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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재건축을 왜 공급 정책의 중심에 놓아야 하는가
주택 공급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반론이 있습니다. 재개발·재건축은 기존 주택을 허물고 새 주택을 짓는 사업이므로 실제 공급 증가 효과가 제한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보다 가구 수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주장입니다. 얼핏 보면 타당한 지적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주택시장을 건축물의 개수만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중요한 한계를 갖습니다. 주택 공급의 효과는 새로 지어진 집의 숫자뿐 아니라 그 집이 기존 주택시장에 만들어내는 연쇄적인 변화까지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한 정비사업 구역에서 노후 주택 800가구가 철거되고 1,600가구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사업 구역만 놓고 보면 주택 수는 800가구 증가합니다. 이는 명확한 물리적 순증 물량입니다. 하지만 이 사업의 효과가 800가구 증가에서 끝난다고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새 아파트에 입주하는 가구가 기존에 거주하던 주택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또 다른 주거 이동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축 아파트에 입주한 가구가 기존의 30평형대 아파트를 매도하거나 임대하고, 그 집을 선택한 가구가 다시 자신이 살던 주택을 비운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주택은 또 다른 가구의 선택지가 됩니다. 이런 이동이 주택의 가격과 품질, 입지에 따라 연쇄적으로 이어지면 신규 아파트의 공급 효과는 최초 입주 가구를 넘어 기존 주택시장으로 확산됩니다. 새로운 주택이 하나 생겼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주택으로 이동한 가구가 기존에 사용하던 주거 공간을 다른 가구가 이용할 수 있게 된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주택시장이 서로 분리된 개별 시장이 아니라 여러 가격대와 품질의 주택이 연결된 시장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고급 신축 아파트의 공급은 해당 주택을 직접 구입할 수 있는 가구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 가구가 비운 기존 주택은 다른 가구의 선택지가 되고, 다시 그 가구가 비운 주택은 또 다른 수요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최초의 공급이 주거 사다리의 여러 단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쇄적인 주거 이동은 해외 연구에서도 분석되어 왔습니다. 미국에서는 시장가격형 아파트의 공급이 기존 저소득 지역의 임대주택 선택지를 확대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고, 핀란드에서도 신규 주택 공급에 따른 이동이 소득 하위 계층까지 이어지는 현상이 관찰됐습니다. 이는 신규 주택이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대에 공급되더라도 기존 주택시장의 주거 이동을 통해 더 넓은 계층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여기서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신축 주택 한 가구가 기존 주택 몇 가구의 추가 공급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기존 주택이 실제로 매매나 임대시장에 나오는지, 새 입주자가 기존 주택을 계속 보유하는지, 주택 수요가 충분한지에 따라 연쇄 이동의 범위는 달라집니다. 또한 한 가구의 이동으로 발생한 여러 차례의 주거 변화를 모두 독립적인 신규 공급으로 계산하면 효과를 중복 산정할 위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물리적인 주택 순증과 광역 주택시장에서 발생하는 유효공급 효과는 구분해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연쇄적인 주거 이동을 계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효과를 무시하는 것 역시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순증 물량은 객관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기본 지표이지만, 주택시장의 변화를 모두 설명하는 지표는 아닙니다. 공급 정책을 평가할 때는 실제 주택 수의 증가뿐 아니라 기존 주택의 재사용, 임대시장에 미치는 영향, 주거 선택지의 확대까지 함께 살펴야 합니다. 재개발·재건축은 주택의 품질을 개선하는 역할도 합니다. 노후화된 주택을 정비하면 주거 안전성과 생활 편의성을 높일 수 있고, 기존에 낮은 밀도로 이용하던 토지에 더 많은 주택을 공급할 가능성도 생깁니다. 이미 도로와 대중교통, 상업시설 등 도시 기반시설이 형성된 지역에서 주택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신규 택지 조성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도심 주택 수요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규 주택이 실제로 얼마나 늘어나는지 엄밀하게 계산하고, 그 공급이 기존 주택시장과 주거 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추가로 분석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입니다. 주택 공급을 확대하려면 새로운 택지를 확보하는 정책과 함께 기존 도심의 재개발·재건축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해야 합니다. 사업성을 지나치게 떨어뜨리는 규제와 불필요한 행정 지연은 민간의 공급 유인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측 가능한 규칙과 합리적인 사업 환경은 민간 자본이 실제 주택 공급으로 이어지게 하는 기반이 됩니다. 주택시장은 단순히 건축물의 개수를 더하고 빼는 산수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한 가구의 입주가 다른 가구의 이동을 촉진하고, 그 이동이 다시 새로운 주거 선택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연결된 시장입니다. 재개발·재건축의 공급 효과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눈에 보이는 신축 물량뿐 아니라 그 뒤에서 움직이는 주택시장 전체의 흐름까지 살펴야 합니다. 공급 정책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2026-10-13 15: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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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공급 또 속도전, 이번에는 '입주 날짜'를 보여줘야
[경제일보] 정부가 다시 주택 공급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서울 준공업지역에서 추진 중인 약 2만7000가구의 사업을 앞당기고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을 통해 추가 물량을 확보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새 택지를 대규모로 내놓기보다 이미 확보한 부지와 진행 중인 사업의 시간을 줄이는 데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그러나 정부가 발표하는 ‘공급’과 국민이 실제로 들어가 살 수 있는 집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차가 있다. 몇 만가구를 공급하겠다는 발표만으로는 그 집이 아직 인허가 단계인지, 공사를 시작했는지, 몇 년 뒤 입주하는지 알기 어렵다. 집을 구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계획서에 잡힌 주택 수가 아니라 언제 열쇠를 받을 수 있느냐다. 정부는 지난해 공급 실적을 인·허가가 아닌 착공 기준으로 관리하겠다고 했다. 인·허가만 받아놓고 공사를 시작하지 않은 사업까지 공급 성과로 잡는 데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2030년까지 수도권에서 135만가구를 착공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공급 통계를 실제 공사에 가까운 단계로 옮긴 셈이다. 하지만 착공도 입주는 아니다. 오늘 공사를 시작한 1만가구와 내년에 사람이 들어가는 1만가구는 시장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아파트는 착공한 뒤 준공과 입주까지 수년이 걸린다. 집값과 전셋값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몇 가구가 삽을 떴느냐보다 언제 새집이 시장에 들어오느냐다. 지난 1월 발표한 도심 주택 공급 대책만 봐도 공급 발표와 실제 입주 사이의 간격이 드러난다. 정부는 도심과 군부지, 공공시설 이전 부지 등을 활용해 6만가구를 공급하겠다고 했지만 일부 사업은 착공 목표 자체가 2028년 이후다. 성남 신규 공공주택지구 6300가구는 착공 목표가 2030년이다. 입주는 그보다 더 뒤다. 2030년에 공사를 시작할 주택까지 지금의 공급 물량으로 묶으면 국민이 체감하는 공급 시점은 흐려진다. 장기적으로 몇 가구를 지을 것인지와 앞으로 2~3년 안에 몇 가구가 실제 입주하는지는 따로 보여줘야 한다. 같은 1만가구라도 내년 입주 물량과 4년 뒤 착공 물량은 같은 공급이 아니다. 시장이 당장 보는 것도 2030년의 계획보다 2027년과 2028년의 입주 물량이다. 부동산R114 집계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입주 예정 물량은 2025년 3만7103가구에서 올해 2만5281가구로 줄고 2027년 1만8682가구, 2028년 1만3683가구까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2028년 물량은 2025년의 40%에도 못 미친다. 실제 준공 물량도 크게 줄었다. 국토교통부 주택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서울 주택 준공은 1만5160가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2.1% 감소했다. 앞으로 공급하겠다는 집의 숫자는 늘어날 수 있지만 지금 시장에 도착하는 새집은 오히려 줄고 있다. 부동산 대책을 오래 지켜본 사람들에게 ‘몇 만호 공급’은 더 이상 낯선 숫자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도권에 몇십만가구를 짓겠다는 발표가 나왔고 공급 부족을 해소하겠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국민이 기억하는 것은 발표한 숫자보다 늦어진 입주다. 택지를 발표하고도 보상이 늦어졌고 사전청약을 받은 뒤 본청약과 입주가 밀린 사례도 있었다. 시장이 정부의 공급 숫자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정부 정책도 국민에게 한 약속이라면 언제 이행되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5만가구를 공급하겠다는 발표만 있고 사업별 착공과 입주 일정이 없다면 약속이 지켜졌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행정은 목표를 발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현실이 되는지를 설명하고 그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래서 공급 발표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신규 공급 5만가구를 발표한다면 그 옆에 사업별 지구 지정 시점과 인허가, 착공, 준공, 입주 예정 시기를 함께 적으면 된다. 일정이 늦어졌다면 얼마나 밀렸고 무엇 때문에 지연됐는지도 공개해야 한다. 공급대책의 책임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장관이 발표한 날 몇 만가구를 확보했다고 성과로 잡을 것이 아니라 실제 착공이 얼마나 이뤄졌고 예정된 날짜에 몇 가구가 입주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일정이 늦어졌다면 어느 단계에서 막혔고 누가 해결하지 못했는지도 밝혀야 한다. 그래야 공급대책에도 책임지는 사람이 생긴다. 이런 정보가 공개돼야 시장도 공급대책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내년에 입주할 1만가구인지, 2030년에 공사를 시작할 1만가구인지 모른 채 총공급 물량만 받아들여서는 앞으로 집이 얼마나 부족한지 가늠하기 어렵다. 정부가 발표하는 숫자가 커도 국민의 불안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속도전의 성과도 발표한 물량이 아니라 실제 일정으로 확인해야 한다. 행정절차를 얼마나 줄였는지보다 착공이 몇 달 앞당겨졌는지, 준공은 언제인지, 입주는 몇 년 몇 월부터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편이 시장에는 훨씬 유용한 정보다. 공급대책은 발표할 때가 아니라 입주할 때 평가받아야 한다. 정부가 5만가구를 약속했다면 국민은 5만이라는 숫자와 함께 그 집에 들어갈 날짜도 알아야 한다. 일정이 늦어지면 이유와 책임도 밝혀야 한다. 수십 년 동안 반복된 ‘몇 만호 공급’ 발표가 시장의 믿음을 얻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에는 숫자를 더 크게 쓰는 대신 달력을 내놓아야 한다.
2026-08-13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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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훈 LH 사장, 공급 속도·품질 혁신 전면에…"국민이 기다리는 집 빠르게 공급"
[경제일보] 이성훈 한국토지주택공사(LH) 신임 사장이 취임사에서 주택 공급 속도와 공공주택 품질 혁신을 내세웠다. 약 8개월간 이어진 수장 공백이 해소된 만큼 LH가 정부 주택 공급 정책의 실행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LH는 경남 진주 본사에서 이성준 제7대 사장 취임식을 개최했다고 6일 밝혔다. 이 신임 사장의 임기는 오는 2029년 7월까지다. 이 사장은 대통령비서실 국토교통비서관으로 근무하며 현 정부의 부동산·국토교통 정책을 조율해 왔다. 앞서 국토교통부 정책기획관과 경기도 건설국장 등을 지냈다. 공공주택 공급 확대와 LH 조직 개편 논의가 동시에 진행되는 시점에 주택 정책을 다뤄 온 관료 출신 인사가 LH 수장에 오른 셈이다. 이날 이 사장은 집은 더 이상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공공재여야 하고, 국민이 부담 가능해야 한다”며 “국민이 기다리는 좋은 집을 빠르게 공급하고, 청년·신혼부부의 주거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전략산업 기반과 균형발전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 LH가 완수해야 할 사명”이라고 말했다. 이 신임 사장은 이를 위해 △주택 공급 속도 제고 △공공주택 입지·품질 혁신 △지역균형성장 지원 △AI 대전환과 ESG 경영 △안전 최우선 경영을 5대 중점 추진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먼저 인허가와 보상, 조성공사 등 사업 전 과정을 바꿔 주택 공급 속도를 높이겠다고 강조했다. 도심복합사업과 공공정비사업, 유휴부지 개발, 신축·기축 매입임대 확대 등을 통해 도심 주택 공급 성과를 조기에 만들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공공임대주택의 질을 높이겠다는 메시지도 전했다. 이 사장은 공공임대주택을 ‘국민이 먼저 찾는 집’이자 ‘서민·중산층의 당당한 주거 선택지’로 바꾸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역세권 등 우수 입지에 공공임대주택을 우선 배치하고 중형 평형을 늘리겠다는 방향을 밝혔다. 청년과 신혼부부, 고령자 등 계층별 주거서비스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지역균형성장도 LH의 역할이라고 전했다. 반도체와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프로젝트가 지역에서 추진될 수 있도록 기업과 협력해 산업단지를 빠르게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산업단지만 짓는 것이 아니라 주거와 교육, 문화 여건을 갖춘 배후도시까지 함께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안전 경영 역시 취임사에 포함됐다. 이 사장은 “성과보다 안전, 속도보다 생명”이라는 원칙을 언급하며 AI 등 첨단기술을 활용해 건설현장과 임대주택 안전을 관리하겠다고 했다. 최근 건설현장 사고가 반복되면서 공공 발주기관과 시행기관의 안전관리 책임도 커지고 있는 만큼 LH 차원의 현장 관리 체계를 강화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LH가 풀어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정부는 LH를 중심으로 공공주택 공급 확대와 매입임대 확대, 공공택지 직접 시행 등을 추진하고 있다. 동시에 LH의 개발 기능과 임대·자산 관리 기능을 분리하는 조직 개편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공급 속도를 높이면서도 재무 부담과 조직 개편, 공공성 회복을 함께 다뤄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이 사장은 “주택정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동시에 LH의 공공성과 경영 효율성을 함께 높여 국민이 신뢰하는 공기업으로 거듭나겠다”며 임직원들에게 “우리가 공급하는 주택과 도시, 일하는 방식까지 과거와는 다른 수준의 변화를 만들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자”고 말했다.
2026-07-06 13: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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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줄어든 시장, 안정이 아니라 불안의 신호다
[경제일보] 전세가 줄어드는 시장을 두고 정상화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세입자의 선택지가 좁아지고, 남은 전세 가격이 뛰며, 월세 부담까지 커지는 시장을 안정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전세 감소는 제도의 변화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흐름은 주거 안전판이 약해지는 신호에 더 가깝다. 최근 통계는 전세 감소가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올해 들어 전월세 거래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육박했다. 서울 아파트 시장에서도 전세 물건을 찾기 어렵다는 말이 더는 과장이 아니다. 한국부동산원 조사에서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6월 둘째 주 한 주 동안 0.32% 올랐다. 10년여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전세대출 잔액은 줄었지만, 이를 가계부채 안정의 신호로만 읽기도 어렵다. 전세 거래 자체가 줄고 월세 전환이 빨라진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세는 한국 주택시장의 오래된 안전판이었다. 해외에서 보기 드문 제도이고, 목돈을 맡기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위험도 적지 않았다. 전세사기와 보증금 미반환 사태는 전세제도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과도한 전세대출이 전셋값과 가계부채를 함께 밀어 올렸다는 지적도 피하기 어렵다. 전세가 언제까지나 지금의 비중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전세 감소를 곧바로 바람직한 변화로 볼 수도 없다. 전세는 단순한 임대차 방식이 아니었다. 중산층과 서민이 매달 주거비를 크게 줄이면서 직장과 학교, 생활권을 유지하게 해준 완충 장치였다. 내 집을 사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제도였고, 매매시장과 월세시장 사이에서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그 안전판이 줄어드는 과정에서 대체 장치가 충분히 마련됐는지가 문제다. 월세 비중이 높아졌다는 통계는 임대차 방식의 변화만 뜻하지 않는다. 매달 소득에서 주거비가 빠져나가는 가구가 늘었다는 의미도 함께 갖는다. 전세는 목돈 부담이 크지만, 월세는 매달 가처분소득을 직접 깎는다. 소득 증가 속도가 물가와 주거비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가구에는 월세화가 생활비 압박으로 이어진다. 청년층과 신혼부부, 아이를 키우는 맞벌이 가구, 은퇴 이후 현금흐름이 제한된 고령층일수록 부담은 더 크다. 전세가 줄어든다고 월세가 안정되는 것도 아니다. 전세에서 밀린 수요가 월세로 이동하면 월세 가격도 오른다. 임차인은 전세 품귀와 월세 부담을 동시에 겪는다. 보증금은 낮아지는 대신 매달 내야 할 돈이 늘고, 보증금이 높은 반전세도 적지 않다. 겉으로는 월세 선택지가 많아진 것처럼 보여도 세입자의 협상력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 최근 서울 전셋값 상승세는 이 대목을 보여준다. 전세가 줄어드는 시장에서 남은 전세 가격이 오른다. 수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전세를 원하는 수요에 비해 시장에 나오는 물건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학군, 직장 접근성, 신축 선호, 대단지 선호가 겹치는 지역에서는 가격이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서울 주요 지역의 전세 품귀를 단순한 계절적 현상으로 넘기기 어려운 이유다. 입주 물량 감소도 전세 불안을 키운다. 새 아파트 입주가 충분하면 전세 시장에는 숨통이 트인다. 새집으로 이동하는 수요가 생기고, 기존 주택의 전세 물건도 연쇄적으로 나온다. 반대로 입주 물량이 줄면 시장에 나오는 전세 공급이 막힌다. 기존 세입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계약갱신청구권을 쓰고, 집주인은 실거주나 월세 전환을 택한다. 신규 전세 물건은 더 줄어든다. 공급 부족과 전세 감소가 맞물리면 가격 상승 압력은 더 커진다. 전세대출 감소도 착시를 경계해야 한다. 전세대출 잔액이 줄었다는 사실은 겉으로 보면 가계부채 부담 완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세 거래가 줄어 대출이 감소했다면 의미가 달라진다. 대출 장부는 가벼워졌지만 세입자의 월 주거비 부담은 커졌을 수 있다. 대출을 못 받아 전세를 포기하고 월세로 이동한 가구도 통계 뒤에 숨어 있다. 부채가 줄었다고 주거비 부담까지 줄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세대출은 양면성을 갖는다. 과도한 전세대출은 전셋값을 밀어 올리고 가계부채를 키웠다. 그렇다고 대출을 급격히 조이면 실수요자도 함께 막힌다. 투기성 수요와 고가 전세에는 엄격해야 하지만, 실수요자의 주거 이동까지 막아서는 곤란하다. 대출 규제는 시장 과열을 막는 수단이지 세입자의 이동 사다리를 끊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책이 전세 감소를 가계부채 축소라는 숫자로만 읽는 순간, 세입자의 부담은 통계 밖으로 밀려난다. 집주인의 선택도 달라졌다. 금리와 세금, 보증금 반환 리스크, 전세사기 이후의 제도 변화가 임대인의 판단에 영향을 주고 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전세보다 월세가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제공한다. 보증금을 돌려줘야 할 부담도 줄어든다. 임대인의 위험 회피가 임차인의 월 주거비 증가로 이전되는 셈이다. 이 변화를 시장의 자연스러운 조정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전세 감소의 본질은 세입자의 선택권 축소다. 세입자가 자신의 소득과 자산, 직장과 가족 상황에 맞춰 전세와 월세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가 없어서 월세로 이동한다면 시장 성숙이라고 보기 어렵다. 가격이 맞지 않아 외곽으로 밀리고, 직장과 학교에서 멀어지고, 매달 주거비 부담이 늘어난다면 주거 안정과 거리가 멀다. 시장 정상화라는 말은 세입자의 체감 현실을 통과해야 한다. 부동산 정책도 매매가격만 보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 집값이 오르면 대출을 조이고, 거래가 줄면 규제를 푸는 방식만으로는 임대차 시장의 변화를 따라가기 어렵다. 전세시장은 매매시장과 연결돼 있고, 월세시장은 가계소득과 맞닿아 있다. 정책이 이 연결고리를 놓치면 전세 불안은 주거비 부담을 거쳐 매수 불안으로 번진다. 전세를 구하지 못한 세입자가 월세 부담까지 커졌다고 느끼는 순간, 무리해서라도 집을 사야 한다는 심리가 되살아날 수 있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이 연결고리가 더 강하다. 좋은 일자리와 교육, 교통망이 집중된 지역일수록 수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전세 물건이 줄면 수요가 외곽이나 지방으로 자연스럽게 분산될 것이라는 기대도 현실과 맞지 않는다. 직장이 서울에 있고 아이 학교가 서울에 있으며 생활 기반이 서울에 있는 가구는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수요가 고정된 곳에서 공급이 줄면 가격은 오른다. 해법은 전세를 억지로 되살리는 구호가 아니다. 월세화를 막겠다는 선언만으로도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세입자가 자신의 형편에 맞게 전세와 월세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다. 신규 입주 물량을 늘리고, 도심 주택 공급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며, 임대차 물건이 시장에 나오도록 세제와 금융 규제를 정교하게 조정해야 한다. 월세 세액공제와 주거급여, 청년·신혼부부 지원도 실제 월세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손질할 필요가 있다. 전세제도의 위험을 줄이는 일도 병행돼야 한다. 보증금 반환 안전장치를 강화하고, 임대인의 상환능력과 권리관계를 더 투명하게 확인하도록 해야 한다. 전세사기를 막는 제도 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전세제도의 위험을 줄이는 일과 전세 수요자를 시장 밖으로 밀어내는 일은 다르다. 위험한 전세를 줄이겠다는 정책이 선량한 실수요자까지 월세시장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된다. 임대차 통계도 더 촘촘해야 한다. 월세 비중이 높아졌다는 숫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증금 규모, 월세 수준, 갱신계약 비중, 신규계약 물량, 지역별 입주 예정 물량, 전세대출 제한의 영향까지 함께 봐야 한다. 같은 월세라도 보증금 1억원에 월세 60만원인 가구와 보증금 3억원에 월세 150만원인 가구의 부담은 다르다. 정책은 평균 수치가 아니라 시장 안쪽의 현실을 읽어야 한다. 전세가 줄어드는 시장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제도는 변하고 시장도 변한다. 그러나 변화가 곧 안정은 아니다. 월세화가 불가피한 흐름이라면 그만큼 월세 세입자를 보호할 장치가 따라와야 한다. 전세가 줄어드는 만큼 공공임대와 민간임대의 질도 높아져야 한다. 입주 물량 감소가 예고됐다면 공급 정책은 더 빨라져야 한다. 시장이 바뀌고 있다는 말만으로 세입자의 부담을 설명할 수는 없다.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불안을 안정으로 오해할 때다. 전세 감소는 언젠가 올 수밖에 없는 변화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전세 감소는 충분한 대체재와 함께 온 변화가 아니다. 전세 물건은 줄고, 월세 부담은 커지고, 서울 전셋값은 뛰고, 공급은 부족하다. 이런 시장을 두고 정상화라고만 말하면 정책의 초점은 흐려진다. 전세가 줄어든 시장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 문제는 그 시장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다. 전세가 줄었다는 사실만 보고 안도할 때가 아니다. 숫자 뒤에 있는 세입자의 부담과 공급 부족의 그림자를 봐야 한다. 전세 감소를 정상화로 부르기 전에, 그 변화가 누구에게 비용을 떠넘기고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2026-06-15 07: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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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막고 세금 올리고 규제 묶고… 카드 다 꺼냈는데 서울 집값은 참여정부 이후 최대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 취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수도권 아파트 가격 오름폭은 2000년대 이후 역대 정권 집권 첫 1년 기준으로 노무현 참여정부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대출을 막았다.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규제지역으로 묶었다. 세금 중과를 재시행했다. 통상적인 부동산 정책 수단을 집권 첫해 안에 사실상 모두 꺼냈다. 그런데도 시장은 굴하지 않았다. 수치 자체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집값이 정책 변수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부동산 시장을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면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놓는다고 해서 정책 선택의 책임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수치에는 불편한 선례가 있다. 참여정부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참여정부의 기시감 참여정부(2003~2008)를 기억하는 세대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묘한 데자뷔를 느낄 것이다. 당시에도 부동산 불로소득 근절이라는 강한 이념적 지향을 가진 정권이 들어섰고, 10·29 대책(2003년)과 8·31 대책(2005년) 등 굵직한 수요 억제 패키지가 잇달았다. 종합부동산세가 도입된 것도 그 시기였다. 그 모든 조치에도 서울 강남 아파트값은 참여정부 5년 내내 상승 곡선을 그었다. 임기 종료 시점까지 서울 아파트 가격은 집권 초 대비 두 배 가까이 오른 지역이 적지 않았다. 그 정치적 상처는 2007년 대선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정치적 유산과 맥이 닿아 있는 인물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을 차단하겠다는 소신은 취임 이전부터 공개적으로 밝혀온 것이다. 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참여정부의 문법을 여러 지점에서 닮아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소신이 정책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1년치 데이터와 함께 들여다보면, 어떤 카드가 어떤 순서로 소진됐는지, 그리고 시장은 그때마다 어떻게 응답했는지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 물려받은 조건 카드를 꺼내기 전에 판세부터 따져야 한다. 윤석열 정부 임기 중 주택 인허가와 착공 물량이 예년에 비해 크게 부진했고, 그 여파로 2025~2026년 서울·수도권의 입주 물량 감소가 이미 예고된 상태였다. 공급 절벽 우려는 정권 교체 훨씬 전부터 시장 가격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결정적 선행 변수가 더해졌다. 새 정부 출범 직전 강남3구와 용산구에 대한 토지거래허가구역이 해제됐다. 이 결정은 수요 억제의 빗장이 일부 풀린다는 신호로 시장에 읽혔고, 집값은 정권 교체와 함께 상승 기대가 더욱 커지는 방향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새 정부 입장에서는 준비 기간도, 인수위도 없는 상태에서 이 상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판은 기울어진 채로 게임이 시작됐다. 첫 번째 카드: 대출을 막다 이 대통령은 취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카드를 꺼냈다. 가계부채 관리방안이었다. 정책 기반을 다지는 데 통상 수개월이 소요되는 새 정부 초기 일정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빠른 행보였다. 다주택자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을 전면 금지하고 대출 최대 한도를 6억원으로 제한했으며, 갭투자 차단을 위해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도 봉쇄했다.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 및 관련 감독 규정을 동원한 6·27 대책은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빈틈 없이 짜인 대출 억제 패키지였다. 시장의 응답은 달랐다. 6·27 대책 이후에도 서울 주요 지역 아파트 호가는 내려오지 않았다. 이미 수억원대 현금을 보유한 고자산층의 매수를 대출 규제가 막기엔 역부족이라는 반응이 시장에서 나왔다. 강남권 일부 단지에서는 오히려 희소성이 부각되며 신고가 거래가 이어졌다. 첫 번째 카드는 시장에 긁힌 자국을 남겼지만, 방향을 바꾸지는 못했다. 두 번째 카드: 공급을 내걸다 대출 규제가 시장에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하자 두 달여 뒤 정부는 두 번째 카드를 꺼냈다. 9·7 주택 공급 확대방안에서 2030년까지 수도권에 총 135만 가구를 공급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수요 억제 일변도에서 벗어나 공급을 병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읽혔고, 방향성 자체는 비판받기 어려운 전환이었다. 그러나 대책의 속살을 들여다본 시장 참여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공공 주도의 고밀 개발과 도심 복합사업 중심의 공급 방식이 문재인 정부 시절 이미 내놓았다가 시장의 외면을 받은 방안들과 본질적으로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수요자들이 원하는 것은 강남·마포·용산 같은 선호 입지의 아파트다. 공공분양이나 도심 복합사업을 통해 공급되는 주거 상품이 그 수요를 얼마나 흡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았다. 9·7 대책 발표 이후에도 서울 주요 지역 호가는 내려오지 않았고, 서울 아파트값 상승률은 대책 전후 수 주간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카드 역시 시장을 움직이지 못했다. 세 번째 카드: 규제로 묶다 공급 계획이 시장에 먹히지 않자 정부는 세 번째 카드를 꺼냈다. 서울 전역과 과천·광명 등 12개 인접 지역을 조정대상지역·투기과열지구·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일괄 묶는 전방위 규제 지정이었다. 이미 6억원으로 제한된 주담대 한도 위에 추가 상한까지 얹었다. 주택 가격이 25억원을 초과할 경우 대출 상한을 2억원으로, 15억~25억원 구간은 4억원으로 더 낮췄다. 고가 주택을 대출에 기대어 매수하는 경로를 사실상 봉쇄하는 설계였다. 출범 후 네 달여 만에 초강도 대출 규제, 공급 계획 발표, 규제지역 전방위 지정이라는 세 가지 카드를 모두 소진한 셈이었다. 참여정부가 집권 2~3년차에 걸쳐 순차적으로 꺼냈던 카드들을 이재명 정부는 집권 첫해 안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네 번째 카드: 세금을 올리다 수요 억제 대책들이 잇따르는 가운데 정부는 역대 정권이 번번이 미뤄온 숙제 하나를 정면으로 끌어안았다.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조치의 재시행이다. 「소득세법」 제104조에 근거한 이 조치는 윤석열 정부에서 4년 연속 1년 단위 시행령 유예라는 방식으로 사실상 작동하지 않았다. 법률에 명시된 세율 조항이 행정부 시행령을 통해 해마다 유예되는 이 방식은 조세 법률주의의 원칙과 긴장 관계에 있다는 지적이 법조계 일부에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추가 유예는 없다"고 못 박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 법 규정의 본래적 효력 회복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다. 역대 정권이 기득권의 저항 앞에 번번이 물러섰던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양도세 중과 시행의 시장 효과는 단방향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다주택자들이 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매도를 미루고 보유를 이어가거나 매매 대신 임대로 전환할 경우, 매매 시장의 매물 감소와 전월세 시장의 물량 축소가 동시에 진행될 수 있다. 네 번째 카드가 불러온 부작용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완: 1·29 공급 신속화 방안 9·7 대책에 대해 "공급 청사진이 추상적이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정부는 올해 1월 후속 공급 계획을 내놨다. 1·29 도심 주택 공급 신속화 방안은 용산국제업무지구, 과천 경마장 부지, 군부대 이전지, 태릉CC 등 구체적 사업지와 공급 시기를 명시해 전작의 추상성을 상당 부분 보완했다. 공급 계획으로서의 구체성은 높아졌다. 그러나 실행 경로는 여전히 검증이 필요하다. 사업지 대부분이 지방자치단체의 협조와 주민 동의를 전제로 한다. 태릉CC는 과거 여러 정부에서 개발 구상이 제기됐다가 주민 반발과 환경 논란으로 번번이 제동이 걸렸던 전례가 있다. 이해당사자와의 충분한 사전 교감 없이 청사진부터 공개하는 방식이 9·7 대책에 이어 1·29 대책에서도 반복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책의 속도와 설득의 절차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결국 실행 결과로 판가름 날 것이다. 임대차 시장에 켜진 경고등 네 장의 카드가 순서대로 소진되는 동안, 압력은 엉뚱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매매 수요를 억누를수록 임대차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경제학의 기본이다. 여기에 토지거래허가구역 내 실거주 의무 강화로 임대 매물 자체가 줄어드는 압력까지 겹쳤다. 양도세 중과 재시행으로 매물을 거둬들인 다주택자들이 임대를 통해 수익을 유지하려 할 경우에도 시장에는 반대 효과가 작용한다. 최근 서울 강남권과 마포·용산 일대에서 전세 물량이 줄고 전셋값이 가파르게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계 대부분에게 전·월세 부담은 매매 가격보다 훨씬 즉각적이고 절박한 생계 문제다. 강남 아파트 가격이 오른다는 뉴스가 체감되려면 상당한 자산이 있어야 하지만, 전세금이 수천만원 오르거나 월세로 전환되는 것은 중산층 세입자에게 당장의 위기로 작용한다. 정책이 막아선 매매 시장의 압력이 임대차 시장으로 고스란히 흘러드는 형국이다. 그리고 이 흐름의 이면에는 정책 결정 방식 자체의 문제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비판 부동산 정책의 내용 못지않게 결정 방식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전문가 집단 사이에 적지 않다. 정책의 방향이 대통령 수준에서 사실상 확정된 뒤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이 빈번했다는 것이다. 한 부동산 정책 전문가는 "양도세 중과 재시행이나 토지거래허가구역 보완책을 마련하는 과정을 보면 전문가 집단의 검토나 이해당사자 협의가 사후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며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려운 의사결정 방식이 누적되면 결국 시장은 정책보다 빨리 움직인다"고 말했다. 반론도 있다. 부동산 정책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충분한 협의를 거치다 보면 결국 기득권의 저항에 밀려 무력화되는 일이 역대 정부에서 반복됐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종합부동산세가 초기 설계와 달리 헌법재판소 결정과 정치적 타협 과정을 거치며 점차 약화된 사례는 이 논거를 뒷받침한다.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결국 후퇴한다는 학습 효과가 현 정부 내에 축적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쪽이 더 맞는 진단인지는 앞으로 나올 정책의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남은 변수들 네 장의 카드를 소진한 이재명 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시장을 움직일 수단은 사실상 세제 개편과 공급 입법으로 좁아졌다. 올 하반기 나올 세제 개편안에서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를 어떤 방향으로 손보느냐에 따라 시장 반응이 달라질 것이다. 세율 인상이나 과세 기준 강화 쪽으로 무게가 실릴 경우 투기 억제 신호로 읽히겠지만, 동시에 매물 잠김과 임대차 시장 압박이 심화되는 부작용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 기준금리 인상이 속도를 높일 경우 가계 부채 부담 증가와 함께 매수 심리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금리 인상은 전세 대출 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임대차 시장의 불안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을 지닌다. 1·29 대책에 포함된 공급 사업들이 현실화되려면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을 비롯한 관련 입법 과제가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국회의 정치 지형이 협력적이냐 아니냐에 따라 공급 계획의 실현 속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참여정부는 가용한 카드를 모두 꺼냈지만 끝내 서울 집값을 잡지 못했고, 그 대가를 임기 말 민심으로 치렀다. 이재명 정부는 그 카드들을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강하게 썼다. 참여정부와 같은 결말을 맞을 것인지, 아니면 세제와 입법이라는 마지막 수단으로 다른 결말을 써낼 것인지 그 답을 쓸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
2026-06-05 15: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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