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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백악관, 중견 제약사에도 '최혜국 약가' 압박…이르면 31일 협약 발표
[경제일보]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대형 제약사에 이어 중견 바이오·제약사로 ‘최혜국 대우(MFN·Most Favored Nation)’ 방식의 의약품 약가 인하 정책을 확대한다. 해외에서 판매하는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미국 정부 프로그램에 약을 공급하는 대신 메디케어 약가 인하 시범사업 제외와 의약품 관세 면제 등의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백악관이 이르면 오는 31일 여러 중견 바이오제약사와 체결한 MFN 약가 협약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구체적인 참여 기업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이번 협약의 핵심은 미국 정부가 의약품 가격을 해외 주요 국가의 가격과 연동하는 것이다. 협약에 참여하는 제약사는 캐나다·덴마크·프랑스·독일·이탈리아·일본·스위스·영국 등 8개 고소득 국가에서 실제 지불되는 순 약가(net drug prices)를 기준으로 미국 주정부의 메디케이드 프로그램에 의약품을 공급해야 한다. 제약사 입장에서는 미국 내 약가를 낮춰야 하는 부담이 생기지만 그 대가로 정부가 추진하는 메디케어 강제 약가 인하 시범 프로그램에서 빠질 수 있다. 수입 의약품에 부과되는 관세도 면제받는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같은 혜택을 내세워 제약사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화이자와 일라이 릴리 등 대형 제약사 17곳과 MFN 약가 관련 협약을 체결했다. 이번에는 그동안 협상 대상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았던 중견 제약사로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중견 바이오업계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올해 초 미국 바이오기업 10곳은 MFN 정책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미국 중견 바이오테크 연합(MBAA)’을 결성했다. 현재는 아카디아, 알커미스, 알닐람, 아델릭스, 바이오마린, 엑셀리시스, 인사이트, 인스메드, 마드리갈, 미룸, 뉴로크린, 트라버리, 리듬 파마슈티컬스 등 13개사가 참여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대형 제약사와 달리 판매 의약품이 한두 개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신약 하나에 막대한 연구개발비와 위험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중견 바이오기업이 해외 가격을 기준으로 미국 약가까지 낮추면 연구개발 투자 여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신약 가격이 다른 국가 수준으로 낮아질 경우 제약사들의 글로벌 가격 전략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미국에서 높은 약가를 통해 연구개발비를 회수하고 다른 국가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적용하는 기존 구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반대로 MFN 정책이 미국의 높은 의약품 가격을 낮추고 정부 재정을 절감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입장이다. 백악관은 지난 5월 MFN 약가 협약을 통해 향후 10년간 정부 예산을 643억 달러 절감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민간 보험 시장까지 포함할 경우 미국 내 의약품 비용 절감 규모는 5290억 달러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백악관은 전망했다. 다만 이 같은 수치는 향후 대형 제약사뿐 아니라 미국 내 주요 단일 공급원 브랜드 의약품 및 바이오의약품 제조사 상당수가 유사한 협약에 참여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백악관은 향후 대부분의 관련 제약사와 비슷한 형태의 협약을 체결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번 중견 제약사 대상 협약은 트럼프 행정부가 MFN 정책을 일부 대형 제약사에 국한하지 않고 미국 의약품 시장 전반으로 확대하는 신호로 해석된다. 다만 실제 정책 효과와 업계 파급력은 향후 협약에 참여하는 기업의 규모와 범위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특히 신약 개발에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는 중견 바이오기업들이 어느 정도까지 약가 인하를 받아들일지가 관건이다. 제약 업계에서는 이번 협약이 미국의 의약품 가격 정책뿐 아니라 글로벌 신약 가격 체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형 제약사에 이어 중견 제약사까지 MFN 정책에 끌어들이면서 미국발 약가 인하 압박이 글로벌 제약업계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2026-08-29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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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주문한 '전략적 자율성', 한국식 답은 따로 있다
[경제일보] 왕이 외교부장이 서울을 떠나며 숙제 하나를 남겼다.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진정한 전략적 자율성’을 갖고 진영 대결이나 편 가르기에 나서지 않았으면 한다는 주문이다. 중국과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과의 관계를 서로 충돌하지 않게 발전시키라는 말도 덧붙였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외교 수장이 한국 땅에서 한국 외교의 좌표를 거론한 셈이다. 표면만 보면 틀렸다고 할 이유는 많지 않다. 강대국의 요구에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 국익을 판단하는 것은 주권국가 외교의 기본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격렬할수록 한국에는 오히려 더 많은 선택지와 더 정교한 계산이 필요하다. 문제는 중국이 말하는 ‘전략적 자율성’과 한국이 가져야 할 전략적 자율성이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니라는 데 있다. 왕 부장은 위성락 국가안보실장과 만나 한국이 진영 대결과 ‘편들기’를 피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동시에 한반도 긴장을 푸는 근본적 방법으로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중국의 기존 입장도 되풀이했다. 중국의 시각에서 전략적 자율성은 한국이 미국의 대중국 견제에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 것과 맞닿아 있다. 한국이 받아들여야 할 자율성은 조금 달라야 한다. 미국의 요구가 국익에 맞지 않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듯, 중국의 요구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과 거리를 두는 것만 자율이고 중국의 전략적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자율일 수는 없다. 자율성의 주어는 미국도 중국도 아닌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출발점은 한미동맹의 위치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현실의 위협으로 존재하는 한 한미동맹은 대한민국 안보의 중심축이다. 이를 미·중 관계의 온도에 따라 조절할 거래 카드로 만들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동맹을 모든 정책에 대한 자동 동의서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최근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시 이후 한미는 을지 자유의 방패 연합훈련 기간을 11일에서 5일로 줄이고 야외기동훈련도 축소했다. 한국 외교부 장관은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물론 미국 정부 관계자 상당수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미국 역시 북미대화와 이란 문제, 한국의 대미 투자 등 자신의 전략적 이해를 계산하며 움직인다는 의미다. 동맹도 국익을 계산한다. 그렇다면 한국이라고 계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미동맹을 튼튼하게 유지하되 한국의 안보와 산업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결정에는 충분한 협의와 상호 존중을 요구해야 한다. 그것은 동맹을 약하게 만드는 태도가 아니라 오래가게 만드는 태도다. 중국과의 경제협력 역시 감정이 아니라 계산의 영역에 놓아야 한다. 왕 부장과 조현 외교부 장관은 한중 자유무역협정 서비스·투자 후속협상, 공급망 안정, 인적·문화 교류 확대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중국은 오는 11월 선전 APEC을 계기로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양국 인적 교류가 올해 10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관계의 정상화는 한국 경제에도 필요한 일이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주요 시장이고 반도체·배터리·화학·소비재 기업에는 거대한 생산·판매 거점이다. 희토류와 배터리 소재를 비롯한 공급망에서도 중국을 지워놓고 산업전략을 세우기 어렵다. 정치적 선명성을 얻겠다고 경제적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실용외교가 아니다. 다만 중국과 협력하는 것과 중국에 의존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희토류와 흑연, 배터리 소재처럼 한 국가의 정책 변화가 한국 공장을 멈춰 세울 수 있는 품목이라면 거래는 지속하되 공급선은 넓혀야 한다. 중국에서 안정적으로 조달하면서 호주·캐나다·동남아·중남미의 대체 공급망을 확보하고, 국내 비축과 재활용도 함께 키워야 한다. 중국과 잘 지내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중국이 공급을 멈춰도 견딜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첨단기술은 더욱 세밀해야 한다. 범용 반도체와 소비재에는 시장의 논리를 최대한 존중하되 첨단 AI 반도체와 군사 전용 가능 기술에는 안보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중국과의 FTA 서비스·투자 협상에서도 한국 시장을 여는 만큼 중국 시장에서 우리 기업이 받는 규제와 차별을 줄이라는 상호주의가 따라야 한다. ‘관계 개선’ 자체가 외교의 목표가 아니라 관계 개선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가 목표여야 한다. 북한 문제에서는 중국의 이번 메시지를 더 냉정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왕 부장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포기를 한반도 긴장 완화의 근본 해법으로 제시했다. 북미 사이의 불신과 군사적 긴장이 한반도 문제를 악화시킨 측면을 부인할 수는 없다. 대화가 끊긴 채 제재와 군사 대응만 반복한다고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반도 긴장의 원인을 미국에만 돌리는 진단은 불완전하다. 왕 부장이 서울에 있던 20일 북한은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했다. 북한의 핵무력 강화와 미사일 개발은 평양 스스로 내린 선택이다. 중국이 미국에는 정책 변화를 요구하면서 북한에는 같은 수준의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중재자로서의 설득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역할은 필요하다. 조 장관이 북한을 대화로 돌려세우는 데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요청한 것도 그래서다. 왕 부장 역시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대화 재개를 위해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베이징이 원하는 ‘한반도 안정’과 서울이 추구해야 할 ‘비핵화된 평화’가 완전히 같은 목표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맹자’ 공손추 하에는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는 말이 나온다. 국제정세가 아무리 유리해도 스스로의 전략과 내부 합의가 없으면 국익을 지키기 어렵다. 미·중 경쟁이라는 ‘천시’와 한반도라는 ‘지리’ 사이에서 한국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산은 어느 나라의 요구에도 흔들리지 않는 국익의 기준이다. 미국과 동맹이라고 모든 정책에서 같아질 필요는 없다. 중국과 협력한다고 중국이 원하는 외교적 좌표에 설 이유도 없다.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이해가 충돌하는 곳에서는 우리의 선을 긋는 것이 외교다. 왕 부장의 ‘전략적 자율성’ 주문을 굳이 배척할 필요는 없다. 대신 한국식으로 다시 정의하면 된다. 안보는 한미동맹을 중심에 두되 동맹 내부에서도 국익을 말한다. 중국과는 시장과 공급망, 북핵 문제에서 적극 협력하되 기술과 경제안보의 경계는 지킨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한국 기업에 일방적인 비용을 요구하면 문제를 제기하고, 양쪽 모두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과감하게 얻는다. 오는 11월 선전 APEC과 한중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이 원칙의 첫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정상회담 사진보다 중국 시장의 문턱이 실제 낮아졌는지, 공급망이 더 안전해졌는지, 문화·인적 교류의 비정상적인 장벽이 사라지는지, 북한을 대화로 돌려세우는 데 중국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를 봐야 한다. 전략적 자율성은 미국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느냐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 얼마나 가까워졌느냐로 잴 일은 더욱 아니다. 미국에도 중국에도 필요한 협력은 하되, 지켜야 할 국익 앞에서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 그것이 한국식 전략적 자율성이다. 중국이 주문한 답을 그대로 제출할 필요는 없다. 답안지는 대한민국이 스스로 쓰면 된다.
2026-08-21 11: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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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사이, 한국 외교의 좌표는 국익이다
[경제일보]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이 서울에 왔다. 중국 외교 수장의 단독 방한은 약 5년 만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과 왕 부장은 19일 서울에서 마주 앉아 한중 관계와 한반도 정세, 경제협력을 논의했다. 중국은 오는 11월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중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서비스·투자 후속협상, 공급망 안정, 인적·문화 교류 확대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양국을 오가는 인적 교류가 올해 10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얼어붙었던 관계가 정상궤도로 돌아오는 것은 반길 일이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옮길 수 없는 이웃이고, 한국 기업의 거대한 시장이며, 반도체·배터리·핵심광물 공급망에서도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상대다. 북한 문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조 장관이 북한의 조속한 대화 복귀를 위해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요청했고, 왕 부장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답한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문제는 한중 관계가 움직일 때마다 되살아나는 질문이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질문부터 잘못됐다. 대한민국이 한미동맹을 외교·안보의 근간으로 삼는 것과 중국과 경제·외교 협력을 확대하는 것은 반드시 양자택일해야 할 일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이 거세질수록 선택을 강요받는 영역이 늘어나는 것은 현실이다. 그렇다고 한국 외교가 모든 사안을 ‘친미냐 친중이냐’의 두 칸짜리 표에 넣는 순간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게 된다. 과거 한중 관계를 설명할 때 흔히 쓰던 ‘안미경중(安美經中,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과 협력한다)’는 공식도 이제는 충분하지 않다. 안보와 경제의 경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수출상품이면서 안보자산이고, 배터리는 산업이면서 공급망 전략이다. 희토류와 핵심광물은 원자재인 동시에 외교적 지렛대가 됐다.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 첨단 장비와 소프트웨어에는 수출통제와 동맹정책이 얽혀 있다. 경제와 안보를 각각 워싱턴과 베이징이라는 두 서랍에 나눠 담을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외교에도 새로운 문법이 필요하다. 우선 안보의 축은 분명히 해야 한다. 한미동맹은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 안보의 기초였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그 전략적 가치는 여전히 크다. 이를 미중 사이의 단기적 거래대상처럼 다루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국과 관계를 개선한다고 한미동맹의 신뢰에 의문을 만들 이유도 없다. 다만 동맹이라고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모든 문제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왕 부장이 서울에 도착한 19일 조 장관은 국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연합훈련 규모와 기간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뿐 아니라 미국 정부 관계자들조차 사전에 이를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국과 미국은 당초 11일 일정이던 연합훈련을 5일로 줄이고, 일부 야외기동훈련도 축소하기로 했다. 동맹도 각자의 국익을 계산한다는 뜻이다. 미국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 중동 문제, 한국의 대미 투자 등 여러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한다. 한국 역시 미국의 정책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동맹 관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동맹은 서로의 국익을 솔직하게 조정할 수 있을 때 오래간다. 중국에는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중국과 경제협력은 확대하되 상호주의와 공급망 안전이라는 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번 외교장관회담에서 양국이 FTA 서비스·투자 협상과 공급망 안정에 협력하기로 한 것은 실용적인 접근이다. 우리 기업이 중국 시장에서 불필요한 규제를 덜 받고 서비스와 투자 분야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면 협상을 적극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다만 공급망 안정이라는 말이 중국 의존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해서는 곤란하다. 반도체 소재 하나, 배터리 원료 하나가 특정 국가의 정책 변화로 막혀 공장이 흔들리는 일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중국과 안정적인 공급선을 유지하는 것과 공급원을 중국 하나에 맡기는 것은 정반대의 전략이다. 필요한 것은 탈중국도, 재중국화도 아니다. 중국과 거래하되 중국이 멈춰도 버틸 수 있는 공급망이다. 반도체도 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에 중요한 시장이고 한국 기업 역시 중국에 대규모 생산기반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을 무시한 채 정치적 구호만으로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반면 첨단 반도체 기술과 장비가 미중 전략경쟁의 최전선에 놓인 상황에서 안보와 기술유출 문제를 무시한 사업 확대 역시 위험하다. 때문에 분야별 기준이 필요하다. 범용 메모리와 소비재에서는 시장 논리를 최대한 존중하고, 첨단 AI 반도체와 군사적 전용 가능성이 있는 기술에는 보다 엄격한 안보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배터리는 중국과 거래하면서 원료 조달국을 넓히고, 핵심광물은 구매계약과 동시에 비축·재활용·대체소재 개발을 추진해야 한다. 북한 문제에서도 중국에 ‘기대할 것’과 ‘기대하지 말 것’을 구분해야 한다. 중국은 북한의 중요한 우방이고 한반도 문제의 핵심 당사국이다. 왕 부장은 이번 회담에서 한국과 북한이 평화와 공존의 기회를 찾아가길 바란다며 중국이 건설적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대화 복귀에 중국의 협조를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중국의 역할을 요청하는 것과 북한 문제를 중국에 맡기는 것은 다르다. 베이징의 대북정책에는 중국 자신의 전략적 이해가 있다. 중국이 원하는 한반도의 안정과 한국이 원하는 비핵화·평화체제가 모든 지점에서 같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왕 부장 역시 이번 방한에서 한국이 ‘근본적 이익’에 따라 독립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발전시키길 희망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을 통해 공개된 발언이다. 이 말 역시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미국이 한국에 선택을 요구해서는 곤란하듯 중국 역시 한미동맹이나 한국의 대외정책에 사실상의 선택지를 제시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독립적인 외교’가 필요하다면 그 독립성은 워싱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베이징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국익에 따라 미국에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중국에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주외교다. ‘논어’ 자로편에는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구절이 있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같아지려 하지 않고, 소인은 같아지려 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 외교에 필요한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과 동맹이라고 모든 정책이 같을 필요는 없다. 중국과 협력한다고 중국의 전략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다른 이해관계를 인정하면서 합의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는 것이 외교다. 모든 사안에서 같은 편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동맹에도, 협력관계에도 건강하지 않다. 오는 11월 선전 APEC은 이를 시험할 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을 적극 검토하고 있고, 왕 부장은 조현 장관의 중국 방문도 제안했다. 관계 복원을 정상회담 사진 한 장으로 끝내지 말고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 미리 정리해야 한다. 대중 외교의 성적표는 정상회담 횟수가 아니다. 우리 기업의 시장 접근성이 나아졌는가. 핵심광물과 부품 공급이 더 안정됐는가. 중국 내 한국 기업이 부당한 차별을 덜 받게 됐는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대화를 복원하는 데 중국이 실제로 역할을 했는가. 문화와 관광 분야의 비정상적 장벽이 줄었는가. 이런 구체적인 결과로 평가해야 한다. 한미관계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면 된다. 주한미군과 확장억제는 얼마나 안정적인가. 첨단기술 협력에서 한국 기업이 어떤 몫을 얻는가. 막대한 대미 투자가 국내 산업과 일자리에 어떤 결과를 남기는가. 미국의 정책 변화가 한국 기업에 과도한 비용을 떠넘길 때 정부가 얼마나 당당하게 문제를 제기하는가를 봐야 한다.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절묘하게 가운데 서는 기술이 아니다. 사안마다 어디에 서야 국익이 커지는지를 판단할 기준이다. 안보에서는 동맹의 신뢰를 지키고, 경제에서는 시장을 넓히며, 공급망에서는 의존을 줄이고, 기술에서는 지킬 것을 지켜야 한다. 북핵 문제에서는 미국과 공조하면서 중국의 역할도 끌어내야 한다. 하나의 문장으로 모든 외교 문제를 설명하려는 순간 현실은 그 문장보다 복잡해진다. 왕 부장의 방한을 친중 외교의 신호로 읽을 필요도, 한미동맹의 균열로 볼 이유도 없다.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해야 할 외교이고, 한미동맹을 굳건히 관리하는 것 역시 해야 할 외교다. 둘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비로소 외교 노선이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편은 미국도 중국도 아닌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원칙이 분명하다면 미국에는 동맹으로 당당할 수 있고 중국에는 이웃으로 실용적일 수 있다. ‘미국이냐 중국이냐’라는 오래된 질문을 버리고, ‘이 선택이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기는가’를 묻는 것. 왕 부장의 5년 만의 방한이 한국 외교에 던진 가장 중요한 숙제다.
2026-08-20 09: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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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0억달러 대미 투자 '시동'…한미, 조선·원전·LNG 프로젝트 본격 협의
[경제일보] 한미 양국 정부가 3500억달러, 우리 돈 약 523조원 규모의 대미 전략적 투자 프로젝트 이행을 위한 고위급 협의에 본격 착수했다. 조선, 원전, 액화천연가스(LNG) 등 산업·에너지 분야가 핵심 협력 축으로 떠오른 가운데, 첫 투자 사업은 오는 6월 대미투자특별법 발효 이후 구체화될 전망이다. 산업통상부는 김정관 장관이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해 미국 정부 주요 인사들과 대미 전략적 투자 프로젝트 및 양국 산업·통상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고 10일 밝혔다. 김 장관은 8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을 만나 대미투자특별법 통과 이후 한국 측 후속 법령 제정과 추진 체계 구축 상황을 설명했다. 산업부는 “양측은 조선·에너지 등 상호 관심 분야를 중심으로 그동안 논의해온 프로젝트 구상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대미 전략적 투자 프로젝트 추진 방향에 대해 심도 있는 협의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번 협의의 배경에는 지난해 11월 한미 양국이 합의한 총 3500억달러 규모의 전략적 투자 양해각서가 있다. 대미투자특별법은 이 합의에 따라 한미전략투자공사를 설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는 특별법 발효 전까지 시행령 등 하위 법령을 정비하고, 미국 측과 투자 후보 사업을 검토할 계획이다. 첫 투자 사업인 이른바 ‘1호 프로젝트’는 한미전략투자공사가 출범한 뒤 공식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유력 후보로는 미국 루이지애나주 LNG 수출 터미널 건설 사업과 신규 원전 건설 등 에너지 인프라 프로젝트가 거론된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에너지 프로젝트는 미국의 에너지 안보 전략과 한국 기업의 기술·시공 역량이 맞물릴 수 있는 분야로 평가된다. 조선 분야 협력도 속도를 내고 있다. 산업부와 미국 상무부는 이번 김 장관의 방미를 계기로 ‘한미 조선 파트너십 이니셔티브’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국은 이를 통해 워싱턴DC에 ‘한미 조선협력센터’를 연내 설립하기로 했다. 한미 조선협력센터는 현지 네트워크 구축, 정책 동향 공유, 양국 기업 간 협력 지원을 맡는다. 미국 조선소의 생산성 개선과 인력 양성 프로그램 운영도 지원할 계획이다. 해당 사업은 2028년까지 추진되며,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가 주관하고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가 참여한다. 올해 예산은 66억원 규모다. 조선은 이번 대미 투자 구상의 핵심 분야다. 한국이 약속한 대미 투자금 3500억달러 가운데 1500억달러가 조선 분야에 집중 투입될 예정이다. 미국은 자국 조선업 재건과 해양 안보 강화를 추진하고 있고,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상선·해양플랜트 건조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조선 협력은 단순한 산업 협력을 넘어 공급망·안보 협력 성격까지 띠고 있다. 김 장관은 러셀 보우트 백악관 예산관리국, OMB 국장과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이 추진 중인 ‘마스가’ 프로젝트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미국 정부 차원의 지원을 요청했다. 마스가는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의미의 프로젝트로, 미국 내 조선업 재건 과정에서 한국의 투자와 기술 협력을 결합하는 구상이다. 에너지 분야 협의도 이어졌다. 김 장관은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과 만나 원전을 포함한 에너지 협력 진전 상황을 점검하고 향후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원전은 한미 양국 모두 전략적 이해가 큰 분야다. 미국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에너지 안보를 중시하고 있고, 한국은 원전 설계·건설·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원전 시장 확대를 노리고 있다. 김 장관은 미 의회를 상대로 한 아웃리치 활동도 병행했다. 대표적 지한파 의원으로 꼽히는 빌 해거티 테네시주 연방 상원의원과 화상 면담을 진행해 원전 협력과 디지털 이슈 등을 논의했다. 산업부는 “원전 등 상호 관심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디지털 이슈 등에 대한 상호 이해를 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아웃리치 활동을 전개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방미는 대미 투자 프로젝트가 선언 단계에서 실행 단계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미 양국은 지난해 대규모 투자 합의를 통해 산업·에너지 협력의 큰 틀을 마련했다. 이번에는 그 틀 안에서 어떤 분야에, 어떤 방식으로, 어느 기관이 투자하고 협력할지를 조율하는 단계로 들어선 셈이다. 다만 실제 프로젝트 추진까지는 넘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3500억달러라는 투자 규모가 워낙 큰 만큼 재원 조달 구조, 투자 수익성, 한국 기업의 참여 방식, 미국 내 인허가 절차, 현지 정치 변수 등이 모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조선과 원전, LNG 인프라 사업은 장기 프로젝트 성격이 강해 초기 협의 이후에도 세부 조건 조율이 중요하다. 한국 입장에서는 대미 투자 확대가 기회와 부담을 동시에 갖는다. 미국 시장에서 산업 기반을 넓히고 에너지·조선·원전 분야의 협력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반면 막대한 투자 자금이 미국으로 향할 경우 국내 산업 투자와의 균형, 기업 부담, 투자 회수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산업부는 향후 미국 측과 대미 전략적 투자 프로젝트 관련 협의를 지속하면서 한미 산업·에너지 협력을 강화하고 주요 통상 현안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방침이다. 김 장관은 미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이날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할 예정이다. 이번 협의는 한미 경제협력이 기존의 교역 중심에서 투자·산업·에너지 안보 중심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500억달러 대미 투자가 조선·원전·LNG 프로젝트를 통해 실제 성과로 이어질 경우, 한미 경제동맹의 무게중심은 단순한 수출입 관계를 넘어 전략산업 공동 구축으로 이동할 전망이다.
2026-05-10 1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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