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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지출에 포박된 나라살림, 이제 정치가 아니라 국가를 선택해야 한다
[경제일보] 대한민국 재정이 거대한 ‘의무지출의 덫’에 걸렸다. 한번 법으로 못 박힌 지출은 경기가 나빠져도, 세수가 줄어도, 국가채무가 늘어도 줄이기 어렵다. 복지지출과 국채 이자 등 의무지출이 국가 예산의 절반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정부가 재량으로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관리재정수지는 만성 적자에 빠져 있고 국가채무는 1500조원을 향해 늘고 있다. 이대로라면 다음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가 꺼내 들 수 있는 카드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재정위기가 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출생과 고령화가 몰고 올 재정 충격을 수년 전부터 경고했지만 정치권은 애써 외면했다. 국민에게 인기 없는 개혁은 뒤로 미루고 당장 표를 얻을 수 있는 복지와 현금성 지원은 경쟁적으로 늘렸다. 그 결과 오늘의 정치가 내일의 청구서를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는 구조가 굳어졌다. 특히 1981년에 만들어진 만 65세 노인 기준을 지금까지 성역처럼 유지하는 것은 상징적인 사례다. 기대수명이 크게 늘고 고령층의 건강 상태와 경제활동 여건도 달라졌다. 그런데도 기초연금과 교통복지 등 주요 제도의 기준은 수십 년 전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령만으로 복지 대상을 획일적으로 정하기보다 소득과 건강, 경제활동 여부 등을 함께 고려해 제도를 현실에 맞게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이 문제에 손대면 ‘노인 복지 축소’라는 프레임에 갇힐까 두려워한다. 정부 역시 개편 필요성을 말하다가 선거와 민심을 의식해 슬그머니 물러서기 일쑤다. 이것이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개혁 회피’다. 개혁을 하지 않는 데 드는 비용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결국 국민 전체와 미래 세대가 세금과 국가채무로 부담하게 된다. 이제는 인기 없는 개혁이라도 해야 한다. 노인 연령 기준을 단순히 일률적으로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건강수명과 소득, 경제활동 여부 등을 종합해 복지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 기초연금 역시 재정 여건과 복지의 형평성을 고려해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보다 두텁게 하는 방향으로 손질할 필요가 있다. 정년과 복지 수급 연령의 불일치도 해소해야 한다. 60세 전후에 직장을 떠나고 65세부터 각종 복지 혜택을 받는 현재의 구조는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와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정년 연장과 계속고용을 연계하고 임금체계도 연공서열 중심에서 직무·성과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고령층이 노동시장에 더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제도를 고치는 것이 단순히 복지지출을 줄이는 것보다 근본적인 해법이다. 의무지출에 제동을 거는 장치도 필요하다. 새로운 복지제도를 만들 때는 재원과 함께 종료 또는 재검토 조건을 제시하고, 일정 기간마다 정책 효과와 재정 부담을 검증하는 일몰제나 재평가제를 확대해야 한다. 기존 사업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계속되는 ‘복지의 관성’도 깨야 한다. 새로운 지출을 늘리기에 앞서 기존 지출의 효율성을 따지고 구조조정하는 원칙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재정준칙 역시 실효성 있게 작동해야 한다. 경제가 좋을 때 세수가 늘었다고 지출을 확대하고 경기가 나빠지면 적자재정으로 다시 돈을 푸는 식의 반복은 지속 가능한 재정 운용이라 할 수 없다. 국가채무와 관리재정수지를 일정 범위 안에서 관리하고 이를 벗어날 경우 정부가 구체적인 정상화 계획을 국회에 제출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복지의 방향도 바꿔야 한다. 단순한 현금성 지원을 확대하는 데 그치기보다 취약계층의 자립과 근로를 지원하는 생산적 복지에 재정을 집중해야 한다. 복지와 일자리를 따로 볼 것이 아니라 직업훈련과 재취업, 의료·돌봄, 주거 지원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해야 한다. 그래야 복지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경제활동을 회복시키는 투자로 기능할 수 있다. 재정개혁은 단순히 숫자를 맞추는 문제가 아니다. 성장의 문제이기도 하다. 의무지출이 계속 늘어나면 정부는 미래 산업에 투자할 여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첨단 제조업, 에너지 인프라, 연구개발 등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분야에 재정을 투입하려 해도 기존 복지와 이자 비용에 발목이 잡히게 된다. 결국 재정의 경직성이 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치권은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 국민에게 ‘더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누가 그 돈을 부담할 것인지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바로 그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정치의 책임이다. 지금처럼 복지 확대에는 여야가 경쟁하면서 재원 마련과 제도 개혁은 서로 미루는 행태를 계속한다면 국가재정은 머지않아 경제위기에 대응할 능력을 잃을 수 있다. 재정은 한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인이 마음대로 쓰고 미래의 청년들이 갚는 돈도 아니다. 국가는 미래 세대에 대한 채무자이면서 동시에 재정을 맡아 관리하는 신탁관리자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표를 의식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냉정한 구조개혁이다. 65세라는 숫자에 묶여 있는 복지제도를 현실에 맞게 고치고, 일할 수 있는 고령층의 경제활동을 늘리며, 의무지출에 제동을 걸고 재정준칙을 실효성 있게 작동시켜야 한다. 복지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미래세대의 성장 기반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라살림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개혁의 골든타임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더 늦으면 재정개혁의 선택지가 아니라 재정위기의 선택지만 남을 수 있다. 정치권이 다음 선거를 계산하는 동안 국가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이제는 표가 아니라 나라살림을 선택해야 한다. 미래 세대에게 빚더미를 물려주는 정치는 책임 있는 정치가 아니다. 지금 정치권이 감당해야 할 가장 시급한 책무는 ‘더 주는 정치’가 아니라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국가재정’을 만드는 일이다.
2026-09-03 10: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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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인파 예상…통신 3사, AI·5G로 불꽃축제 '트래픽 폭주' 막는다
[경제일보]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가 오는 5일 서울 여의도·이촌 한강공원 일대에서 열리는 ‘서울세계불꽃축제 2026’를 앞두고 특별 소통 대책을 가동한다. 대규모 인파가 한꺼번에 사진과 영상을 전송하면서 발생하는 통신 트래픽 급증에 대비해 이동기지국과 임시 장비를 배치하고 24시간 관제에 들어간다. LG유플러스는 전야 행사와 본행사가 이어지는 4~5일 행사장과 인접 지역에 약 100만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했다. 통신 3사는 불꽃쇼 시간뿐 아니라 관람객이 몰리는 입장 시간과 행사가 끝난 뒤 귀가 시간대까지 집중적으로 관리할 계획이다. ◆ SKT, 지난해 접속 데이터 기반으로 AI 예측 SKT는 지난해 불꽃축제에서 측정한 데이터를 토대로 올해 통신 수요를 예측했다. 지난해 SKT망 기준 순 방문자는 19만3000명, 불꽃쇼 시간대 최대 동시 접속자는 8만8000명으로 집계됐다. 인파가 여의도 한강공원을 넘어 노량진수산시장과 마포대교 물빛광장 등 인접 지역으로 확산하는 흐름도 확인했다. 이를 반영해 여의도 한강공원 크루즈 선착장과 시계탑, 여의나루역 등에 고정 통신시설을 보강한다. 이동기지국과 전기차 기반 이동기지국 등 임시 시설도 추가 투입한다. 행사 당일에는 트래픽이 집중되는 구간을 실시간으로 파악해 장비 운용과 현장 대응에 반영할 방침이다. 망 운용에는 자체 개발한 AI 시스템 ‘A-One(Access All-in-One)’을 적용한다. 지도에서 행사 장소를 지정하면 AI가 예상 관중 수와 자사 가입자 수, 기존 기지국의 수용 인원과 부하율을 분석해 보강 필요 여부와 이동기지국의 수량·위치를 추천한다. SKT는 AI 도입으로 행사 분석과 대응 계획 수립 시간이 기존 약 5일에서 30분으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복재원 SKT 네트워크 운용담당은 “AI 기반 혼잡도 사전 예측과 통신망 관리를 통해 고객들이 축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 KT, 5G망 나눠 행사장 CCTV 통신 보호 KT는 여의도 한강공원과 인근 지하철역 등 주요 이동 동선을 중심으로 통신 품질을 사전 점검했다. 관람객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구간의 기지국 용량을 미리 증설하고 이동식 기지국을 추가 배치해 네트워크 수용 능력을 확대했다. 행사장 안전 관리에는 5G 네트워크 슬라이싱 기술을 적용한다. 하나의 5G 네트워크를 여러 개의 가상망으로 나눠 특정 서비스에 독립적인 통신 자원을 제공하는 기술이다. 일반 이용자의 데이터 사용이 급증하더라도 주최 측이 행사장 전역의 CCTV 영상을 지체 없이 전송받을 수 있도록 별도의 안정적인 통신 환경을 제공한다. KT는 최근 대규모 월드컵 거리 응원 현장에서도 네트워크 슬라이싱을 활용해 무전형 커뮤니케이션과 현장 상황 공유, 긴급 대응 연락을 지원한 바 있다. 불꽃축제 당일에는 종합관제실을 중심으로 24시간 대응 체계를 운영하고 현장·지원 인력을 평소보다 늘려 장애나 품질 저하가 확인되면 즉시 조치할 계획이다. ◆ LG유플러스, AI가 기지국 과부하 예측해 자동 제어 LG유플러스는 행사 기간 약 100만명 규모의 유동 인구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비상 운영 체계에 들어갔다. 무선 트래픽 수용량을 늘리기 위해 이동기지국과 임시 장비를 추가로 구축하고 행사장과 주변 지역의 무선망 최적화 작업을 진행했다. 사전 통화 품질 측정과 네트워크 점검도 완료했다. 행사 현장에는 통화 품질 점검과 장애 대응을 담당하는 전문 인력을 배치한다. 현장 인력은 통신 품질과 트래픽 변화를 상시 확인하고 장애가 발생하거나 특정 구간에 이용량이 집중되면 즉시 대응할 예정이다. 서울 마곡사옥에는 종합상황실을 마련해 장비별 트래픽과 무선망 품질을 24시간 집중적으로 감시한다. AI 기반 자율운영 네트워크 플랫폼 ‘AION’을 활용해 기지국 과부하를 사전에 예측하고, 상황에 따라 트래픽을 자동 분산·제어한다. 현장 대응과 원격 관제를 함께 운용해 장애 징후를 조기에 발견한다는 구상이다.
2026-09-02 15: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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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의 국회, '국가의 시간' 아껴야
[경제일보] 국회의 시간과 산업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국회에서 법안 한 건이 한 회기 미뤄지는 것은 단지 다음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면 될 일처럼 치부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변전소 하나, 산업용수 관로 하나, 공장 인허가 하나가 늦어지는 사이 경쟁국에서는 생산라인이 돌아가고 고객사의 공급망이 굳어진다. 정치에는 다음 회기가 있지만 산업에는 놓치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있다. 22대 국회 후반기 첫 정기국회가 지난 1일 막을 올렸다. 12월 9일까지 꼭 100일이다. 8·30 개각에 따른 장관 인사청문회, 부동산 정책과 사법개혁 법안, 세제 개편에 역대 최대 규모인 821조원짜리 2027년도 예산안까지 한꺼번에 국회 문턱을 넘는다. 여당은 국정과제 입법과 확장재정을 뒷받침하겠다고 하고, 야당은 ‘입법 독주’와 ‘포퓰리즘 예산’을 막겠다며 벼르고 있다. 충돌할 사안이 적지 않다. 다툴 것은 다퉈야 한다. 세금과 부동산, 형사사법 체계를 바꾸는 법에는 서로 다른 철학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821조원의 나랏돈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도 야당이 매섭게 따져야 한다. 다수당이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도,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로 시간을 끄는 것도 모두 경계할 일이다. 하지만 모든 법안을 같은 정치의 시계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조정식 국회의장은 개회사에서 ‘1년을 미룬 법이 10년의 격차를 만든다’며 반도체·AI·첨단바이오 같은 국가전략기술 관련 입법을 서둘러 달라고 했다. 통상과 대외경제 입법에서는 여야가 ‘원팀’으로 움직이자는 주문도 내놨다. 표현이 다소 과장돼 보일 수 있지만 문제의식은 정확하다. 세계의 기술경쟁은 국회의 의사일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더구나 정부는 내년 예산부터 산업의 속도를 크게 높이겠다고 돈을 걸었다. 2027년도 정부 예산안은 올해보다 12.8% 늘어난 821조원이다. 이 가운데 반도체·피지컬AI·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프로젝트와 관련 인프라·기술개발에 21조300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정부 연구개발 예산안도 39조5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1.2% 늘렸다. 돈만 놓고 보면 한국이 AI와 첨단산업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는 분명하다. 문제는 예산의 속도와 법의 속도가 다르면 돈도 기다린다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만 해도 전력과 용수, 산업단지와 건축 문제를 풀기 위해 전기사업법·수도법·물관리기본법·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건축법 등의 손질이 주요 과제로 거론되고 있다. 반도체 공장에 수십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기업이 있어도 전력과 물을 공급할 제도와 시설이 제때 따라오지 못하면 장부 위 투자는 공장이 되지 못한다. AI 데이터센터 역시 GPU를 사놓는다고 만들어지는 산업이 아니다. 전력망과 부지, 냉각설비와 인허가가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여기에 한국 정치의 오래된 습관이 끼어든다. 여야가 크게 충돌하는 법안 하나가 상임위를 붙잡으면 그와 직접 관계없는 법안까지 함께 기다린다. 원내 협상이 틀어지면 본회의 일정 전체가 흔들리고, 서로 상대 당 법안에 조건을 붙이기 시작하면 민생·산업법안도 협상카드가 된다. 정치에는 모든 것을 한 묶음으로 흥정하려는 유혹이 있다. 그 비용은 국회가 아니라 국민과 기업이 낸다. 공장 착공이 늦어지고, 신규 채용이 밀리고, 기업의 투자금은 해외로 옮겨갈 수 있다. 스타트업은 규제가 정리될 때까지 사업모델을 바꾸고, 지역에서는 산업단지 지정만 기다리다 토지가 묶인다. 법안이 국회 서랍에서 보낸 시간은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국가의 대기시간’도 비용이다. 이번 정기국회가 해야 할 일은 법안을 많이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법은 충분히 싸우고, 어떤 법은 싸움과 분리해 빨리 처리할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여야가 국가전략산업과 민생 인프라에 대해서는 별도의 ‘초당적 신속처리 트랙’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회법상 신속처리안건, 이른바 패스트트랙을 남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여야 원내지도부가 정기국회 초기에 합의 가능한 법안을 추려 상임위 심사와 공청회, 법사위 검토, 본회의 처리 시한을 미리 정하자는 것이다. 기준도 까다롭게 세우면 된다. 첫째, 특정 기업이나 계층에 특혜를 주기보다 국가 전체의 산업 기반과 직결되는 법이어야 한다. 둘째, 여야가 정책목표 자체에는 큰 이견이 없고 방법론만 조정하면 되는 법이어야 한다. 셋째, 처리 지연에 따른 경제적 비용과 해외 경쟁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안전·환경·노동권을 속도라는 이름으로 우회하지 않아야 한다. 신속한 입법은 졸속 입법과 같은 말이 아니다. 전력망 건설을 서두른다고 주민의 재산권과 환경 검토를 생략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 경쟁력을 이유로 노동기준을 백지수표처럼 풀어주는 것도 곤란하다. 필요한 것은 심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심사의 끝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기업과 국민에게 가장 큰 부담은 엄격한 규제 자체보다 결론이 언제 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일 때가 많다. 여당의 책임이 먼저 무겁다. 다수 의석을 갖고 있는 만큼 ‘속도’를 ‘독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내놓은 법이라고 원안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국가의 시간을 줄이는 방법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도 1일 국무회의에서 ‘정부안이 언제나 옳거나 완벽할 수 없다’며 국회의 지적과 대안을 검토해 필요하면 입법과 예산에 반영하라고 주문했다. 여당이 새겨들을 말이다. 야당도 달라야 한다. 정부 정책을 검증하는 것과 정책을 멈춰 세우는 것은 다르다.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송전망이나 AI 데이터센터의 기반시설까지 정권의 성패와 연결해 지연시키면 정권이 아니라 한국 기업이 경쟁국에 뒤처진다. 잘못된 조항을 고치되 필요한 법은 통과시키고, 그 결과를 다음 선거에서 평가받는 것이 책임 있는 야당의 모습이다. 국회는 벌써 대비되는 두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정기국회 첫날 행정안전위원회에서는 지방자치법·소방기본법 등 여러 법안이 여야 논의를 거쳐 처리된 반면, 중대범죄수사청 관련 법안에서는 여야가 충돌했다. 정치적 이해가 첨예한 법과 합의 가능한 법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비자’ 심도편에는 ‘법여시전즉치 치여세의즉유공(法與時轉則治 治與世宜則有功)’이라는 구절이 있다. ‘법이 시대와 함께 변하면 다스려지고, 제도가 세상 형편에 맞으면 성과가 난다’는 뜻이다. 2000년도 더 된 문장이지만 기술이 몇 달 단위로 바뀌는 지금의 국회에 오히려 더 절실하다. 법은 산업보다 앞서기 어렵다. 적어도 산업의 발목을 붙잡을 만큼 뒤처져서는 안 된다. 이번 정기국회에는 821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예산보다 더 귀한 자원이 하나 있다. 100일이라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정쟁의 밀도를 높이는 데 쓸 것인지, 대한민국이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는 데 쓸 것인지가 국회의 성적표가 될 것이다. 여야가 모두 합의하는 법만 처리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민주주의에는 갈등이 필요하고, 때로는 오래 토론해야 할 문제도 있다. 다만 반도체와 AI가 세계시장에서 하루를 다투고 있는데 국회가 정치적으로 결론 내지 못한 다른 문제 때문에 전력망과 산업용수 법안까지 세워두는 것은 민주적 숙의가 아니라 행정적 낭비에 가깝다. 법안 처리 건수 몇 백 건을 자랑하는 국회보다 대한민국이 기다리는 시간을 몇 달 줄인 국회가 더 유능하다. 12월 9일 정기국회가 문을 닫을 때 국민이 보고 싶은 것도 그것이다. 여야가 몇 번 이겼는지가 아니라 공장과 기업, 청년과 지역이 얼마나 덜 기다리게 됐는가. 정기국회 100일의 진짜 경쟁은 법안 숫자가 아니다. 국가의 시간을 누가 더 아껴줬느냐의 경쟁이어야 한다.
2026-09-02 12: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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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 외친 정부, 정작 서울 재건축은 묶어뒀다
[경제일보] 이재명 정부는 지난 13일 수도권에 23만호 이상을 추가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름도 ‘주택 신속공급 방안’이다. 공급이 부족하니 더 많이, 더 빨리 짓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실제 주택을 늘릴 수 있는 재건축·재개발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정반대다. 서울시는 재건축·재개발 조합원 지위 양도 제한을 3년간 한시적으로 풀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규제를 풀 경우 재건축 기대감이 커져 집값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다. 집값을 잡겠다고 정비사업에 묶인 주택의 거래까지 계속 막겠다는 것이다. 조합원 지위 양도 제한은 투기과열지구에서 재건축은 조합설립인가 이후, 재개발은 관리처분인가 이후 새로 집을 산 사람이 원칙적으로 조합원 자격을 승계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다. 투기 수요를 막기 위해 만든 규제다. 문제는 투기만 막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거래와 사업의 자금 흐름까지 함께 묶는다는 데 있다. 지난해 10·15 대책 이후 서울 전역이 투기과열지구로 지정되면서 조합원 지위 양도 제한을 받는 정비사업장은 42곳에서 159곳으로 늘었다. 강남 3구와 용산구를 겨냥하던 규제가 서울 전역으로 번진 것이다. 사업성과 가격 수준이 전혀 다른 지역까지 똑같은 잣대가 적용됐다. 그 부담은 투기세력에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서울시가 새로 규제를 받게 된 117개 구역을 조사한 결과 분담금 부담과 주거 이전, 상속 문제 등으로 집을 팔고 싶어도 팔지 못한다는 사례가 127건 확인됐다. 절반가량은 분담금 부담 때문이었다. 재건축 공사비가 뛰고 추가 분담금이 억 단위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끝까지 사업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조합원도 있다. 이들에게 집을 팔고 빠져나갈 길까지 막아 놓으면 사업이 빨라지는 것이 아니다.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조합원이 늘고 조합 내부 갈등이 커지면 사업은 그만큼 늦어진다. 투기를 막겠다며 공급사업의 자금 순환까지 막는 것은 정책의 목적과 수단이 뒤집힌 것이다. 정부 정책의 모순은 다른 대책과 비교하면 더 선명해진다. 정부는 이번 공급대책에서 재개발 조합설립 동의율을 75%에서 70%로 낮추고 시공사 선정 절차와 이주비 관련 규제도 손질하기로 했다. 정비사업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 시간을 줄여야 공급이 빨라진다는 사실을 정부도 인정한 셈이다. 한쪽에서는 정비사업의 속도를 높이겠다며 규제를 풀고, 다른 한쪽에서는 집값이 오를 수 있다며 사업의 출구를 막아 놓는다. 정책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서울의 주택 공급 구조를 보면 더 그렇다. 서울에는 대규모 신도시를 만들 빈 땅이 거의 없다. 정부가 공공청사와 유휴부지, 그린벨트와 각종 공공부지까지 들여다보는 이유도 새로 집을 지을 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재건축·재개발은 다르다. 사업할 땅이 이미 있고 소유자도 있다. 도로와 지하철, 학교 같은 기반시설도 상당 부분 갖춰져 있다. 구역 지정과 조합 설립, 사업시행인가까지 수년간 진행해 온 사업장도 적지 않다. 서울에서 주택을 늘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다. 서울시는 2031년까지 정비사업을 통해 31만호를 착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가운데 3년 안에 착공할 수 있는 85개 구역 8만5000호를 따로 골라 사업 속도를 높이겠다고 했다. 없는 땅을 새로 찾는 것보다 이미 움직이고 있는 사업의 시간을 줄이는 편이 훨씬 빠르다. 그런데 정부는 이 사업들의 거래 규제를 그대로 두고 또 다른 공급부지를 찾는다. 공급정책의 순서가 뒤집혔다. 재건축 규제 완화가 강남과 한강변 일부 인기 단지의 가격을 자극할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고 서울 25개 구의 정비사업을 한꺼번에 묶어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압구정과 강북의 사업성 낮은 정비구역을 같은 규제로 다루는 것은 정밀한 정책이 아니라 행정 편의다. 가격이 과열되는 지역은 대출과 세제, 토지거래허가제, 자금출처 조사로 관리하면 된다. 사업 단계와 보유 기간, 지역별 가격 수준에 따라 조합원 지위 양도 요건을 세분화하는 방법도 있다. 투기 대응 수단은 따로 있는데 공급사업의 출구까지 잠글 이유는 없다. 서울시가 요구한 것도 영구적인 전면 자유화가 아니다. 3년간 한시적으로 규제를 완화하자는 것이다. 전면 완화가 어렵다면 실거주 장기보유자나 과도한 분담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조합원부터 예외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선택지는 있는데 정부는 가장 손쉬운 현상 유지에 머물러 있다. 이재명 정부는 지금 공급을 서두른다고 한다. 수도권에 23만호 이상을 추가 공급하고 공공부지를 발굴하며 각종 절차를 앞당기겠다고 한다. 공급 부족이 집값과 전셋값을 밀어 올리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먼저 움직여야 할 곳도 분명하다. 정부가 돈을 들여 새 사업을 만드는 것보다 민간이 자기 돈을 들여 짓겠다는 주택의 장애물을 걷어내는 것이 빠르다. 이미 수년간 행정 절차를 밟아 온 사업부터 착공시키는 것이 공급정책의 기본 순서다. 재건축·재개발은 오늘 규제를 푼다고 내년에 바로 입주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서울시는 정비사업 기간을 평균 18.5년에서 12년까지 줄이겠다고 한다. 아무리 서둘러도 10년 안팎이 걸린다. 지금 늦춘 1년은 몇 년 뒤 입주물량에서 그대로 빠진다. 과거 정부들이 부동산 정책에서 반복해 온 잘못도 비슷했다. 집값이 오르면 규제를 늘리고, 규제로 사업이 늦어져 공급이 부족해지면 다시 공급대책을 내놨다. 당장의 가격만 잡으려다 몇 년 뒤 공급 부족을 키우는 악순환이었다. 이재명 정부가 공급을 말하기 시작했다면 정책도 공급에 맞춰야 한다. 집값 과열이 두렵다고 서울의 정비사업을 묶어 놓고 다른 곳에서 23만호, 30만호를 외친다고 주택이 빨리 생기지는 않는다. 가격은 가격대로 관리하고 공급은 공급대로 움직여야 한다. 둘을 한꺼번에 묶어 놓으면 집값도 잡지 못하고 공급 시계만 늦어진다. 공급을 늘리겠다는 정부가 먼저 풀어야 할 것은 새 택지가 아니다. 자신이 채워 놓은 규제의 자물쇠다.
2026-08-25 09: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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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X 기반 다진 구본준 5년…앞으로 5년은 장남 구형모 '경영 시험대'
[경제일보] LG그룹에서 독립한 지 5년. LX그룹의 시계가 ‘구본준의 첫 5년’에서 ‘구형모의 다음 5년’을 향하고 있다. 구본준 LX그룹 회장이 장남 구형모 LX MDI 사장에게 지주사 지분을 잇따라 넘기면서다. 지난 5년간 인수합병(M&A)과 투자로 몸집을 키웠다면 이제는 확보한 사업을 안정적인 수익과 경쟁력으로 연결해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10일 구 회장은 LX홀딩스 주식 610만주를 구 사장에게 증여했다. 이에 구 사장은 지주사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구 회장은 오는 9월 11일 381만5000주를 추가 증여할 계획이다. 추가 증여가 마무리되면 구 사장 지분율은 24.68%로 높아지고 구 회장은 7.24%로 낮아진다. 당장 경영권이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지분 구조에서는 차세대 체제를 향한 움직임이 뚜렷해진 셈이다. 독립 5년, ‘LX’를 만들다…커진 몸집, “이제는 수익성” LX는 2021년 5월 LG에서 계열분리됐다. LX홀딩스를 중심으로 LX인터내셔널, LX하우시스, LX세미콘, LX MMA, LX판토스 등이 한 울타리에 모였다. 상사·물류·건자재·반도체·화학 등 사업 성격이 서로 달랐다는 점에서 하나의 주력 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한 전통적인 대기업과는 출발부터 달랐다. 구 회장이 꺼내든 해법은 ‘확장’이었다. 기존 사업을 묶는 데 그치지 않고 M&A와 지분투자로 새 성장축을 붙였다. LX인터내셔널은 2022년 포승그린파워를 인수했고 2023년 한국유리공업을 LX글라스로 편입했다. 2024년에는 인도네시아 AKP 니켈광산을 인수하며 자원사업을 이차전지 핵심광물로 넓혔고, 텔레칩스 지분 투자로 차량용 반도체에도 접점을 만들었다. 외형은 빠르게 커졌다. LX그룹 자산총액은 계열분리 전인 2020년 7조1799억원에서 2025년 말 13조3500억원으로 85.9% 늘었다. 재계 순위는 43위까지 올랐고 계열사도 11곳에서 18곳으로 증가했다. LX인터내셔널·LX하우시스·LX세미콘·LX MMA 등 주요 4개사 매출 합계도 같은 기간 16조246억원에서 22조2724억원으로 39% 증가했다. 특히 2023년 자산 10조원을 넘어서며 공정거래위원회 지정 대기업집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LX가 계열분리 이후 독자 그룹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구본준 체제의 첫 5년은 ‘독립과 외형 확대’로 요약된다. 다음 과제는 ‘얼마나 커졌느냐’보다 ‘얼마나 잘 버느냐’다. 주요 4개사의 2025년 합산 매출은 22조2727억원으로 전년보다 2.9% 줄었고 영업이익은 4958억원으로 44.2% 감소했다. LX인터내셔널(-40.3%), LX하우시스(-86.6%), LX세미콘(-34.8%), LX MMA(-39.3%) 모두 영업이익이 줄었다. LX홀딩스 관계자는 “AKP 니켈광산은 2024년 인수 이후 안정화 과정을 거쳐 성장세를 보이고 있고, 포승그린파워 역시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다. LX글라스는 건설경기 영향이 있지만 원가 절감 등 여러 방안을 통해 수익성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며 “사업과 운영 전반의 효율성을 높여 보다 견고한 기업 체질을 구축하고, 미래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준비와 투자를 통해 장기적인 경쟁력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했다. 지난 5년이 사업 포트폴리오에 새로운 조각을 채우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각각의 사업이 안정적인 이익을 만들어내도록 체질을 강화해야 하는 단계에 접어든 셈이다. ‘그룹 두뇌’ 구형모, 다음 5년 시험대 구 사장의 현재 역할도 이와 맞닿아 있다. 1987년생인 구 사장은 LG전자 일본법인을 거쳐 2021년 LX홀딩스 출범과 함께 그룹에 합류했다. 이후 경영기획 부문을 맡았고 2022년 설립된 LX MDI 대표이사로 이동한 뒤 2024년 말 사장으로 승진했다. LX MDI는 계열사 경영 컨설팅과 산업 정보 제공 등을 맡는 그룹 내부 ‘두뇌’ 역할을 한다. LX홀딩스 관계자는 “구 사장은 LX MDI 대표이사로서 계열사별 본원적 경쟁력 강화를 위한 경영 컨설팅을 수행하고, 거시적 트렌드와 최신 산업 동향·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고도화해 계열사의 시장 대응력 확보에 기여하고 있다”고 했다. 구 회장이 아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어서 최대주주 변경을 곧바로 경영권 승계 완료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지분 이동과 구 사장의 승진, LX MDI에서의 역할 확대를 감안하면 그룹의 무게추가 장기적으로 구형모 체제를 향하고 있다는 해석에는 힘이 실린다. 업계 관계자는 “구본준의 LX 1기가 LG에서 독립해 M&A로 외연을 넓히고 그룹의 틀을 세우는 시간이었다면 LX 2기에 필요한 DNA는 달라진다”며 “커진 몸집을 이익으로 연결하고 서로 다른 사업을 하나의 성장 구조로 묶는 능력”이라고 했다. 이어 “독립 5년 만에 체급을 키운 LX는 이제 ‘얼마나 커졌느냐’보다 ‘얼마나 단단해졌느냐’를 증명해야 한다”며 “최대주주에 오른 구형모 사장이 아버지가 만든 LX의 외형 위에 어떤 색깔의 ‘두 번째 LX’를 세울지가 앞으로 5년을 가를 시험대가 될 전망”이라고 덧붙였다. [아주경제 2026년 08월 18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8-18 09:3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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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전'도 좋다, 대통령이 모든 길을 뚫을 순 없다
[경제일보] 대통령이 다시 기업들의 투자 일정표를 펼쳐 들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10일 청와대에서 ‘메가프로젝트’ 제2차 민관합동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반도체 클러스터를 비롯한 대형 투자사업의 진행 상황을 직접 챙겼다. 지난달 첫 회의를 연 지 한 달여 만이다. 광주 군공항 이전에서 반도체 산업단지 조성, 전력과 용수 공급, 각종 인허가와 규제 개선까지 대통령 앞에 올라왔다. 이 대통령은 “속도전을 넘어서 전격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세계 산업전쟁의 시계에 한국 행정의 느린 걸음을 맞출 수 없다는 주문일 것이다. 맞는 진단이다. 반도체와 인공지능, 피지컬AI에서 1~2년은 단순히 달력 몇 장이 넘어가는 시간이 아니다. 기술 세대가 바뀌고 고객사가 공급망을 다시 짜고, 경쟁국이 새로운 공장을 먼저 돌릴 수 있는 시간이다. 기업이 수십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나섰는데 부지와 전력, 용수, 환경영향평가를 놓고 정부 부처를 몇 년씩 오가게 한다면 국가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 꼴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메가특구특별법’도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각종 인허가 기간을 줄이고 전력·용수·교통 등 기반시설을 함께 구축하며, 여러 부처에 흩어진 사안을 범정부 차원에서 신속하게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광주 군공항의 기능을 조기에 분산 배치해 반도체 산업단지 조성을 앞당기고, 필요한 전력도 사업 일정에 맞춰 공급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충청권과 영남권에서도 수백조원 규모의 민간 투자가 예정돼 있다. 대통령이 나서자 오래 얽혀 있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기업으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이런 일이라면 대통령이 몇 번이고 회의를 열어도 좋다는 목소리가 나올 만하다. 하지만 박수를 치고 끝내기에는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왜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일이 움직이는가.’ 군공항 이전 시점부터 산업단지 착공, 송전망과 용수 공급까지 대통령이 일일이 일정표를 확인해야 비로소 부처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대통령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장면인 동시에 우리 행정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처음 길을 뚫는 것은 필요하다. 군과 지방자치단체, 여러 정부 부처와 기업의 이해관계가 수십 년간 뒤엉킨 사업이라면 최고 책임자의 결단 없이는 첫 삽을 뜨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 누구도 책임지고 먼저 움직이지 못하는 사안에서 대통령이 “이 방향으로 가라”고 정리하는 것은 지도자의 역할이다. 대통령이 첫 문을 열었다면 두 번째 문부터는 장관들이 열어야 한다. 산업부 장관은 투자 일정을 책임지고, 국토·환경 행정은 부지와 교통망, 환경과 용수를 맡아야 한다. 전력 당국은 송전망의 완공 시점을 책임져야 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주민을 설득하고 정주 여건을 갖추는 일을 자신의 이름으로 해내야 한다. 약속한 날짜를 지키지 못했다면 왜 늦었는지 설명하고, 필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면 책임도 져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인 행정이다. 한국 행정의 고질적인 문제는 책임자가 없어서라기보다 책임이 너무 잘게 쪼개져 있다는 데 있다. 대형 공장 하나를 짓는 데 산업·국토·환경·전력·지방행정이 모두 관여한다. 하지만 각 기관은 자기 업무만 처리하면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산단 지정에는 문제가 없고, 환경 절차에도 문제가 없고, 전력 공급도 규정대로 검토했다고 한다. 모든 기관이 자기 몫을 했다는 데 정작 공장 착공은 늦어진다. 기업 눈에는 정부가 여러 개가 아니다. 하나다. 이 단순한 상식을 행정이 자주 잊는다. 기업인은 어느 부처의 어느 과가 무엇을 맡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 공장을 지을 수 있는가”라는 한 가지 답을 원한다. 하지만 그 답을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니 결국 대통령 앞까지 사안이 올라간다. 대통령 주재 회의가 열리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그동안 “어렵다”고 하던 사안에 대안이 붙고, “검토 중”이던 사업에 날짜가 생긴다. 법이 갑자기 바뀐 것이 아니다. 책임지고 결정할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대통령 직할 행정’의 효용과 위험이 함께 있다. 초기에는 빠르다. 강력한 정치적 권위가 부처의 칸막이와 오래된 이해관계를 단숨에 넘어설 수 있다. 이런 방식이 일상화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대통령이 관심을 가진 사업은 빨리 가고, 대통령의 회의 안건에 올라가지 못한 사업은 다시 평소의 속도로 돌아간다. 기업 입장에서 법과 제도보다 대통령의 관심 여부가 더 중요한 변수가 된다면 그것은 좋은 투자 환경이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대통령에게도 시간은 하루 24시간뿐이다. 반도체 공장의 물길과 송전선까지 대통령이 끝까지 챙기는 동안 외교와 안보, 복지와 교육, 저출생과 재정도 대통령을 기다린다. 메가프로젝트가 늘어날수록 대통령실이 거대한 민원조정실이 되는 구조는 오래갈 수 없다. 이번 ‘전격전’의 진짜 성과는 특정 공장의 착공 시점을 몇 년 앞당기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챙기지 않아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정부를 만드는 데까지 가야 한다. 먼저 대형 전략투자에는 한 사람이 전체 일정을 책임지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원스톱 창구’를 설치했다고 해놓고 접수만 한 곳에서 받은 뒤 서류가 다시 여러 기관을 순회한다면 간판만 바꾼 것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국가전략 프로젝트에는 총괄 책임자를 두고 부지·전력·용수·환경·교통 문제를 한꺼번에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 행정 방식도 바꿔야 한다. 환경 검토가 끝난 뒤 전력을 논의하고, 전력 문제가 정리된 뒤 용수를 검토하는 식으로 순서대로 일을 처리해서는 세계 산업경쟁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사업 초기부터 환경·전력·용수·교통 문제를 동시에 들여다봐야 한다. 이것은 환경 기준을 낮추자는 얘기가 아니다. 절차를 없애는 것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주민의 권리와 노동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가전략산업이라는 이유로 주민 의견을 건너뛰거나 노동·환경 기준을 일괄적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빨라 보일지 몰라도 갈등이 쌓이면 소송과 반발로 더 많은 시간을 잃는다. 빠른 정부는 절차를 무시하는 정부가 아니라, 필요한 절차를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는 정부다. 공무원이 결정을 피하지 않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새로운 사업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성공하면 정치권의 성과가 되고 실패하면 실무자의 책임이 되는 구조에서는 누구라도 전례를 찾고 결재를 미룬다. 명백한 특혜나 위법이 아니라면 당시의 자료와 절차에 따라 내린 합리적인 정책 판단은 보호할 필요가 있다. 적극행정은 구호가 아니라 감사와 인사제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맹자’에는 “도선부족이위정 도법불능이자행(徒善不足以爲政 徒法不能以自行)”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뜻만으로 정치를 할 수 없고, 법도 스스로 실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사람이 움직여야 제도가 움직인다. 지금 메가프로젝트에 대통령의 힘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 굳어버린 행정을 처음 움직이려면 최고 책임자의 결단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국가는 뛰어난 지도자 한 사람의 독촉에 오래 의존하지 않는다. 지도자의 의지를 제도로 바꾸고, 제도를 조직의 습관으로 만드는 나라가 강한 나라다. 대통령의 역할은 방향을 정하고 처음 막힌 길을 여는 데 있어야 한다. 그다음부터는 총리가 부처를 조정하고 장관이 일정에 책임을 지며, 지자체장이 현장의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사업이 늦어질 때마다 대통령이 다시 등장하는 구조가 아니라, 대통령이 없어도 담당자가 움직이고 정해진 날짜에 답을 내놓는 구조가 필요하다. 메가프로젝트의 성적표도 그렇게 바꿔야 한다. 대통령이 몇 차례 회의를 열었는지가 아니라 그 뒤 대통령이 회의를 열지 않아도 사업이 일정대로 진행됐는지를 봐야 한다.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전에 장관이 문제를 풀었는지, 지자체장이 기업과 주민을 설득했는지, 담당 기관이 약속한 날짜 안에 결정을 내렸는지를 따져야 한다. ‘전격전’은 시작할 때 필요하다. 다만, 국가가 언제까지나 전격전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지금은 대통령이 직접 뛰어 막힌 길을 열어야 할 때일 수 있다. 그 길이 열렸다면 이제 장관과 지자체장이 달려야 한다. 대통령은 방향을 정하고, 장관은 일정과 결과에 책임지며, 공무원은 법과 원칙 안에서 결정을 내리는 정부. 그것이 메가프로젝트 속도전의 다음 단계다. 대통령의 속도는 임기와 함께 끝난다. 시스템의 속도는 정권이 바뀌어도 남는다. 이번 ‘전격전’의 가장 값진 성과는 공장 몇 곳을 빨리 세우는 데 있지 않다.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아도 제시간에 움직이는 정부를 남기는 데 있다.
2026-08-11 09: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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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학부 연구실이 키운 3인, 12년 뒤 라이스대·버클리·릴리로
[경제일보] KAIST가 학부생 연구참여 프로그램(URP, Undergraduate Research Participation Program)의 장기 성과로 물리학과 박용근 교수 연구실 출신 세 명을 9일 공개했다. 2014년 학부 연구생으로 소개됐던 이들은 12년 뒤 미국 대학 조교수 둘과 글로벌 제약사 오픈이노베이션 책임자로 자리를 잡았다. URP는 2006년 KAIST가 국내 처음 도입한 프로그램으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학부연구기회 프로그램(UROP)을 본떴다. 학부생이 연구 주제를 직접 제안하는 창의과제와 교수 연구에 참여하는 연구과제로 나뉘며, 6개월 동안 장학금과 연구비를 함께 받는다. 아이디어 도출부터 실험 설계, 데이터 분석, 논문 작성까지 학생이 주도하는 구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지원으로 운영되며 최근 5년간(2021~2025년) 679개 과제가 수행됐다. 조상연 라이스대 조교수는 학부 1학년 때 연구에 입문해 졸업 전까지 30학점이 넘는 연구학점을 이수했다. 학부 시절 제1저자 논문 중 말라리아 광학영상 연구는 2012년 국제학술지 트렌즈 인 바이오테크놀로지 표지논문으로 선정됐다. 이후 MIT·하버드대 공동 의과학 과정(HS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의대 조교수를 거쳐 올해 7월 라이스대에 부임했다. 나노레이저 입자와 생체광학기술로 개별 암세포와 치료용 세포를 장기간 추적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조 교수는 "밤늦게 기숙사로 돌아가다 꺼져 있던 가로등이 켜지는 것을 보고 초고해상도 현미경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박 교수님께서 막연한 호기심을 하나의 과학적 질문으로 구체화해주신 덕분에 논문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영주 UC버클리 조교수는 학부 연구생 시절 홀로그래픽 현미경과 인공지능(AI)을 결합한 가상 염색·진단 연구로 제1저자 논문 8편을 발표했다. 관련 성과는 네이처 셀 바이올로지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등에 실렸다. 스탠퍼드대 응용물리학 박사과정에서 2022년 셀(Cell) 표지논문을 제1저자로 게재했고, 올해 7월 UC버클리에 임용됐다. 광학과 유전공학, AI를 묶어 뇌에 정보를 입력하는 양방향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를 개발 중이다. 이서은 일라이 릴리 리더는 진로가 다르다. 컬럼비아대 박사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을 거쳐 일라이 릴리 신경과학 부문에 합류했고, 바이오텍 인수·합병(M&A)과 라이선싱, 파트너십을 발굴하는 오픈이노베이션 업무를 맡고 있다. 학부 연구 경험이 연구자 트랙뿐 아니라 기술 기반 산업 전략으로도 이어진 사례다. 박용근 교수 연구실은 최근 5년간에도 병리조직 가상염색 등 4건의 URP 과제를 수행했다. 학교 전체로도 2023년 박세호 학부생이 제1저자로 참여한 시계열 인과관계 추정 방법론(GOBI) 연구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실렸고, 2024년 윤태식 학부생은 천연물 세큐린진 G의 세계 최초 전합성 연구를 수행했다. 2025년에는 김민재 학부생의 웨어러블 이산화탄소 센서와 OLED 디스플레이 연구가 디바이스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각각 게재됐다. 박 교수는 "KAIST 학부생의 역량은 글로벌 톱스쿨 학생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연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이기에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출발점은 같다"고 말했다. 배충식 총장은 "앞으로도 URP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며, 세계 대학과 산업 현장에서 혁신을 이끄는 과학기술 인재로 성장하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2026-08-09 17: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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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는 AI 광고, 카카오는 AI 거래…엇갈린 수익화 시계
[경제일보] 네이버와 카카오가 올해 인공지능(AI) 사업의 수익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돈을 버는 시점과 방식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네이버는 검색과 광고에 AI를 접목하면서 이미 새로운 매출을 만들기 시작했다. 카카오는 아직 AI 사업에 대한 투자가 매출보다 앞서는 단계로 보고 있다. 카카오톡을 중심으로 외부 서비스를 연결하고 AI가 실제 주문과 결제까지 처리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갖춘 뒤 수익을 내겠다는 구상이다. 연초까지만 해도 두 회사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AI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우고 올해부터 수익화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상반기 사업을 진행하면서 차이가 나타났다. 네이버는 기존 사업에 AI를 얹는 방식으로 비교적 빠르게 매출을 만들었고, 카카오는 AI가 실제 거래를 만들어내기까지 필요한 파트너 연동과 서비스 구조 설계에 시간을 더 쓰기로 했다. ◆ 네이버, AI 검색에 광고부터 붙였다 네이버가 먼저 손댄 곳은 광고다. AI 브리핑은 검색 결과를 AI가 정리해 보여주는 서비스다. 네이버는 여기에 광고를 적용하면서 기존 검색광고가 들어가지 않았던 정보성 검색 영역을 새로운 광고 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는 2분기 실적발표에서 생성형 AI 서비스 자체가 새로운 광고 매출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기존 검색광고를 대체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수익화하지 못했던 영역에 광고를 붙여 새로운 인벤토리를 확보하겠다는 설명이다. AI탭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네이버에 따르면 AI탭 이용자는 1000만명을 넘어섰다. 검색어를 입력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AI와 대화하면서 상품을 찾고 장소를 알아보는 이용자가 늘고 있다. 네이버가 기대하는 것은 광고 지면을 하나 더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AI가 이용자의 검색 의도를 파악하고 적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연결하면 광고의 구매 전환율을 높일 수 있다. 쇼핑과 예약 등 검색 이후의 행동까지 이어지면 광고뿐 아니라 커머스 거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미 기존 광고사업에서도 AI 활용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게 네이버의 설명이다. AI를 활용한 광고 상품의 성과를 높이고 광고주 확대를 이어가는 방식이다. 이런 구조는 네이버가 가진 사업 기반 때문에 가능하다. 검색 이용자가 많고 광고주가 이미 확보돼 있다. AI가 검색을 대신하는 과정에서 광고를 붙일 수 있는 만큼 새로운 사업을 만들기 위해 몇 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 매출이 늘어도 AI 비용은 별개다 네이버의 AI 전략을 광고만 놓고 보면 수익화가 빠르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비용이 계속 늘고 있다. 네이버는 AI 서비스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컴퓨팅 인프라에도 상당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엔비디아·브룩필드와 함께 세종 데이터센터의 AI 팩토리를 구축하고 있으며 초기 55MW에서 2028년 200MW 규모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GW급 인프라 구축도 추진하고 있다. 2분기 실적에서도 비용 부담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의 2분기 매출은 3조389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5203억원으로 0.2% 감소했다. 영업비용은 20% 늘었다. AI가 매출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해서 이익이 같은 속도로 증가하는 구조는 아니다. GPU와 서버를 사들이면 감가상각이 발생하고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면 전력과 냉각, 유지관리 비용이 따라온다. AI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추론 비용도 커질 수 있다. 최근 네이버가 GPU와 CPU 등 컴퓨터 장비의 감가상각기간을 5년에서 6년으로 늘린 것도 이 같은 상황에서 주목받고 있다. 같은 장비 가격을 5년이 아니라 6년에 걸쳐 비용으로 처리하면 당해연도 감가상각비는 줄어든다. 다만 이를 회계상 비용을 의도적으로 늦춘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감가상각기간은 해당 자산의 예상 경제적 사용기간을 기준으로 정하는 회계적 추정치다. 네이버가 실제 장비의 사용기간이 늘었다고 판단했다면 변경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 사용기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가 중요하다. 최신 GPU가 계속 등장하는 상황에서 기존 장비를 6년 동안 경제성 있게 사용할 수 있는지가 확인돼야 한다. 아마존의 사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마존은 2024년 서버의 예상 사용기간을 5년에서 6년으로 늘렸다. 이후 2025년부터는 일부 서버와 네트워크 장비의 사용기간을 다시 6년에서 5년으로 줄였다. AI와 머신러닝을 포함한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졌다는 판단이었다. 이 변경으로 2025년 감가상각비는 14억달러 늘었고 순이익은 10억달러 감소했다. 네이버가 6년을 선택한 것과 아마존이 일부 장비의 기간을 5년으로 되돌린 것은 AI 인프라 투자에서 감가상각기간이 단순한 회계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 장비가 얼마나 오래 돈을 벌어줄 수 있는지가 뒤따라야 한다. ◆ 카카오가 수익화를 내년으로 잡은 까닭 카카오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카카오는 올해 초 AI를 새로운 성장축으로 내세웠다. 카카오그룹도 2026년을 AI와 글로벌 사업을 중심으로 성장의 방향을 전환하는 시기로 규정했다. 카카오는 카카오톡 이용자의 일상과 관계, 맥락을 이해하는 ‘휴먼 센트릭 AI’를 앞세우면서 AI가 이용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다음 행동까지 연결하는 에이전틱 AI로 발전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카카오가 원하는 것은 카카오톡 안에서 AI가 답변만 해주는 서비스가 아니다. 이용자가 AI에게 “오늘 저녁 뭐 먹을까”라고 물었을 때 맛집을 추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식당을 고르고 예약하거나 음식을 주문하고 결제하는 단계까지 연결하는 것이 목표다. 이렇게 되면 AI는 단순한 검색 도구가 아니라 카카오톡과 외부 서비스를 이어주는 중간 단계가 된다. 카카오가 돈을 벌 수 있는 지점도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광고가 될 수도 있고, 거래수수료나 구독 형태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구조를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이다. 외부 사업자의 서비스와 AI를 기술적으로 연결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존 서비스의 이용자 경험을 어떻게 바꿀지 결정해야 하고 AI가 거래 과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지도 정해야 한다. 주문이나 결제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누가 질지도 협의해야 한다. 수수료와 광고 노출 방식도 마찬가지다. 카카오는 올해 초부터 이 작업을 단계적으로 진행해왔다. 지난 1분기 실적발표에서 카카오는 기존 사업의 성장 기반을 바탕으로 5000만 이용자가 사용하는 에이전틱 AI 플랫폼으로 전환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외부 서비스와의 연결도 이미 시작됐다. 카카오는 지난 3월 챗GPT 포 카카오의 ‘카카오툴즈’에 올리브영, 무신사, 현대백화점, 삼쩜삼, 마이리얼트립, 사람인, 우리의식탁 등 다양한 파트너 서비스를 추가했다. 이용자가 AI를 통해 외부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면서 에이전트 생태계 구축에 들어간 것이다. 카카오가 추진하는 구조에서는 이용자 확보와 매출 발생 사이에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다. AI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 AI가 이용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외부 서비스를 호출한 뒤 실제 주문과 결제까지 연결돼야 거래수수료나 광고 등 새로운 매출을 만들 수 있다. 신종환 카카오 CFO가 2분기 실적발표에서 AI는 아직 매출 기여보다 투자가 선행되는 단계라고 설명한 것도 이 같은 상황과 맞닿아 있다. AI 서비스 이용자를 확보하는 것과 이를 실제 거래로 연결하는 것은 별개의 과정이라는 판단이다. 정신아 대표도 2분기 컨퍼런스콜에서 올해 말까지 AI 대중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수익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연초에 제시했던 ‘2026년 AI 수익화 원년’이라는 표현과 비교하면 실제 매출화 시점이 뒤로 밀린 셈이다. 다만 카카오가 AI 사업의 수익화 계획을 접은 것은 아니다. 올해는 이용자 확보와 에이전트 연결을 확대하고, 실제 주문과 결제가 안정적으로 이뤄지는 구조를 만든 뒤 내년부터 이를 매출로 연결하겠다는 단계적 접근에 가깝다. 카카오가 올해 AI 에이전트의 거래 영역을 넓히는 데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예약과 결제까지 연결되는 서비스를 확보하고, 외부 파트너가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카카오는 자체 기술과 B2C 서비스를 강화하면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인프라는 외부 파트너십을 활용하는 방향도 제시했다. ◆ 네이버는 광고주, 카카오는 외부 사업자가 관건 AI 사업을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투자 방식도 달라졌다. 네이버는 AI 모델과 서비스뿐 아니라 GPU와 데이터센터 같은 기반시설에도 직접 투자하고 있다. 인프라를 직접 확보하면 AI 서비스가 커졌을 때 필요한 연산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지만, 투자금과 감가상각 부담도 함께 안게 된다. 카카오는 대규모 AI 인프라를 직접 보유하는 데 상대적으로 신중하다. GPU 세대가 빠르게 바뀌는 상황에서 막대한 자금을 장비에 묶어두기보다 외부 인프라를 활용하면서 서비스와 플랫폼 구축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카카오가 AI 인프라에 투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카카오는 자체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5년 말 기준 사업보고서에서도 신규 AI 서비스와 자체 모델 역량 강화를 위한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안산 데이터센터는 카카오톡을 포함한 그룹 서비스와 신규 AI 서비스에 필요한 인프라를 지원하고 있다. 다만 네이버처럼 AI 컴퓨팅 인프라를 장기적인 성장사업의 한 축으로 확대하는 것과는 접근법이 다르다. 카카오그룹은 올해 초 B2C 서비스와 핵심 기술은 내재화하고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인프라는 외부 파트너십을 통해 유연하게 확대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실적을 보는 기준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네이버는 AI 브리핑과 AI탭에서 발생하는 광고 매출이 얼마나 커지는지 봐야 한다. AI 쇼핑이 실제 거래와 구매 전환을 얼마나 끌어올리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AI 팩토리 가동 이후에는 대규모 인프라 투자에 대한 수익성도 숫자로 나타나게 된다. 카카오는 AI 이용자 숫자보다 거래가 중요해진다. 카카오톡에서 AI를 거쳐 실제 주문과 결제가 얼마나 발생하는지, 그 과정에서 카카오가 어떤 방식으로 매출을 확보하는지가 관심사다. 두 회사의 2026년 AI 사업은 같은 출발선에 서 있지 않다. 네이버는 이미 광고라는 익숙한 수익모델에 AI를 연결했다. 카카오는 외부 서비스와의 연결 구조를 만들면서 실제 거래가 발생하는 지점을 찾고 있다. 네이버에서는 AI가 기존 광고와 커머스에 얼마나 추가 매출을 만들어내는지가 숫자로 나타날 것이다. 동시에 늘어난 AI 인프라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도 봐야 한다. 카카오에서는 카카오톡 안에서 AI를 이용한 실제 거래가 얼마나 만들어지는지가 중요하다. AI를 써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가 아니라 그 이용이 주문과 결제로 이어지는지가 확인돼야 수익모델의 윤곽이 잡힌다. 올해 하반기 네이버의 AI 광고가 확대되고 카카오의 에이전트 서비스가 외부 사업자와 연결되면 두 회사의 전략 차이도 지금보다 선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내년에는 네이버의 AI 팩토리 매출까지 더해진다. 그때부터는 AI를 얼마나 많이 도입했느냐보다 AI가 실제로 얼마를 벌어들이고, 그 과정에서 얼마의 비용이 들어갔는지가 실적표에서 직접 비교될 전망이다.
2026-08-08 11: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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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 절벽' 해소하려면 입주 날짜부터 밝혀라
[경제일보] 주택 공급 대책이 나올 때마다 수십만호, 백수십만호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인허가를 늘리고 착공을 앞당기며 공공택지를 개발하겠다는 계획도 따라붙는다. 발표문만 놓고 보면 몇 년 뒤에는 집이 넘쳐날 것 같다. 그러나 집을 구하는 서민이 마주하는 현실은 딴판이다. 들어갈 집은 줄고 전셋값과 월세는 오르는데, 주택 당국은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않은 물량까지 공급 실적으로 내세운다. 집 없는 서민에게 공급은 계획도, 인허가도, 착공식도 아니다. 이삿짐을 들고 들어갈 수 있는 집이 공급이다. 어느 지역에 몇 가구가 지어지고 언제 입주할 수 있는지가 빠진 대책은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비워 둔 약속이다. 올해 상반기 수도권 주택 통계는 발표 숫자와 국민 체감이 왜 다른지를 보여준다. 수도권 분양 물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5.1% 늘었지만 준공 물량은 47.6% 줄었다. 청약을 받은 아파트는 크게 늘었는데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은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인허가는 8.1% 줄었고 착공도 0.7% 감소했다. 분양은 계약자를 모집했다는 뜻이고 착공은 공사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전세 시장에 집이 나오고 매매 시장의 선택지가 늘어나는 때는 공사가 끝나 입주가 시작된 뒤다. 분양 증가를 공급 회복으로 포장해도 당장 전세계약 만료를 앞둔 세입자에게 돌아오는 집은 없다. 서울의 사정은 더 답답하다. 서울 아파트 입주 예정 물량은 지난해 3만7103가구에서 올해 2만5281가구로 줄고, 2027년에는 1만8682가구, 2028년에는 1만3683가구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8년 물량은 지난해의 40%에도 못 미친다. 그마저 특정 지역의 대단지에 몰려 있다. 서울 전체 입주 물량만 보면 어느 정도 공급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 아파트가 한 채도 나오지 않는 자치구도 있다. 직장과 학교 때문에 생활권을 쉽게 옮길 수 없는 서민에게 서울 전체 합계는 큰 의미가 없다. 필요한 것은 자신이 사는 지역과 출퇴근이 가능한 범위 안에서 언제 집이 나오는지에 관한 정보다. 정부는 2030년까지 수도권에서 135만호를 착공하겠다고 밝혔다. 숫자는 크지만 2030년까지 착공한다는 말과 2030년까지 입주할 수 있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2030년 말 첫 삽을 뜬 아파트라면 실제 입주는 그로부터 몇 년 뒤다. 토지 보상과 사업 승인, 공사비 협상, 자금 조달이 늦어지면 착공 시점부터 밀린다. 지금 전세계약 만료를 걱정하는 세입자와 출산을 앞둔 신혼부부에게 2030년 착공 목표는 눈앞의 공급이 아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답은 앞으로 2∼3년 동안 서울과 수도권 어느 지역에 몇 가구가 실제로 입주하느냐다. 먼 미래의 착공 총량으로 당장의 공급 공백을 덮어서는 안 된다. 주택 당국도 인허가 숫자의 허점을 알고 있다. 인허가를 받고도 사업이 멈추거나 착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장이 늘자 공급 관리의 무게중심을 착공으로 옮겼다. 인허가 실적만으로는 주택이 제대로 공급되고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그렇다면 착공에서 멈출 이유가 없다. 준공과 입주까지 추적하고 공개해야 한다. 공사비가 오르면 시공사와 조합이 다투고, 프로젝트파이낸싱이 막히면 현장이 멈춘다. 도로와 학교가 늦어지면 집을 다 짓고도 입주가 미뤄진다. 이런 위험을 관리하지 않은 채 착공 물량만 발표하는 것은 공급 정책이라기보다 첫 삽을 뜬 횟수를 세는 행정에 가깝다. 공급 대책마다 사업별 입주 예정 연월을 붙여야 한다. 최초 계획과 현재 예상 시점을 나란히 적고, 일정이 늦어졌다면 지연 기간과 원인을 밝혀야 한다. 토지 보상 때문인지, 공사비 분쟁 때문인지, 금융 조달에 문제가 생겼는지, 기반시설이 늦어지는지를 국민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책임 기관과 정상화 목표도 함께 공개해야 한다. 계획 물량을 부풀려 보여주는 관행도 바로잡아야 한다. 재건축·재개발 사업의 전체 건립 가구 수를 모두 새 공급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 기존 2500가구를 철거하고 3000가구를 짓는 사업이라면 시장에 새로 보태지는 집은 500가구다. 전체 가구 수와 순증 물량, 조합원 몫, 일반분양, 공공임대를 나눠 보여줘야 실제 공급 규모를 알 수 있다. 3기 신도시와 공공택지도 총물량만 발표할 일이 아니다. 지구별·블록별 입주 시기와 도로, 철도, 학교의 완공 일정을 함께 내놓아야 한다. 집은 완성됐는데 교통망이 열리지 않고 학교가 들어서지 않았다면 주거 공급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 주민이 입주 뒤 몇 년 동안 불편을 떠안는 것은 불가피한 과정이 아니라 행정이 일정을 맞추지 못한 결과다. 입주 시계를 공개하면 어느 사업이 멈췄고 어느 기관에서 일정이 지연됐는지가 드러난다. 그동안 착공식은 정부의 성과가 되고 입주 지연은 시행사나 조합의 문제로 남는 일이 반복됐다. 착공 날짜만 관리하고 입주 날짜를 관리하지 않으면 성과는 행정이 가져가고 실패의 책임은 현장에 남는다. 공급 대책은 발표 당일의 박수로 평가받는 정책이 아니다. 몇 년 뒤 약속한 주택이 제때 완공됐는지, 국민이 예정된 날짜에 입주했는지로 성패를 따져야 한다. 일정과 책임자가 공개되지 않은 계획은 늦어져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 계획이 된다. 입주 물량이 줄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사람은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전세계약이 끝나는 세입자,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청년, 아이가 생겨 더 넓은 집이 필요한 신혼부부다. 매매시장을 대출 규제로 누르면 이들은 전월세 시장으로 밀려난다. 그곳에서도 입주 물량이 부족하면 선택할 집은 줄고 주거비는 더 오른다. 서민에게 주택 공급은 먼 미래의 국가계획이 아니다. 다음 계약 때 올려줘야 할 보증금과 매달 빠져나갈 월세의 문제다. 정부가 5년 뒤 착공 물량을 자랑하는 동안 국민은 6개월 뒤 이사할 집을 찾지 못한다. 이런 현실을 두고 공급 대책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1년, 2년, 3년 동안 실제로 입주할 주택이 어디에 얼마나 나오는지 공개해야 한다. 약속한 일정대로 가는 사업과 지연된 사업을 구분하고, 공급이 비는 지역에는 어떤 대책을 언제 시행할지도 밝혀야 한다. 주택 공급 실적은 장관이 착공식에서 삽을 든 날 생기지 않는다. 집 없는 서민이 열쇠를 받아 현관문을 여는 날 비로소 완성된다. 공급 절벽을 해소하겠다면 더 큰 숫자를 내놓을 것이 아니라 국민이 믿고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입주 날짜부터 내놓아야 한다.
2026-08-05 09: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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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가 멈춘 날, AI 반도체의 두 번째 승부가 시작됐다
코스피가 하루 만에 10.84% 무너졌다. 개장 6분 만에 사이드카가 발동됐고, 곧이어 서킷브레이커가 시장을 멈춰 세웠다. 지수는 6023.66까지 밀렸고 외국인은 약 5조원어치를 팔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급락하자 한국 증시 전체가 흔들렸다. 이날 사태를 중국 메모리 기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상장 충격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중국의 메모리 산업 육성, 노광장비 자립 가능성, 미국 빅테크의 AI 투자 부담, 국내 증시의 과도한 반도체 집중과 레버리지가 동시에 반응한 결과다. 해외에서 시작된 작은 균열이 국내 수급 구조를 만나 거대한 충격으로 확대됐다. CXMT는 상장 첫날 공모가보다 466% 뛰었다. 기업가치는 약 3조3000억위안까지 치솟았고 86억달러를 조달했다. 세계 D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7∼9% 수준이지만 자금과 내수시장, 정부 지원을 한꺼번에 확보했다는 점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CXMT가 당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 사업을 위협한다고 보는 것도 성급하다. 기업공개 투자계획의 중심은 기존 D램 생산라인과 공정 개선이다. HBM은 기술과 수율, 고객 인증에서 여전히 상당한 격차가 있다. 중국의 공격은 가장 높은 산봉우리보다 넓은 평지에서 먼저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DDR5와 LPDDR5X 같은 범용·모바일 D램을 중국 PC와 스마트폰, 서버 기업에 공급하며 시장을 잠식하는 방식이다. 중국산 제품이 내수시장을 차지하면 한국 기업은 범용 D램의 물량과 가격에서 압박을 받는다. HBM에서 번 돈을 범용 제품의 가격 하락이 갉아먹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중국산 이머전 DUV 노광장비 생산 보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올해 생산계획으로 알려진 물량은 5대에 불과하다. 해상도와 처리 속도, 수율, 안정적인 유지보수 능력도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 장비 한 대를 만드는 것과 반도체 공장에서 연중 가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나 중국 산업을 평가할 때 현재의 완성도만 보는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중국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 산업도 처음에는 품질과 수율에서 조롱받았다. 중국의 경쟁력은 출발점보다 개선 속도, 거대한 내수시장과 장기간의 자본 투입에서 나왔다. DUV 장비 5대가 당장 ASML을 대체하지는 못해도 5년 뒤 공급망의 일부를 바꿀 가능성은 남는다. 알파벳의 실적도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알파벳은 2분기 매출 1198억달러를 기록했고 클라우드 매출은 82% 증가했다. AI가 돈을 벌지 못한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시장을 긴장시킨 것은 매출이 아니라 투자비였다. 알파벳은 연간 설비투자 전망을 1950억∼2050억달러로 높였다. 데이터센터와 서버에 막대한 자금을 쏟으면서 분기 잉여현금흐름은 약 59억달러 적자로 돌아섰다. AI 산업이 소프트웨어의 외양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발전소와 데이터센터, 반도체 공장이 결합된 자본집약 산업이라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 앞으로 시장이 요구할 답은 GPU를 몇 장 확보했느냐가 아니다. 그 GPU가 얼마나 가동됐고 고객이 어느 정도의 비용을 지불했으며 투자한 자본이 언제 현금으로 돌아오는지를 묻게 될 것이다. AI 경쟁은 기술 성능에 이어 자본 효율성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한국 증시는 이런 변화에 유난히 취약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 데다 레버리지 ETF와 신용거래가 상승 속도를 더욱 높였다. 오를 때는 효율적인 구조였지만 방향이 바뀌자 외국인 매도, ETF 헤지, 반대매매가 서로를 자극했다. 기업의 본질가치가 하루 만에 10% 이상 사라졌다기보다 수급의 체력이 먼저 무너진 것이다. 이번 폭락을 AI 반도체 시대의 종말로 규정할 이유는 없다. 빅테크의 투자는 여전히 확대되고 있고 HBM 수요와 데이터센터 건설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모든 AI 투자가 성공하고 모든 반도체 기업이 같은 이익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은 수정될 때가 됐다. 확인해야 할 숫자도 달라졌다. 빅테크의 설비투자 계획뿐 아니라 AI 서비스 매출과 현금흐름, HBM 주문과 가격, CXMT의 실제 생산량과 수율, 중국산 장비의 고객사 투입 여부를 함께 봐야 한다. 피보나치나 엘리엇 파동이 제시하는 가격대는 시장 심리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기업의 미래를 결정하지 못한다. 코스피가 멈춘 날 드러난 것은 AI 황금기의 붕괴가 아니다. 공급 부족과 기대만으로 주가가 오르던 첫 번째 장이 끝나고, 기술과 자본, 생산성으로 승자를 가리는 두 번째 장이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한국 기업에 필요한 것은 중국의 추격을 과장하는 공포도, HBM 우위를 영원한 성벽처럼 믿는 낙관도 아니다. 앞선 기술을 다음 기술로 연결하고, 벌어들인 현금을 연구개발과 생산성 향상에 다시 투입해야 한다. 시장이 멈춘 시간은 짧았다. 산업의 시계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2026-07-29 07: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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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컴, 유럽형 '소버린 에이전틱 OS' 3분기 공개…14조원 시장 공략한다
[경제일보] 한컴(대표이사 변성준·김연수)이 기존 공공·금융 시스템을 교체하지 않고 인공지능(AI) 에이전트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유럽 소버린 AI 시장 공략에 나선다. 올해 3분기 유럽형 ‘소버린 에이전틱 운영체제(OS)’ 베타 버전을 공개하고 검증을 거쳐 하반기 중 상용 버전을 선보일 계획이다. 한컴은 폴란드 국가공인 연구개발(R&D)센터 7불스(7Bulls), 현지 AI·IT 기업 알고마인(Algomine)과 유럽형 소버린 에이전틱 OS 개발을 위한 세부 협력 어젠다에 합의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번 합의는 앞서 체결한 업무협약(MOU)을 구체적인 개발 과제로 옮기는 단계다. 협력 분야는 △제품 현지화 △기존 시스템 연동 △거버넌스와 유럽연합(EU) 규제 대응 △공동 영업과 사업화 등 4개 축이다. 현재는 공동개발과 개념검증(PoC)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구체적인 현지 고객이나 공급 계약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3분기 베타 공개와 하반기 상용화 일정이 제시되면서 유럽 진출 계획이 제품 개발과 매출화 단계로 넘어가는 분기점을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 기존 시스템 유지한 채 AI 에이전트 연결 한컴이 말하는 에이전틱 OS는 윈도나 리눅스처럼 컴퓨터를 구동하는 전통적인 운영체제와는 다르다. 조직이 보유한 데이터와 업무 시스템, 권한 체계, 여러 AI 모델과 에이전트를 하나의 환경에서 연결하고 통제하는 통합 운영 플랫폼에 가깝다. 핵심은 유럽 공공기관이 장기간 사용해 온 기간계 시스템을 걷어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존 시스템에 연결 모듈인 커넥터를 붙여 AI 에이전트가 필요한 데이터를 읽고 업무를 수행하도록 설계한다. 전면 교체에 따른 비용과 서비스 중단 위험을 줄이면서 단계적으로 AI를 도입하려는 공공·금융기관을 겨냥한 방식이다. 현지화는 언어에서 시작한다. 한컴은 폴란드어 특화 거대언어모델(LLM) ‘비엘리크(Bielik)’를 에이전틱 OS에 연동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폴란드어 에이전트의 성능을 측정할 평가체계도 공동으로 구축한다. 날짜와 통화, 문자 표기 등 현지 업무환경에 필요한 요소도 제품에 반영할 예정이다. 배포 방식은 폐쇄망과 온프레미스를 중심으로 설계한다. 민감한 문서와 업무 데이터의 외부 이동을 최소화하고 고객이 직접 AI 모델과 데이터 접근권한을 관리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7불스는 현지화와 기술개발을, 알고마인은 고객 채널을 활용한 공공·금융 분야 PoC와 사업 발굴을 맡는다. 한컴은 3분기 공개할 베타 버전을 통해 폴란드어 처리 성능과 현지 기간계 시스템 연동, AI 에이전트의 권한 통제 등을 우선 검증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하반기 상용 버전을 출시하고 PoC를 실제 공급 계약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이다. ◆ EU 규제는 부담이자 시장 진입 기회 한컴이 유럽을 첫 해외 거점으로 선택한 배경에는 EU의 규제 시계가 있다. EU AI법에 따른 투명성 의무는 오는 8월 2일부터 적용된다. 이용자가 AI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일정한 AI 생성·조작 콘텐츠에는 식별 가능한 표시를 적용해야 한다. 생체인식과 핵심 인프라, 교육, 고용 등에 사용되는 일부 고위험 AI 규정은 2027년 12월 2일부터 적용된다. 로봇과 산업기계 등 규제 대상 제품에 내장되는 시스템에는 2028년 8월 2일부터 관련 규정이 적용될 예정이다. 유럽 공공기관과 기업이 AI 도입과 함께 로그 기록, 접근 통제, 모델 검증과 사람의 감독 체계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한컴의 전략은 오픈AI나 구글처럼 기반모델을 직접 개발해 경쟁하는 데 있지 않다. 고객이 필요에 따라 현지 모델이나 외부 LLM을 선택하되 한컴은 문서를 AI가 읽을 수 있는 데이터로 바꾸고 기존 업무 시스템과 연결하며 실행 과정과 권한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자체 모델 경쟁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기보다 모델에 종속되지 않는 구조를 앞세워 공공·금융 분야의 규제와 레거시 연동 수요를 공략하는 셈이다. 글로벌 빅테크와 정면으로 맞붙기보다 여러 모델과 업무 시스템 사이의 운영 계층을 선점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한컴은 글로벌 에이전틱 AI 시장 전망을 토대로 2030년 소버린 에이전틱 OS의 유효시장(SAM)을 70억∼100억달러, 약 10조∼14조원으로 자체 추산하고 있다. 전체 소버린 AI 시장이 아니라 한컴이 겨냥하는 소프트웨어·플랫폼 영역의 추정치다. 관건은 하반기 상용화 이후 실제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느냐다. 국내에서 축적한 공공 문서 처리와 폐쇄망 구축 경험을 폴란드어와 EU 규제 환경에서도 재현해야 한다. 3분기 베타에서 커넥터의 호환성과 언어 정확도, 규제 대응 기능을 입증하고 이를 공급 계약으로 연결해야 유럽 진출이 첫 매출로 이어질 수 있다. 김연수 한컴 대표는 “유럽의 공공 시스템은 수십 년간 축적된 자산”이라며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지능화하는 것이 우리의 접근”이라고 말했다. 이어 “AI 주권은 인프라를 갖추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며 “그 위에서 데이터가 실제로 일하게 만드는 계층이 필요하고 그 자리를 한컴이 채우려 한다”고 강조했다.
2026-07-15 10:3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