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퇴임하는 대법관이 대법원장 앞에서 법원을 질타했다. 6년 임기를 마친 이흥구 대법관은 7일 퇴임식에서 12·3 비상계엄 이후 대법원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민에게 법원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법원이 말해야 할 때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결국 말할 기회마저 잃게 된다는 취지의 말도 남겼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켜보는 자리였다.
이 대법관은 정치권에도 날을 세웠다. 법왜곡죄와 재판소원, 대법관 증원 등 이른바 ‘사법 3법’의 입법 과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동시에 불공정하거나 충실하지 못한 재판, 당사자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재판,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재판에 쌓인 국민의 불신도 거론했다. 정치권의 사법부 압박만으로 지금의 상황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조 대법원장에게는 정치권을 향한 비판보다 법원을 향한 이 말이 더 쓰릴 수 있다. 사법부 독립은 대법원장의 권한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법관에게 재판받을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헌법 원칙이다. 대법원장에게 주어진 권한도 결국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에서 출발한다.
12·3 비상계엄 당시 조 대법원장은 말을 아꼈다. 계엄이 해제된 다음 날 아침 계엄 선포 과정의 법적 문제에 대해 절차를 더 지켜봐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고 탄핵 사유에 관한 질문에도 즉답하지 않았다. 사법부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이 뒤따랐다.
당시 대법원장에게 계엄 선포의 위헌·위법성을 미리 결론 내리라는 요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회에 군 병력이 들어가고 국민의 기본권이 위협받던 밤이었다. 헌법 질서와 국민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사법부의 책무라는 원칙을 밝히는 데 재판 결과를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이흥구 대법관은 법복을 벗는 날 당시 대법원의 대응을 다시 꺼냈다.
이재명 당시 대통령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에서 대법원의 움직임은 빨랐다. 사건은 2025년 3월 28일 대법원에 접수됐고 4월 22일 소부에 배당된 당일 조 대법원장의 결정으로 전원합의체에 넘겨졌다. 이날 첫 합의가 열렸고 이틀 뒤 두 번째 합의를 거쳐 5월 1일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접수부터 선고까지 34일이었다.
신속한 재판은 국민의 권리다. 공직선거법 사건에는 신속한 처리가 필요하다는 법원의 설명도 있었다. 실제 전원합의체 내부에서도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의견과 신속성만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반대 의견이 맞섰다. 문제는 대통령 선거를 한 달여 앞둔 유력 후보의 재판을 이 정도 속도로 끝내면서 국민의 의문까지 충분히 풀어줬느냐는 데 있다.
판결문에 법리를 적는 것과 재판 과정에 쏠린 의문을 설명하는 것은 같지 않다. 어떤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올리고 언제 심리해 언제 선고할지는 대법원이 정한다. 더구나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후보자의 정치적 운명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법원의 판단이 정치적 해석에 휘말릴 가능성이 큰 만큼 과정에 대한 설명도 그만큼 중요했다.
대법관 인선에서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행사가 또 다른 논란을 불렀다. 노태악 전 대법관이 지난 3월 퇴임했지만 후임 제청은 오랫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조 대법원장은 후보추천위원회 추천 이후 반년 넘게 지나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후임으로 제청했다. 이흥구 대법관 후임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도 같은 날 제청했다.
제청 과정은 그동안의 방식과 달랐다. 대통령과 협의를 거쳐 대면 제청해 온 관행과 달리 청와대와 최종 조율을 마치지 않은 채 후보자를 서면으로 제청했다. 헌법은 대법원장에게 제청권을 주지만 대통령에게 임명권을 두고 국회의 동의를 거치도록 했다. 어느 한 헌법기관이 대법관 인사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권한을 나눠놓은 것이다.
청와대는 손봉기 후보자에 대해 재제청을 요구했다. 이흥구 대법관까지 퇴임하면서 현재 대법관 두 자리가 비었다. 재판 지연 해소를 내걸고 취임한 조 대법원장 체제에서 정작 대법원의 재판을 담당할 대법관 두 명이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헌법상 제청권이 대법원장에게 있다는 말만으로 끝낼 수 없는 대목이다. 권한을 행사했다면 그 뒤 대법원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지도 사법부 수장의 책임 영역에 들어간다. 조 대법원장은 전원합의체 재판장이면서 전국 법원의 사법행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대법관 공석이 길어진 문제에서 조 대법원장을 떼어놓을 수 없는 이유다.
비상계엄 당시 대법원은 말을 아꼈다. 이재명 사건에서는 34일 만에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대법관 인선에서는 후임 제청이 수개월 늦어졌고 기존 관행과 다른 서면 제청 이후 두 자리 공석까지 이어졌다. 서로 다른 세 사건이지만 그 중심에는 모두 조희대 대법원장의 판단이 있었다.
물론 각각의 판단에는 법원이 내놓을 설명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보는 것은 개별 사건에 붙은 해명만이 아니다. 법원이 언제 침묵했고 언제 빠르게 움직였는지, 사법부 수장이 자신의 권한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고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함께 본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 그런 과정이 쌓여 만들어진다.
조 대법원장은 정치권을 향해 사법독립을 강조해 왔다. 정치권이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한다면 사법부 수장이 막아서는 것은 당연하다. 법왜곡죄와 재판소원, 대법관 증원이 재판 독립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 문제 역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다만 사법독립을 말하는 목소리와 자신의 권한 행사를 돌아보는 무게가 같았는지는 별개의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이흥구 대법관의 퇴임사가 예사롭지 않다. 정치권에서 조 대법원장을 겨냥해 던진 말이 아니다. 6년 동안 같은 대법원에서 재판하고 전원합의체에 앉았던 대법관이 법복을 벗는 날 남긴 말이다. 정치권의 사법부 흔들기를 비판하면서도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잃은 책임까지 외면하지 않았다.
대법원장은 사법독립을 지키는 자리다. 동시에 그 이름으로 행사한 권한의 결과를 짊어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조희대 대법원에서는 사법독립을 말할 때마다 권한은 앞에 섰지만 책임은 좀처럼 같은 크기로 따라오지 않았다.
떠나는 대법관이 마지막 날 그 불편한 대목을 건드렸다. 조희대에게 부족했던 것은 사법독립을 말할 권한이 아니었다. 그 권한에 걸맞은 책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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