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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만 바라볼 수 없다"…삼성·SK하이닉스, 중국 D램의 역습에 맞서다
[경제일보] 인공지능(AI) 열풍으로 한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역대급 실적을 올리는 사이 중국이 또 다른 전선에서 추격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에 생산능력을 집중하는 동안 중국 창신메모리(CXMT)는 모바일 메모리의 공정 미세화와 생산성 개선을 앞세워 시장 확대에 나섰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CXMT는 전날 중국 허페이에서 열린 세계제조업대회에서 5세대 D램 기술 플랫폼인 ‘G5’의 양산을 공식 발표했다. G5를 적용한 24기가비트(Gb) LPDDR5X 제품 2종도 공개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주도해 온 시장에 중국산 첨단 D램 공급을 늘리겠다는 선언이다. 이번 발표의 핵심은 생산성이다. CXMT는 네 차례 패터닝하는 공정 기술을 활용해 메모리 배열 내 특정 구조의 반간격을 11.95나노미터까지 줄였다고 밝혔다. 8Gb 제품으로 환산한 웨이퍼당 생산 가능한 칩 수는 이전 세대보다 최소 50% 늘었다는 설명이다. 단일 칩 용량도 기존 동급 제품보다 50% 증가한 24Gb로 높였다. 다만 이를 한국 기업과의 기술 격차 해소로 단정할 수는 없다. 11.95나노미터는 메모리 배열의 특정 구조를 측정한 값으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사용하는 공정 세대 명칭과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 웨이퍼당 칩 수 증가도 불량품을 제외한 양품 수율과 다르다. CXMT는 G5의 실제 수율과 월간 생산량, 고객사별 공급 규모를 공개하지 않았다. 1세계 D램 4위까지 올라온 중국…공백 파고드는 생산능력 CXMT의 추격은 기술 발표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글로벌 D램 매출 점유율은 삼성전자 39.4%, SK하이닉스 24.9%, 미국 마이크론 23.3%, CXMT 9.5% 순이었다. CXMT의 점유율은 1분기 7.6%에서 한 분기 만에 1.9%포인트 상승했다.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4위 공급업체의 존재감이 커진 것이다. 중국 업체에 기회가 생긴 배경에는 기존 강자들의 생산능력 재배치가 있다. HBM과 고용량 서버용 D램 수요가 폭증하자 주요 업체들이 수익성이 높은 제품에 설비를 우선 배정했다. 상대적으로 모바일·PC용 제품의 공급 여력이 줄면서 CXMT를 비롯한 후발 업체들이 고객을 확보할 공간이 넓어졌다. 그렇다고 범용 D램 시장이 이미 가격 폭락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트렌드포스는 지난 7일 보고서에서 2분기 D램 업계 매출이 전분기보다 59.5%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3분기 일반 D램 계약가격 역시 13~18%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확인되는 것은 중국산 공급 확대에 따른 잠재적 경쟁 압력이지, 한국산 제품의 가격 하락이 현실화됐다는 사실은 아니다. 당장의 접점은 스마트폰이다. CXMT가 이번에 내놓은 G5 기반 제품은 저전력 모바일 D램인 LPDDR5X다. 중국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이 공급처를 다변화할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가격뿐 아니라 전력 효율, 품질, 안정적인 공급 능력으로 고객을 붙잡아야 한다. 실제 경쟁 강도는 신제품의 양산 수율과 고객사 채택 규모가 확인돼야 판단할 수 있다. 삼성은 제품 포트폴리오, SK는 고객 밀착…서로 다른 방어전 삼성전자는 HBM과 일반 D램을 동시에 고도화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지난 7월 30일 발표한 2분기 실적 자료에서 HBM4 공급 확대와 업계 최초 HBM4E 샘플 출하를 강조하는 한편, DDR5와 저전력 서버 메모리 규격인 SOCAMM2도 고부가 제품군으로 제시했다. 서버용 제품 매출 비중도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밝혔다. 폭넓은 제품군을 확보한 삼성의 과제는 제한된 설비를 어디에 배정하느냐다. HBM과 서버용 제품의 호황에 대응하면서도 모바일 고객이 요구하는 물량과 가격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 HBM 투자 확대가 범용 D램 포기를 뜻하지는 않지만, 수요가 다른 제품군 사이에서 생산능력을 조정하는 부담은 커졌다. SK하이닉스는 HBM과 고부가 서버 메모리에 무게를 싣고 고객과의 장기계약을 확대하고 있다. 회사는 2분기 HBM4 대량 출하를 시작했고 약 10개 주요 고객사와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동시에 10나노급 6세대 공정 기반 D램 출하와 SOCAMM2 판매도 확대하고 있다. HBM에 집중하면서 서버용 일반 메모리까지 묶어 고객 수요에 대응하는 구조다. 두 기업의 차이는 경쟁의 출발점이다. 삼성은 폭넓은 메모리 제품군과 생산 포트폴리오를 조정해야 하고, SK하이닉스는 HBM을 중심으로 구축한 고객 관계와 고부가 제품 판매를 지속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중국 업체가 모바일과 일반 D램에서 공급을 늘리면 기존 제품의 수익성과 시장 기반을 함께 점검해야 한다. 中 LPDDR6까지 상용화…승부는 ‘양산 발표’ 다음에 CXMT의 행보는 LPDDR5X에 그치지 않는다. 회사는 지난 7일 차세대 모바일 메모리인 LPDDR6의 양산과 샤오미 플래그십 스마트폰 적용을 발표했다. 이번 G5 발표에 앞서 차세대 규격의 상용화를 알린 셈이다. 중국 업체의 경쟁 영역을 과거 세대의 저가 D램에만 한정해 볼 수 없는 이유다. 사업영역도 넓히고 있다. 실제 CXMT는 베이징 신규 시설에 낸드플래시 연구개발 생산라인 구축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는 계획 단계로, 상업 생산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D램에서 확보한 자본과 고객 기반을 다른 메모리 분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한국 기업에 필요한 것은 HBM 투자를 줄이는 단순한 대응이 아니다. AI 서버는 HBM뿐 아니라 고용량 일반 D램도 사용한다. HBM의 기술 우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서버용 DDR5와 저전력 메모리에서 고객이 요구하는 성능·가격·공급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G5 양산 발표가 글로벌 가격 질서를 바꿀지는 아직 불확실하다”며 “앞으로 확인해야 할 지표는 생산라인의 실제 양품 수율, 월간 출하량, 해외 고객사 확보 여부”라고 했다. 이어 “한국 기업에는 여기에 제품별 수익성과 생산능력 배분이라는 과제가 더해진다”면서 “AI 호황이 한국 메모리 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고 있지만, 그 사이 일반 D램 시장의 경쟁 구도도 달라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HBM을 앞세운 성장과 폭넓은 D램 시장의 기반을 동시에 지킬 수 있느냐. 중국의 추격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이 두 가지 과제를 함께 던지고 있다”고 했다.
2026-09-21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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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컴퓨터가 촉매 계산의 빈틈 찾았다…메가존클라우드·KISTI 산업 실증 시동
[경제일보] 양자컴퓨팅을 산업 현장의 문제 해결에 직접 적용해보는 실전형 실험이 국내에서 본격화되고 있다. 메가존클라우드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개최한 양자컴퓨팅 해커톤에서 기존 화학 계산법이 정확한 결과를 내기 어려운 영역을 양자컴퓨터로 찾아내는 연구가 대상을 받았다. 아직 양자컴퓨터가 산업 전반에서 고전컴퓨터를 대체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고전 계산의 한계를 특정하고 실험 비용과 시행착오를 줄이는 ‘보완재’로서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메가존클라우드와 KISTI는 26일 서울 삼정호텔에서 ‘Quantum Reframing Challenge 2026’ 본선을 열었다. 이번 대회에는 고등학생부터 대학생·대학원생, 연구자와 산업체 재직자까지 73개팀 214명이 참가 신청했고, 이 가운데 54개팀이 기획서를 제출해 12개팀이 본선에 올랐다. 본선에서는 아이온큐의 이온트랩, 파스칼의 중성원자, 콴델라의 광자 방식 등 서로 다른 양자컴퓨팅 환경에서 실제 구현·검증이 이뤄졌다. ◆ ‘양자야호’가 찾은 계산 오류의 틈 대상은 성균관대 바이오메카트로닉스학과 학생 3명으로 구성된 ‘Quanskkuad’팀이 차지했다. 팀은 이산화탄소를 에틸렌으로 전환하는 구리 촉매의 선택성을 예측하는 과정에서 기존 밀도범함수이론(DFT) 계산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는 강상관 영역을 양자컴퓨팅으로 검증하는 접근법을 제시했다. 핵심은 기존 계산법을 양자컴퓨터로 통째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구간에서 기존 계산의 오차가 커지는지를 찾아 실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는 것이다. 촉매 개발은 후보 물질을 합성하고 반복적으로 실험하는 과정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따라서 계산 단계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영역을 미리 가려낼 수 있다면 불필요한 후보 합성과 실험을 줄일 여지가 있다. 다만 이번 결과는 해커톤에서 확인한 ‘가능성’ 단계로, 실제 산업 현장에서 기존 방식 대비 비용·시간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는 후속 검증이 필요하다. 이번 대회의 특징은 양자 알고리즘 자체보다 산업 문제를 양자컴퓨터가 풀 수 있는 형태로 다시 정의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실제 본선 과제에는 반도체 전구체 계산 교정, 배터리 소재 후보 탐색, 항만 크레인 작업 배정, 야외 공연장 저음 소음 제어 등 다양한 산업·공공 문제가 포함됐다. 고전컴퓨터의 계산 오류를 보완하려는 계산과학형 과제와 경우의 수가 폭증하는 문제를 다루는 조합최적화형 과제로 나뉘었다. 특히 참가자들에게 생성형 AI 사용을 허용해 양자 프로그래밍 경험이 없는 참가자도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본선 진출팀에는 아이온큐·파스칼·콴델라의 플랫폼 튜토리얼과 실제 QPU 활용 기회, 전문가 멘토링이 제공됐다. 양자컴퓨팅을 소수의 물리·수학 전공자만 다루는 기술에서 산업 현장 개발자와 연구자가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 넓히려는 시도다. 이번 행사의 다음 단계는 실제 사업화다. 메가존클라우드와 KISTI는 우수 과제를 후속 개념검증(PoC)과 산업 실증으로 연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양사가 지난 3월 문을 연 한국양자융합센터(KQNC)를 활용한다. KQNC는 산업 특화 양자 알고리즘 개발과 기업 대상 PoC, 기술지원, 교육·인력양성을 수행하는 실행 거점으로 구축됐다. 정부도 양자산업의 초점을 하드웨어 개발에서 실제 활용으로 넓히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번 사업을 ‘양자컴퓨팅 서비스 및 활용체계 구축’ 사업과 연계하고 있으며, 지난 8월에는 양자를 미래성장동력 ‘7대 SEED’의 차세대 프런티어 분야로 선정했다. KISTI에 구축 중인 100큐비트급 아이온큐 이온트랩 양자컴퓨터의 산업 활용 사례를 늘리는 것도 이번 프로그램의 목적 가운데 하나다. 한편 이번 해커톤이 보여준 것은 ‘양자컴퓨터가 당장 고전컴퓨터보다 빠르다’는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고전컴퓨터가 어려움을 겪는 특정 문제를 골라내고, 실제 양자 하드웨어에서 검증한 뒤 산업 현장의 PoC로 연결하는 과정 자체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양자기술 경쟁이 큐비트 수와 하드웨어 성능 경쟁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메가존클라우드와 KISTI가 이번 성과를 실제 기업의 비용 절감과 연구기간 단축으로 연결한다면 국내 양자컴퓨팅 시장도 ‘기술 시연’에서 ‘산업 가치 창출’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반대로 후속 실증에서 기존 슈퍼컴퓨터·고성능컴퓨팅 대비 경제성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양자컴퓨팅의 산업화에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대회가 의미를 갖는 지점 역시 바로 이 검증 과정에 있다.
2026-08-27 16: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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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찾은 '구글의 전설' 제프 딘…"AI 경쟁, 결국 컴퓨팅 효율 싸움"
[경제일보] 인공지능(AI) 산업의 경쟁 구도가 거대언어모델(LLM)의 성능 경쟁에서 컴퓨팅 자원을 얼마나 확보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의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구글에서 27년간 AI와 컴퓨팅 인프라의 발전을 이끌었던 제프 딘이 한국에서 던진 메시지도 여기에 집중됐다. 딘은 지난 13일 서울 AI 허브에서 열린 특별강연에서 “향후 몇 년간 AI 발전의 핵심은 하드웨어와 컴퓨팅 자원을 얼마나 확보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더 큰 모델을 만드는 것만으로 AI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번 강연은 딘이 구글을 떠난 뒤 사실상 첫 공식 행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KAIST와 국가AI연구거점의 공동 초청으로 마련된 행사에는 KAIST를 비롯해 고려대·연세대·포스텍 등 컨소시엄 대학의 연구진과 학생, 기업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했고 온라인으로도 220여명이 참여했다. 딘은 1999년 구글에 합류한 이후 검색 인프라를 비롯해 구글의 AI 연구 기반을 구축한 핵심 인물이다. 분산 시스템 연구를 기반으로 대규모 연산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기술을 발전시켰고, 텐서플로와 구글의 AI 전용 반도체인 TPU 개발에도 관여했다. 최근까지는 구글 수석과학자로 차세대 AI 모델 제미나이 개발을 이끌었다. 그런 그가 구글을 떠나 과학 연구를 위한 AI 스타트업 ‘디스커버리 루프’를 창업하면서 업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구글과 같은 빅테크의 최고 수준 연구 환경을 떠나 새로운 회사를 선택한 만큼, 그의 이번 발언은 단순한 기술 전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 AI의 다음 병목은 ‘모델’보다 ‘연산’ 딘이 강조한 것은 AI 발전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의 변화다. 그는 학부 시절 신경망 학습을 연구했지만 당시 컴퓨팅 성능의 한계 때문에 연구 성과를 내기 어려웠고, 20여년이 지나 충분한 연산 자원이 확보되면서 당시 아이디어가 현실화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15년간 AI의 발전 역시 특정한 알고리즘 하나가 등장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연산 능력·데이터·모델 규모가 함께 확대된 결과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발언은 현재 AI 산업의 경쟁 구도를 정확히 관통한다.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가 대중화된 이후 기업들은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키고 더 큰 모델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경쟁해왔다. 그러나 모델 규모가 커질수록 학습과 추론에 필요한 컴퓨팅 비용도 폭증한다. 결국 AI 모델을 얼마나 잘 만드는가와 동시에 필요한 연산량을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는가가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 된다. 엔비디아가 AI 가속기 시장을 장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구글이 자체 TPU를 개발한 이유 역시 외부 반도체에만 의존하지 않고 AI 연산 구조에 맞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함께 최적화하기 위해서였다. 딘의 경력 자체가 이를 보여준다. 대규모 분산 시스템을 연구하던 컴퓨터과학자가 구글에서 TPU와 AI 시스템 개발에 참여한 것은 AI가 발전할수록 모델과 반도체, 데이터센터, 소프트웨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 한국 AI도 ‘모델 개발’ 이후를 준비해야 이번 딘의 KAIST 방문은 국내 AI 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AI 전략은 그동안 자체 파운데이션 모델 확보와 GPU 확보에 상당한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모델을 하나 확보한다고 AI 경쟁력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대규모 모델을 학습시키고 실제 서비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GPU와 AI 반도체, 데이터센터, 네트워크, 저장장치, 소프트웨어 등 전체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연결해야 한다. KAIST가 추진하는 ‘AI 시스템 이니셔티브’ 역시 이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AI 모델 자체뿐 아니라 하드웨어와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함께 최적화해 제한된 컴퓨팅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목표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와 KAIST의 협력이 이어지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엔비디아가 KAIST와 AI 공동연구소 및 피지컬AI센터 설립을 추진한 데 이어 구글의 핵심 AI 연구자가 직접 KAIST를 찾아 연구진과 분산 시스템과 AI 인프라를 논의했다. 이는 한국이 AI 모델 경쟁에서 단순히 해외 기술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AI 시스템 전체를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딘이 강연에서 “AI가 인간을 대체하느냐”는 질문에 인간과 AI가 각자의 강점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AI를 인간의 대체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풀기 위한 연구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창업한 디스커버리 루프가 과학 연구를 AI의 주요 적용 분야로 삼은 것도 의미가 있다. AI가 검색과 문서 작성, 코딩을 넘어 신약과 소재, 물리학 등 과학적 발견의 속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확장될 경우 필요한 컴퓨팅 규모는 지금보다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한편 딘이 한국에서 던진 메시지는 명확하다. AI 경쟁의 다음 승부처는 더 큰 모델을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연산 자원을 확보하고, 이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연결하고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한국이 AI 강국을 목표로 한다면 GPU 확보량이나 국산 모델 개발 성과만을 경쟁력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반도체부터 데이터센터, 네트워크, 분산 시스템, 모델까지 이어지는 ‘AI 풀스택’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27년간 구글의 AI 역사를 만들어온 연구자가 퇴사 직후 한국에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도 결국 이 지점이었다. AI 시대의 진짜 경쟁은 모델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는 시스템의 경쟁으로 넘어가고 있다.
2026-08-19 07:5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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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드포, AI API 비용 폭증 막는다…'파레토'로 토큰 지출 사전 통제
[경제일보] 생성형 인공지능(AI)과 AI 에이전트 도입이 확산하면서 기업들의 관심이 'AI를 얼마나 많이 활용하느냐'에서 'AI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이에 데이터 파운드리 기업 바운드포가 AI 토큰 비용을 사전에 통제하는 서비스를 선보이며 기업용 AI 비용 관리 시장 공략에 나섰다. 단순히 사용량과 비용을 보여주는 기존 모니터링 방식에서 나아가 예산을 초과할 것으로 예상되는 AI API 호출을 실행 단계에서 차단하는 방식이다. 12일 바운드포는 자사 AI 데이터 운영 플랫폼 '드로파이'에 AI 토큰 지출 관리 서비스 '파레토'를 새롭게 추가했다고 밝혔다. 최근 기업들은 하나의 AI 모델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 성격에 따라 여러 생성형 AI 모델과 API를 동시에 활용하고 있다. 고성능 모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AI 사용량 자체를 늘리는 이른바 '토큰맥싱'이 확산하는 등 AI 활용 확대가 기업 경쟁력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용량이 늘어날수록 비용 부담 역시 커지는 구조다. 특히 AI 에이전트가 확산하면서 토큰 비용의 성격도 달라지고 있다. 사람이 직접 AI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사용 시간이나 빈도에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AI 에이전트는 업무가 완료될 때까지 API를 자동으로 호출할 수 있다. 로봇이나 각종 디바이스에 AI가 탑재되면 24시간 작동하면서 지속적으로 모델을 호출하는 환경도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해 같은 요청을 반복하거나, 단순한 작업에 고성능 모델을 계속 사용하는 경우 예상하지 못한 비용이 누적될 수 있다. AI 사용량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목표였던 단계에서 벗어나 기업이 AI 비용의 발생 구조까지 관리해야 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기존 기업용 비용 관리 방식만으로는 해당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월말 청구서나 사용량 데이터를 통해 어느 서비스에서 비용이 발생했는지를 확인한다. 다만 AI API는 호출량과 토큰 사용량에 따라 비용이 실시간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사후에 비용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이미 발생한 지출을 되돌리기 어려운 것으로 평가된다. 바운드포는 파레토를 내놓은 것도 해당 문제를 겨냥했다. 바운드포는 파레토가 관리자가 설정한 예산 한도와 정책을 AI API 호출 과정에 적용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요청을 실행 전에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사용 이후 비용을 분석하는 '사후 관측'보다 비용이 발생하기 전에 통제하는 '사전 통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기업은 팀이나 프로젝트별로 AI 사용 예산을 설정할 수 있으며 현재 사용량과 예상 지출을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AI 에이전트가 자동으로 API를 호출하는 환경에서도 정해진 예산 범위 안에서 서비스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비용이 발생하는 패턴을 분석해 불필요한 지출을 찾아내는 기능도 제공한다. 실패한 API 요청이 반복되면서 비용이 누적되는 재시도, 사실상 동일한 요청을 반복 처리하는 중복 호출, 상대적으로 단순한 작업에 고성능 모델을 사용하는 과사양 모델 사용 등을 분석해 절감 가능성이 있는 영역을 리포트로 제공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어떤 모델을 얼마나 사용했는지를 확인하는 것뿐 아니라 어떤 업무에 어떤 모델을 사용했는지, 불필요한 호출이 발생하고 있는지, 설정한 예산을 넘어설 가능성이 있는지까지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AI 에이전트가 업무 자동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수록 비용 통제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AI 에이전트가 여러 단계의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요청에 그치지 않고 여러 모델과 API를 연속적으로 호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지컬 AI 확산도 변수다. 로봇이나 자율 시스템 등이 AI 모델을 활용해 주변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환경에서는 서비스가 작동하는 동안 지속적인 AI 추론과 API 호출이 발생할 수 있다. AI가 소프트웨어 안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기기와 연결될수록 토큰 비용이 기업의 운영비와 직접 연결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AI 시장의 경쟁 기준이 변하고 있다. 기존에는 더 뛰어난 성능의 모델을 확보하거나 이를 다양한 업무에 빠르게 적용하는 것이 기업의 AI 경쟁력으로 평가됐다면, 앞으로는 동일한 업무를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까지 중요한 요소가 될 전망이다. 바운드포는 파레토를 자사 AI 데이터 운영 플랫폼인 드로파이에 결합하면서 데이터 관리와 AI 비용 통제를 하나의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AI 활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관리하는 동시에 해당 데이터를 바탕으로 AI 사용 패턴과 비용 구조를 분석해 운영 효율까지 높이겠다는 것이다. 황인호 바운드포 대표는 "로봇과 디바이스가 24시간 AI를 호출하는 환경에서는 비용을 사후에 분석하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파레토는 피지컬 AI 현장에서 바운드포가 직접 겪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서비스"라며 "앞으로도 현장에서 검증한 운영 경험을 서비스로 고도화해 AI 데이터 관리부터 비용 통제까지 기업의 AI 운영 전반을 지원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2026-08-12 1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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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실적' vs SK하닉 '실탄'…AI 메모리 패권경쟁 2라운드
[경제일보] AI 반도체 전쟁의 열기가 다시 한국 증시를 흔드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역대급 실적으로 돌아왔고,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대규모 투자 재원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한쪽은 실적으로, 다른 한쪽은 자금조달로 AI 메모리 패권전 2라운드의 문을 열었다. 역대급 실적으로 돌아온 삼성의 '반격'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약 171조원, 영업이익 약 89조4000억원의 잠정 실적을 발표했다. 전년 동기 영업이익 4조6800억원과 비교하면 약 19배 수준이다. 이는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D램과 낸드 가격이 뛰고, 고부가 메모리 수요가 폭발한 결과다. 몇 년 전 HBM 경쟁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줬다는 평가를 받았던 삼성전자가 다시 메모리 슈퍼사이클의 중심으로 돌아왔다는 신호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정했다. 삼성전자가 실적을 발표한 지난 7일 코스피는 4.9% 급락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각각 6.9%, 6.1% 하락했다. 강한 이익이 이미 주가에 반영됐고, AI 메모리 호황이 얼마나 이어질지에 대한 의문이 커진 영향이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과열됐는지, 빅테크의 설비투자가 계속 늘어날지, 메모리 가격 상승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가 새로운 질문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은 단순한 HBM 점유율 싸움을 넘어섰다. 이제 승부처는 '누가 더 빨리 고성능 메모리 생산능력을 늘리느냐', '누가 엔비디아와 빅테크 고객의 장기계약을 더 단단히 묶느냐'. '메모리 사이클이 꺾일 때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로 옮겨갔다. 삼성전자의 무기는 종합 반도체 체력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파운드리, 시스템LSI, 패키징을 모두 가진 세계에서 드문 기업이다. AI 반도체가 복잡해질수록 칩 하나의 성능보다 메모리, 로직, 패키징을 함께 묶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삼성전자는 HBM에서 SK하이닉스에 먼저 밀렸지만, 메모리 전반의 가격 상승과 낸드 회복, 범용 D램 수요 반등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HBM 초반 주도권을 놓쳤다. AI 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 공급망의 신뢰를 먼저 얻은 쪽은 SK하이닉스였다. 삼성전자의 2분기 호실적에도 시장에서 '삼성이 AI 메모리의 가장 중요한 고객에게 가장 중요한 제품을 가장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HBM 선점한 SK, 자본시장서 실탄 확보 SK하이닉스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미국 주식 매각을 시작했고 280억7000만 달러(한화 약 43조원) 자금 조달을 추진하고 있다. 해당 자금은 국내 신규 반도체 공장 건설과 첨단 장비 확보에 쓰일 가능성이 크다. AI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는 시점에 글로벌 투자자 자금을 끌어와 생산능력 확대에 투입하겠다는 전략이다. HBM 선점으로 얻은 시장 신뢰를 자본시장으로 확장하려는 승부수다. SK하이닉스의 강점은 집중력이다. 삼성전자가 메모리와 파운드리, 모바일과 가전까지 거대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기업이라면, SK하이닉스는 메모리 한 분야에서 더 집중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특히 HBM에서는 엔비디아 공급망을 선점하며 'AI 시대 메모리 강자' 이미지를 굳혔다. HBM은 단순히 많이 만드는 제품이 아니다. 고객의 AI 가속기 설계 일정에 맞춰 성능, 발열, 전력 효율, 패키징을 함께 맞춰야 한다. SK하이닉스는 이 고객 맞춤형 대응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SK하이닉스의 대규모 자금 조달은 기회이자 동시에 부담이다. AI 메모리 호황이 길게 이어지면 선제 투자는 격차 확대의 무기가 되지만, 반대로 빅테크의 AI 투자가 둔화하거나 메모리 공급이 한꺼번에 늘어나면 대규모 설비투자는 고정비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호황 이후 겨누는 장기전 두 기업 모두 사이클 방어가 숙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기업들은 다운사이클 위험을 줄이기 위해 장기계약과 '테이크 오어 페이(Take or Pay)' 방식의 계약을 활용하고 있다. 이런 계약이 전체 매출을 모두 방어하는 것은 아닌 만큼 공급과잉이 현실화될 경우 충격을 완전히 막기는 어렵다.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쟁은 '누가 더 많이 버느냐'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전자는 실적으로 자신이 여전히 '메모리 강자'임을 증명해야 하고, SK하이닉스는 HBM 선점이 일시적 우위가 아니라 장기 경쟁력임을 입증해야 한다. 투자 포인트도 다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전체 체력과 포트폴리오 회복력이 강점이다. 메모리 가격 상승이 D램과 낸드 전반으로 번지면 삼성의 이익 레버리지는 더 커진다. 파운드리와 시스템반도체 부진이 부담이지만, 반대로 이 부문이 회복하면 실적 개선의 추가 여지도 생긴다. SK하이닉스는 HBM과 고성능 D램에 더 집중된 기업이다. AI 서버 수요가 계속 강하면 이 집중력이 더 큰 프리미엄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시장이 더 이상 '좋은 숫자'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의 2분기 잠정 실적은 압도적이지만, 주가는 흔들렸다. 이는 투자자들이 이미 AI 호황을 주가에 상당 부분 반영했고, 이제는 다음 국면을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AI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2027년 이후에도 지속될지, 가격 상승이 얼마나 이어질지, 고객의 장기계약이 실제 방어막이 될지가 중요해졌다. 한국 반도체 산업 전체로 보면 두 기업의 경쟁은 축복이자 부담이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동시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면 국내 장비·소재·부품 생태계는 커진다. 용인, 평택, 청주 등 반도체 거점의 산업적 무게도 커진다. 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너무 많은 투자가 몰리면 사이클 하강기에 충격도 커진다. 반도체 산업은 국가 전략산업이지만, 동시에 가장 냉정한 사이클 산업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지금은 강하지만, 진짜 승부는 가격이 오를 때가 아니라 가격이 흔들릴 때 드러난다"며 "AI 메모리 2라운드는 생산능력, 고객계약, 자금조달, 사이클 방어력까지 모두 겨루는 장기전"이라고 했다. 이어 "AI는 더 많은 메모리를 요구하고, 시장은 더 많은 증거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익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승패를 가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주경제 2026년 07월 09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7-09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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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구호가 아니라 인프라 전쟁이다
[경제일보]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이재명 정부의 첫 대형 산업 승부수로 떠올랐다. 정부는 반도체 수요 폭증과 지역균형발전을 동시에 겨냥해 서남권을 제2의 반도체 생산기지로 키우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이에 호응했다. 지난 6월 30일 광주에서 열린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삼성은 호남에 총 425조원을 투자하고, 광주에 약 400조원을 들여 신규 반도체 팹 2기를 짓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SK하이닉스도 서남권에 400조원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구상을 제시했다. 양사의 투자 규모를 합치면 825조원에 이른다. 정부가 내건 명분은 분명하다. AI(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기존 용인·평택·이천 중심의 수도권 반도체 축만으로는 미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호남을 새로운 생산기지로 개발해야 한다며 전력과 용수, 용지 여건을 언급했고, 청와대 안에 3대 메가프로젝트 직할 담당관을 두겠다고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도 3S+1F 전략을 통해 속도전, 거점전, 선도전, 총력지원체계를 제시했다. 그러나 반도체 클러스터는 발표문으로 지어지지 않는다. 반도체 공장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전력, 물, 땅, 인재, 협력업체, 물류, 정주 여건이 동시에 맞물려야 돌아가는 초정밀 산업 생태계다. 호남 클러스터의 성패도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정부와 기업이 ‘825조원’이라는 숫자를 꺼내 든 순간, 국민이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다. 과연 호남은 반도체를 감당할 인프라를 갖췄느냐다. 첫째는 전력이다. 반도체 팹은 전기를 먹고 산다. AI 데이터센터까지 결합되면 전력 수요는 더 커진다. 단순히 발전량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안정적이고 끊김 없는 전력망, 초고압 송전망, 변전 설비, 전력 품질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 반도체 라인은 순간 정전이나 전압 불안에도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전력 공급계획이 지역 민원과 송전망 지연에 막히면 400조원짜리 팹은 착공 전부터 병목에 걸린다. 둘째는 용수다. 반도체 생산에는 대량의 초순수가 필요하다. 정부는 전력과 용수 공급에 문제가 없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물은 행정명령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취수원, 정수·폐수처리 시설, 재이용 시스템, 지역 농업·생활용수와의 조정까지 함께 설계돼야 한다. 셋째는 사람이다. 반도체 클러스터의 진짜 경쟁력은 공장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할 엔지니어와 기술자다. 수도권에 집중된 고급 인력이 호남으로 이동하려면 좋은 일자리만으로는 부족하다. 교육, 의료, 주거, 문화, 교통이 함께 따라와야 한다. 가족이 옮겨 살 수 있는 도시가 돼야 인재가 온다. 지방에 공장을 짓고 인재는 수도권에서 출퇴근시키는 방식으로는 첨단산업 생태계를 만들 수 없다. 넷째는 기업의 자율성과 정책의 일관성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큰 틀의 투자 계획을 밝혔지만 구체적 입지와 세부 일정은 여전히 신중히 검토 중이다. 대규모 반도체 투자는 한 번 삽을 뜨면 수십 년을 간다. 정치 일정에 맞춰 서두를 일이 아니다. 기업이 투자 논리로 판단하고 정부는 인프라와 규제를 책임지는 구조가 돼야 한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균형발전 정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한국 첨단산업의 지도는 수도권과 일부 충청권에 지나치게 기울어 있었다. 호남이 농업과 전통 제조업의 이미지에 갇혀 있는 동안 청년은 떠났고 지역경제는 노쇠했다. 반도체 클러스터가 제대로 추진된다면 호남은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라 AI 데이터센터, 첨단 패키징, 미래 에너지, 소부장 기업이 결합된 남부권 산업축으로 도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균형발전은 지역 배분이 아니다. 산업 경쟁력을 해치면서까지 지도를 나누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반도체는 세계와 싸우는 산업이다. 미국, 대만, 일본, 중국은 국가 차원의 보조금과 인프라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이 호남 클러스터를 추진하려면 수도권 클러스터를 약화시키는 ‘분산’이 아니라, 수도권·충청·호남을 연결하는 ‘확장’이어야 한다. 용인과 평택이 흔들리고 호남이 뜨는 구조가 아니라 기존 거점은 더 빨라지고 새 거점은 더 넓어지는 구조여야 한다. 《논어》에 ‘공욕선기사 필선리기기(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라는 말이 있다. 장인이 일을 잘하려면 먼저 연장을 날카롭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연장은 전력망이고, 용수망이고, 도로·철도·항만이고, 대학과 연구소이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도시 환경이다. 연장이 무딘데 공장부터 세우면 산업은 오래가지 못한다. 정부는 이제 숫자의 정치에서 실행의 행정으로 넘어가야 한다. 825조원이라는 투자 규모는 국민의 기대를 키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숫자가 실제 공장, 실제 고용, 실제 수출, 실제 지역소득으로 바뀌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전력·용수·부지 인허가 일정을 공개하고 책임 주체를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지역 대학과 기업을 묶은 반도체 인력 양성 로드맵을 즉시 제시해야 한다. 셋째, 기업 투자 결정이 정치적 압박으로 비치지 않도록 세제·규제·인센티브 기준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성공하면 한국 산업 지도를 바꿀 수 있다. 실패하면 또 하나의 거대한 지역 공약으로 남을 수 있다. 차이는 말이 아니라 인프라에서 갈린다. 반도체는 균형발전의 깃발만 보고 오지 않는다. 전기와 물과 사람과 시간이 있어야 온다. 정부가 정말 호남을 대한민국 산업의 새 심장으로 만들고 싶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구호가 아니라 더 촘촘한 실행표다.
2026-07-03 12:5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