·사법부 사이의 권력 배분 방안을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여야와 헌법학자,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개헌 논의기구를 만들어 쟁점을 정리할 수도 있다. 개헌은 정치공학이 되는 순간 실패한다. 현직 대통령에게 유리하도록 설계해도 안 되고, 현직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해서도 안 된다. 헌법은 특정 정치인을 위한 계약서가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까지 적용받을 국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파리에서 말한 대로 대통령의 임기는 헌법에 의해 제한된다. 그렇다면 이제 정치권도 그 헌법의 정신을 받아들일 차례다. 사람은 임기가 끝나면 떠난다. 헌법은 남는다. 개헌의 출발점은 바로 그 단순한 사실이어야 한다.
2026-09-10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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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더 큰 수사권 줬다면 통제장치도 함께 세워야
[경제일보] 수사권 조정의 핵심은 권한을 나누는 데 있었다. 검찰에 집중됐던 수사·기소 권한을 분산하고 경찰의 독립적 수사 역량을 키우자는 취지였다.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권한을 넘긴 만큼 책임과 통제 장치도 함께 세웠느냐다. 최근 제주에서 벌어진 실종사건 허위 종결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제주서부경찰서 실종팀에서 근무한 한 경찰관은 자신이 처리한 실종사건 298건 가운데 27건을 부적절하게 처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11건은 허위 종결로 확인됐다. 실제로 연락하지 않고 소재가 확인된 것처럼 처리하거나, 실종자가 사망했다는 허위 내용을 시스템에 입력해 관리 대상에서 해제한 사례도 드러났다. 기존 허위 종결 사건 당사자 2명은 이후 숨진 채 발견됐다. 다만 이 사건에서 말하는 ‘실종사건 종결’과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이 행사하는 형사소송법상 ‘불송치 결정’은 같은 제도가 아니다. 전자는 실종신고 관리와 관련된 경찰 업무이고, 후자는 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단한 형사사건을 검찰에 송치하지 않는 절차다. 두 제도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이 형사사법 개혁과 맞닿는 지점은 분명하다. 경찰의 판단 영역이 넓어지는 만큼 그 판단을 점검하고 바로잡는 장치도 정교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가 된 초기 사건들은 해당 경찰관의 야간 1인 당직 때 처리됐다. 당시 별도의 보고·검토 절차가 있더라도 전산상 실종 해제는 담당자가 직접 할 수 있었다. 경찰은 논란 이후 관리자가 해제 사유와 입력 내용을 다시 확인한 뒤 최종 승인하도록 이중장치를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개인의 일탈로만 정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찰은 수사기관이면서 거대한 행정조직이다. 내부 위계와 동료 관계가 강한 조직에서는 부실 판단이나 잘못된 관행이 내부에서 충분히 걸러지지 않을 위험이 존재한다. 실제 더불어민주당 경찰개혁추진단도 제 식구 감싸기, 사건 암장, 무단 종결, 증거 은폐·조작, 수사정보 유출, 개인정보 침해를 ‘6대 폐단’으로 지목했다. 외부 감사 확대와 수사 제척사유 강화, 피해자 설명 책임, 부실 수사의 법적 책임 강화도 대책으로 거론되고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거치면서 경찰은 일반 형사사건의 1차 수사에서 훨씬 큰 역할을 맡게 됐다. 앞으로 검찰의 직접수사 영역이 더 줄어들수록 경찰 판단의 무게는 커진다. 수사를 시작할지, 더 이어갈지, 불송치할지에 대한 결정 하나가 국민의 권리와 직결된다. 물론 형사사건에는 이미 통제 장치가 있다.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하면 고소인이나 피해자 등은 이의를 신청할 수 있고, 검사는 위법하거나 부당한 불송치에 대해 재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제도가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충실히 작동하느냐와, 실종사건처럼 형사 불송치 절차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영역의 공백이다. 그래서 논의의 초점은 ‘경찰에게 권한이 많다’는 데서 멈춰서는 곤란하다. 어떤 판단을 내렸고, 그 판단이 어떻게 기록되며, 누가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지를 촘촘하게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사건 종결에는 충분한 이유가 남아야 한다. ‘혐의 없음’이나 ‘소재 확인’ 같은 결과만 기록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자료를 확인했고, 어떤 절차를 거쳤으며, 왜 추가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남겨야 한다. 특히 실종·성범죄·아동·가정폭력처럼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사건은 종결 기준을 더 엄격하게 둘 필요가 있다. 둘째, 고위험 사건에는 내부 결재를 넘어선 점검 장치가 필요하다. 모든 사건을 외부기관이 다시 심사하는 방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장기 실종이나 중대한 피해 사건, 담당자 단독 판단 비중이 큰 사건은 일정 비율을 표본 감사하거나 외부위원회가 사후 검증하는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셋째, 신고자와 피해자에게 종결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는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 형사사건의 불송치에는 법정 이의신청 절차가 있지만 실종사건 등 다른 경찰 업무에서는 재검토 요구 통로가 상대적으로 약한 경우가 있다. 사건이 왜 끝났는지 설명하고, 이의가 있을 때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다시 판단을 요구할 수 있는지 명확히 알려야 한다. 넷째, 부실 처리의 책임도 분명히 해야 한다. 단순 실수와 고의적 은폐는 구분해야 하지만 허위 기록, 사건 암장, 증거 삭제처럼 중대한 행위는 징계만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형사책임과 지휘 책임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조직도 긴장한다. 고대 로마 공화정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다. 집정관을 두 명으로 두고 임기를 제한한 것도 상호 견제를 제도화하려는 장치였다. 권력은 선의만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경험에서 나온 제도였다. 현대 형사사법 역시 다르지 않다. 좋은 경찰관이 많다는 믿음과 경찰 권한을 제도적으로 통제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견제 장치는 경찰을 불신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경찰의 판단을 더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다. 이번 제주 사건을 계기로 ‘성인실종법’ 제정 필요성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일반 성인 실종은 아동·치매환자 등에 적용되는 별도 법률의 보호 대상에서 빠져 있어 제도적 공백이 있다는 지적이 이어져왔다. 실종사건 종결 때 객관적 증빙을 남기고 제3기관이 수사·수색 과정을 점검하는 방안도 논의할 만하다. 검찰의 과도한 권한을 줄였다는 이유로 경찰의 역할 확대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권력분산의 목적은 한 기관의 힘을 다른 기관에 옮겨 싣는 데 있지 않다. 국민의 기본권이 어느 한 조직의 자의적 판단에 좌우되지 않도록 견제와 책임의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경찰개혁은 경찰을 약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정당한 수사는 흔들림 없이 할 수 있게 하고, 잘못된 판단은 조직 내부와 외부에서 신속하게 걸러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검찰 권한을 줄이고 경찰의 역할을 키웠다면 책임의 기준 역시 달라져야 한다. 사건을 왜 끝냈는지 기록이 남고, 그 판단이 잘못됐을 때 다시 들여다볼 통로가 작동해야 국민도 경찰의 판단을 신뢰한다. 제주 실종사건이 보여준 것은 한 경찰관의 일탈만이 아니다. 담당자의 잘못된 판단을 제때 걸러내지 못한 시스템의 허점이다. 경찰권이 커지는 시대라면 개혁의 다음 순서는 분명하다. 더 많은 권한에 걸맞은 더 촘촘한 책임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2026-09-09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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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검증의 출발선" 청와대 사전 검증은 무엇을 했나
[경제일보]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의 인사검증을 대신하는 절차가 아니다. 국회가 후보자를 공개적으로 검증하는 마지막 문턱에 가깝다. 그 문턱에 누구를 세울 것인지를 먼저 가려내는 일은 인사권자의 몫이다. 이 둘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청문회는 검증 장치가 아니라 잘못된 인사를 뒤늦게 수습하는 무대가 된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에 청와대가 내놓은 설명은 그래서 곱씹어볼 대목이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인사청문 제도 자체가 후보자에 대한 국민적 검증 과정”이라며 두 후보자가 “인사위원장의 책임 아래 인사 시스템을 거쳐 지명된 후보”인 만큼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국민 눈높이에 부족함이 없도록 인사 검증체계를 갖추고 강화하겠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인사청문회는 국민을 대신한 국회의 공개 검증 절차다. 아직 사실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의혹만으로 후보자를 낙마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야당이 제기하는 의혹이 모두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고, 청문회를 정치적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다만 인사 시스템을 거쳐 지명했다면서 왜 곧바로 검증체계를 강화하겠다는 것인가. 김 후보자에게는 코로나19 치료제 임상시험 승인과 관련한 청탁 의혹과 과거 음주운전 문제가 제기됐다. 김 후보자는 부정한 청탁은 없었다고 반박하면서도 민원 전달 과정에는 신중했어야 했다고 밝혔고, 음주운전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용 후보자에게는 비례대표 의원직과 장관직의 겸직 문제, 당 운영을 둘러싼 공정성 논란 등이 제기되고 있다. 각각의 의혹과 적격성은 청문회에서 사실관계를 더 따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명 전 어디까지 검토됐느냐는 것이다. 이미 알고도 장관직 수행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면 청와대가 그 판단에 책임을 지면 된다. 반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면 사전 검증에 구멍이 있었다는 뜻이다. 둘 중 어느 경우든 “청문회에서 검증하자”는 말만으로 끝낼 문제는 아니다. 국회법은 국무위원 후보자 등에 대해 국회가 인사청문회를 열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대통령에게서 후보자를 고르는 책임을 넘겨받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 이후 국회가 공직 수행 능력과 도덕성 등을 공개적으로 다시 검증하는 견제 장치다. 사전 검증과 인사청문은 순서만 다른 같은 검증이 아니다. 책임의 주체부터 다르다. 청와대 검증은 대통령의 책임이고, 국회 청문회는 국회의 책임이다. 이 단순한 구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청와대가 후보자의 재산과 세금, 범죄·징계 이력, 이해충돌 가능성, 과거 행적과 정무적 리스크를 충분히 확인한 뒤 “이 정도 문제를 감안해도 국정을 맡길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지명이다. 청문회는 그 판단에 누락이나 왜곡이 없는지 국민 앞에서 다시 따지는 과정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전 단계에서 걸러졌어야 할 문제가 지명 직후 쏟아지고, 그때마다 “청문회에서 보자”는 답이 반복되면 인사의 책임 구조가 거꾸로 선다. 대통령이 고르고 청와대가 검증했는데, 최종적으로 후보자의 적격 여부를 발견하고 판단하는 책임은 국회와 언론, 국민이 떠안게 되는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런 방식이 반복될 때 생기는 ‘지명의 관성’이다. 후보자를 발표한 뒤에는 철회 비용이 커진다. 인사 실패를 인정해야 하고 야당의 공세도 감수해야 한다. 결국 이미 지명했다는 이유 자체가 후보자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되기 쉽다. 검증의 판단 기준이 ‘공직에 적합한가’에서 ‘청문회를 버틸 수 있는가’로 바뀌는 순간이다. 제대로 된 사전 검증은 흠결을 하나도 없는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현실 정치에 거의 없다. 핵심은 어떤 흠결까지 받아들일 것인지 기준을 미리 세우는 것이다. 음주운전이나 세금 체납, 부동산 투기, 연구윤리 위반, 갑질, 이해충돌, 수사·징계 이력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검증 항목부터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를 확인하는 데 그쳐서는 부족하다. 공직의 성격에 따라 어느 정도의 흠결을 결격으로 볼 것인지도 정해야 한다. 법무부 장관에게 요구하는 기준과 산업부 장관에게 요구하는 전문성의 기준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제는 탈락 사유였던 문제가 오늘은 해명 가능한 문제가 되는 것도 곤란하다. 법적 결격과 정치적·윤리적 부적격을 구분하는 기준도 필요하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곧바로 장관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다. 장관은 형사재판에서 유죄인지 무죄인지만 따지는 자리가 아니다. 국민에게 정책의 준수를 요구하고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다. 법률상 임명 가능성과 국민이 기대하는 공직 윤리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그때그때 여론을 보며 판단해서는 인사 원칙이 생기지 않는다. 책임선도 분명히 해야 한다. 현재 청와대 인사는 인사위원회를 중심으로 후보 추천과 검증, 정무적 판단이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구조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인사수석실까지 신설됐지만 후보자 논란이 반복되면서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누가 후보자를 추천했는지까지 모두 공개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인사에는 보안이 필요하다. 후보군의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할 이유도 충분하다. 하지만 지명 이후 중대한 문제가 드러났다면 최소한 내부적으로는 추천 단계에서 놓쳤는지, 검증 과정에서 확인하지 못했는지, 알고도 정무적으로 수용했는지를 구분하고 책임을 남겨야 한다. 알고도 선택했다면 대통령과 인사위원회가 정치적 책임을 지면 된다. 몰랐다면 검증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상서’ 고요모에는 ‘지인즉철 능관인(知人則哲 能官人)’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지혜이며, 그래야 사람을 제대로 벼슬에 쓸 수 있다는 의미다. 수천 년 전에도 국정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를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서 찾았다. 인사가 어려운 것은 시대가 달라져도 마찬가지다. 사람에게는 과거가 있고 완벽한 후보자는 없다. 사생활과 공적 검증의 경계를 어디에 둘지도 쉽지 않다. 지나치게 가혹한 검증은 유능한 인재가 공직을 피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준이 필요하다. 정권에 가까운 사람에게는 느슨하고 반대편 사람에게는 엄격한 잣대가 아니라, 어느 정부에서든 대체로 예측할 수 있는 기준 말이다. 청와대가 이번에 인사 검증체계를 강화하겠다고 한 것은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강화하겠다’는 말만 반복해서는 같은 문제가 다음 개각에서 다시 돌아온다. 검증 항목을 표준화하고, 중대한 결격 사유와 해명 가능한 사안을 구분하며, 추천·검증·정무 판단의 책임선을 명확히 해야 한다. 지명 뒤 예상하지 못한 중대 문제가 드러났을 때는 어떤 단계에서 놓쳤는지 복기하는 절차도 필요하다. 또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인사청문회는 청와대 검증의 실패를 대신 책임지는 곳이 아니다. 국회가 후보자를 검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지명하기 전에 제대로 검증하는 것은 그보다 먼저 존재하는 권한이자 책임이다. 청문회에서 모든 것을 확인하겠다면 사전 검증은 형식이 된다. 반대로 청와대가 자신 있게 검증을 마쳤다면 논란이 불거졌을 때 “청문회에서 보자”에 앞서 왜 그 문제를 감수하고도 지명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인사의 신뢰는 흠결 없는 사람을 찾아내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왜 골랐고, 무엇을 확인했으며,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지 분명할 때 생긴다. 청문회는 검증의 시작이 아니다. 대통령의 인사검증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국민 앞에서 확인하는 마지막 문턱이어야 한다.
2026-09-08 09:4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