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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상비약 늘리자는 정부, 약국 문 닫으면 약도 사지 말라는 약사회
밤 11시 아이의 열이 오른다. 집에 해열제는 없고 동네 약국은 문을 닫았다. 응급실을 찾아갈 만큼 위급하지는 않지만 다음 날 아침까지 손 놓고 기다리기도 어렵다.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제도는 이런 상황에서 시작됐다. 약국이 쉬는 심야와 공휴일에도 급한 약은 구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제도가 시행된 때는 2012년 11월이다. 14년이 지난 지금 편의점에서 실제로 살 수 있는 상비약은 11종뿐이다. 해열진통제와 소화제, 감기약, 파스 등 13종이 지정돼 있지만 어린이용 타이레놀 2종이 생산 중단되면서 판매 품목이 줄었다. 정부는 올해 12월까지 품목을 최대 20종으로 확대하고 약국과 24시간 편의점이 없는 지역에서는 일반 소매점에도 판매를 허용할 계획이다. 약사법은 안전상비의약품의 범위를 이미 정해 놓았다. 가벼운 증상에 시급히 사용하고 환자가 스스로 판단해 복용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 가운데 성분과 부작용, 함량, 제형 등을 따져 20개 이내에서 지정하도록 했다. 편의점 판매를 허용할 약의 범위를 정부가 마음대로 넓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회가 법률로 정한 한도 안에서 비어 있는 아홉 자리를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방침이 나오자 약사단체들은 일제히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서울시약사회는 품목 확대와 판매점 기준 완화가 의약품 안전관리의 공백을 키울 것이라며 공공심야약국 확충과 단골약사제 도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한약사회도 편의성보다 안전성이 먼저라며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약사의 복약지도 없이 판매되는 의약품이 늘어나면 오남용과 부작용도 커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의약품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해열진통제를 많이 먹으면 간 손상이 생길 수 있고 감기약과 진통제를 함께 복용하다 같은 성분을 겹쳐 먹을 수도 있다. 이런 위험 때문에 편의점 상비약은 제품과 포장 단위, 판매 수량이 제한된다. 부작용 가능성은 품목별 안전성을 따지고 경고 표시를 강화해야 할 이유이지 모든 추가 논의를 중단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약사회가 안전을 근거로 반대하려면 제품별로 설명해야 한다. 어떤 성분이 어린이나 임신부에게 위험한지, 어느 함량부터 약사의 상담이 필요한지, 어떤 약을 편의점에서 팔아서는 안 되는지 근거를 내놓아야 한다. 11종은 허용하면서 지사제나 제산제 몇 종이 추가되면 국민 건강이 위태로워진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판매 품목 전체를 막는 방식으로는 안전 논쟁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사제와 제산제 추가 논의는 2017년에도 있었다.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가 갑작스러운 설사와 속쓰림에 사용하는 약을 편의점 판매 대상에 넣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약사회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약사회 측 인사의 자해 소동까지 벌어졌고 이후 논의는 사실상 멈췄다. 국민 생활은 달라졌지만 품목 조정은 8년 넘게 약사회 반대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소비자들이 편의점에서 약을 사는 시간대를 보면 제도가 필요한 이유도 드러난다. GS25의 지난해 안전상비약 매출 가운데 57.2%는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 사이에 발생했다. 요일별 매출은 일요일이 20.1%로 가장 많았다. 사람들이 약사의 상담을 피하려고 편의점을 찾은 것이 아니라 약국이 문을 닫은 시간에 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국민 여론도 약사회의 전면 반대와 거리가 있다. 지난해 전국 성인 108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85.4%가 편의점 상비약 품목 확대에 동의했다. 생산이 중단된 제품의 대체 필요성까지 포함하면 현행 품목을 확대하거나 바꿔야 한다는 응답은 94.7%였다. 소비자들은 아무 약이나 팔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부작용과 오남용 위험이 낮은 제품을 골라 달라는 조건도 함께 제시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도 법이 허용한 20개까지 품목을 확대하라고 촉구했다. 1인 가구와 맞벌이 가구, 야간 노동자, 이동이 어려운 고령자에게 약국 운영시간 밖의 의약품 접근은 생활 안전과 맞닿아 있다는 이유였다. 소비자단체는 품목 확대와 함께 판매 실태 점검, 부작용 감시, 국민이 참여하는 품목 검토 절차도 요구했다. 접근성을 넓히되 관리 책임도 함께 강화하자는 제안이다. 약사회가 대안으로 내놓은 공공심야약국은 필요한 제도다. 여러 만성질환 약을 함께 복용하는 고령자나 임신부, 어린 환자에게는 약사의 상담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공공심야약국을 전국 모든 생활권에서 밤새 운영하기는 어렵다. 약국도 24시간 편의점도 없는 지역의 주민에게 심야약국이 충분히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다. 공공심야약국과 편의점 상비약은 맡아야 할 일이 다르다. 복용 중인 약이 여러 개이거나 증상이 오래가는 환자는 약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갑작스러운 두통이나 소화불량에 쓸 약이 필요한 사람은 가까운 편의점에서 제한된 제품을 살 수 있어야 한다. 두 제도를 경쟁 관계로 몰아갈수록 약사회가 지키려는 대상이 국민 건강인지 약국의 판매 영역인지 묻게 된다. 편의점의 판매관리가 허술하다는 지적은 보건 당국이 답해야 한다. 현행 제도에서도 판매자는 사전교육을 받고 보건소에 등록해야 한다. 같은 품목은 한 차례에 하나만 팔 수 있고 12세 미만 어린이에게는 판매할 수 없다. 위해 의약품 판매를 막는 바코드 시스템과 주의사항 게시 의무도 갖춰야 한다. 규정을 지키지 않는 점포는 단속하면 된다. 계산대에서 같은 제품이 연속 결제되지 않도록 막고 실제 판매를 맡는 종업원에게 정기교육을 실시할 수도 있다. 반복 위반 점포는 등록을 취소하고 점검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정부가 관리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 품목 수만 늘려서는 안 되지만 관리 부실의 부담을 약이 필요한 국민에게 떠넘겨서도 안 된다. 대한약사회는 편의점 상비약이 전체 일반의약품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며 밥그릇을 지키려는 반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작다면 저위험 의약품 몇 종을 늘리는 일에 전국 약사회가 성명과 결의대회로 맞서는 이유부터 설명해야 한다. 2017년부터 이어진 강경 대응을 두고 국민이 직역 이익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전을 말하려면 집단 반대의 강도보다 의약품별 근거가 먼저 나와야 한다. 약사의 전문성은 모든 의약품을 약국 안에 묶어 둘 때 생기지 않는다. 성분 중복을 찾아내고 환자의 나이와 질환, 복용 중인 약을 살펴 적합한 약을 권할 때 전문성이 빛난다. 병원 진료가 필요한 환자를 가려내는 일도 약사의 중요한 역할이다. 한밤중 가벼운 증상에 사용할 약까지 막아야 전문직의 권위가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정부도 숫자 채우기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같은 성분의 다른 상표를 여러 개 추가해 20종을 맞추는 방식이라면 국민이 느끼는 변화는 없다. 실제 심야 수요가 많은 증상을 조사하고 부작용과 오남용 위험이 낮은 제품을 골라야 한다. 어린이와 임신부, 고령자에게 주의가 필요한 성분은 포장 앞면에 크게 표시하고 문제가 반복되는 제품은 판매 대상에서 빼야 한다. 국민은 약국 영업시간에 맞춰 아프지 않는다. 아이의 열은 한밤중에도 오르고 속쓰림과 복통은 공휴일에도 찾아온다. 편의점 상비약은 병원이나 약국을 대신하는 제도가 아니라 문이 닫힌 시간의 빈틈을 메우는 장치다. 14년 동안 실제 판매 품목이 11종에 묶여 있다면 손볼 때도 지났다. 약사회가 지켜야 할 것은 약국의 판매 독점이 아니다. 국민이 필요한 약을 안전하게 사용하도록 돕는 전문직의 책임이다. 제품별 위험을 따지기도 전에 확대 계획부터 막는다면 안전이라는 말도 직역 이익을 가리는 방패로 받아들여진다. 정부는 안전성이 검증된 약을 골라 접근성을 넓히고 약사회는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안전 기준을 내놓아야 한다. 약국 문이 닫았다는 이유로 약도 사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국민 편에 서 있다고 보기 어렵다. 편의점 상비약은 14년째 제자리다. 이제 품목을 정하는 기준도 약사단체의 반발이 아니라 국민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약을 필요로 하는지에 맞춰야 한다.
2026-07-24 09:3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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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동산 국민 대토론회, 소통보다 결론과 책임이 중요하다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놓고 대대적인 국민 의견 수렴에 나섰다. 지난 14일부터 사흘 동안 주택 공급과 금융, 세제를 주제로 분야별 토론회를 열었고 23일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종합토론회를 주재했다. 당초 100분으로 예정됐던 토론은 세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들을 만큼 들었다. 정부가 이제 보여줘야 할 것은 더 많은 발언과 추가 토론이 아니라 정책의 결론이다. 부동산 정책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리는 영역이다. 집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의 요구가 다르고 서울과 지방의 처지도 같지 않다. 재건축을 추진하는 주민과 임대주택 확대를 요구하는 무주택자의 이해도 충돌한다. 세금을 올리자는 주장과 거래를 막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한 자리에서 좀처럼 합쳐지지 않는다. 모든 이해관계자의 동의를 얻은 뒤 정책을 결정하겠다는 접근으로는 어느 결론에도 이르기 어렵다. 국민 의견을 듣는 절차는 필요하지만 정책 결정의 책임까지 국민에게 나눠줄 수는 없다. 정부는 서로 충돌하는 요구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포기할지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을 설명하고 정치적 부담까지 감당하는 일이 국정 운영이다. 지금 부동산 시장에는 토론보다 시간이 더 비싼 자원이 됐다. 서울 아파트값은 7월 셋째 주까지 76주 연속 올랐다. 올해 들어 서울 아파트값은 6.03% 상승했고 성북구와 강서구, 구로구 등 비강남권의 상승세도 두드러졌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 역시 같은 주 0.27% 올랐다. 강남 일부 지역에 머물던 가격 불안이 중저가 지역과 임대차 시장으로 번지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가 결론을 미루는 동안 시장은 멈춰 서 있지 않는다. 집을 살 사람은 세금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 계약을 늦춘다. 집을 팔 사람은 양도소득세 개편 가능성을 지켜보며 매물을 거둬들인다. 전세대출 규제 강화 가능성이 거론되면 임차인은 대출이 막히기 전에 계약부터 서두른다. 공급 계획이 확정되지 않으면 건설사는 토지 매입과 사업 추진을 미룬다. 정책을 결정하지 않은 상태도 시장에서는 하나의 정책으로 작용한다. 불확실성이 길어지면 정보와 현금을 가진 사람은 기다릴 수 있지만 자금 사정이 빠듯한 실수요자는 버티기 어렵다. 결정 지연의 비용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 부담한다. 이번 대토론회에서는 낯선 주제가 등장한 것도 아니다. 보유세를 어느 수준으로 올릴지, 실거주 1주택과 비거주 주택을 어떻게 구분할지, 초고가 주택의 기준을 어디에 둘지 의견이 엇갈렸다. 초고가 주택 기준으로 10억원과 30억원, 50억원이 각각 거론됐다. 양도소득세 비과세 혜택을 생애 한 차례로 제한하는 방안도 나왔다. 전세대출을 줄이되 청년과 신혼부부, 생애 최초 임차인에게는 선별적으로 지원하자는 제안도 제시됐다. 쟁점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정부가 정해야 할 기준과 수치가 남아 있을 뿐이다. 부동산 세제는 국민의 재산권과 직접 맞닿아 있다. 보유세를 올리면 보유 비용이 커지고 양도소득세를 손질하면 매물의 양과 거래 시점이 달라진다. 취득세는 무주택자가 처음 집을 마련하는 단계부터 영향을 미친다. 세율과 공제 기준을 조금만 바꿔도 누군가에게는 수천만원의 부담이 생긴다. 세금은 여론의 흐름에 따라 수시로 움직일 수 있는 정책 수단이 아니다. 누가 얼마를 부담해야 하는지 법률로 정하고 납세자가 자신의 재산 처분과 주거 계획을 미리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주택을 보유하고도 정책 발표 전후에 따라 부담이 크게 달라진다면 조세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다. 대출 규제도 마찬가지다.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 잔금대출은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니다. 한 가구의 이사와 결혼, 자녀 교육, 노후 계획이 걸려 있다. 계약 당시 가능했던 대출이 잔금 지급 직전에 막히면 국민은 집을 포기하거나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정부가 대출 기준을 바꿀 수는 있다. 가계부채와 집값을 관리하기 위해 규제를 강화할 필요도 생긴다. 그러나 예고 기간과 경과조치 없이 정책 변경의 비용을 계약 당사자에게 넘길 권한까지 정부가 가진 것은 아니다. 기존 계약을 어디까지 보호할지, 어떤 사람을 실수요자로 볼지, 예외를 어느 범위에서 인정할지 정책 발표와 동시에 제시해야 한다. 공급 문제는 더 단순하다. 국민이 궁금한 것은 몇 년 뒤까지 몇십만가구를 공급하겠다는 총량이 아니다. 어느 지역에서 언제 인허가가 끝나고 착공과 준공은 언제 이뤄지는지가 중요하다. 공급 예정 물량은 삽을 뜨기 전까지 주택이 아니다. 준공과 입주로 이어지지 못한 공급 계획은 가격 불안을 잠시 달래는 발표문에 그친다. 정부가 할 일은 공급 확대의 당위성을 다시 토론하는 것이 아니다. 사업이 늦어지는 지구를 찾아 보상과 인허가, 기반시설 설치가 어디에서 막혔는지 밝히고 부처와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별로 처리 기한을 정해야 한다. 지연이 반복되면 담당 기관과 책임자가 설명해야 한다. 이번 대토론회가 정책 전환의 출발점이 되려면 정부는 적어도 세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먼저 부동산 정책의 목표부터 정해야 한다. 집값을 일정 수준까지 낮추겠다는 것인지, 단기간 급등을 막겠다는 것인지, 무주택자의 주거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인지 정부의 우선순위가 보여야 한다. 집값과 가계부채, 주택 공급, 전월세 안정을 한꺼번에 내세우면 정책수단이 서로 충돌한다. 대출을 강하게 조이면 가계부채는 줄일 수 있지만 현금 보유자에게 유리한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 공급을 늘리기 위해 재건축 규제를 풀면 장기적으로 입주 물량이 늘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 해당 지역 가격이 오를 수 있다. 정부는 무엇을 먼저 잡을지 선택해야 한다. 정책 발표와 시행 시점도 제시해야 한다. 세제 개편안을 언제 국회에 제출할지, 금융 규제는 어느 날짜부터 어떤 계약에 적용할지, 공급 사업은 지구별로 언제 착공하고 입주할지 공개해야 한다. “검토하겠다”는 말이 반복될수록 국민은 정부 발표보다 시장의 소문을 먼저 믿게 된다. 책임을 맡은 사람도 드러나야 한다. 공급 일정은 국토교통부가 책임지고 대출 규제는 금융위원회가 맡아야 한다. 세제 개편은 재정경제부가 설명해야 한다. 부처 간 정책이 충돌하면 국무총리와 대통령실이 조정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정책이 효과를 내지 못했을 때 시장 상황과 전임 정부, 투기 세력만 탓해서는 책임 행정이 성립하지 않는다. 정부는 정책 시행 뒤 평가 기준도 공개해야 한다. 집값 상승률 하나만 놓고 성공과 실패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주택 인허가와 착공, 준공 물량이 얼마나 늘었는지, 청년과 신혼부부의 주거비 부담이 줄었는지, 전세대출 축소로 월세 부담이 커지지 않았는지 함께 살펴야 한다. 분기마다 이행 상황을 공개하고 목표에서 벗어난 정책은 수정해야 한다. 법률과 행정에는 권한을 행사한 사람이 책임을 진다는 원칙이 따른다. 정책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정부가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국민 여론에 돌릴 수는 없다. 국민 대토론회에서 다수가 찬성했다는 이유로 잘못된 정책의 책임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반대 의견을 충분히 들었다고 해서 정책 실패가 면책되는 것도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토론회에서 “공직자의 최대 덕목은 책임을 지는 것”이라며 비난과 갈등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이 발언이 대토론회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토론회를 한 차례 더 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부가 정한 목표와 기준을 국민에게 알리고 정책의 효과가 예상과 다를 때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일이다. 정책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면 필요한 보완책을 마련하고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면 담당자가 설명해야 한다. 정부는 오는 27일 총리 주재 토론회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쟁점을 다시 논의할 예정이다. 추가 토론이 결정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마지막 점검이라면 의미가 있다. 토론 뒤에도 결론과 일정이 나오지 않는다면 국민 대토론회는 정책 결정을 미루기 위한 긴 회의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국민은 이미 집값과 전셋값, 대출이자와 세금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고 있다. 무주택자는 오르는 집값을 보며 불안을 호소하고 집을 가진 사람은 또다시 세제가 바뀔까 걱정한다. 청년은 대출 규제 앞에서 주거 계획을 다시 세우고 건설사는 수익성을 계산하며 사업을 멈출지 결정한다. 정부가 국민에게 더 물어야 할 질문은 많지 않다. 이제까지 나온 의견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릴지 정해야 한다. 시행 시점을 못 박고 담당 부처와 책임자를 밝혀야 한다. 정책이 실패했을 때 누가 어떤 방식으로 수정할지도 제시해야 한다. 소통은 결론을 늦추는 면허가 아니다. 국민이 의견을 냈다면 정부는 선택해야 한다. 선택했다면 설명해야 하고 시행했다면 책임져야 한다. 부동산 정책의 신뢰는 토론 시간이나 참석자 수에서 생기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기준과 지켜지는 일정, 책임지는 사람의 이름에서 생긴다.
2026-07-24 07: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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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권 뉴스] 하이난은 내연차 끊고, 외국인은 공장 찾는다
중국 제조업의 간판이 바뀌고 있다. 하이난은 2030년부터 내연기관 신차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고 중국으로 들어오는 외국 자본은 첨단기술 분야로 몰리고 있다. 중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전기차와 로봇이 만들어지는 공장을 새로운 여행지로 고르고 있다. 하이난성 정부는 최근 발표한 생태환경 계획에 2030년 내연기관 신차 판매를 중단하는 내용을 담았다. 계획대로 시행되면 하이난은 중국에서 내연기관차 판매를 멈추는 첫 성급 지역이 된다. 2030년이 되자마자 하이난 도로에서 휘발유차와 경유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 판매되는 차량이 정책 대상이다. 이미 등록된 내연기관차는 계속 운행할 수 있고 정기검사와 중고차 거래도 가능하다. 기존 차량을 강제로 폐차하거나 운행을 금지하는 조치는 아니다. 하이난이 먼저 나선 데는 섬이라는 조건이 작용했다. 자동차의 이동 범위가 육지보다 제한적이어서 충전망을 구축하기 쉽다. 관광산업과 환경 보전을 중시하는 지역 정책도 전기차 보급과 맞아떨어진다. 하이난은 2030년까지 공공서비스와 영업용 차량의 신규·교체 물량을 원칙적으로 청정에너지차로 바꾸기로 했다. 개인이 새로 사거나 교체하는 차량도 모두 신에너지차로 전환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전체 등록 차량 가운데 신에너지차 비중은 2025년 23.75%에서 2030년 45%로 끌어올린다. 충전기 한 대가 담당하는 차량은 2.5대 이하로 유지할 계획이다. 하이난의 실험을 중국 전역에 곧바로 옮기기는 어렵다. 장거리 이동이 많은 내륙 지역은 충전시설과 전력망 여건이 다르다. 겨울이 긴 북부에서는 낮은 기온에 따른 전기차 주행거리 감소도 해결해야 한다. 하이난은 전국 확대를 앞둔 시험장에 가깝다. 외국 자본의 행선지도 달라지고 있다. 중국 상무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실제 사용 외국인 투자액은 4021억4000만위안이었다. 첨단기술 산업에 들어온 외국인 투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3.2% 증가했다. 전체 외국인 투자에서 첨단기술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42.4%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외국 자본이 중국으로 일제히 돌아왔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전체 투자액은 여전히 지난해보다 적다. 변화가 나타난 곳은 투자 대상이다. 값싼 인건비를 활용하는 단순 조립공장보다 전자·통신장비와 연구개발, 제품 설계, 기술사업화 분야로 돈이 옮겨가고 있다. 올해 1∼5월 중국이 유치한 외국인 투자액은 지난해보다 8.6% 줄었다. 그러나 5월 투자액은 전년 동월보다 5.9% 증가했고 6월에도 증가세가 이어졌다. 상반기 중국에 추가 투자를 집행한 기존 외국계 기업도 4800곳에 육박했다. 중국 당국에는 외자 규모만큼 투자 내용이 중요해졌다. 의류와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동남아시아나 인도로 빠져나가더라도 반도체와 통신장비, 바이오, 연구개발 시설을 붙잡으면 산업 고도화에 도움이 된다는 계산이다. 중국 공장은 이제 관광객도 불러들이고 있다. 중국 국가이민관리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중국에 입국한 외국인은 2291만4000명으로 지난해보다 20.4% 증가했다. 이 가운데 무비자로 들어온 외국인은 1781만5000명으로 전체의 77.7%를 차지했다. 한국인은 중국 입국 외국인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곳도 달라졌다. 고궁과 만리장성, 상하이 와이탄을 둘러보는 전통적인 일정에 전기차 공장과 로봇 생산시설, 반도체 전시관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로봇팔이 차체를 조립하고 무인운반차가 부품을 나르는 생산라인 자체가 볼거리가 된 것이다. 베이징의 샤오미 자동차 공장은 압축주조와 차체 조립 등 생산공정 일부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2024년 관람 프로그램을 시작한 뒤 누적 방문객이 25만명을 넘어섰다. 중국에서는 공장과 조선소, 산업박물관 등을 관광상품으로 묶은 산업관광이 빠르게 늘고 있다. 공장 관광은 기업에도 남는 장사다. 제품을 광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기술과 자동화 수준을 눈앞에서 보여줄 수 있다. 해외 소비자와 거래처에는 중국 제품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홍보관이 되고 지방정부에는 관광객의 체류 시간과 소비를 늘리는 수단이 된다. 과거 중국 공장은 낮은 임금과 대량생산을 상징했다. 지금 중국이 외부에 보여주려는 공장은 전기차와 로봇, 반도체가 만들어지는 자동화 생산기지다. 하이난의 내연기관 신차 판매 중단과 첨단산업으로 이동하는 외국 자본, 관광지가 된 생산라인은 달라진 중국 제조업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중국은 이제 상품만 수출하려 하지 않는다. 공장이 돌아가는 방식과 기술력, 산업의 미래까지 하나의 제품처럼 내다 팔고 있다.
2026-07-23 17: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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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동산 정책, 강한 대책보다 흔들리지 않는 규칙이 필요하다
집값이 오르면 정부는 더 강한 대책을 꺼낸다. 대출 한도를 줄이고 규제지역을 넓힌다. 세금을 올릴 가능성을 내비치고 공급 물량을 앞당기겠다고 발표한다. 시장이 잠시 주춤하면 규제를 풀고 대출 문턱을 낮춘다. 그러다 가격이 다시 뛰면 이전보다 센 대책을 내놓는다. 한국 부동산 정책은 오랫동안 이런 순환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 방향이 달라졌고 같은 정부 안에서도 집값과 여론에 따라 규제가 수차례 바뀌었다. 시장 참여자는 현재의 제도보다 다음 대책을 먼저 계산하게 됐다. 집을 사려는 사람도 팔려는 사람도 건설하려는 기업도 정부가 정한 규칙을 믿고 장기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졌다. 지금 시장이 보내는 신호도 가볍게 넘길 상황은 아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26년 7월 둘째 주 전국 아파트값은 전주보다 0.11% 올랐다. 수도권은 0.21%, 서울은 0.30% 상승했다. 지방 상승률은 0.01%에 그쳤다. 서울 아파트값은 74주째 올랐고 전셋값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전국이 함께 달아오른 시장이 아니라 서울과 수도권 선호 지역에 수요가 몰리는 양극화 시장에 가깝다. 가계대출도 다시 불어났다. 지난 6월 전 금융권 가계대출은 한 달 동안 8조3000억원 증가했다.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은 4조5000억원이었다. 5월과 6월 두 달 동안 늘어난 가계대출만 17조6000억원이다. 한국은행은 지난 16일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2.75%로 올리면서 금융안정 위험을 주요 근거로 들었다. 집값과 빚이 통화정책까지 움직이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2025년 6월 수도권과 규제지역의 주택 구입 목적 주택담보대출에 6억원 한도가 도입됐다. 같은 해 9월 규제지역 주택담보인정비율인 LTV가 50%에서 40%로 낮아졌다. 10월에는 주택 가격에 따라 대출 한도를 6억원, 4억원, 2억원으로 차등화했다. 2026년 정부는 가계대출 증가율을 1.5% 이내로 관리하고 2030년까지 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80%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대책은 충분히 강했다. 그런데 집값도 대출도 다시 움직이고 있다. 더 센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 정책 효과가 약한 원인을 규제의 강도에서만 찾으면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대출을 더 막고 세금을 더 올리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정책의 강도와 정책의 신뢰는 다른 문제다. 아무리 센 규제라도 시장이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면 수요자는 규제가 풀릴 때를 기다린다. 규제가 더 강해질 것으로 예상하면 시행 전에 거래를 서두른다. 특정 지역만 묶으면 인접 지역으로 수요가 이동하고 특정 대출만 막으면 다른 금융상품을 찾는다. 정책이 시장을 이끄는 대신 시장이 다음 규제의 틈을 찾아 움직이게 된다. 한국은행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지난해 12월 금융안정보고서에서 거시건전성 정책의 잦은 기조 변화는 대출 증가 억제 효과를 제한한다고 분석했다. 단기 경기 상황에 대응하는 수단으로 규제를 활용하기보다 중장기 관점에서 운용해 정책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규제를 반복해서 강화했는데도 가계대출이 다시 늘어난 현실과 맞닿아 있는 진단이다. 주택은 주식처럼 오늘 사고 내일 파는 상품이 아니다. 무주택자가 집을 사기 위해서는 계약금을 마련하고 대출 가능액을 확인한 뒤 잔금 일정을 정해야 한다. 기존 주택을 처분하고 새집으로 옮기는 과정에는 수개월이 걸린다. 재건축과 재개발, 민간 주택사업은 토지 확보부터 입주까지 10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계약을 맺은 뒤 대출 기준이 바뀌고 중도금을 낸 뒤 잔금대출 한도가 줄어들면 정책은 미래 행동을 안내하는 규칙이 아니라 이미 내린 결정을 뒤흔드는 위험이 된다. 법률상 소급입법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국민이 체감하는 효과는 과거 선택에 대한 불이익과 다르지 않다. 법과 제도가 신뢰를 얻으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어떤 조건에서 규제가 적용되는지 미리 알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조건에는 같은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제도가 바뀔 때는 기존 계약과 진행 중인 거래를 보호하는 경과조치를 둬야 한다. 부동산 정책도 다르지 않다. 정부가 정한 규칙을 지킨 사람이 뒤늦은 정책 변경으로 손해를 보고 규제의 빈틈을 예상한 사람이 이익을 얻는 구조가 반복되면 성실한 실수요자부터 제도를 믿지 않게 된다. 정책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예측 가능성을 잃은 행정은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공급정책도 같은 잘못을 되풀이해 왔다. 정부는 집값이 오를 때마다 수십만호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인허가 물량과 착공 물량, 준공 물량은 서로 다른 숫자다. 인허가를 받았다고 집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착공했다고 곧바로 입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전국 주택 인허가는 98694호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6% 줄었다. 착공은 94367호로 27.0% 늘었지만 준공은 88143호로 46.7% 감소했다. 같은 기간 안에서도 공급의 앞단과 뒷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5월 말 전국 미분양은 65239호에 달했다. 전국에 미분양이 쌓여 있으면서 서울과 수도권 선호 지역에서는 공급 부족 우려가 커지는 불균형도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공급 물량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지역에서 언제 착공하고 언제 입주할 수 있는가다. 공급 계획은 토지 확보와 인허가, 착공, 준공으로 나눠 공개해야 한다. 일정이 늦어지면 지연 원인과 변경된 입주 시점을 밝혀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미 진행 중인 사업은 원칙대로 이어져야 한다. 대출 규제의 기본축도 다시 세워야 한다. 담보가치에 따라 빌릴 수 있는 비율을 정하는 LTV는 집값과 지역에 따라 수시로 바꾸기 쉽다. 반면 소득에서 원리금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율을 따지는 DSR은 빚을 갚을 능력을 기준으로 한다. 장기적인 가계부채 관리는 주택 가격이나 행정구역보다 차주의 상환 능력을 중심에 두는 편이 타당하다. 청년과 신혼부부, 생애 최초 구입자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면 DSR 원칙을 무너뜨리는 예외 대출을 반복하기보다 장기 고정금리와 이자 지원, 공공주택 공급으로 돕는 편이 낫다. 정책대출을 늘렸다가 가계대출이 증가하면 다시 줄이는 방식은 지원 대상자에게도 안정적인 제도가 아니다. 규제지역 지정도 담당 부처의 판단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집값 상승률과 거래량, 소득 대비 주택가격, 가계대출 증가율 같은 객관적 기준을 사전에 공개해야 한다. 일정 기준을 넘으면 규제가 강화되고 일정 기간 안정되면 완화된다는 경로를 시장이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세제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취득세와 양도소득세, 보유세는 거래와 보유에 관한 국민의 장기 선택을 바꾼다. 집값이 오를 때 세금을 올리고 거래가 얼어붙으면 다시 낮추는 방식은 매물 잠김과 거래 쏠림을 반복시킨다. 적어도 3년에서 5년 동안 어떤 세목을 어떤 방향으로 조정할지 로드맵을 제시하고 충분한 유예기간을 둬야 한다. 정책을 바꾸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다. 경제 여건과 인구 구조, 금리와 공급 상황이 달라지면 정책도 달라져야 한다. 다만 변경 조건과 절차가 사전에 정해져 있어야 한다. 규칙 안에 변화의 기준을 넣는 것과 시장이 출렁일 때마다 규칙 자체를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르다. 강한 대책은 발표 당일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 거래를 줄이고 대출 신청을 늦추는 효과도 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이 정책의 지속성을 믿지 않으면 수요는 사라지지 않고 뒤로 밀릴 뿐이다. 공급 사업도 중단되거나 지연되고 임대차시장으로 부담이 옮겨갈 수 있다. 정부가 집값을 원하는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특정 가격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무리한 차입을 막고 충분한 주택이 꾸준히 공급되도록 제도를 관리하는 일이다. 주거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거래 과정의 불공정을 차단하는 일도 정부의 몫이다. 부동산 시장의 신뢰는 대책의 횟수나 발표문의 수위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늘 정한 기준이 내일도 적용되고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의 기본 틀이 유지될 때 생긴다. 국민이 자신의 소득과 자산, 가족계획에 따라 주거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지금 내놓아야 할 것은 시장을 놀라게 할 또 하나의 대책이 아니다. 대출과 세제, 공급에 관해 언제 어떤 조건에서 무엇이 바뀌는지 알 수 있는 규칙이다. 부동산 정책에 필요한 힘은 예고 없이 휘두르는 규제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래 지킬 원칙을 세우고 정부부터 그 원칙에 구속될 때 정책은 비로소 시장의 신뢰를 얻는다.
2026-07-23 10:4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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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 '투표자 수 통계 수정 정황' 수사…노태악 책임론 다시 부상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수사하는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의 전산 통계 수정 정황을 포착하고 추가 강제수사에 나섰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국민참정권 침해 진상규명을 위한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과 서울 송파구선거관리위원회 등에 검사와 수사관을 보내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합수본은 수사 과정에서 지방선거 당시 중앙선관위와 경기도선관위 관계자들이 투표자 수와 관련된 전산 통계를 임의로 수정한 정황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합수본은 수정 시점과 횟수, 수정 전후 수치, 전산 접속 기록과 내부 보고 자료 등을 확보해 경위를 살펴보고 있다. 이번 압수수색으로 수사는 투표용지 인쇄량 산정과 현장 대응을 넘어 선거 이후 전산 통계가 처리된 과정으로 확대됐다. 누가 어떤 자료를 근거로 수치를 바꿨는지, 정상적인 오류 정정 절차를 거쳤는지, 변경 사실이 상급자에게 보고됐는지가 확인 대상이다. 합수본은 지난달에도 중앙선관위와 서울시선관위, 송파구선관위 등을 압수수색해 투표용지 인쇄 계획과 투표록, 내부 결재 문서 등을 확보했다. 노태악 전 중앙선관위원장과 허철훈 전 사무총장 등 선관위 관계자 10여명은 공직선거법 위반과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입건됐고 출국금지 조치도 받았다. 투표자 수 통계가 수정됐다는 정황만으로 선거 결과에 손을 댔다고 볼 근거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합수본도 현재는 통계 수정의 목적과 절차,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의 관련성을 확인하는 단계다. 그렇다고 선관위 내부의 통상적인 업무 처리로 가볍게 넘길 사안도 아니다. 투표자 수는 투표용지 교부 수량과 잔여 수량, 투표록의 기록을 대조하는 기초 자료다. 전산 수치를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면 근거 자료와 승인 절차, 변경 전후 내역이 남아 있어야 한다. 합수본은 전산 통계가 실제 투표소별 기록과 일치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투표용지 부족 사실이 발생한 뒤 수치가 변경됐다면 변경 사유와 보고 경로도 살펴야 한다. 부족 수량이나 추가 공급량을 사후에 맞추기 위한 수정이었는지도 수사 대상에서 빠질 수 없다. 수사가 전산 통계로 확대되면서 노 전 위원장의 재임 중 책임도 다시 거론되고 있다. 노 전 위원장은 이번 지방선거까지 중앙선관위를 이끌었고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이틀 뒤인 지난달 5일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합수본은 노 전 위원장을 피의자로 입건하고 출국을 금지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출발점으로 지목된 결정은 인쇄 기준 축소였다. 중앙선관위는 선거인 수 대비 투표용지 최소 인쇄 비율을 기존 60%에서 50%로 낮췄다. 국민의 투표권 행사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기준이었지만 중앙선관위원회의 공식 회의나 의결을 거치지 않고 사무총장과 선거정책실장의 전결로 처리됐다. 어떤 사항을 위원회 의결에 부치고 어떤 사항을 사무처 전결로 처리할지 판단하는 내부 기준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선관위 전체회의에서 관련 질문이 나왔지만 선거1국장은 규칙과 편람·지침을 구분하는 별도 기준이 없다고 답했다. 투표용지 인쇄 비율을 10%포인트 낮추는 결정은 비용 절감이나 행정 편의에 머물지 않는다. 예상보다 높은 투표율이 나오거나 지역별 투표율 편차가 커지면 유권자가 투표용지를 받지 못할 수 있다. 실제 송파구의 최종 투표율은 65.8%로 서울 평균보다 높았고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가 중단되거나 마감 시간이 연장됐다. 중앙선관위원장은 각 투표소의 용지 수량을 직접 계산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선거인의 투표권 행사에 영향을 주는 기준이 어떤 절차로 정해지고 있는지, 사무처의 결정이 현장에서 어떤 위험을 낳을 수 있는지는 감독해야 한다. 노 전 위원장이 인쇄 기준 축소를 언제 보고받았는지, 관련 위험에 관한 검토를 지시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선거 당일 투표용지 부족 상황도 투표 종료 약 40분 전에야 보고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사실이라면 선거 현장의 중대한 문제가 중앙선관위원장에게 전달되는 보고 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노 전 위원장이 인쇄량 축소와 전산 통계 수정에 직접 관여했다는 정황은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직접 지시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재임 당시 수장의 지휘·감독 책임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인쇄 기준 축소를 보고받았다면 결정의 타당성과 위험을 검토한 과정을 밝혀야 한다. 보고받지 못했다면 투표권 행사와 직결된 사안을 사무처가 자체 판단하도록 둔 경위를 설명해야 한다. 선거 당일 전국의 투표소에서 용지가 부족한데 위원장에게 보고가 늦어진 이유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전산 통계 수정 정황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관계 직원 개인이 임의로 수치를 바꾼 것인지, 지역선관위와 중앙선관위 사이에 보고가 오갔는지, 지휘부가 수정 사실을 알았는지가 밝혀져야 한다. 통계 수정이 여러 기관에서 이뤄졌다면 동일한 지침이나 지시가 있었는지도 조사해야 한다. 노 전 위원장은 사의를 밝히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취지로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임기 종료를 앞둔 사퇴가 선거관리 실패에 대한 사실 규명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누가 기준을 낮췄고 누가 위험을 검토했으며 사고 발생 뒤 어떤 보고와 조치가 있었는지는 별도로 확인돼야 한다. 중앙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관이다. 정치권이나 행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독립성을 보장받는 대신 선거관리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투표용지조차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고 사후 전산 통계까지 수정한 정황이 드러났다면 독립성만 내세울 수 없다. 합수본 수사가 통계 수정에 관여한 실무자를 확인하는 데 그쳐서도 안 된다. 투표용지 인쇄 기준을 낮춘 결정 과정과 선거 당일 보고 지연, 전산 통계 수정 경위가 서로 연결돼 있는지 살펴야 한다. 노 전 위원장을 비롯한 당시 지휘부가 각 단계에서 어떤 보고를 받고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투표용지는 선거관리의 가장 기본적인 준비물이다. 투표자 수 통계는 투표용지의 교부와 잔여 수량을 검증하는 자료다. 두 업무에서 동시에 문제가 드러난다면 현장 직원 몇 명의 착오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노태악 전 위원장 개인의 형사책임은 증거와 수사 결과에 따라 판단할 문제다. 재임 중 선거관리 실패에 대한 책임은 별개로 남는다. 이번 수사는 선관위 직원들이 전산 수치를 왜 고쳤는지만 확인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의사결정과 보고 체계, 당시 선관위 수뇌부의 관리 책임까지 규명해야 한다.
2026-07-23 10: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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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대출은 막고 집값은 못 잡았다…서울은 '현금 부자 시장'이 됐다
주택담보대출 문턱은 거듭 높아졌는데 서울 아파트값은 75주째 올랐다. 7월 둘째 주 상승률만 0.30%다. 전셋값도 한 주 동안 0.28% 뛰었다. 대출을 막으면 매수세가 꺾이고 집값이 내려갈 것이라는 정부의 계산은 시장에서 빗나갔다. 사라진 것은 주택을 사려는 수요가 아니라 대출이 필요한 매수자였다. 정부는 주택가격에 따라 담보대출 한도를 나눴다. 15억원 이하 주택은 최대 6억원, 15억원 초과 25억원 이하는 4억원, 25억원을 넘으면 2억원까지만 빌릴 수 있다. 20억원짜리 집을 사려면 최소 16억원, 30억원짜리 집을 사려면 28억원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취득세와 중개보수까지 감안하면 필요한 돈은 더 늘어난다. 대출 한도는 원리금을 갚을 능력보다 지금 보유한 자산의 규모를 앞세운다.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는 맞벌이 부부라도 쌓아둔 돈이 부족하면 서울의 선호 주택을 살 수 없다. 반면 소득이 많지 않아도 현금 20억원을 보유한 사람은 매수할 수 있다. 대출규제가 강화될수록 소득보다 보유자산이 주택 구입을 좌우한다. 앞으로 수십 년간 원리금을 갚을 사람은 밀려나고 기존 부동산과 금융자산, 부모 돈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근로소득으로 주택을 마련하겠다는 기대는 약해지고 상속과 증여, 자산 매각이 서울 주택시장의 입장권이 되고 있다. 한국은행도 같은 현상을 확인했다. 올해 1월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에 따르면 강남 3구와 용산 등 서울 핵심지에서는 현금 등 순수 자기자금으로 거래한 비중이 높아졌고 주택담보인정비율은 낮아졌다. 서울 외곽과 경기지역에서는 금융기관 대출 의존도와 주택담보인정비율이 오히려 올라갔다. 현금을 가진 사람은 핵심지에 남았고 대출이 필요한 사람은 서울 외곽과 경기지역으로 밀려났다. 대출규제가 모든 매수자에게 같은 강도로 작용한 것이 아니다. 자산가에게는 불편에 그쳤지만 무주택 실수요자에게는 시장 진입을 막는 벽이 됐다. 은행 대출이 막히자 주식과 채권을 판 돈이 서울 주택시장으로 들어왔다.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주식과 채권 매각대금 가운데 주택 구입에 사용된 돈은 3조7254억원에 달했다. 약 66%인 2조4000억원이 서울로 향했다. 강남구에 3700억원, 송파구에 3500억원, 서초구에 2900억원이 들어갔다. 강남 3구에만 1조원이 넘는 돈이 몰렸다. 지난해 서울 주택 매입에 투입된 증여·상속 자금도 4조4407억원에 달했다. 전년 2조2823억원의 두 배에 육박한다. 대출이 줄어든 자리를 금융자산과 부모 자산이 메웠다. 정부가 은행 문을 좁힐수록 주식과 부동산을 가진 집안의 자녀가 유리해졌다. 같은 소득을 받는 두 사람이 있어도 부모에게 수억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서울 아파트를 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외곽으로 밀려난다. 대출규제는 가계의 부채를 줄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부모의 재산에 따라 자녀 세대의 주거지가 갈리는 속도를 더 높였다. 15억원이라는 대출 기준선은 가격 움직임까지 바꿨다. 올해 2월부터 5월 중순까지 서울 아파트 거래의 81.6%가 15억원 이하 주택에 몰렸다. 15억원 이하에서는 6억원을 빌릴 수 있지만 가격이 15억원을 조금이라도 넘으면 대출 한도가 4억원으로 줄어든다. 집값이 몇천만원 오르는 순간 매수자가 추가로 준비해야 할 돈은 2억원 이상 늘어난다. 대출을 이용해야 하는 매수자는 15억원 이하 매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서울 외곽의 중저가 아파트가 15억원을 향해 오르는 이유다. 정부가 만든 기준선이 집값을 누르기보다 그 아래 가격대의 수요를 끌어모으고 있다. 15억원을 넘어선 주택은 현금 동원력이 있는 사람들의 거래 영역으로 넘어간다. 고가 주택시장도 오래 얼어붙지 않았다. 규제 직후에는 거래가 급감했지만 수개월 뒤 다시 살아났다. 현금 매수자는 대출금리와 한도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핵심지 매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산가가 신고가에 주택을 사면 그 거래가 같은 단지와 인근 지역의 시세가 된다. 거래량이 줄었다고 가격이 내려가는 것도 아니다. 대출을 쓰는 수백 명이 시장에서 이탈해도 현금 거래 몇 건이 최고가를 새로 쓸 수 있다. 매수자의 수는 줄었지만 남은 매수자의 자금력은 더 강해졌다. 서울 핵심지에서는 거래 감소와 가격 상승이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다. 중산층이 살 수 있는 서울 아파트는 100채 가운데 8채도 되지 않는다. 올해 1분기 중위소득 가구가 구입할 수 있는 서울 아파트는 전체의 7.8%에 그쳤다. 해당 지표는 자기자금 30%와 주택담보인정비율 70%를 전제로 산출됐다. 서울에 실제 적용되는 대출규제는 더 강하다. 무주택 중산층이 체감하는 장벽은 통계보다 높다. 정부는 집값을 낮추겠다며 무주택자의 구매력부터 낮췄다. 공급은 부족하고 선호지역의 매물은 한정돼 있는데 돈줄만 조이면 집값보다 매수자의 얼굴이 먼저 바뀐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던 사람은 빠지고 대출이 필요 없는 사람이 남는다. 금융규제로 아파트를 지을 수는 없다. 직장과 교통, 교육 여건이 갖춰진 지역에 새 주택을 충분히 공급하지 않은 채 대출만 막으면 희소한 주택은 돈 많은 사람의 몫이 된다. 서울 집값을 떠받치는 공급 부족과 선호지역 쏠림을 그대로 둔 채 금융권만 압박한 대가가 지금의 현금 부자 시장이다. 상환 능력을 따지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과 주택가격만 보고 대출액을 자르는 절대 한도도 같은 잣대로 운용해서는 안 된다. 고소득 무주택자가 실거주 목적으로 처음 집을 사는 경우와 다주택자가 추가 주택을 매수하는 경우를 똑같이 막으면 자산을 이미 가진 사람만 유리해진다. 대출이 막힌 수요는 서울 외곽과 수도권의 대출 가능 주택으로 이동했다. 해당 지역의 집값이 오르자 정부는 다시 규제지역을 확대했다. 수요는 인접 지역으로 옮겨갔고 규제는 뒤를 쫓았다. 정부가 지역을 옮겨 다니며 대출을 조이는 동안 서울 핵심지는 현금 자산가의 시장으로 남았다. 집값을 잡겠다며 대출을 막았지만 집값은 남고 무주택자만 밀려났다. 대출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서울 주택시장의 문이 닫혔고 대출이 필요 없는 사람의 구매력은 그대로다. 주식과 채권을 팔 수 있는 사람, 부모에게 수억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 기존 주택을 처분해 거액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만 핵심지 거래에 참여한다. 서울 주택시장에서 소득이 차지하던 자리를 현금과 증여가 대신하고 있다. 대출규제가 이 흐름을 계속 강화한다면 ‘현금 부자 시장’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에 머물지 않는다. 정부가 정책으로 굳혀 놓은 시장이 된다.
2026-07-22 08: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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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으로 끝나지 않은 4743만원…노태악 배우자 출장 의혹의 다섯 쟁점
노태악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재임 중 배우자의 해외 출장에 들어간 비용 4743만8900원을 국고에 반납했다. 호주·뉴질랜드, 독일·에스토니아, 덴마크·스웨덴 등 세 차례 출장에서 배우자에게 지출된 비용을 중앙선관위가 산출한 금액이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노 전 위원장은 지난 1일 국회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배우자 출장 비용을 국고에 반납하거나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23일 국정조사에서는 배우자 동행과 관련해 “지금까지는 전부 다 그렇게 해왔고 아무런 이의 제기도 없어 특별히 의문을 갖지 않았다”는 취지로 답했다. 국고 반납으로 4743만여원은 회수됐다. 그러나 배우자 출장비를 국고에서 부담한 근거와 배우자의 공적 역할, 예산 편성·집행 과정, 외부 공개자료에서 동행 사실이 빠진 경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국민의힘 미디어특별위원회는 노 전 위원장 등을 업무상 횡령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고발했다. 합수본은 지난 20일 노 전 위원장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수사의 초점도 반납 사실보다 지출 당시의 의사결정 과정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반납은 국고 지출의 근거를 설명하지 못한다 공금 지출의 적법성은 돈을 돌려줬는지가 아니라 지출 당시 법령과 예산 목적에 맞았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배우자 동행이 선관위원장의 공식 업무 수행에 필요했는지, 배우자가 현지에서 맡은 공적 역할이 있었는지, 상대 기관이 배우자를 공식 초청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배우자 비용을 국고에서 부담할 수 있는 규정과 내부 지침이 존재했는지도 핵심 쟁점이다. 업무상 횡령 혐의는 노 전 위원장의 예산 집행 관여 정도와 국고 부담의 근거, 지출 경위와 당시 인식을 종합해 판단된다. 사후 반환은 지출 당시의 행위와 판단을 소급해 바꾸지 않는다. 반납 시점도 짚어야 한다. 배우자 동행은 노 전 위원장 재임 중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비용 반환은 국정조사에서 의혹이 제기되고 형사 고발이 이뤄진 뒤 진행됐다. 선관위 내부 점검으로 먼저 바로잡은 사안이 아니라 외부 문제 제기를 거친 뒤 취해진 조치다. 노 전 위원장이 국고에 반납한 4743만8900원이 배우자에게 들어간 비용 전부인지도 공개돼야 한다. 항공료와 숙박비, 식비, 현지 교통비를 어떻게 계산했는지, 공동 지출 가운데 배우자 몫은 어떤 기준으로 나눴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다 그렇게 해왔다”는 말이 넓힌 책임 노 전 위원장은 배우자 동행을 의심하지 않은 이유로 과거의 관행을 들었다. 선관위도 헌법기관장의 지위와 역할에 상응하는 예우를 고려해 예산 편성 단계부터 배우자 비용을 포함했다고 설명했다. 관행은 국고 지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법령과 예산 목적에 맞지 않는 지출이 반복됐다면 문제의 범위는 노 전 위원장의 세 차례 출장을 넘어선다. 선관위가 기관장 배우자의 출장 비용을 계속 부담해왔다면 전임 위원장 때도 같은 사례가 있었는지 조사해야 한다. 배우자 동행을 누가 제안했고 어느 부서가 예산을 편성했는지, 법률 검토와 내부 감사가 있었는지, 누가 최종 결재했는지도 확인 대상이다. 노 전 위원장의 기관장 책임도 사라지지 않는다. 예산 편성과 집행을 실무 부서가 맡았더라도 배우자를 세 차례 동반한 당사자이자 선관위의 최고 책임자는 노 전 위원장이었다. 관행을 따랐다는 설명은 국고 부담의 근거를 확인해야 할 기관장의 책임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 선관위는 정당과 후보자, 유권자에게 선거법과 절차를 엄격하게 적용한다. 후보자의 회계보고와 선거비용을 감독하고 작은 기재 오류와 기한 위반에도 책임을 묻는다. 기관장 배우자에 대한 예우가 오랜 관행이었다는 이유로 별도의 검증 없이 이어졌다면 선관위가 외부에 요구해온 기준과 내부에서 적용한 기준이 달랐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국민 눈높이’는 법적 근거를 대신할 수 없다 선관위는 “헌법기관장으로서 지위와 역할에 상응하는 예우를 고려해 예산을 편성할 때부터 배우자 예산을 편성했다”며 앞으로 국민 눈높이에 맞게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국민 눈높이는 국고 지출의 법적 근거를 대신하지 못한다. 배우자 동행이 공식 업무에 필요했다면 선관위는 관련 규정과 공식 일정, 초청 문서, 배우자가 수행한 역할을 제시해야 한다. 공적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 비용은 개인 부담 영역에 속한다. ‘헌법기관장 예우’라는 포괄적인 표현만으로 수천만원의 국고 부담을 설명하기도 어렵다. 예산에 배우자 비용이 편성돼 있었다는 사실도 지출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공공예산은 편성 목적과 실제 사용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 선관위 해명은 배우자가 어떤 자격으로 출장에 동행했는지 답하지 않았다. 공식 대표단 구성원이었는지, 의전상 동반이 필요했는지, 현지에서 수행한 일정이 무엇인지가 공개되지 않았다. 예우라는 설명만 있고 예우에 국고를 사용할 수 있는 근거는 제시되지 않은 상태다. 내부 예산에는 있고 외부 출장 내역에는 없었다 선관위는 배우자 비용을 예산 편성 단계부터 포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관위가 외부에 제출한 국외출장 내역에는 배우자 동행 사실이 기재되지 않았다. 내부에서는 배우자 동행을 전제로 비용을 편성하면서 외부 자료의 출장자 명단에서는 배우자가 빠진 것이다. 공식 출장 참여자로 보았다면 외부 자료에서 제외된 이유가 남는다. 공식 출장 참여자가 아니었다면 국고로 비용을 부담한 근거가 약해진다. 기재 누락이 서식과 작성 기준에 따른 것인지,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배우자가 제외된 것인지 조사해야 한다. 출장 결과보고서를 작성한 실무자와 검토자, 승인권자도 확인 대상이다. 예산자료와 공개자료의 불일치는 선관위의 정보 공개 기준과 연결된다. 배우자 동행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됐다면 국민은 누가 어떤 자격으로 출장에 참여했고 얼마의 예산이 사용됐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선거비용과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감독하는 기관이라면 내부 출장 예산과 참여자 정보도 같은 수준으로 관리해야 한다. 배우자 비용은 공식 예산에 반영하면서 동행 사실은 공개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도록 한 구조는 선관위의 설명 책임을 무겁게 한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함께 드러난 내부 통제 문제 배우자 동반 출장 의혹은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조사하는 국회 국정조사 과정에서 불거졌다. 투표용지 부족과 배우자 출장비는 발생 원인과 성격이 다르다. 두 사안에서 함께 제기되는 문제는 선관위 내부 통제다. 선거 당일 투표용지 수량을 점검하고 부족 사태를 막아야 할 관리 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같은 과정에서 기관장 배우자의 출장비가 세 차례에 걸쳐 국고에서 지출됐고, 외부 출장 내역에는 동행 사실이 없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선거 관리의 기본 업무와 수뇌부 관련 예산 집행에서 각각 어떤 점검과 감독이 이뤄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실무자의 판단에만 맡겨진 것인지, 중간 결재와 사후 감사가 형식적으로 진행된 것인지, 기관장이 관련 보고를 받았는지가 조사돼야 한다.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관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선거 관리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부여된 지위다. 예산 집행과 조직 운영까지 외부 감시에서 벗어나게 하는 특권은 아니다. 선관위가 고위 간부 자녀 특혜 채용과 선거 관리 부실에 이어 기관장 배우자 출장비 논란까지 맞으면서 독립기관의 책임 구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독립성은 스스로 법과 절차를 더 엄격하게 지킬 때 설득력을 얻는다. 수사와 자체 조사에서 확인해야 할 네 가지 합수본의 압수자료 분석은 배우자 출장비의 사용처와 함께 동행 결정, 예산 편성, 내부 결재, 공개자료 작성 과정을 향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배우자 동행에 공적 필요성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공식 초청과 현지 일정, 배우자의 역할이 판단 자료가 된다. 둘째, 국고 부담의 법령상·예산상 근거를 밝혀야 한다. 헌법기관장에 대한 예우가 어떤 규정에 따라 어느 범위까지 인정됐는지가 핵심이다. 셋째, 세 차례 출장의 의사결정과 결재 구조를 확인해야 한다. 노 전 위원장과 선관위 관계자들이 배우자 비용 편성과 집행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알았는지가 형사책임과 기관 책임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넷째, 외부 출장 내역에서 배우자 동행 사실이 빠진 경위를 밝혀야 한다. 예산자료와 공개자료가 달라진 과정과 작성·검토·승인 책임을 확인해야 한다. 선관위의 자체 점검도 필요하다. 노 전 위원장 재임 기간에 한정하지 않고 역대 위원장의 배우자 동반 출장과 비용 부담 사례를 조사해야 한다. 관련 규정과 출장보고서 공개 기준을 함께 손보지 않으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 노 전 위원장은 배우자 출장 비용 4743만8900원을 국고에 반납했다. 반납으로 확인된 것은 비용이 회수됐다는 사실이다. 세 차례 배우자 동행에 어떤 공적 필요성이 있었는지, 국고 부담은 어떤 근거와 결재를 거쳤는지, 공개자료에서 동행 사실이 빠진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노 전 위원장과 선관위가 설명해야 할 책임은 바로 그 지점에 남아 있다.
2026-07-21 09: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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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청약통장이 버림받는 나라, 주거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다
지난 6월 전국에서 청약통장 10만여개가 사라졌다. 하루 평균 3300개꼴이다. 2022년 6월 2859만9279명까지 늘었던 가입자는 올해 6월 2583만4034명으로 줄었다. 4년 동안 276만명 넘게 청약 대열에서 빠져나갔다. 금융상품 하나의 인기가 떨어진 정도로 넘길 일이 아니다. 청약통장은 오랫동안 무주택자가 국가의 주택정책을 믿고 가입한 통장이었다. 당장 집을 살 돈이 없어도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 넣고 무주택 기간을 견디면 언젠가는 새 아파트를 마련할 기회를 얻는다는 약속이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도 오래 일하고 꾸준히 저축하면 내 집에 다가갈 수 있었다. 청약제도는 돈이 부족한 사람에게 시간을 자산으로 바꿔주는 장치였다. 국가는 통장을 만들고 기다리라고 했다. 국민은 10년, 20년씩 돈을 넣었다. 지금 청약통장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지난달 서울 민간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3.3㎡당 6165만원이었다. 국민평형으로 불리는 전용면적 84㎡의 공급면적을 33평 안팎으로 잡으면 평균 분양가가 20억원을 넘어선다. 분양가의 10%만 계약금으로 내도 2억원이다. 중도금과 잔금까지 치르려면 평범한 직장인의 근로소득과 저축만으로는 부족하다. 청약 가점은 무주택 기간과 가입 기간을 따진다. 실제 입주는 현금 동원 능력이 결정한다. 통장을 오래 유지하고 높은 점수를 받아 당첨돼도 분양대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계약을 포기해야 한다. 청약통장이 있던 자리를 부모의 재산이 차지했다. 청약통장 가입자가 줄어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0년 넘게 납입해도 당첨 가능성은 낮고 당첨돼도 살 수 없다. 손에 잡히지 않는 기회를 위해 계속 돈을 묶어두는 편이 비합리적인 선택이 됐다. 장기 가입자까지 통장을 깨는 현상은 청약제도의 효용이 무너졌다는 경고다. 서울의 당첨 문턱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 평균 당첨 가점은 65.81점이었다. 2023년 56.17점, 2024년 59.68점에서 해마다 뛰었다. 일반적인 4인 가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점은 69점이다. 평균 당첨선이 최고점과 불과 3점 차이로 붙었다. 미혼 청년과 결혼 초기 신혼부부는 가점제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부양가족이 적고 무주택 기간도 짧기 때문이다. 정부는 청년에게 결혼과 출산을 권하면서 청약 점수표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청년과 막 가정을 꾸린 부부를 뒤로 밀어낸다. 특별공급 유형을 늘려도 공급 물량이 부족하면 경쟁자의 줄만 나뉜다. 신혼부부, 생애 최초, 다자녀, 노부모 부양, 신생아 특별공급을 계속 덧붙였지만 살 집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공급 부족의 책임을 자격 기준 개편으로 가려온 셈이다. 추첨 물량을 늘려도 분양가가 20억원이면 현금이 많은 사람이 계약한다. 가점에서 추첨으로 선정 방식을 바꿔도 입주 문턱은 그대로 남는다. 청약제도는 당첨자를 정할 뿐 당첨자가 집을 살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공공분양에서도 자금력이 점수로 바뀌었다. 정부는 2024년 11월 청약저축 월 납입 인정액을 10만원에서 25만원으로 올렸다. 납입총액으로 당첨 순위를 정하는 공공분양에서는 매달 25만원을 넣어야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다. 월 10만원과 25만원의 차이는 1년에 180만원이다. 10년이면 1800만원이다. 월세와 생활비, 학자금 대출을 감당하는 청년에게 매달 25만원은 결코 가벼운 부담이 아니다. 저축 여력이 부족한 무주택자를 돕기 위해 만든 제도가 돈을 더 많이 넣을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서울과 지방의 청약시장은 정반대로 움직인다. 올해 상반기 서울 아파트 평균 청약 경쟁률은 92.6대 1에 달했다. 울산과 부산, 강원, 전남, 제주 등에서는 모집 가구 수를 채우지 못한 단지가 이어졌다. 서울에서는 100명 가까이 줄을 서야 한 명이 당첨된다. 지방에서는 청약통장을 쓰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집이 남는다. 서울의 청약통장은 당첨 가능성이 희박한 복권이 됐고 지방의 청약통장은 쓸 곳을 찾기 어려운 통장이 됐다. 서울의 높은 경쟁률을 청약제도의 인기라고 내세울 수도 없다. 수백 명 가운데 한 명에게 수억원의 시세차익이 돌아가는 구조는 정상적인 주택 공급시장이 아니다. 필요한 곳에 집이 부족해 벌어지는 쟁탈전이다. 지방에는 지어놓고도 팔리지 않은 집이 쌓였다. 지난 5월 말 전국 미분양 주택은 6만5239가구였고 준공 후에도 주인을 찾지 못한 주택은 2만9350가구에 달했다. 상당수가 비수도권에 몰려 있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주택이 부족하고 사람이 떠나는 곳에는 빈집이 늘어난다. 일자리와 대학, 교통망, 의료시설이 수도권에 집중된 상태에서 지방에 아파트만 지어 공급 실적을 채운 결과다. 정부의 공급 통계에서는 서울 도심의 한 채와 수요가 줄어드는 지방의 한 채가 똑같이 계산된다. 전국 공급량이 늘었다고 발표해도 서울 출퇴근권의 무주택자가 들어갈 집은 늘지 않는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공급계획서에 적힌 가구 수가 아니라 실제 생활권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주택이다. 택지를 발표하고 지구를 지정하는 것만으로 주택이 생기지 않는다. 인허가와 착공이 늦어지고 준공이 몇 년씩 밀리는 동안 전셋값과 분양가는 오른다. 주택정책은 발표 물량이 아니라 착공과 준공, 입주 시점으로 평가해야 한다. 역대 정부는 집값이 오를 때마다 대출을 조이고 청약 요건을 손질했다. 공급 부족은 그대로 둔 채 수요자에게 더 높은 문턱을 세웠다. 대출을 줄이면 현금이 많은 사람은 불편을 감수하고 집을 산다. 저축한 돈 2억∼3억원이 전 재산인 무주택자는 시장에서 밀려난다. 투기를 막는다는 규제가 실수요자의 사다리부터 걷어찼다. 현금 부자에게 유리한 시장을 만든 뒤 청약 기회는 열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분양가는 20억원을 넘는데 금융 통로는 막혀 있다. 당첨권만 주고 입주할 길을 닫아놓은 셈이다. 청약제도는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졌다. 혼인 기간, 자녀 수, 소득, 자산, 거주 기간, 세대 구성, 주택 소유 이력을 모두 따진다. 모집공고문은 웬만한 법률 문서보다 어렵다. 한 항목을 잘못 판단하면 부적격 처리를 받고 당첨 기회까지 제한된다. 규칙이 복잡해진 만큼 무주택자의 기회가 넓어졌다면 감수할 수 있다. 현실은 반대다. 규정은 계속 늘었고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줄었다. 청약제도 개편은 공급 부족과 고분양가를 가리는 장막이 됐다. 청약통장 금리를 조금 올리고 세제 혜택을 늘리는 처방도 본질을 비껴간다. 청약통장은 예금 이자를 받기 위해 만드는 통장이 아니다. 집을 분양받기 위해 가입한다. 당첨 가능성이 낮고 당첨돼도 잔금을 치르지 못하는데 금리 몇 푼을 더 준다고 국민이 돌아오지 않는다. 청약통장 이탈은 주택도시기금에도 부담을 준다. 청약저축 자금은 공공임대주택 건설과 전세자금 지원에 쓰이는 주요 재원이다. 청약제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수록 서민 주거정책을 떠받칠 자금도 줄어든다. 정책 실패가 다시 정책 기반을 무너뜨리는 구조다. 수요가 몰리는 지역에 무주택자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 서울 도심과 주요 일자리 접근성이 높은 지역의 재건축·재개발 사업 기간을 줄이고 실제 착공과 입주로 이어지는 물량을 늘려야 한다. 공공택지에서는 토지비와 개발이익을 낮춰 분양가를 억제해야 한다. 공공이 조성한 땅에서 민간 시세와 다를 바 없는 가격의 아파트를 내놓고 서민 주거정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생애 최초 무주택자에게는 소득과 상환 능력을 기준으로 장기·고정금리 대출 통로를 열어야 한다. 분양가와 대출한도가 따로 움직이면 청약시장은 현금 부자의 시장으로 남는다. 가점제도 현재의 가구 구조에 맞게 고쳐야 한다. 1인 가구와 결혼 초기 가구가 가입 기간과 납입 실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물량을 늘려야 한다. 부양가족 수가 적다는 이유로 청년을 사실상 배제하는 제도는 저출산 시대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지방에서는 청약 조건을 다시 손보는 데 그칠 일이 아니다. 미분양을 해소하고 실수요를 만들 수 있도록 산업과 교통, 교육 정책을 주택 공급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사람이 갈 이유가 없는 곳에 아파트만 짓고 청약 미달을 수요자의 선택 탓으로 돌려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더 심각한 대목은 1순위 가입자까지 빠르게 줄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통장을 유지한 사람들이 기다림을 끝내고 있다. 수년간 돈을 넣어온 가입자는 작은 금리 차이 때문에 통장을 깨지 않는다. 당첨되기 어렵고 당첨돼도 살 수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떠난다. 4년 동안 276만명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개인 사정의 합계로 넘길 수 없는 규모다. 청년이 청약통장을 만들지 않고 신혼부부가 서울을 떠나며 장기 무주택자가 통장을 깨는 사회에서는 근로소득보다 상속과 증여가 집의 주인을 결정한다. 집을 가진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의 차이가 자녀 세대의 주거와 결혼, 출산까지 갈라놓는다. 국가는 국민에게 통장을 만들고 기다리라고 했다. 국민은 돈을 넣고 무주택 기간을 견뎠다. 그 사이 필요한 곳의 공급은 부족해졌고 분양가는 20억원을 넘어섰으며 현금이 없는 실수요자의 금융 통로는 좁아졌다. 청약통장을 깬 국민이 국가와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 아니다. 주택정책이 먼저 신뢰를 잃었다. 276만개의 해지 통장은 정부에 보내는 항의서다. 정부가 읽지 않는다면 다음에 사라지는 것은 청약통장만이 아니다. 일해서 번 돈으로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믿음, 대한민국 중산층을 만들어온 통로가 함께 사라진다.
2026-07-21 09: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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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권 뉴스]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기업용 AI 키운다…데이터센터도 확충
중국의 인공지능(AI) 산업이 연구실을 벗어나 기업과 공장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기업의 회계·구매·생산 업무를 처리하는 AI 시스템이 등장하고, 휴머노이드 로봇은 제조와 의료 현장에 투입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할 데이터센터와 통신망 투자도 함께 늘고 있다. 20일 중국 정보기술 기업 엑스퓨전은 최근 상하이에서 열린 ‘2026 세계인공지능대회(WAIC)’에서 기업용 AI 시스템을 대거 공개했다. 엑스퓨전이 내놓은 제품은 기업의 회계와 인사, 구매, 재고를 관리하는 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ERP)에 AI를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직원이 일일이 자료를 입력하고 분석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AI가 주문과 재고를 살피고 생산 일정을 조정하거나 경영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한 것이다. 기업 내부에서 AI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서버와 소프트웨어를 묶은 시스템도 선보였다. 대형 AI 모델 자체의 성능 경쟁보다 AI가 실제 기업 업무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처리하고 비용을 줄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엑스퓨전은 전력과 서버, AI 연산, 업무 수행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하는 사업 구조도 제시했다. AI에 투자한 비용이 생산성 향상과 매출 증가로 이어지도록 기업의 핵심 업무 안에 AI를 넣겠다는 구상이다. 중국 정부도 AI의 산업 현장 적용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는 올해 상반기 지능형 로봇과 상업우주, 신에너지차, 신소재 분야에서 기술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졌다고 밝혔다. 제조와 의료 현장에서는 5세대 이동통신과 로봇, AI를 결합한 서비스가 빠르게 늘고 있다. 특히 중국산 사족보행 로봇은 세계 판매량의 약 70%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개처럼 네 발로 움직이는 사족보행 로봇은 계단이나 비탈길, 공사장처럼 바퀴로 이동하기 어려운 곳에서 주로 사용된다. 중국 기업이 내놓은 휴머노이드 로봇 제품도 세계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다. 사람처럼 팔과 다리를 갖춘 휴머노이드 로봇은 공장에서 물건을 옮기거나 조립하는 작업부터 병원과 돌봄 현장까지 활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다만 중국 정부가 발표한 ‘세계 절반’은 판매량이 아니라 출시된 제품의 종류를 기준으로 한 수치다. 중국 기업들이 다양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빠르게 내놓고 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로봇과 기업용 AI를 움직이는 데이터센터 투자도 확대되고 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중국의 AI 연산시설 규모는 2185EFLOPS에 달했다. 일반 독자에게 생소한 EFLOPS는 컴퓨터가 1초 동안 얼마나 많은 계산을 처리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단위다. 중국 전역의 데이터센터가 AI 학습과 서비스에 투입할 수 있는 연산 능력을 모두 합한 수치다. 데이터센터에 마련된 공간 가운데 서버가 실제로 설치된 비율은 71.4%로 집계됐다. 중국은 최근 2년 동안 주요 데이터센터 지역을 잇는 고속 통신망도 70개 이상 구축했다. 지역 간 데이터 전송 속도와 안정성도 개선됐다. 중국은 전력과 부지가 풍부한 서부 지역에 대형 데이터센터를 짓고, 베이징과 상하이 등 동부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AI 연산 수요를 보내 처리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도시의 전력 부담을 줄이고 전국의 데이터센터를 하나의 거대한 연산망처럼 활용하려는 것이다. 중국의 AI 전략은 이제 대형 모델을 개발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기업 업무를 처리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로봇을 생산 현장에 투입하며, 그 뒤에서 대규모 계산을 처리할 데이터센터를 확충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기술을 얼마나 많이 보유했느냐보다 공장과 기업 현장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느냐가 경쟁력을 가르는 단계에 들어선 셈이다.
2026-07-20 16: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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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디올백 종결' 뒤집어 보는 경찰…권익위는 누구의 권익을 지켰나
경찰이 20일 정부세종청사 국민권익위원회를 압수수색했다. 대상은 유철환 전 권익위원장과 정승윤 전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이 사용하던 사무실 등이다. 경찰청 3대 특검 인계사건 특별수사본부는 지난 16일 정 전 부위원장의 주거지도 압수수색했다. 적용 혐의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이다. 수사의 출발점은 300만원짜리 가방이 아니다. 권익위가 2024년 김건희씨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을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하는 과정에서 수뇌부가 실무진의 조사와 전원위원회의 심의에 부당하게 개입했는지가 핵심이다. 당시 언론이 흔히 사용한 ‘무혐의’라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권익위는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아니다. 형사책임의 유무를 확정하는 기관이 아니라 청탁금지법 위반 신고를 조사해 수사기관이나 감사기관에 이첩·송부할 사안인지 판단하는 반부패 행정기관이다. 권익위가 내린 결론은 형사재판의 무죄판결이 아니라 신고사건의 종결 결정이었다. 그 종결 결정이 정상적인 조사와 심의를 거쳐 나왔는지를 경찰이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처벌 규정이 없다는 말로 덮을 수 없는 문제 사건은 2022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씨는 윤석열 당시 대통령 취임 후 서울 서초동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에서 최재영 목사로부터 300만원 상당의 명품가방을 받았다. 참여연대는 2023년 12월 19일 김씨와 윤 전 대통령 등을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권익위에 신고했다. 권익위는 신고 접수 후 업무일 기준 116일이 지난 2024년 6월 10일 사건을 종결했다. 부패방지권익위법은 신고사항을 접수일부터 60일 이내에 처리하도록 하고, 보완이 필요할 때도 30일 범위에서만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권익위는 최장 90일의 법정 처리기간도 넘겼다. 정승윤 당시 부위원장은 대통령 배우자를 제재하는 규정이 청탁금지법에 없다는 점을 종결 이유로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과 가방 제공자의 직무 관련성, 가방이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하는지도 논의한 뒤 종결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 배우자 본인을 직접 처벌하는 조항이 없다는 설명 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청탁금지법은 금품을 받은 공직자 배우자를 직접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실 하나로 사건 전체를 끝낼 수는 없다. 청탁금지법은 공직자의 배우자가 공직자의 직무와 관련해 금품을 받는 행위를 금지한다. 공직자가 배우자의 수수 사실을 알게 된 경우 신고하도록 하고, 신고하지 않은 공직자를 처벌하는 구조도 두고 있다. 금품 제공자에 대한 제재 규정도 있다. 헌법재판소 역시 청탁금지법이 배우자를 직접 처벌하지 않는 대신 공직자의 신고 의무와 불이행에 대한 제재를 두고 있다는 법률 구조를 전제로 판단했다. 따라서 권익위가 확인했어야 할 대상은 김씨 개인의 처벌 가능성에 그치지 않는다. 가방 제공과 대통령 직무 사이에 관련성이 있었는지, 윤 전 대통령이 가방 수수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 알게 된 뒤 소속 기관장에게 신고하거나 반환·인도 조치를 했는지, 제공자의 행위가 청탁금지법에 저촉되는지까지 조사했어야 했다. 배우자 처벌 조항이 없다는 문구는 조사의 끝이 아니라 출발점에 가까웠다. 권익위는 법률의 한 문장을 꺼내 사건 전체에 덮었다. 법조문을 좁게 잘라 읽으면 결론은 쉬워진다. 그러나 반부패기관의 임무는 권력자에게 가장 유리한 문구를 찾아주는 데 있지 않다. 사실관계를 조사한 뒤 법률이 요구하는 책임의 범위를 가려내는 것이 권익위가 해야 할 일이었다. 조사 마감일 밤, 조사 대상 대통령과 만난 권익위 2인자 2026년 출범한 권익위 정상화 추진 태스크포스의 조사 결과는 당시 종결 결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권익위 TF에 따르면 정 전 부위원장은 담당 부서의 의견과 달리 판단을 유보하고 추가 보완을 반복적으로 지시해 사건 처리를 지연시켰다. 전원위원회가 열리기 약 2시간 전에는 일부 정무직·상임위원을 따로 불러 수사기관 이첩이나 송부가 아닌 ‘사건 종결’을 처리 방향으로 제시한 사실도 확인됐다. 더 심각한 대목은 대통령 관저 회동이다. TF는 정 전 부위원장이 사건 처리기간 중 윤 전 대통령 등과 심야에 대통령 관저에서 약 1시간 동안 비공식 회동한 정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회동 시점은 당초 사건 처리 마감일 밤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윤 전 대통령은 자신의 배우자와 함께 권익위 신고사건의 피신고자였다. 조사기관의 수뇌부가 조사 대상자를 비공식적으로 만난 셈이다. 권익위가 회동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경찰이 밝혀야 한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사건 처리 방향에 관한 요청이나 언급이 있었는지, 회동 뒤 실무진에 어떤 지시가 내려갔는지, 회동 사실을 전원위원들에게 알렸는지가 수사의 중심에 놓인다. 조사 대상자와 조사기관 수뇌부의 비공식 접촉은 그 자체로 기관의 공정성을 훼손한다. 법률가라면 사건 당사자와 심판자의 접촉이 어떤 의심을 낳는지 모를 수 없다. 사건 당사자에게 특혜를 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혜를 의심할 만한 접촉부터 피하는 것이 공직자의 의무다. 그런 기본조차 지키지 않았다면 법률 지식의 부족이 아니다. 직업적 양심의 문제다. 회의에서 논의하지 않은 문구까지 의결서에 추가 TF가 확인한 의결서 작성 과정도 정상적인 행정기관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권익위 의결서는 원칙적으로 사건을 조사한 담당 부서가 전원위원회의 논의와 의결 내용에 따라 작성한다. 그런데 TF는 정 전 부위원장이 상정 의안에 없거나 전원위원회에서 논의하지 않은 사항을 의결서에 직접 추가한 정황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전원위원회는 장식물이 아니다. 여러 위원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사건을 심의하고 다수 의견으로 결론을 내리도록 만든 합의제 기관이다. 회의 전에 결론을 정해 놓거나 회의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을 사후에 의결서에 넣었다면 합의제 의사결정의 외형만 빌린 셈이다. 의결서는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설명문이 아니다. 실제 회의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내용을 기록하는 공문서다. 수뇌부가 원하는 결론에 맞춰 의결서의 논리를 사후 보강했다면 전원위원들의 심의권과 실무진의 고유 업무를 침해했는지가 문제 된다. 형법상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에게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시키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할 때 성립한다. 대법원은 실무 담당자에게 법령과 절차에 따른 고유한 권한과 역할이 있는데도 상급자가 그 기준과 절차를 어기도록 지시한 경우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할 수 있다고 판시해 왔다. 경찰은 정 전 부위원장과 유 전 위원장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실무진이 원래 작성한 보고서와 최종 의결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전원위원들의 독립적인 판단이 침해됐는지를 문서와 전자정보로 확인해야 한다. 직권남용죄 성립은 부당한 지시가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무진이 법령상 의무가 없는 일을 실제로 했거나 고유한 권한 행사가 방해된 결과까지 입증해야 한다. 이번 압수수색의 성패도 그 연결고리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복원하느냐에 달렸다. 반대 의견을 낸 간부에게 돌아온 발언 제한과 업무 배제 사건 처리 과정에서 가장 참담한 대목은 실무 책임자였던 김모 부패방지국장의 죽음이다. 김 국장은 명품가방 사건이 종결된 지 약 두 달 뒤인 2024년 8월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공개된 김 국장의 메시지에는 “지난 20년간 만든 제도를 제 손으로 망가뜨렸다”, “가방 건과 관련된 여파가 너무 크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 국장은 종결 결정에 반대 의견을 표시한 권익위원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특정 사건 하나와 곧바로 연결해 형사책임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권익위 자체 TF가 확인한 조직 내부의 처우는 별개의 문제다. TF는 정 전 부위원장이 사건 종결에 반대했던 김 국장의 회의 발언권을 제한하고 주요 사건 업무에서 배제했으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토대로 공개적으로 비난한 정황을 확인했다. 권익위는 해당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하고 정 전 부위원장의 현 소속기관에 비위 사실을 통보하기로 했다. 고인과 유족에게 기관 차원의 사과도 결정했다. 법과 원칙을 지키겠다는 실무자의 의견이 조직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발언 제한과 업무 배제로 돌아왔다면 권익위의 내부 통제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반대 의견을 설득하지 못하자 사람을 배제하고 결론을 밀어붙이는 조직에서 합의제 의사결정은 작동할 수 없다. 부하 직원에게 청렴을 교육하면서 정작 수뇌부는 권력자의 사건 앞에서 다른 잣대를 들이댔다면 그보다 모순적인 일도 없다. 법률가의 지식이 권력의 방패가 될 때 유 전 위원장과 정 전 부위원장은 모두 법률가다. 유 전 위원장은 판사 출신이고 정 전 부위원장은 검사 출신 법학교수다. 법률의 문언과 행정절차가 왜 존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법률가 출신 고위공직자에게 요구되는 책임은 법조문을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권력자가 불편해하더라도 법과 절차에 따라 판단하고, 실무자가 외압 없이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한다. 그 일을 하라고 장관급 위원장과 차관급 부위원장 자리를 맡긴다. 법률 지식을 권력자의 책임을 가리는 데 사용하면 무지보다 해롭다. 법을 모르는 사람은 잘못 해석할 수 있지만, 법을 아는 사람이 결론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는 문구를 찾아 붙이면 법률은 책임을 묻는 기준이 아니라 책임을 피하는 기술로 전락한다. 청탁금지법에 대통령 배우자 직접 처벌 규정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은 없다. 국민이 권익위에 물은 것은 법 조항 한 줄이 아니었다. 대통령 배우자가 고가의 금품을 받고 대통령이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최고 권력자에게도 일반 공직자와 같은 기준이 적용되는지를 물었다. 권익위 수뇌부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116일을 끈 뒤 배우자 처벌 규정이 없다는 설명을 내놓고 사건을 닫았다. 그 과정에서 조사 대상 대통령과 비공식 회동이 있었고, 회의 직전 종결 방향을 제시했으며, 회의에서 논의하지 않은 내용이 의결서에 들어갔다는 것이 권익위 자체 조사 결과다. 이런 정황이 확인되고도 공직자의 재량이나 법률 해석의 차이라고 둘러댈 수는 없다. 재량은 정해진 절차 안에서 행사할 때 보호받는다. 법률 해석은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반대 의견을 검토한 뒤 내놓아야 설득력을 얻는다. 결론을 정해 놓고 절차를 거꾸로 밟았다면 재량이 아니라 권한의 사유화다. 권익위가 잃은 것은 한 사건의 신뢰가 아니다 권익위는 스스로를 ‘대한민국 반부패 총괄기관’이라고 소개한다. 청탁금지법과 이해충돌방지법을 관장하고 공직사회 청렴도를 평가하며 부패 신고자를 보호하는 기관이다. 그런 기관이 최고 권력자의 배우자 사건 앞에서 처리기간을 넘기고, 조사 대상자와 수뇌부가 비공식으로 만나고, 실무진의 반대 의견을 누르고, 회의에서 논의하지 않은 내용까지 의결서에 넣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권익위가 잃은 것은 김건희씨 사건 하나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일반 공무원과 국민에게 청렴을 요구할 자격을 잃었다. 민원인에게 절차를 지키라고 말하고 공직자에게 배우자의 금품 수수를 신고하라고 교육하면서 대통령 부부에게는 법의 빈틈부터 찾아줬다는 인식이 남았다. 공직자는 정권과 함께 일할 수 있지만 정권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된다. 임명권자에게 인간적인 의리를 느낄 수는 있어도 법률상 직무를 그 의리 아래 둘 수는 없다. 권력자의 눈치를 살펴 결론을 정하는 사람이라면 반부패기관의 수뇌부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경력, 판사와 검사를 지냈다는 이력, 법을 가르친다는 직함도 공직자의 양심을 대신하지 못한다. 오히려 법과 절차를 잘 아는 사람이 본분을 저버렸다면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경찰 수사는 누가 어떤 지시를 했는지 밝히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대통령 관저 회동과 사건 지연, 사전회의, 의결서 수정, 실무진 배제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권익위의 독립적인 심의 절차가 권력을 위해 훼손됐다면 그 책임을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물어야 한다. 권익위 간판에는 아직도 ‘청렴하고 공정한 대한민국’이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그 문구를 다시 사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권익위 내부에서 벌어진 일을 숨김없이 밝혀야 한다. 반부패기관의 신뢰는 홍보 문구나 사과문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권력 앞에서 법을 굽힌 사람이 누구인지 가려내고 그에 맞는 책임을 묻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2026-07-20 16: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