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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의 가치'로 키운 46년…이랜드, 옷가게서 종합 소비기업으로
[경제일보]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앞 2평 남짓한 옷가게에서 시작된 '반값의 실험'이 46년 만에 패션·유통·외식·호텔을 아우르는 사업으로 확장됐다. 출발점은 1980년 박성수 이랜드 창업자가 문을 연 보세 옷가게 '잉글런드'였다. 당시 내세운 '절반 가격에 두 배 가치 제공'이라는 원칙은 합리적인 가격에 품질과 디자인을 갖춘 옷을 선보이겠다는 구상으로 이후 이랜드의 사업 전반을 관통하는 경영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회사는 이러한 경영철학을 패션에 국한하지 않고 사업 전반으로 확대했다. 스파오·미쏘 등 자체 패션 브랜드를 육성하는 한편 뉴코아·NC백화점으로 유통망을 넓히고 애슐리퀸즈와 켄싱턴호텔앤리조트를 통해 외식·숙박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이랜드의 46년을 관통하는 핵심 DNA는 '가치의 대중화'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성장 전략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과거 신규 브랜드 출시와 인수합병(M&A)을 통해 사업 영역을 확대하며 외형 성장을 추구했다면 최근에는 경쟁력 있는 브랜드에 역량을 집중하고 사업 효율화를 통해 수익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경영 전략을 전환하고 있다. '합리적 가격' 앞세워 패션에서 유통·외식으로 영토 확장 이랜드의 초기 성장은 대중적인 캐주얼 의류를 앞세워 패션시장의 빈틈을 공략한 결과였다. 1983년 브렌따노, 1985년 언더우드, 1988년 헌트 등을 잇달아 선보이며 젊은 소비자층을 확보했다. 1986년에는 패션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도입해 매장 운영과 상품 공급을 표준화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판매망을 확대했다. 이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994년에는 도심형 아울렛 '2001아울렛'을 열며 유통사업에 진출했다. 백화점보다 저렴한 가격에 의류와 생활용품을 구매하려는 수요를 겨냥한 것이다. 2004년 뉴코아 인수로 전국 유통망을 확대하며 패션기업에서 유통기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외식에서도 동일한 전략을 적용하며 1994년 피자몰을 시작으로 2003년 애슐리를 선보이면서 합리적인 가격에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외식 모델을 구축했다. 의류에서 시작된 가치 대중화 전략이 쇼핑과 식생활로 확장된 것이다. 뉴발란스 1조 브랜드로 육성…패션·외식 경쟁력 강화 이랜드는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는 동시에 해외 브랜드를 국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며 브랜드 육성 역량을 핵심 경쟁력으로 키워왔다. 대표적인 사례는 뉴발란스로 이랜드는 2008년 당시 연매출 약 250억원 수준이던 국내 사업을 맡아 상품기획과 유통망 확대, 마케팅을 강화하며 2024년 매출 1조원 규모의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특히 국내 소비자 수요에 맞춰 뉴발란스키즈를 선보이며 성인 스포츠 브랜드를 아동복 시장으로 확장하는 등 사업 영역을 넓혔다. 자체 브랜드 육성에서도 성과를 거뒀다. 2009년 출시한 스파오는 상품 기획부터 생산·유통까지 직접 관리하는 SPA(제조·유통 일괄형) 방식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며 성장해 2024년 연매출 6000억원을 돌파하는 등 이랜드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미쏘·후아유 등도 고객층별 수요에 맞춰 상품을 세분화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특히 올해 상반기 미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4% 증가한 가운데 이랜드월드 패션 부문 전체 매출과 영업이익도 각각 9%, 29% 늘었다. 외식 부문에서는 애슐리퀸즈를 중심으로 다양한 메뉴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뷔페 모델을 강화했다. 운영 효율화도 병행하면서 이랜드이츠의 상반기 매출은 3061억원으로 10.7%, 순이익은 230억원으로 50.6% 증가했다. 패션과 외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전략은 소비자가 원하는 가격과 경험을 먼저 설정하고 이에 맞춰 상품과 운영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단순한 저가 전략을 넘어 소비자의 반복 구매와 방문을 이끄는 브랜드 경쟁력을 강화해왔다. 몸집 불리기에서 내실 다지기로……'선택과 집중' 본격화 이랜드의 공격적인 사업 확장이 성장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이후 잇따른 인수합병(M&A)은 외형 확대의 동력이었지만 차입금 증가와 재무 부담으로도 이어졌다. 이후 티니위니와 모던하우스 등 일부 사업을 매각하며 재무구조 개선에 나섰다. 최근에는 신규 사업 확대보다 경쟁력 있는 브랜드에 역량을 집중하고 기존 사업의 수익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경영 전략을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이랜드월드는 2026년 상반기 연결 기준 매출 2조8398억원, 영업이익 2316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 48% 성장했다. 특히 영업이익은 최근 10년간 상반기 기준 최대 규모로 매출 증가를 웃도는 수익성 개선이 두드러졌다. 유통 부문에서도 사업 효율화에 따른 수익성 개선이 두드러졌다. 이랜드리테일은 주요 점포의 상품 구성 개편과 신규 브랜드 유치, 오프프라이스 매장 'NC픽스' 확대 등을 통해 올해 상반기 거래액이 전년 동기 대비 3% 증가하는 동안 영업이익은 243% 늘었다. 이 같은 수익성 개선에 힘입어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상반기 누적 순이익 흑자도 달성했다. 다만 수익성 개선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사업별 경쟁력 강화가 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패션 부문은 뉴발란스 본사가 2027년부터 한국법인을 운영할 예정인 만큼 향후 사업 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동시에 스파오·미쏘·후아유 등 자체 브랜드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육성해야 한다. 외식 부문 역시 식자재 가격과 인건비 상승 속에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해야 하며, 유통 부문은 온라인 쇼핑 확대에 대응해 오프라인 점포의 수익성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다. 이랜드의 향후 성장 관건은 '절반 가격에 두 배 가치'라는 창업철학을 유지하면서 수익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데 있다. 외형 확대보다 브랜드 경쟁력과 운영 효율을 높여 소비자 가치와 기업의 수익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핵심 과제로 꼽힌다.
2026-10-15 16: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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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중공업, 해양플랜트에 웃고 울었다…'기술 집중 DNA'의 명암
[경제일보] 삼성중공업은 해양플랜트에서 성장과 위기를 함께 경험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생산설비(FLNG)를 건조한 기술력은 회사를 차별화했지만, 공사 지연과 원가 증가는 실적을 짓눌렀다. 고난도 제품에 집중한 전략은 경쟁력을 키우는 동시에 사업 관리의 한계도 드러냈다. 삼성중공업에 따르면 현재까지 전 세계 신조 FLNG 11기 가운데 7기를 수주했다. 회사가 집계한 누적 계약금액은 155억 달러다. 과거 손실을 겪고도 해양사업을 이어온 회사는 건조 경험을 후속 프로젝트에 적용하고 있다. 기술력을 지속적인 이익으로 바꾸려면 설계·원가·공정 관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고난도 기술의 명암 삼성중공업은 1974년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맞춰 출범했지만, 1차 오일쇼크에 따른 경기 침체로 조선소 건설을 미루고 산업기계에 집중했다. 이후 1977년 우진조선을 인수해 삼성조선을 설립하며 조선업에 진입했다. 거제조선소의 첫 도크는 1979년 12월 완공됐다. 이듬해에는 호주 선주가 발주한 2100톤급 석유시추보급선 두 척을 처음 진수했다. 이후 어떤 제품을 주력으로 삼느냐가 회사의 경쟁력을 결정했다. 오늘날 LNG운반선과 FLNG 중심의 사업 구조도 제품 선택과 기술 축적의 결과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글로벌 조선 시황에 따라 부가가치가 높은 고수익 선박을 위주로 영업 전략을 확립했다”고 했다. LNG운반선은 이 전략의 대표 선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2026년 한국 조선업 검토 보고서에서 삼성중공업의 강점을 해양플랫폼과 고사양 LNG운반선으로 설명했다. 높은 단가와 복잡한 엔지니어링에 집중한 사업 모델이라는 평가다. 상징적인 프로젝트가 프렐류드 FLNG다. 삼성중공업은 프랑스 테크닙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2011년 쉘로부터 수주했다. 길이 488m, 폭 74m의 설비는 2017년 6월 거제조선소를 떠났다. 천연가스를 해상에서 액화·저장해 출하하는 시설을 거대한 부유식 구조물에 담아냈다. 그러나 기술적 성취가 안정적인 이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삼성중공업은 2015년 잠정 실적 발표에서 연간 영업손실 1조5019억원을 기록했다. 회사는 수주잔고의 원가를 재점검하고 예상 공사비 증가분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해양설비 건설 지연에 따른 비용 증가도 손실의 배경이었다. 대형 프로젝트는 설계와 자재 조달, 제작 일정이 맞물린다. 설계 변경은 자재 투입과 제작 순서를 바꾸고, 공정 지연은 인력과 설비 사용 기간을 늘린다. 추가 비용을 계약에 따라 회수할 수 있는지도 이익을 좌우한다. 높은 계약금액만큼 수행 과정의 위험 관리가 중요하다. 삼성중공업은 2015~2022년 연간 영업적자를 기록한 뒤 2023년 흑자로 돌아섰다. 당시 발표한 영업이익은 2333억원이었다. 한겨레는 선박 가격이 회복된 시기에 수주한 물량이 실적에 기여했다고 보도했다. 회복에는 기술 축적과 함께 시장 여건과 수주 시점도 작용했다. 경험을 수익으로 과거 경험을 후속 사업에 활용하는 방식이 ‘레슨런드(Lessons Learned) 시스템’이다. 이전 공사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분석해 설계와 공정을 최적화하는 체계다. 삼성중공업은 최근 FLNG 계약에서도 이를 적용해 표준화 수준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FLNG 건조 경험을 바탕으로 차기 프로젝트에 발생이 가능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레슨런드 시스템’을 운영해 효율적으로 공정을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회사는 대형 FLNG의 설계부터 시운전까지 통합 수행하는 EPC(설계·조달·시공) 역량도 갖췄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개별 프로젝트의 경험을 반복해서 활용하는 데 있다. 앞선 공사에서 확인한 문제를 다음 설계와 제작 일정에 반영하면 같은 위험에 다시 노출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다만 표준화 효과를 확인할 공개 수치는 부족하다. 회사는 공정 효율과 원가 개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건조기간과 비용 감소분은 계약·영업 기밀을 이유로 밝히지 않았다. 실제 성과는 설계 변경과 공정 지연, 예상 원가와 실제 원가의 차이가 얼마나 줄었는지로 판단해야 한다.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매출은 3조2307억원, 영업이익은 3250억원이었다. 전년 동기보다 각각 약 20%, 59% 증가했고 영업이익률은 10.1%를 기록했다. 회사는 조업일수 증가와 글로벌 오퍼레이션 생산 본격화 등을 주요 요인으로 제시했다. 다만 상선과 FLNG의 기여도는 구분해 밝히지 않아 표준화와 실적 개선의 관계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생산 기반 강화에는 디지털·인공지능(AI)·로보틱스 전환을 묶은 ‘3X’를 활용하고 있다. 회사는 각 프로젝트를 단계적으로 순차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수행 단계에 맞춰 설계·제작·시운전 역량을 배치하는 일도 수익성을 지키는 과제다. 외부 위험도 남아 있다. 로이터는 지난해 6월 러시아 즈베즈다 조선소와의 쇄빙선 관련 계약 두 건이 해지됐다고 보도했다. 계약 규모는 총 4조8500억원으로, 같은 금액의 손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회사는 싱가포르 국제중재가 진행 중이라며 구체적인 상황은 공개하지 않았다. 삼성중공업의 기술 집중 전략은 차별화된 제품과 긴 적자의 역사를 함께 남겼다. 앞으로의 성장은 수주 규모와 수행 능력에 달려 있다. 축적한 경험을 설계와 공정에 반영해 계약 당시 예상한 원가와 납기를 지켜내는 것이 지속적인 이익 창출의 관건이다.
2026-10-07 17: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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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퇴 한 달 김용범, 왜 다시 '국채'를 꺼냈나
[경제일보] 김용범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다시 경제정책의 화두를 던졌다. 이번에는 부동산도, 증시도 아니다. 국채다. 김 전 실장이 최근 쓴 ‘국채가 흔들리는 시대’의 출발점은 글로벌 금리다. 미국과 일본, 프랑스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장기금리 상승을 단순한 인플레이션 후유증이 아니라 지난 15년간 이어졌던 저금리 체제의 변화로 봤다. 글만 놓고 보면 채권시장 분석이다. 그러나 작성 시점과 김 전 실장의 현재 위치를 함께 놓으면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김 전 실장은 지난 9월 1일 이재명 정부 초대 정책실장에서 물러났다. 정부 출범 후 15개월 만이었다. 한미 통상협상과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묶은 3대 메가프로젝트를 지휘했지만,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와 부동산·세제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면서 책임론도 동시에 받았다. 퇴임 이후에도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국민의힘은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도입 과정에서 부당한 압력이 있었는지 등을 규명해야 한다며 김 전 실장 등을 공수처에 고발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 증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다만 현재까지 제기된 내용은 정치권의 의혹과 고발 단계다. 10월 1일 정무위가 채택한 증인 명단에는 김 전 실장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실장이 선택한 주제가 국채와 반도체, 그리고 미래대응기금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미래대응기금은 그의 정책실장 재임기를 상징하는 정책 가운데 하나다. 김 전 실장은 지난 7월 반도체 호황에 따른 추가 세수를 두고 “아주 의미 있는 규모의 돈이 모일 것”이라며 청년·미래·지역·교육에 활용하는 구상을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리에서 물러난 9월 1일 정부가 2027년도 예산안을 발표하며 162조3000억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을 공식화했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정책실장 임기는 끝났지만 그가 밀었던 정책은 오히려 제도화 단계에 들어간 셈이다. 이번 글에서 김 전 실장이 “정부에서 일하며 호황기 세수가 가진 중력을 여러 번 봤다”고 회고한 대목도 그래서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세수가 늘면 중앙부처와 지방정부, 교육청마다 쓸 이유가 생기고, 한 번 늘어난 지출은 다시 줄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가 미래대응기금을 설명하면서 ‘의지만으로는 이 중력을 이기기 어렵다. 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숫자는 그의 문제의식을 뒷받침한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올해 국세수입을 478조6000억원으로 다시 추산했다. 추경예산보다 63조2000억원 많다. 반도체 호황과 특별배당, 증시 활성화 등이 주요 원인이다. 9월 수출도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반도체 수출은 전년 동월보다 263% 증가했다. 한국 경제가 말 그대로 반도체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 전 실장이 이번 글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도 현재의 고금리 자체보다는 반도체 호황이 끝났을 때의 한국 경제다. 지금은 반도체 수출과 기업이익이 성장과 세수, 외환수급을 동시에 받치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업황이 꺾이면 상황은 반대로 움직일 수 있다. 성장과 세수가 둔화되고 무역흑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글로벌 장기금리마저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한국 경제가 쓸 수 있는 완충재는 줄어든다. ◇ 왜 지금 ‘국채’인가 글의 또 다른 축은 세계 금융시장의 변화다. 최근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5%를 넘어 2000년대 초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라갔다. 미국 고용이 둔화하면서 연방준비제도의 추가 금리 인상 기대가 낮아졌지만 장기금리는 쉽게 떨어지지 않고 있다. 과거라면 경기 둔화 조짐이 나타났을 때 국채 금리는 먼저 내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다르다. 미국 정부의 막대한 재정적자로 국채 공급이 늘고 있는 데다 AI 투자 붐까지 자본시장 수요를 키우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는 데이터센터와 GPU, 전력 인프라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운 규모의 돈을 쓰고 있다. 올해 들어 AI 관련 기업들이 채권시장에서 조달하는 금액도 빠르게 증가했다. 정부와 기업이 동시에 돈을 필요로 하는 구조다. 일본도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 국채 10년물 금리는 최근 3%를 기록해 약 30년 만의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일본 금리가 오르면 장기간 해외에 투자됐던 일본계 자금의 움직임도 달라질 수 있다. 프랑스의 변화는 더 직접적이다. 재정 우려가 커지면서 독일 국채와의 금리차가 확대됐고, 국가 신용위험을 나타내는 CDS도 201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라왔다. 여기에 중동 정세 불안으로 국제유가까지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고 있다. 김 전 실장이 재정, AI 투자, 인플레이션, 지정학이라는 네 가지 요인을 국채 금리 상승 원인으로 나눈 배경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간단하다. 2010년대의 초저금리가 정상적인 상태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시장 분석인가, 정책 유산에 대한 설명인가 이번 글에는 개인적인 회고가 이례적으로 많이 들어 있다. 김 전 실장은 재임 당시에도 SNS에 장문의 경제정책 글을 꾸준히 올렸다. 정책실장이 직접 증시와 부동산, 산업정책을 설명하면서 시장이 그의 표현 하나하나에 반응하기도 했다. 이번 글도 그 연장선에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 당시에는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의 글이었다면 지금은 자리에서 물러난 정책 설계자의 글이다. 그래서 “좋을 때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은 시장 전망인 동시에 자신의 정책 선택에 대한 설명으로도 읽힌다. 특히 미래대응기금이 그렇다. 정부는 내년 기금에 162조3000억원을 적립해 청년과 성장동력, 지방, 교육·인재 등 4개 분야에 45조4000억원을 쓰고 나머지는 국채 발행 축소와 여유자금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제도가 출범하기도 전에 논쟁은 시작됐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추가·초과 세수를 기금에 적립한 뒤 필요할 경우 일반회계로 전출하는 구조에 대해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야당에서는 국회의 예산 심의권이 약화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지방교부세가 줄어들 수 있다며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있다. 김 전 실장이 글에서 “기금의 입법도 중요하지만 꺼내 쓰는 원칙을 엄격하게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 부분은 오히려 이런 논란을 의식한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기금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김용범의 진단, 어디까지 맞을까 큰 방향에서는 최근 금융시장이 그의 진단과 상당 부분 겹친다. 글로벌 국채금리가 중앙은행의 정책금리 전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은 이미 뚜렷하다. 정부 부채 증가와 AI 투자에 따른 자금 수요가 장기금리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한국에 반도체라는 강력한 완충재가 있다는 분석 역시 현재 숫자만 보면 설득력이 있다. 올해 세수 증가와 기록적인 수출의 상당 부분이 반도체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한국 경제의 위험이기도 하다. 반도체가 잘될수록 성장률도 높아지고 세수도 늘어난다. 정부의 정책 여력도 커진다. 반대로 반도체가 흔들리면 그 효과가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지금 미래대응기금을 둘러싼 논쟁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호황으로 생긴 돈을 지금 쓸 것인가. 다음 불황을 위해 남길 것인가. 아니면 AI와 인재, 새로운 산업에 투자해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것인가. 김 전 실장은 세 번째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다만 그 답이 미래대응기금 하나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 통제, 지방재정과의 관계, 투자 사업의 선정 기준, 기금에서 돈을 꺼낼 수 있는 조건을 얼마나 엄격하게 정하느냐가 남았다. 기금이 미래 투자를 위한 완충장치가 될 수도 있고, 또 하나의 거대한 지출 통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용범은 정책실장에서 물러났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를 둘러싼 논란도 아직 정치권에서 끝나지 않았다. 현재 공개적으로 확인되는 새로운 공직은 없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시장과 정책에 대해 긴 글을 쓰는 이유는 적어도 글 안에서는 분명해 보인다. 자신이 정부 안에서 보았던 호황기의 재정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자신이 추진했던 미래대응기금이 왜 필요했는지를 다시 말하는 것이다. 이를 정치적 복귀 신호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현재로서는 정책실장에서 경제정책 논객으로 위치가 바뀌는 과정에 가깝다. 한 달 전까지 정책을 만들던 사람이 이제 그 정책이 필요한 이유를 밖에서 설명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시장은 그의 글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국채금리는 오르고 있고, AI 투자는 더 많은 자본을 빨아들이고 있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에 전례 없는 호황을 가져왔다. 미래대응기금의 규모도 당초 예상보다 커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래서 앞으로 볼 대목은 김용범 개인보다 정책이다. 반도체 호황이 끝난 뒤에도 한국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 더 많은 의무지출만 남을 것인가. 아니면 신산업과 인재, 재정의 완충력이 남을 것인가. 한편 김 전 실장이 던진 ‘국채가 흔들리는 시대’라는 문제의식의 끝에는 결국 이 질문이 있다. 좋을 때 번 돈을 어떻게 쓰는가. 호황이 끝난 뒤 국가의 실력은 거기서 드러난다.
2026-10-03 2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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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성장에 가려진 숙제, '반도체 다음'을 준비할 때다
[경제일보] 한국 경제가 모처럼 좋은 숫자를 받아들었다. 국회예산정책처(예정처)는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3.5%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3월 전망보다 1.5%포인트 높였다. 수년간 1~2%대 성장에 익숙해진 우리 경제로서는 반가운 변화다. 오늘 아침 나온 수출 성적표는 더 화려하다. 9월 수출은 1209억4000만 달러로 사상 처음 월 1200억 달러를 넘어섰다. 1~9월 누적 수출도 8145억 달러로 지난해 연간 실적을 이미 웃돌았다. 무역수지는 498억5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그 중심에 반도체가 있다. 9월 반도체 수출은 603억 달러로 처음 6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262.8% 늘었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가 메모리 수요를 끌어올리고 수출 물량과 가격이 함께 뛰면서 한국 경제를 밀어 올리고 있다. 좋은 성적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반도체는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확보한 몇 안 되는 확실한 비교우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력이 커지면 소재·부품·장비 기업으로 주문이 이어지고 설비투자가 늘어난다. 수출과 경상수지가 좋아지고 세수에도 도움이 된다. 반도체 호황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다음이다. 예정처가 내다본 내년 성장률은 2.7%다. 올해보다 0.8%포인트 낮다. 2026~2030년 연평균 성장률 역시 2.7%로 전망했다. 올해 잠재성장률은 2.2%, 앞으로 5년 평균은 2.3% 수준이다. 내년 2.7% 성장을 경기침체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예정처는 수출 호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설비투자와 민간소비를 중심으로 내수도 회복할 것으로 봤다. 성장률도 잠재성장률을 웃돈다. 올해의 높은 성장세가 내년에는 다소 정상화된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런데도 3.5%와 2.7% 사이에는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문제가 숨어 있다. 올해 성장의 상당 부분을 반도체가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9월만 놓고 보면 전체 수출 1209억 달러 가운데 반도체가 603억 달러다. 거의 절반이다. 특정 월의 이례적으로 높은 비중을 우리 수출의 평상시 구조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도체 경기가 전체 수출과 성장률을 크게 좌우하는 현실만큼은 분명해졌다. 예정처도 반도체 쏠림을 별도의 위험 요인으로 짚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늘어난 기업이익과 국민소득이 다른 산업의 투자와 일자리, 가계소득으로 퍼지는 데 시간이 걸리고 수혜 산업과 그렇지 않은 산업 사이의 격차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상 최대 수출에도 자영업자나 일부 중소기업이 경기 회복을 선뜻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첨단 반도체 공장은 수십조원을 투자해도 자동화 수준이 높다. 과거 제조업 호황처럼 수출 증가가 곧바로 대규모 고용 증가로 이어지는 구조와는 거리가 있다. 기업의 영업이익이 늘어나는 속도와 가계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속도에도 차이가 생긴다. 더 근본적인 숫자는 잠재성장률이다. 한 해 성장률은 경기와 수출 여건에 따라 크게 움직인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가 물가 불안을 키우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체력에 가깝다. 예정처가 내다본 향후 5년 평균은 2.3%다. AI 투자와 생산성 향상으로 자본과 생산성의 기여는 커지지만 인구 감소 탓에 노동의 성장 기여는 계속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저출생·고령화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서비스업의 낮은 생산성을 끌어올려주는 것도 아니며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저절로 없애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반도체의 힘과 한계를 함께 경험했다.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수출과 설비투자, 세수가 한꺼번에 좋아졌다. 사이클이 돌아서면 세 지표가 동시에 흔들렸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산업을 가진 것은 한국 경제의 큰 자산이다. 그렇다고 나라 경제 전체를 한 산업의 경기 사이클에 오래 맡겨둘 수는 없다. 지금의 호황은 AI 투자 붐과도 맞물려 있다. 예정처는 미국 장기금리 상승에 따른 AI 투자 둔화 가능성과 미국의 관세정책, 중국과의 경쟁 심화를 향후 성장경로의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외부 변수가 지금의 호황을 흔들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반도체 호황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반도체가 벌어준 시간과 돈을 다음 성장동력을 만드는 데 쓰는 것이다. 구조개혁은 불황보다 호황기에 하기 쉽다. 경기가 꺾이면 기업은 투자 여력을 잃고 정부의 세수도 줄어든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개혁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려워진다. 수출과 기업이익, 세수가 함께 좋아지는 지금이 오히려 손대기 어려웠던 숙제를 풀 기회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부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미국과 중국, 대만, 일본, 유럽까지 국가 차원의 반도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전력망과 용수, 연구개발, 인재 공급은 개별 기업이 홀로 해결하기 어려운 국가 인프라의 영역이다. 동시에 산업정책의 시선을 그 너머로 넓혀야 한다. AI 서비스와 바이오, 로봇, 방산, 에너지, 콘텐츠 등에서 반도체의 뒤를 이을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키워야 한다.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대학과 직업교육을 산업 수요에 맞게 바꾸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반도체에서 생긴 자본과 기술, 인재가 다른 산업으로 흘러갈 통로가 넓어져야 반도체 기업의 호황이 한국 경제 전체의 호황으로 이어진다. <관자(管子)>에는 “일년지계 막여수곡, 십년지계 막여수목, 종신지계 막여수인(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한 해를 내다보면 곡식을 심고 10년을 내다보면 나무를 심으며 평생을 내다보면 사람을 키우라는 뜻이다. 경제도 다르지 않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더 짓는 일은 몇 년 뒤 수출을 늘릴 수 있다. 사람을 키우고 대학과 노동시장을 바꾸며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은 10년 뒤 나라의 성장률을 바꾼다. 9월 수출 1209억 달러와 반도체 603억 달러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일궈낸 값진 성과다. 기록은 기록대로 평가해야 한다. 다만 그 숫자가 한국 경제의 오래된 숙제까지 해결됐다는 증거는 아니다. 올해 3.5%와 내년 2.7% 사이에서 읽어야 할 것도 성장률의 단순한 오르내림이 아니다. 반도체가 밀어준 성장의 힘을 다른 산업과 가계, 다음 세대의 성장으로 얼마나 옮겨놓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호황은 언젠가 끝난다. 사이클도 다시 돈다. 좋은 시절에 할 일은 축배를 오래 드는 것이 아니라 다음 겨울을 견딜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다. 반도체가 벌어준 지금의 시간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다음 호황에도 또 반도체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이번 호황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이다.
2026-10-01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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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케미칼 새 성장로드맵, '첨단소재·전지·수소' 키운다
[경제일보] 롯데케미칼의 성장 공식은 오랫동안 명확했다. 대규모 설비를 확보해 에틸렌과 프로필렌을 생산하고, 이를 합성수지와 화학제품으로 가공해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규모의 경제가 경쟁력이었고, 생산능력 확대가 곧 성장 전략이었다. 1976년 설립된 호남석유화학은 1979년 롯데그룹에 편입됐다. 롯데는 석유화학을 그룹의 핵심 제조업으로 육성하며 생산시설을 확대했다. 2016년에는 삼성의 화학계열사를 인수해 첨단소재와 정밀화학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확장 DNA가 이제 전환점을 맞았다. 중국의 석유화학 설비 증설과 글로벌 공급과잉으로 범용제품의 수익성이 악화하면서 생산능력을 늘리는 방식만으로는 성장을 지속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롯데케미칼은 올해 4월 투자자 간담회에서 첨단소재·정밀화학·전지소재·수소에너지를 4대 성장축으로 제시했다. 범용 석유화학 비중을 줄이는 동시에 기존 화학 기술을 고부가 산업으로 옮기겠다는 구상이다. 몸집 줄이는 기초화학…성장 공식부터 바꾼다 사업재편의 출발점은 대산이다. 롯데케미칼이 분할한 롯데대산석화와 HD현대케미칼의 합병법인 H&L어드밴스드가 이달 출범했다.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가 지분을 각각 50% 보유하는 구조다. 통합법인은 향후 3년에 걸쳐 연산 110만톤 규모의 대산 나프타분해시설(NCC) 가동을 중단하고 저수익 설비를 조정할 계획이다. 정유와 석유화학 공정을 연결해 원료 조달과 생산비용을 낮추려는 목적이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17일 H&L어드밴스드에 6000억원을 출자하기로 결정했다. 출자 예정일은 28일이다. 설비 통합이 끝이 아니라 차입금 상환과 재무구조 개선까지 비용을 치러야 하는 구조조정이라는 의미다. 여수에서도 한화솔루션·DL케미칼·여천NCC와 설비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 공장을 늘려 성장했다면 이제는 중복 설비를 줄여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3000억원 율촌 투자…첨단소재로 무게중심 이동 줄이는 사업이 있다면 키우는 사업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전남 율촌산업단지다. 롯데케미칼 자회사 롯데엔지니어링플라스틱은 3000억원 이상을 투입해 연산 50만톤 규모의 컴파운딩 공장을 구축하고 있다. 지난해 일부 생산라인이 상업가동에 들어갔으며 올해 전체 준공을 추진 중이다. 컴파운딩은 플라스틱에 첨가제 등을 혼합해 강도와 내열성, 충격 저항성 등을 높이는 기술이다. 범용수지를 대량생산하는 것과 달리 자동차·전자제품 고객이 요구하는 성능에 맞춰 제품을 설계한다. 율촌 공장은 ABS와 폴리카보네이트 등 기능성 소재를 생산하고, 향후 피지컬 AI와 항공우주 분야에 사용되는 슈퍼 엔지니어링 플라스틱(EP)으로 제품군을 확대할 계획이다. 생산량보다 고객별 소재 설계와 기술력으로 이익을 확보하는 사업으로 이동하려는 시도다. AI 회로박부터 수소까지…네 갈래 성장축 전지소재 사업도 고부가 제품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전기차·에너지저장장치용 동박과 함께 AI 데이터센터에 사용되는 회로박 공급을 확대하고 있다. 회로박은 전자회로용 소재로, 배터리 전극에 사용되는 전지박과 용도가 다르다. 회사는 익산의 고부가 회로박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한편 말레이시아 생산거점도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정밀화학에서는 반도체 현상액이 핵심이다. 롯데케미칼과 일본 도쿠야마의 합작사 한덕화학은 반도체 미세회로 제조에 쓰이는 TMAH 생산시설 증설을 추진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용 고부가 소재도 확대 대상이다. 에너지에서는 수소 생산·유통·발전을 연결한다. 합작사 롯데SK에너루트는 울산에서 수소연료전지 발전사업을 추진하며 연말까지 총 80MW 규모의 설비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대산에서는 고압 수소출하센터가 지난해 11월부터 상업가동에 들어갔다. 범용 화학제품 생산으로 축적한 기술과 산업단지 인프라를 반도체, 배터리, 수소 시장으로 확장하는 방식이다. 성장보다 중요한 수익성…전환 DNA의 시험대 관건은 새로운 사업이 실제 이익으로 연결되느냐다. 롯데케미칼의 올해 2분기 연결 영업이익은 1101억원으로 두 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기초화학 부문의 영업이익은 23억원에 그쳤다. 반면 첨단소재 부문은 1325억원, 롯데정밀화학은 619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169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고부가 사업이 실적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전지소재의 수익성 회복은 아직 과제라는 의미다. 투자를 무조건 늘릴 수도 없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17일 당초 770억원을 투입하려던 울산 폐PET 화학적 재활용 설비의 추가 투자를 중단하기로 했다. 미래사업이라도 투자회수 가능성이 낮으면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롯데케미칼의 DNA가 대규모 생산시설을 확보해 시장을 넓히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어떤 설비를 줄이고 어떤 기술에 자본을 집중할지 선택하는 능력으로 바뀌고 있다"며 "2030년 기능성 소재 비중을 60% 이상으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도 생산능력보다 실제 이익과 현금흐름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어 "롯데케미칼은 범용 설비를 합리화하고 그 기반 위에 첨단소재와 정밀화학, 전지소재와 수소를 쌓으려는 것"이라며 "확장으로 성장한 기업이 선택과 집중으로 다시 성장할 수 있을지, 롯데케미칼의 다음 DNA가 시험대에 올랐다"고 덧붙였다. [아주경제 2026년 09월 22일자 15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9-22 07:5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