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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으로 끝나지 않은 4743만원…노태악 배우자 출장 의혹의 다섯 쟁점
[경제일보] 노태악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재임 중 배우자의 해외 출장에 들어간 비용 4743만8900원을 국고에 반납했다. 호주·뉴질랜드, 독일·에스토니아, 덴마크·스웨덴 등 세 차례 출장에서 배우자에게 지출된 비용을 중앙선관위가 산출한 금액이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노 전 위원장은 지난 1일 국회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배우자 출장 비용을 국고에 반납하거나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23일 국정조사에서는 배우자 동행과 관련해 “지금까지는 전부 다 그렇게 해왔고 아무런 이의 제기도 없어 특별히 의문을 갖지 않았다”는 취지로 답했다. 국고 반납으로 4743만여원은 회수됐다. 그러나 배우자 출장비를 국고에서 부담한 근거와 배우자의 공적 역할, 예산 편성·집행 과정, 외부 공개자료에서 동행 사실이 빠진 경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국민의힘 미디어특별위원회는 노 전 위원장 등을 업무상 횡령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고발했다. 합수본은 지난 20일 노 전 위원장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수사의 초점도 반납 사실보다 지출 당시의 의사결정 과정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반납은 국고 지출의 근거를 설명하지 못한다 공금 지출의 적법성은 돈을 돌려줬는지가 아니라 지출 당시 법령과 예산 목적에 맞았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배우자 동행이 선관위원장의 공식 업무 수행에 필요했는지, 배우자가 현지에서 맡은 공적 역할이 있었는지, 상대 기관이 배우자를 공식 초청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배우자 비용을 국고에서 부담할 수 있는 규정과 내부 지침이 존재했는지도 핵심 쟁점이다. 업무상 횡령 혐의는 노 전 위원장의 예산 집행 관여 정도와 국고 부담의 근거, 지출 경위와 당시 인식을 종합해 판단된다. 사후 반환은 지출 당시의 행위와 판단을 소급해 바꾸지 않는다. 반납 시점도 짚어야 한다. 배우자 동행은 노 전 위원장 재임 중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비용 반환은 국정조사에서 의혹이 제기되고 형사 고발이 이뤄진 뒤 진행됐다. 선관위 내부 점검으로 먼저 바로잡은 사안이 아니라 외부 문제 제기를 거친 뒤 취해진 조치다. 노 전 위원장이 국고에 반납한 4743만8900원이 배우자에게 들어간 비용 전부인지도 공개돼야 한다. 항공료와 숙박비, 식비, 현지 교통비를 어떻게 계산했는지, 공동 지출 가운데 배우자 몫은 어떤 기준으로 나눴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다 그렇게 해왔다”는 말이 넓힌 책임 노 전 위원장은 배우자 동행을 의심하지 않은 이유로 과거의 관행을 들었다. 선관위도 헌법기관장의 지위와 역할에 상응하는 예우를 고려해 예산 편성 단계부터 배우자 비용을 포함했다고 설명했다. 관행은 국고 지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법령과 예산 목적에 맞지 않는 지출이 반복됐다면 문제의 범위는 노 전 위원장의 세 차례 출장을 넘어선다. 선관위가 기관장 배우자의 출장 비용을 계속 부담해왔다면 전임 위원장 때도 같은 사례가 있었는지 조사해야 한다. 배우자 동행을 누가 제안했고 어느 부서가 예산을 편성했는지, 법률 검토와 내부 감사가 있었는지, 누가 최종 결재했는지도 확인 대상이다. 노 전 위원장의 기관장 책임도 사라지지 않는다. 예산 편성과 집행을 실무 부서가 맡았더라도 배우자를 세 차례 동반한 당사자이자 선관위의 최고 책임자는 노 전 위원장이었다. 관행을 따랐다는 설명은 국고 부담의 근거를 확인해야 할 기관장의 책임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 선관위는 정당과 후보자, 유권자에게 선거법과 절차를 엄격하게 적용한다. 후보자의 회계보고와 선거비용을 감독하고 작은 기재 오류와 기한 위반에도 책임을 묻는다. 기관장 배우자에 대한 예우가 오랜 관행이었다는 이유로 별도의 검증 없이 이어졌다면 선관위가 외부에 요구해온 기준과 내부에서 적용한 기준이 달랐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국민 눈높이’는 법적 근거를 대신할 수 없다 선관위는 “헌법기관장으로서 지위와 역할에 상응하는 예우를 고려해 예산을 편성할 때부터 배우자 예산을 편성했다”며 앞으로 국민 눈높이에 맞게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국민 눈높이는 국고 지출의 법적 근거를 대신하지 못한다. 배우자 동행이 공식 업무에 필요했다면 선관위는 관련 규정과 공식 일정, 초청 문서, 배우자가 수행한 역할을 제시해야 한다. 공적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 비용은 개인 부담 영역에 속한다. ‘헌법기관장 예우’라는 포괄적인 표현만으로 수천만원의 국고 부담을 설명하기도 어렵다. 예산에 배우자 비용이 편성돼 있었다는 사실도 지출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공공예산은 편성 목적과 실제 사용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 선관위 해명은 배우자가 어떤 자격으로 출장에 동행했는지 답하지 않았다. 공식 대표단 구성원이었는지, 의전상 동반이 필요했는지, 현지에서 수행한 일정이 무엇인지가 공개되지 않았다. 예우라는 설명만 있고 예우에 국고를 사용할 수 있는 근거는 제시되지 않은 상태다. 내부 예산에는 있고 외부 출장 내역에는 없었다 선관위는 배우자 비용을 예산 편성 단계부터 포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관위가 외부에 제출한 국외출장 내역에는 배우자 동행 사실이 기재되지 않았다. 내부에서는 배우자 동행을 전제로 비용을 편성하면서 외부 자료의 출장자 명단에서는 배우자가 빠진 것이다. 공식 출장 참여자로 보았다면 외부 자료에서 제외된 이유가 남는다. 공식 출장 참여자가 아니었다면 국고로 비용을 부담한 근거가 약해진다. 기재 누락이 서식과 작성 기준에 따른 것인지,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배우자가 제외된 것인지 조사해야 한다. 출장 결과보고서를 작성한 실무자와 검토자, 승인권자도 확인 대상이다. 예산자료와 공개자료의 불일치는 선관위의 정보 공개 기준과 연결된다. 배우자 동행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됐다면 국민은 누가 어떤 자격으로 출장에 참여했고 얼마의 예산이 사용됐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선거비용과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감독하는 기관이라면 내부 출장 예산과 참여자 정보도 같은 수준으로 관리해야 한다. 배우자 비용은 공식 예산에 반영하면서 동행 사실은 공개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도록 한 구조는 선관위의 설명 책임을 무겁게 한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함께 드러난 내부 통제 문제 배우자 동반 출장 의혹은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조사하는 국회 국정조사 과정에서 불거졌다. 투표용지 부족과 배우자 출장비는 발생 원인과 성격이 다르다. 두 사안에서 함께 제기되는 문제는 선관위 내부 통제다. 선거 당일 투표용지 수량을 점검하고 부족 사태를 막아야 할 관리 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같은 과정에서 기관장 배우자의 출장비가 세 차례에 걸쳐 국고에서 지출됐고, 외부 출장 내역에는 동행 사실이 없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선거 관리의 기본 업무와 수뇌부 관련 예산 집행에서 각각 어떤 점검과 감독이 이뤄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실무자의 판단에만 맡겨진 것인지, 중간 결재와 사후 감사가 형식적으로 진행된 것인지, 기관장이 관련 보고를 받았는지가 조사돼야 한다.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관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선거 관리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부여된 지위다. 예산 집행과 조직 운영까지 외부 감시에서 벗어나게 하는 특권은 아니다. 선관위가 고위 간부 자녀 특혜 채용과 선거 관리 부실에 이어 기관장 배우자 출장비 논란까지 맞으면서 독립기관의 책임 구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독립성은 스스로 법과 절차를 더 엄격하게 지킬 때 설득력을 얻는다. 수사와 자체 조사에서 확인해야 할 네 가지 합수본의 압수자료 분석은 배우자 출장비의 사용처와 함께 동행 결정, 예산 편성, 내부 결재, 공개자료 작성 과정을 향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배우자 동행에 공적 필요성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공식 초청과 현지 일정, 배우자의 역할이 판단 자료가 된다. 둘째, 국고 부담의 법령상·예산상 근거를 밝혀야 한다. 헌법기관장에 대한 예우가 어떤 규정에 따라 어느 범위까지 인정됐는지가 핵심이다. 셋째, 세 차례 출장의 의사결정과 결재 구조를 확인해야 한다. 노 전 위원장과 선관위 관계자들이 배우자 비용 편성과 집행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알았는지가 형사책임과 기관 책임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넷째, 외부 출장 내역에서 배우자 동행 사실이 빠진 경위를 밝혀야 한다. 예산자료와 공개자료가 달라진 과정과 작성·검토·승인 책임을 확인해야 한다. 선관위의 자체 점검도 필요하다. 노 전 위원장 재임 기간에 한정하지 않고 역대 위원장의 배우자 동반 출장과 비용 부담 사례를 조사해야 한다. 관련 규정과 출장보고서 공개 기준을 함께 손보지 않으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 노 전 위원장은 배우자 출장 비용 4743만8900원을 국고에 반납했다. 반납으로 확인된 것은 비용이 회수됐다는 사실이다. 세 차례 배우자 동행에 어떤 공적 필요성이 있었는지, 국고 부담은 어떤 근거와 결재를 거쳤는지, 공개자료에서 동행 사실이 빠진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노 전 위원장과 선관위가 설명해야 할 책임은 바로 그 지점에 남아 있다.
2026-07-21 09: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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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악 선관위, 홍명보호보다 더 위험한 실패
[경제일보] 홍명보 감독은 월드컵 32강 진출이 좌절된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표팀은 결과로 평가받는 조직이고, 감독은 그 결과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한국 축구는 또 한 번의 실패를 기록으로 남겼다. 아프지만 대표팀에는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전술과 선수 구성을 다시 손 볼 시간이 남아 있다. 노태악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선관위 역시 결과로 평가받아야 하는 조직이다. 다만 선관위가 책임져야 할 결과는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국민이 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제대로 보장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물러났다. 그러나 사퇴가 남기는 무게까지 같을 수는 없다. 축구대표팀의 실패는 국민에게 실망을 남기지만, 다음 대회에서 만회할 기회가 있다. 반면 투표용지가 없어 발길을 돌렸거나 언제 투표할 수 있을지 모른 채 투표소 앞에서 기다려야 했던 유권자에게는 다음 경기가 없다. 그 한 표는 선거 당일, 그 투표소에서 보장됐어야 했다. 이번 사태는 몇몇 투표소의 우발적 혼선으로 정리할 수 없다.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전국 1만4288개 투표소 가운데 140곳이 부족 가능성 때문에 추가 투표용지를 받았다. 이 가운데 실제 추가 용지를 사용한 곳은 91곳이었고, 26곳에서는 투표가 잠시라도 중단됐다. 선관위가 처음 파악한 범위를 넘어 피해 실태가 계속 드러난 것도 국민 불안을 키웠다. 사태의 시간표는 더욱 답답하다. 송파구선관위는 선거 당일 오전 11시 40~50분께 이미 무번호 투표용지 부족 가능성을 예상해 서울시선관위에 일련번호 부여 방안을 문의했다. 그러나 서울시선관위와 중앙선관위가 함께 대응에 나선 것은 약 5시간 뒤였다. 오후 4시 46분이 되어서야 송파구선관위가 일련번호를 기재하지 않은 투표용지를 투표소에 내보내겠다고 알렸고, 중앙선관위는 오후 5시가 넘어 민원을 계기로 서울시선관위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했다. 선거를 총괄하는 기관이 현장의 경고를 제때 받아내지 못하고, 민원과 혼란이 번진 뒤에야 대응에 나섰다면 이는 단순한 전달 실수의 문제가 아니다. 투표소별 투표율과 남은 용지를 누가 점검했는지, 어느 단계에서 위험 신호가 끊겼는지, 중앙 상황실은 왜 먼저 움직이지 못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말은 중앙의 책임을 덜어주는 근거가 아니라, 보고와 지휘 체계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를 묻게 하는 출발점이다. 진상규명위원회도 결론을 흐리지 않았다. 상급위원회에 대한 신속한 보고 체계가 작동하지 않았고, 상급위원회의 지휘권도 발동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서울시선관위는 중앙선관위와 논의하지 않은 채 투표시간 연장을 결정했고, 송파구선관위에서는 투표가 끝나기 전 개표가 시작되는 일도 있었다. 전국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이 선거일 하루 동안 같은 지휘선 아래 움직이지 못한 셈이다. 투표용지 인쇄 하한을 유권자 수의 60%에서 50%로 낮춘 결정도 비켜갈 수 없다. 해당 지침은 사무총장 전결로 처리됐다. 노태악 전 위원장은 국정조사에서 이를 알고 있었다고 답했고, 사전 보고에 대해서는 짧은 보고가 있었을 수 있으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인쇄 비율은 서류철 안의 작은 행정 항목이 아니다. 본투표일에 유권자가 몰릴 경우를 대비하는 최소 안전장치다. 보관 공간과 관리 비용을 고려할 수는 있어도, 그 판단이 투표소의 용지 부족으로 이어졌다면 선관위는 그 우선순위를 설명해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선거관리의 기준과 지휘 체계를 책임지는 자리다. 투표용지 인쇄 기준이 낮아졌다면 그 위험을 점검했어야 하고, 선거일 현장에서 부족 징후가 나타났다면 보고와 대응이 지체되지 않도록 조직을 움직였어야 한다. 최고 책임자의 역할은 현장의 숫자를 대신 세는 데 있지 않다. 현장이 흔들릴 때 조직 전체가 즉시 움직이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노태악 개인의 사퇴로만 마무리될 일이 아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노태악 전 위원장을 비롯한 선관위 수뇌부 12명에 대한 수사의뢰를 권고했고, 관련 실무자 6명에 대한 징계도 권고했다. 이는 유죄 판단이 아니다. 다만 이번 사태를 일선 직원 몇 명의 과실로 돌려 봉합할 수 없다는 뜻은 분명하다. 홍명보 감독의 사퇴는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의 표현이었다. 노태악 전 위원장의 사퇴는 참정권 보장에 실패한 국가기관 수장의 책임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 뒤에 따라야 할 절차도 달라야 한다. 누가 인쇄 기준을 낮췄는지, 현장의 경고가 어디에서 멈췄는지, 중앙은 왜 위험을 먼저 감지하지 못했는지, 그 판단과 지연에 책임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선관위의 독립성은 외부 권력이 선거 관리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독립기관이라는 지위가 내부 실패에 대한 설명 의무까지 덜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일수록 더 높은 수준의 준비와 책임이 요구된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개혁 구호가 아니다. 투표소에 가면 투표용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사고가 나면 국가기관이 즉시 수습할 것이라는 당연한 믿음이다. 홍명보호의 탈락은 한국 축구에 숙제를 남겼다. 노태악 선관위의 실패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다시 묻게 한다. 축구는 다음 대회를 기약할 수 있다. 하지만 선거는 다르다. 그날 투표소에서 행사되지 못한 한 표는 다음 선거가 아니라, 바로 그날 국가가 지켜냈어야 할 권리였다.
2026-06-30 07: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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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의 패착, 협회의 무책임, 악플의 폭주
[경제일보] 48개국이 겨루고 32개국이 살아남는 월드컵이었다. 한국 축구는 그 넓어진 문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조별리그 1승 2패, 조 3위, 최종 34위. 12개 조 3위 가운데 성적이 좋은 8개 팀에게까지 주어진 기회는 한국을 비켜 갔다. 대표팀은 체코전 승리로 출발했다. 그러나 멕시코에 무너졌고,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스스로 운명을 끝낼 기회를 놓쳤다. 비기기만 해도 조 2위로 32강에 갈 수 있었다. 상대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팀이었고, 한국은 지지 않아도 되는 팀이었다. 그런데 경기는 한국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조차 보여주지 못한 채 흘러갔다. 홍명보 감독의 패착은 손흥민을 선발 명단에서 제외한 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후반에 상대 체력이 떨어지고 공간이 생기면 손흥민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감독은 선발을 정할 권한이 있다. 누구를 앞세우고 누구를 아낄지, 어느 시점에 승부를 걸지는 전적으로 감독의 몫이다. 그러나 권한에는 결과가 따른다. 월드컵 32강이 걸린 경기에서 가장 위협적인 공격 자원을 벤치에 두는 선택은, 그만큼 치밀한 경기 설계와 대비책을 전제로 해야 한다. 한국은 전반부터 중원에서 밀렸고, 공격은 상대 수비를 흔들 만큼 날카롭지 못했다. 손흥민이 들어온 뒤에도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실점 뒤에는 조급함만 커졌고, 한국은 끝내 한 골을 만회하지 못했다. 축구에서 패배의 책임을 선발 명단 한 장에만 돌릴 수는 없다. 선수들의 몸 상태와 집중력, 상대의 전술, 경기 중 변수도 함께 작용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경기에서 누가 먼저 뛰고, 어떤 방식으로 승부를 설계했는지는 감독의 판단이다. 남아공전은 홍명보호가 이번 대회에서 보인 한계를 압축한 경기였다. 상대보다 먼저 준비하지 못했고, 경기가 틀어진 뒤에도 판을 바꿀 장면을 만들지 못했다. 홍 감독에게 이번 실패가 더욱 무거운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조별리그 탈락 뒤 물러났다. 12년 뒤 다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그 사이 한국 축구는 유럽 정상급 무대에서 뛰는 선수들을 더 많이 배출했고, 손흥민·김민재·이강인 같은 자원도 갖췄다. 경험과 선수층을 말할 조건은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결과는 두 번째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었다. 모든 패배가 감독 사퇴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월드컵 본선에서 두 차례 지휘봉을 잡고도 두 번 모두 조별리그를 넘지 못했다면, 사퇴는 선택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이다. 홍명보 감독은 떠나는 것이 맞았다. 다만 감독 한 명의 퇴장으로 한국 축구의 책임까지 정리하려 해서는 안 된다. 홍 감독은 처음부터 축구협회의 불투명한 선임 논란을 안고 출발했다. 문체부 특정감사는 홍 감독 선임 과정에서 규정상 권한이 없는 기술총괄이사가 면접에 관여했고, 절차도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축구협회는 그 판단에 이견을 보였지만, 선임 과정이 팬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까지 없앨 수는 없다. 대표팀 감독은 결과로 선임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자리다. 홍 감독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고 축구협회가 “감독이 책임지고 물러났으니 끝났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다. 감독을 뽑은 사람, 감독에게 권한을 주고 대표팀 운영을 관리한 사람, 월드컵을 앞두고도 국민을 설득할 만한 청사진을 내놓지 못한 사람들도 각자의 몫을 져야 한다. 축구협회가 해야 할 일은 새 감독 이름부터 꺼내는 것이 아니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감독 후보를 검증했고, 전력강화위원회는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으며, 왜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까지 일관된 경기력을 만들지 못했는지부터 답해야 한다. 사퇴한 감독을 앞세워 책임의 장부를 덮는다면, 다음 감독도 같은 의심과 불신 속에서 출발하게 된다. 이번 사태에서 더 우려스러운 것은 패배 뒤 쏟아진 악성 댓글과 협박이다. 국가대표 감독은 공적 비판의 대상이다. 선수 선발, 전술, 교체, 경기 운영, 인터뷰는 모두 국민이 평가할 수 있다. 손흥민을 왜 선발에서 뺐는지, 남아공전에서 왜 그런 전술을 택했는지, 두 번째 월드컵에서 무엇을 남겼는지 묻는 일은 정당하다. 표현이 불편하더라도 경기 내용과 사실에 근거해 판단을 비판하는 것은 막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비판에는 대상과 근거와 한계가 있다. 공항에서 살해하겠다는 식의 글, 확인되지 않은 사퇴설과 합성 이미지, 선수와 가족을 겨냥한 욕설과 허위사실 유포는 축구 비평이 아니다. 이런 행위는 공적 사안을 두고 의견을 제시하는 차원을 벗어나 협박, 명예훼손, 모욕의 법적 책임이 문제 되는 영역으로 들어간다. 표현의 자유는 권한을 가진 사람을 비판할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 타인의 신변을 위협하거나 허위사실을 퍼뜨릴 자유까지 보장하는 면허가 아니다. 공적 인물은 일반인보다 넓은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공적 인물이라는 이유로 가족과 지인까지 공격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의 전술 실패를 따지는 일과 인격을 짓밟는 일은 전혀 다르다. 선수의 부진을 분석하는 일과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 계정을 찾아가 협박성 글을 남기는 일도 다르다. 설영우 측이 악의적 비방, 인신공격, 허위사실 유포에 법적 대응 방침을 밝힌 것도 이 선을 넘은 공격이 실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선수는 경기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 평가가 가족을 끌어들이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위해를 예고하는 데까지 번진다면 그것은 스포츠를 향한 애정이 아니라 집단적 분풀이에 가깝다. 한국 축구는 패배할 때마다 한 사람을 골라 세우는 데 익숙했다. 감독이 패하면 감독 하나를 내보내고, 선수가 실수하면 그 선수의 이름을 조롱거리로 만든다. 그 사이 감독을 선임한 사람들의 판단, 대표팀을 운영한 사람들의 무능, 실패를 되풀이하게 만든 관행은 뒤로 숨는다. 이번에는 책임의 순서를 뒤바꾸지 말아야 한다. 홍명보 감독에게는 패착의 책임이 있다. 손흥민을 벤치에 둔 선택과 남아공전의 무기력한 경기 운영, 두 번째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은 모두 그의 성적표에 남아야 한다. 축구협회에는 더 큰 책임이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감독 선임 과정, 불신을 키운 운영, 결과가 나쁠 때마다 감독 교체로 사태를 봉합해 온 관행을 바꾸지 않는다면 같은 실패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살해를 예고하고,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선수와 가족을 향해 모욕을 쏟아낸 이들에게도 책임은 남는다. 분노가 컸다는 사정은 타인을 위협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홍명보는 떠났다. 그러나 한국 축구의 실패가 함께 떠난 것은 아니다. 감독의 패착은 기록으로 남고, 협회의 무책임은 해명과 쇄신으로 답해야 하며, 악플의 폭주는 법과 상식의 선에서 멈춰 세워야 한다. 그 세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다음 월드컵에서도 한국 축구는 또 한 사람을 내보내고, 또 다른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일로 실패를 끝낼 것이다.
2026-06-29 0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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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찾아간 투표소에 용지가 없었다
6월 3일 오후 1시, 서울 송파구 잠실2동 제6투표소. 투표용지가 바닥났다. 이미 줄을 서 기다리던 유권자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후 투표가 중단된 곳들이 속속 생겨났고, 일부 투표소는 오후 10시까지 투표를 연장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뒤늦게 인정한 용지 부족 투표소는 최종 전국 50곳이었다. 언론은 이 사태를 선관위의 행정 실수로 보도했다. 절반은 맞다. 그러나 절반은 빠져 있다. 이 사태가 모든 유권자에게 동등한 피해를 입혔다는 가정이다. 그렇지 않다. 투표소 앞에서 기다리다 돌아선 유권자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고령자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관위가 유권자의 절반만 온다고 계산한 근거 이번 사태의 직접 원인은 명확하다. 중앙선관위가 본투표 용지 인쇄 비율 하한을 전체 유권자의 50%로 설정했다. 사전투표가 일반화된 이후 본투표 참여율이 낮아졌다는 과거 데이터를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달랐다.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동시에 치러지면서 투표 참여율이 61%로 치솟았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본투표 참여율이 50%를 훌쩍 넘어섰고, 준비된 용지는 바닥났다. 선관위는 "예측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투표율 상승은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있었다. 재보궐선거 병행, 정치적 관심 고조 등 여러 변수가 이미 공개된 상황이었다. 불확실성이 있을 때 안전 마진을 확보하는 것은 행정의 기본이다. 선관위는 그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 왜 고령 유권자에게 더 가혹한가 투표소 혼란은 모든 유권자에게 불편을 줬다. 그러나 '불편'의 무게는 같지 않다. 젊은 유권자는 스마트폰으로 상황을 확인하고, 대기 번호를 받아두고,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다 돌아올 수 있다. 저녁 10시까지 기다리는 것도 상대적으로 감당 가능하다. 고령 유권자는 다르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에게 투표소까지의 이동은 그 자체로 큰 결심이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거나 자녀의 도움을 받아 찾아온 투표소 앞에서 "용지가 없으니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선택지는 둘뿐이다. 체력이 허락하는 한 버티거나, 포기하고 돌아서거나. 오후 10시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많은 어르신에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인지 기능이 저하된 고령자에게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와 대기는 더 큰 혼란을 준다. "대기 번호를 받아두면 나중에 올 수 있다"는 안내가 전달됐다 해도, 이를 이해하고 실행하기 어려운 어르신들이 있다. 이들에게 투표용지 부족은 단순한 대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참정권 박탈이었다. 선관위의 실수는 모든 유권자에게 동등하게 가혹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가장 깊이 피해를 입은 것은 몸을 이끌고 투표소를 찾아온 고령 유권자였다. 선관위는 고령 유권자를 설계에 포함시킨 적이 없다 이번 사태는 예외적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 무관심의 결과다. 선관위의 투표 운영 설계는 평균적인 유권자를 상정한다. 스마트폰을 쓸 줄 알고, 상황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며, 장시간 대기가 가능한 유권자다. 고령 유권자, 장애인, 거동 불편자는 이 설계의 바깥에 있다. 거소투표 신청 기한, 투표보조인 요청 방법, 임시기표소 안내 — 이 모든 제도가 존재하지만, 제도의 존재를 아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필요한 사람에게 닿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선관위는 고령 유권자를 위한 접근성 설계를 독립적인 정책 과제로 다룬 적이 없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그 무관심이 극단적 형태로 드러난 사건이다. 65세 이상 유권자는 이미 전체 유권자의 20%에 달한다. 이들이 투표소에서 겪는 현실적 장벽을 측정하고, 개선하고, 책임지는 주체가 선관위 안에 없다. 위원장이 사퇴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조사 범위에 고령 유권자 피해 실태가 포함될지는 불확실하다. 책임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선관위 위원장이 사퇴했다. 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러나 이 수습이 '투표용지를 왜 부족하게 인쇄했는가'에만 집중된다면, 문제의 절반만 다루는 것이다. 세 가지 질문이 추가로 다뤄져야 한다. 첫째, 용지 부족으로 투표를 포기한 유권자 중 고령자 비율이 얼마나 되는가. 이것은 집계 가능한 데이터다. 선관위는 이를 공개해야 한다. 둘째, 고령 유권자의 투표 접근성을 독립적인 지표로 관리하는 체계가 선관위 안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번 기회에 만들어야 한다. 셋째, 투표 운영 설계 단계에서 고령자·장애인 등 취약 유권자의 접근성을 사전 검토하는 의무 절차가 있는가. 이것 역시 없다면, 법제화를 검토해야 한다. 투표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다. 그 행위가 가능하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은 선관위의 존재 이유다. 힘겹게 찾아온 투표소 앞에서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이번 사태 보도에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진상규명위원회가 무엇을 조사하고, 무엇을 조사하지 않는지를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2026-06-07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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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용지 부족한 선거, 정신 나간 선관위
민주주의는 선거로 시작해 선거로 완성된다. 주권을 가진 국민이 자신의 의사를 평화적으로 표출하고, 국가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엄숙하게 확인하는 성스러운 과정이 바로 선거다. 그렇기에 선거는 단순한 정치적 이벤트나 행정 절차가 아니다. 국가의 정당성을 담보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떠받치는 가장 견고한 기둥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있어서는 안 될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서울 송파구와 광진구를 비롯한 일부 수도권 핵심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바닥나 투표가 중단되거나 무한정 지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행정 시스템과 정보통신 기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선거 역사에서 이처럼 황당하고 부끄러운 오점이 언제 있었던가. 소식을 접한 많은 국민은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다. 선거 당일 흉흉하게 떠도는 가짜뉴스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신성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일터와 가정에서 시간을 쪼개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은 투표용지가 없다는 황당한 안내를 받으며 수십 분, 길게는 몇 시간씩 줄을 서서 대기해야 했다. 참다못한 일부 유권자들은 결국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한 채 분통을 터뜨리며 발길을 돌렸다. 국가가 국민의 참정권을 폭력이나 강압이 아닌, ‘준비 부족’이라는 한심한 행정 무능으로 박탈한 셈이다. 도대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사태가 커지자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내놓은 해명은 더욱 가관이다. 선관위 측은 “예상보다 투표율이 너무 높게 나와 현장에서 수요를 맞추지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해명은 법치국가의 기본 상식은 물론이고 보통의 일반 국민이 가진 보편적 이성으로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투표율이 예상보다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은 선거 행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변수다. 더욱이 선거관리라는 고유의 목적을 지닌 헌법기관의 핵심 업무는 바로 그러한 모든 예외적 상황과 최악의 시나리오에 완벽하게 대비하는 것이다. 비가 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듯, 투표율이 100%에 육박하더라도 모든 유권자가 표를 던질 수 있도록 충분한 투표용지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것은 선거 행정의 초보적인 의무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이미 확정된 유권자 명부가 존재한다. 어느 동네, 어느 투표소에 몇 명의 유권자가 적을 두고 있는지 선관위는 시스템을 통해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특정 지역 투표소에 유권자 수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투표용지만 공급했다는 사실은 어떤 핑계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명백한 직무유기다. 일각에서 나오는 “남아서 폐기되는 투표용지의 예산을 아끼려다 벌어진 일”이라는 식의 변명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단언컨대, 투표지 몇 장을 폐기하는 비용보다 단 한 명의 국민이 가진 참정권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무겁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히 현장 공무원 몇 명의 행정 착오나 실수가 아니다. 국민의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헌법상 참정권이 국가기관에 의해 침해당한 중대한 민주주의 훼손 사건이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투표권은 주권자가 국가 권력을 통제하고 참여하는 유일무이한 열쇠다. 한 표의 가치는 곧 국민주권의 크기와 같다. 그런데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감시해야 할 선관위가 오히려 부실한 준비로 국민의 투표권 행사를 가로막고 방해했다면, 이는 결코 가볍게 웃어넘길 해프닝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반복되는 부실 관리가 선거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근본적으로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는 결과의 공정함보다 과정의 투명성과 절차적 신뢰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무리 완벽하고 공정한 개표 결과가 도출된다 한들, 국민이 그 과정을 믿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기초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선관위가 보여준 행보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지난 선거에서의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부터 시작해 투표지가 외부로 반출되는 인재가 발생했고, 조직 내부적으로는 고위직 자녀들의 특혜 채용 비리 의혹까지 터져 나오며 국민적 신뢰를 이미 바닥까지 잃은 상태였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또다시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대형 사고가 터지니, 사회 일각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부정선거 음모론과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다. 물론 필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제기되는 맹목적인 부정선거 음모론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차가운 사실과 객관적인 증거 위에서만 올바르게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점은, 선관위가 보여준 연속적인 실책과 안일함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는 의혹의 가짜뉴스들이 자라날 비옥한 토양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거 없는 의혹을 양산하는 세력도 문제지만, 그 의혹에 땔감을 던져주며 빌미를 제공한 국가기관의 책임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된다(天下難事 必作於易)”고 역설했다.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것은 정밀한 균열이 아니라 사소한 틈새 하나를 방치했을 때다. 투표용지를 인쇄하고 수량을 맞춰 현장에 배부하는 일은 거창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나 첨단 인공지능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 아니다. 선거 행정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그 가장 기초적인 기본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논어』에서도 공자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그 직분에 있지 않은 것과 같다”고 꾸짖었다. 막강한 권한과 독립성에는 그에 상응하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법이다. 선관위는 선거의 공정성을 위해 헌법이 엄격하게 독립성을 보장해 준 초연적 기관이다. 권한이 강한 만큼 그들이 가져야 할 책임 의식은 일반 행정 부처보다 몇 배는 더 무겁고 철저해야 마땅하다. 이번 사태는 선관위가 관례대로 사과문 한 장 발표하고 적당히 구렁이 담 넘어가듯 뭉개고 끝낼 사안이 결코 아니다. 독립적인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철저한 진상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도대체 어느 선에서 어떤 기준으로 투표용지 발행 수량을 제한했는지, 현장에서 용지가 부족하다는 비명이 터져 나왔을 때 왜 제때 보고와 추가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비상 대응 매뉴얼은 작동했는지 전 과정을 국민 앞에 한 치의 의혹도 없이 낱낱이 밝혀야 한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선관위의 운영 시스템 전반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구조적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견고한 방패 뒤에 숨어, 감사원의 감사를 거부하거나 외부의 정당한 비판을 무력화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지금의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구조를 전면 점검해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독립기관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진짜 적은 한 번의 실수가 아니다. 그 실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반성하지 않고, 결국 같은 실수를 부끄러움 없이 반복하는 나태함이다. 신뢰라는 탑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눈물겹게 쌓아 올려야 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것은 단 하루, 한순간의 방심으로 족하다.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울린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순진한 행정 착오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썩어가고 있다는 엄중한 경고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선관위는 이번 참사를 계기 삼아 조직의 명운을 걸고 뼈를 깎는 자기 혁신과 인적 쇄신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유권자의 소중한 참정권을 지키고 부서진 선거의 신뢰를 간신히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인들의 거창한 구호나 헌법 조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줄을 서서 내 표를 기다리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참정권을 단 하나도 흘리지 않고 빈틈없이 받아내 지켜내는 현장의 땀방울에서 시작된다. 선관위는 이번 사태의 치욕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위대한 대한민국 유권자들 역시 선관위의 향후 행보를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2026-06-04 07:5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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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택 CPO 퇴사 수순…카카오, '카톡 개편' 후폭풍에 리더십 공백
[경제일보] 카카오 최고제품책임자(CPO)가 퇴사 수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면서 카카오톡 개편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해 카카오톡의 친구탭을 피드형 구조로 바꾸는 대규모 개편을 주도한 핵심 임원이 물러나면서, 카카오는 이용자 민심 회복과 AI 기반 서비스 전환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떠안게 됐다. 27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홍 CPO는 최근 사의를 표명하고 퇴사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홍 CPO는 토스뱅크 대표를 지낸 뒤 지난해 카카오에 합류해 카카오톡을 비롯한 주요 제품 전략을 총괄했다. 당시 카카오는 ‘빅뱅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카카오톡의 대대적인 개편을 추진했다. 논란의 중심은 친구탭 개편이었다. 카카오는 지난해 9월 카카오톡 첫 화면 성격의 친구탭을 기존 전화번호부형 목록에서 인스타그램식 피드형 구조로 바꿨다. 친구의 프로필 변경이나 게시물을 더 적극적으로 노출하고, 광고 지면도 함께 확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용자들은 “메신저 본질을 훼손했다”, “원치 않는 소식과 광고가 과도하게 노출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구글 플레이스토어와 애플 앱스토어에는 낮은 평점과 이전 방식으로 돌려달라는 리뷰가 이어졌고, 카카오는 결국 친구 목록을 첫 화면에서 다시 볼 수 있도록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홍 CPO는 당시 사내 공지를 통해 개편 방향을 ‘소셜 확장’과 ‘메신저 기능 강화’로 설명했다. 앱 다운로드 수와 트래픽 등 주요 지표는 유지되고 있다고 밝히면서도, 이용자 불편을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그러나 해명 이후에도 책임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만 카카오톡 개편은 실적 측면에서는 일정한 효과를 냈다. 카카오의 올해 1분기 연결 매출은 1조9421억원, 영업이익은 2114억원이었다. 플랫폼 부문 중 톡비즈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9% 증가한 6086억원을 기록했고, 톡비즈 광고 매출은 338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6% 늘었다. 카카오는 금융 광고주 중심의 수요 확대, 메시지 상품 다각화, 디스플레이 광고 증가 등을 성장 배경으로 설명했다. 결국 카카오톡 개편은 ‘수익성 개선’과 ‘이용자 신뢰 훼손’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동시에 남겼다. 광고 지면 확대와 체류 시간 증대는 카카오의 숙원이던 톡비즈 성장에 기여했지만, 국민 메신저로서 쌓아온 편의성과 신뢰에는 타격을 줬다. 카카오톡은 단순 앱이 아니라 국내 이용자의 일상 인프라에 가까운 서비스다. 이 때문에 이용자 동의 없이 사용 경험을 크게 바꾸는 실험은 일반 플랫폼보다 더 큰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다. 홍 CPO의 이탈은 카카오의 제품 리더십에도 부담이다. 카카오는 올해 카카오톡을 중심으로 AI 에이전트, 맞춤형 추천, 광고·커머스 고도화 전략을 본격화해야 한다. 하지만 카카오톡 개편을 주도했던 핵심 임원이 물러나면서 서비스 방향성과 조직 운영의 연속성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 카카오가 풀어야 할 과제는 분명하다. 광고와 커머스 수익을 키우되 이용자가 카카오톡을 ‘불편한 광고판’으로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 AI 기능을 붙이더라도 메신저 본연의 간결함과 사적 소통의 안정감을 해치지 않는 설계가 필요하다. 후임 CPO 인선도 단순한 자리 채우기가 아니라, 제품 철학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카카오 측은 후임 인선을 서둘러 경영 공백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인사만으로 논란이 끝나지는 않는다. 카카오톡 개편 사태는 카카오가 성장 정체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이용자와 어떤 방식으로 합의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2026-05-27 17: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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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 허위사실 유튜버 사과로 소송 취하…'사이버 렉카' 향한 강력 경고
[경제일보] 엔씨가 자사 게임 ‘아이온2’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한 유튜버의 공식 사과를 받아들이고 법적 조치를 취하했다. 단순한 선처로 끝난 사안이 아니다. 게임 출시 초반 여론을 좌우하는 유튜브·커뮤니티 콘텐츠의 영향력이 커진 상황에서, 엔씨가 허위사실과 악의적 비방에 더는 소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겠다는 기준선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번 사건은 유튜브 채널 ‘겜창현’이 ‘아이온2’와 관련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반복적으로 게시했다는 엔씨의 판단에서 시작됐다. 엔씨는 지난해 12월 해당 유튜버를 상대로 형사 고소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동시에 제기했다. 당시 엔씨는 해당 채널이 “무과금 이용자만 제재한다”, “매크로를 끼워서 팔고 있다”, “엔씨 관계자가 작업장 사장이다” 등의 주장을 했고, 이는 사실이 아니거나 모욕적 표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이후 해당 유튜버는 지난 21일 자신의 채널을 통해 사과 영상을 올렸다. 그는 방송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말하고 과도한 비방을 했다는 취지로 고개를 숙였다. 엔씨는 해당 유튜버가 잘못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사과 의사를 전했으며,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점 등을 고려해 민·형사상 법적 조치를 취하했다. 엔씨의 대응은 이번 한 건에 그치지 않는다. 회사는 지난 4월에도 ‘리니지 클래식’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유튜브 채널 ‘영래기’ 운영자를 허위사실 유포와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당시 엔씨는 해당 유튜버가 리니지 클래식에서 불법 프로그램 사용자를 방치하고, 오히려 신고한 정상 이용자들을 제재했다는 주장을 했지만 내부 데이터 분석과 사내외 전문가 검토 결과 명백한 허위사실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처럼 엔씨가 잇따라 법적 대응에 나선 배경에는 신작 성패를 좌우하는 초반 여론의 민감성이 자리한다. 게임은 출시 직후 이용자 반응과 커뮤니티 평판, 스트리머·유튜버 영상이 곧바로 매출과 접속자 지표에 영향을 준다. 특히 MMORPG는 운영 신뢰가 핵심이다. 매크로, 과금, 제재, 작업장, 내부자 연루 같은 의혹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확산되는 순간 이용자 불신을 키운다. 엔씨 입장에서 ‘아이온2’와 ‘리니지 클래식’은 단순한 신작이 아니다. 사명 변경 이후 실적 회복과 브랜드 신뢰 회복을 보여줘야 하는 핵심 타이틀이다. 이런 상황에서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자극적 썸네일과 단정적 표현으로 퍼질 경우, 이용자뿐 아니라 주주와 임직원, 개발 조직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엔씨가 “고객, 주주, 임직원 보호”를 법적 대응 명분으로 내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임업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이른바 ‘사이버 렉카’형 게임 유튜버에 대한 경고로 보고 있다. 게임 이슈를 빠르게 다루는 콘텐츠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용자 불만을 전달하고 운영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정당한 감시 기능이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사실처럼 말하거나, 특정 기업·개발자·이용자를 겨냥해 반복적으로 비방하는 방식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글로벌이코노믹은 최근 게임업계가 유튜버 등 1인 미디어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서고 있으며, 엔씨 고소 사례가 팬덤과 1인 미디어의 양면성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과거에도 게임 커뮤니티와 유튜브를 둘러싼 명예훼손·모욕 논란은 있었다. 다만 대형 게임사가 특정 게임 유튜버를 상대로 형사 고소와 민사 손해배상 소송을 동시에 제기하고, 이후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낸 사례는 게임업계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연합뉴스도 엔씨의 겜창현 법적 대응을 두고 게임사가 특정 유튜버를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업계 반응을 전했다. 법·제도 환경도 콘텐츠 생산자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구독자 10만명 이상 또는 일정 조회수 이상 콘텐츠 생산자가 고의로 허위·조작정보를 유포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힐 경우 손해액의 최대 5배까지 배상 책임을 지우는 정보통신망법 시행령 개정안을 보고한 바 있다. 실제 입법과 적용 과정에서는 표현의 자유 논란이 남아 있지만, 허위정보 유통에 대한 사회적 책임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엔씨의 이번 선처는 ‘봐주기’라기보다 경고장에 가깝다. 회사는 해당 유튜버가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기 때문에 소송을 취하했다. 동시에 허위사실 유포와 악의적 비방에 대해서는 원칙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사과하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허위 콘텐츠가 법적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앞으로 게임사들의 대응 방식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는 논란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유튜버나 커뮤니티발 의혹에 침묵하거나 공지로만 해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신작 흥행과 기업 신뢰에 직접 타격을 주는 허위사실에는 고소, 손해배상, 영상 삭제 요청, 정정보도 요구 등 실질적 대응이 늘어날 수 있다. 콘텐츠 생산자들도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 의혹 제기는 가능하지만, 사실 확인 없는 단정은 위험하다. 내부자 연루, 불법 프로그램 방치, 과금 조작, 특정 이용자 차별 제재 같은 주장은 게임사의 신뢰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근거가 부족한 내용을 조회수 경쟁을 위해 반복적으로 확대하면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이번 사건은 엔씨가 ‘두들겨 맞는 회사’에서 ‘법적으로 반격하는 회사’로 태도를 바꿨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용자 비판은 수용하되, 허위사실과 악의적 비방은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겜창현 사과와 소송 취하는 게임 유튜버 전체, 특히 자극적 폭로와 단정적 비방으로 조회수를 얻어온 사이버 렉카형 채널에 분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게임 여론은 이제 게임 안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유튜브 영상 하나가 신작의 이미지를 만들고, 커뮤니티 게시글 하나가 운영 신뢰를 흔든다. 그래서 비판은 더 필요해졌고, 동시에 사실 확인도 더 중요해졌다. 엔씨의 강경 대응은 게임업계가 콘텐츠 생태계의 책임 문제를 더는 방치하지 않겠다는 출발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2026-05-23 13:5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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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번 사람과 존경받는 사람 사이
[경제일보]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수면 위아래를 오가고, 미국의 군사자산이 걸프만에 묶여 있는 동안,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5분의 1이 통과하는 이 좁은 해협은 국제 에너지 시장의 심장부로 떨리고 있다. 위기가 반복될 때마다 유가는 오르고 선박 운임도 함께 치솟는다. 누군가는 그것을 공포로 기억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시장의 기회로 바꾼다. 냉정하게 말하면 해운업은 원래 그런 세계다. 세계의 불안 위에서 수익을 만든다. 그러나 같은 돈을 벌어도 세상은 어떤 기업인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어떤 기업인에게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부를 숫자로만 생각하지만 실제 사회는 숫자보다 태도를 기억한다. 그 돈이 어디를 향했는지,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남겼는지, 위기 속에서 어떤 얼굴을 보여줬는지를 더 오래 붙들고 산다. 요즘 해운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름 가운데 하나가 장금상선의 정태순 회장이다. 호르무즈 리스크와 VLCC 운임 급등 속에서 장금상선은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 VLCC, 즉 초대형 원유운반선은 길이 300미터를 넘는 거대한 선박으로 단 한 번의 항해로 20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실어 나른다. 중동과 아시아를 잇는 원유 수송의 대동맥이자, 시황이 불안할 때는 바다 위의 원유 저장고가 된다. 장금상선은 세계 최대 수준의 VLCC 선대를 확보했고 최근에는 100척 규모의 초대형 발주까지 추진하며 시장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냉혹한 시장 판단만 놓고 보면 대단한 승부사다. 그런데 정태순 회장에 대한 업계 안팎의 시선은 의외로 우호적이다. 해운업은 원래 국민적 호감을 얻기 어려운 산업이다. 배는 바다 위에 있고 돈은 숫자로 움직인다. 일반 국민에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태순 회장이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번 돈을 어디에 썼느냐와 관련이 있다. 정 회장은 해양 인재 양성 지원과 공익재단 활동, 기부와 사회공헌을 꾸준히 이어왔다. 거창한 이름을 앞세운 자선이 아니었다. 산업과 사람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조용하게 쌓아왔다. 시장은 결국 그것을 읽는다. "함께 가는 기업인"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기업인은 사회 안에서 존재한다. 공동체가 등을 돌리면 아무리 많은 배를 가져도 고립된다. 반대로 공동체와 호흡하면 부는 비로소 존경으로 이어진다. 완벽한 기업인이라는 말이 아니다. 어느 기업주에게나 그늘은 있다. 다만 정태순 회장의 이름 앞에 지금 붙는 수식어는 '탈세'가 아니라 '해양'이다. 그 차이는 작지 않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한 인물이 떠오른다. 한때 '선박왕'으로 불렸던 시도그룹 권혁 회장이다. 권혁 회장의 사업은 VLCC와는 결이 다르다. 벌크선과 컨테이너 피더선을 중심으로 인트라아시아 항로를 누볐다. 정태순 회장과는 다른 바다에서 다른 배로 싸운 사람이다. 그러나 해운업 안에서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이름이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행로는 오늘의 주제와 함께 놓일 수밖에 없다. 권혁 회장은 한국 해운업 역사에서 빼놓기 어려운 이름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십수 년간 국내 조선소에 총 121척의 선박을 발주했다. 계약 규모는 약 9조 원, 직·간접 경제효과는 13조원을 넘는다는 추산도 있었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을 포함한 조선 빅3와 중소 조선소까지, 일감 가뭄에 시달리던 현장에 권혁 회장의 발주서는 단비였다. 수천 명의 용접공과 설계사, 협력업체 직원들이 그 계약서 한 장에 생계를 얹었다. 공격적 투자와 승부사 기질만 놓고 보면 한국 조선·해운업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선박왕'이라는 이름도, 한국판 오나시스라는 수식어도 그 시절에 붙었다. 그러나 세상이 권혁 회장을 기억하는 방식은 안타깝게도 그 이름 쪽으로 굳어지지 않았다. 2010년 국세청이 권혁 회장에게 4101억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역외탈세 혐의였다. 언론은 앞다퉈 보도했고 '선박왕'은 하루아침에 '탈세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왕 시리즈' 보도의 대표 사례가 됐다. 1심에서는 징역 4년에 벌금 2340억원이 선고됐다. 물론 법적으로 볼 부분은 냉정하게 봐야 한다. 최종 확정심에서 실제 유죄로 인정된 세액은 약 7억원 수준이었다. 핵심 쟁점이었던 법인세 포탈 혐의는 무죄로 확정됐다. 수천억 원짜리 세금 폭탄이 7억원짜리 판결로 귀결된 것이다. 국제 해운업의 특수성도 있다. 선박은 편의치적국에 등록하고 운영은 다국적 법인 네트워크를 통한다. 이 구조가 조세 회피를 위한 것인지 글로벌 해운업의 통상 관행인지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되지 않는다. 당시 국세청 역외탈세 수사가 실적 압박 속에서 과도하게 진행됐다는 비판도 법조계 일각에서 제기됐다. 조세 정의와 산업 현실 사이의 균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 사건은 남겼다. 그러나 기업인의 평판은 판결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민은 판결문보다 기억을 더 오래 붙들고 산다. 언론이 처음 보도한 4101억원짜리 헤드라인은 기억되고, 대법원에서 사실상 뒤집어진 결론은 기억되지 않는다. 더구나 권혁 회장은 재판 기간 내내 언론을 통해 억울함을 간간이 피력했다.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과 사회적 신뢰를 쌓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는 자신의 서사를 방어하는 행위이고 후자는 공동체에 무언가를 내어주는 행위다. 사회는 자신을 향한 해명보다 타인을 향한 행동을 더 오래 기억한다. 결국 권혁 회장에게 남은 것은 "수천억 원대 조세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라는 그림자였다. 바로 그 지점에서 기업인의 운명이 갈린다. 세상에는 돈 많은 사람이 많다. 그러나 존경받는 부자는 드물다. 한국 사회는 부 자체보다 "어떻게 벌었는가"와 "어디에 쓰는가"를 더 집요하게 본다. 국민은 생각보다 냉정하다. 많이 번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혼자만 가지려는 사람에게 등을 돌릴 뿐이다. 성경 누가복음에는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재산은 권리인 동시에 책임이라는 뜻이다. 법구경은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하나 덕의 향기는 사방으로 퍼진다"고 말한다. 돈은 항구에 묶이지만 덕은 사람 사이를 건넌다. 선박은 바다를 건너지만 사람의 이름은 결국 마음 위에 남는다. 노자의 도덕경은 더 직설적이다. "천도는 남는 곳의 것을 덜어 부족한 곳을 채운다(損有餘而補不足)" 동양 고전은 오래전부터 부의 순환을 말해왔다. 오늘날 ESG니 사회적 책임이니 하는 개념도 결국 이 오래된 상식의 현대적 표현에 불과하다. 세계의 거상들은 결국 그 지점에서 이름이 달라졌다.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는 단지 배를 많이 가졌기 때문에 전설이 된 것이 아니다. 부와 영향력을 문화와 공공 영역으로 확장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남았다. 록펠러는 독점기업의 탐욕이라는 비판 속에 살았지만 거대한 기부와 재단 활동으로 결국 이름의 방향을 바꿨다. 카네기는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라고 말했다. 극단적인 표현처럼 들리지만 본질은 단순하다. 재산은 결국 사회 안에서 의미를 얻는다는 것이다. 해운업은 특히 그렇다. 바다는 세계를 연결한다. 한 척의 배에는 원유와 철광석만 실리는 것이 아니다. 국가 경제와 산업의 운명이 함께 움직인다. 부산과 울산, 거제의 조선소가 돌아가는 것도, 정유공장이 멈추지 않는 것도 결국 이 배들이 항로를 지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운 재벌은 일반 기업인보다 더 큰 사회적 상징성을 가진다. 국민은 그들에게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국가 산업의 얼굴 역할까지 기대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부자에게 두 가지 얼굴을 동시에 요구한다. 냉혹한 시장의 승부사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책임자이기를 바란다. 이것이 위선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런 긴장 위에서 유지된다. 시장은 탐욕으로 움직이지만 사회는 도덕으로 균형을 잡는다. 그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가 결국 기업인의 이름을 가른다. 정태순 회장이 지금 박수를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정태순 회장이 돈을 벌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 시장에서 한국 해운기업이 이기는 모습을 반긴다. 다만 그 성공이 사회와 연결돼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반면 권혁 회장은 아직 그 연결고리를 복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은 판결문 한 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업인의 마지막 평가는 법원이 아니라 시간이 내린다. 권혁 회장은 이미 산업사에 이름을 남겼다. 9조 원의 발주 실적은 조선소 현장에, 협력업체에, 수천 명의 생계에 새겨져 있다.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록이 사회적 존경으로 전환되려면 다른 종류의 기록이 필요하다. 법정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의 귀환이 그것이다. 더 늦기 전에 사회 앞으로 나와야 한다. 해양 인재를 위한 장학사업도 좋고 조선업 기술 인력 지원도 좋다. 지방 항만도시 청년들을 위한 교육재단도 가능하다. 바다에서 번 돈을 다시 사회의 바다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한국판 오나시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마지막 장이 완성된다.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바다로 나가기 위해 존재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과거 논란의 그늘 속에 있는다고 이름이 회복되지는 않는다. 세상 앞으로 나와야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사회와 나눌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진짜 선박왕은 배의 숫자로 완성되지 않는다. 공동체와 함께 항해할 때 비로소 그 이름이 남는다.
2026-05-13 18: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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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배당금'이라는 위험한 수사(修辭), 정책 사령탑의 가벼움이 시장을 흔든다
[경제일보]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쏘아 올린 ‘인공지능(AI) 국민배당금’ 논의가 우리 경제계와 자본시장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AI와 반도체 산업의 유례없는 호황으로 발생할 최대 70조 원 규모의 초과 세수를 전 국민에게 현금 형태로 환원하자는 제안이다. 국가 정책의 물줄기를 잡는 정책 사령탑이 SNS를 통해 던진 이 화두는 논쟁적인 수준을 넘어 위태롭기까지 하다. 국정 운영의 핵심 참모는 그 입의 무거움이 곧 국가의 신뢰도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 사태는 정책의 본질을 망각한 채 수사적 포퓰리즘에 기대어 시장의 질서를 교란한 전형적인 '메시지 리스크'다. 김 실장의 논리는 AI 시대의 과실이 특정 기업의 노력이 아닌, 수십 년간 축적된 국가적 산업 기반 위에서 피어난 것이니 이를 '구조적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공정의 가치를 담은 듯 보이지만, 이는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와 기업가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기업의 이윤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생존을 건 투자와 기술 혁신의 결과물이다. 이를 '국민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환원하려는 움직임은 자칫 기업의 투자 의지를 꺾고 자본의 해외 유출을 가속화할 뿐이다. 실제로 김 실장의 발언 직후 코스피 지수가 5% 이상 급락하며 8,000선을 넘보던 장세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은 시장이 이 제안을 얼마나 심각한 위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정책 결정권자의 '지나친 낙관론'이다. 현재의 반도체 호황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거액의 사용처를 미리 정해놓는 것은 재정 운용의 기본 원칙인 '신중함'을 저버린 처사다. 반도체 산업은 사이클의 변동성이 극심하며,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이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쏟아 붇으며 우리 턱밑까지 추격해 오고 있다. 지금은 초과 이윤을 어떻게 나눠 쓸지를 고민할 때가 아니라, 초격차 유지를 위해 R&D 지원을 확대하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같은 핵심 인프라 구축에 재원을 집중 투입해야 할 때다. 또한, 국가재정법은 세계잉여금의 일정 비율을 국채 상환에 우선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나랏빚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황에서 미래 세대에게 짐을 넘기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이를 두고 '포퓰리즘적 긴축'이라 비난하며 현금 살포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무책임하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농어촌 기본소득이나 노령연금 강화 등을 언급하는 것은 정책의 순수성을 의심케 하며, 국가 재정을 정치적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정책의 책임 있는 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신중하고 조심해도 과하지 않다. 설익은 아이디어를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던져 시장에 혼란을 초래하고, 외신이 이를 '횡재세'로 오인해 보도하게 만든 뒤 해명에 급급한 모습은 볼썽사납다. 국정의 최고위 경제 참모라면 장밋빛 전망에 취해 대중의 인기를 좇을 것이 아니라, 냉혹한 글로벌 경제 전쟁터에서 우리 기업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실효적 전략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 세금은 정부가 국민에게 베푸는 '시혜적 현금'이 아니다. 국가의 존립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다. 정부는 이제라도 '국민배당금'이라는 선정적인 수사를 거두고, 초과 세수를 국가 경쟁력 강화와 재정 건전화라는 본연의 목적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할지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 신중하지 못한 입이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우(愚)를 다시는 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경제 정책 사령탑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격이자 상식이다.
2026-05-13 07: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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