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국민 배우 최불암이 29일 밤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 '수사반장'의 박영한 반장과 '전원일기'의 김 회장을 기억하는 세대에게 최불암은 낯선 스타가 아니었다. 가족이 모인 저녁마다 안방에서 만났던 친숙한 얼굴이었다. 수십 년 동안 국민 아버지로 사랑받았던 배우의 별세 소식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부모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고 있다.
최불암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와 함께한 기억조차 많지 않았던 배우가 22년 동안 '전원일기'의 김 회장으로 살아가며 국민의 아버지가 됐다. 극 중 김 회장은 때로 자식들에게 엄격했지만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다. 가족을 이끌면서도 자신보다 주변 사람들의 형편을 먼저 살피려 했던 모습은 당시 시청자들이 바랐던 아버지상과 닮아 있었다.
김혜자가 연기한 어머니 이은심도 빼놓을 수 없다. 가족의 끼니를 챙기고 자식들의 걱정을 들어주며 집안의 크고 작은 갈등을 다독이던 인물이었다. 최불암과 김혜자가 보여준 부모의 모습에는 그 시절 한국 가정의 일상과 정서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시청자들은 두 사람을 보며 자신의 부모를 떠올렸고, 드라마 속 가족의 일에 함께 웃고 울었다.
'전원일기'가 방영된 1980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 사회는 크게 변했다. 산업화로 농촌을 떠난 젊은이들이 도시에 정착했고, 대가족이 한집에 모여 살던 풍경도 점차 사라졌다. 양촌리 사람들의 일상에는 그런 변화가 그대로 나타났다. 농사 걱정과 자식들의 진로, 노부모 부양과 세대 갈등은 당시 어느 가정에서나 겪을 법한 문제였다. 그래서 '전원일기'는 농촌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한국 가족의 생활을 기록한 작품이기도 했다.
물론 그 시절의 가족을 마냥 아름답게 기억할 수만은 없다. 아버지의 권위를 앞세우는 관습이 있었고, 어머니에게는 지나친 희생을 요구했다. 김혜자가 보여준 어머니의 헌신은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줬지만 현실의 여성들이 감당했던 고단함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과거의 가족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아니라 서로의 어려움을 살피고 함께 책임지려 했던 태도다.
오늘날 가족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일반가구의 36.6%가 1인 가구다. 혼자 사는 사람이 늘고 가족을 이루는 방식도 다양해졌다. 그런데 가족의 규모가 작아질수록 질병과 노후, 육아와 생계의 어려움을 함께 감당할 사람이 부족해지는 경우도 생긴다. 가족 안에서 해결하던 문제를 이제는 이웃과 지역사회, 국가가 함께 살펴야 할 이유다.
최불암이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것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수사반장'에서는 억울한 사람들의 사정을 살피는 형사였고,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전국을 다니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방송 밖에서도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후원 활동에 힘썼다. 국민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오랜 연기 경력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삶에 대한 존경도 담겨 있다.
최불암은 2002년 '전원일기' 종영을 앞두고 쓴 기고문에서 '그늘 넓은 느티나무' 같은 아버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가족이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젊은 세대에게 지혜를 건네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뜻이다. 부모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고 가족의 형태도 달라진 지금, 오히려 새겨들을 만한 말이다. 존경은 나이나 지위에서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최불암은 떠났지만 그가 보여준 아버지의 모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김혜자와 함께 지켜온 양촌리의 밥상도 오랫동안 한국인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권위적인 아버지나 희생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힘든 날 돌아가면 반겨줄 사람이 있었던 시절의 따뜻함일지 모른다. 그 따뜻함을 다음 세대에도 전할 수 있을지, 이제 우리 사회가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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