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인류 문명의 역사는 끊임없이 떠나고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온 역사다. 익숙한 땅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한 사람들이 새로운 교역로를 열었고, 다른 문명의 지식과 기술을 자기 것으로 발전시킨 사회가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
문명여행자 안계환 작가가 최근 집필한 '떠남 그리고 지적 스폴리아 — 오디세우스에서 BTS까지, 문명을 바꾼 두 단어'라는 책의 구조를 듣고선, 그 세계사작인 탁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두 개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세계를 향한 도전인 '떠남'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의 지식을 받아들여 자기 문명으로 재창조하는 '지적 스폴리아(Intellectual Spolia)'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간명하면서도 묵직하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세계를 압도하지 못했던 유럽은 어떻게 19세기 말 지구촌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게 됐는가.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문화적 성공은 그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15세기 유럽은 왜 바다로 떠났는가
15세기 세계의 경제와 문명은 유럽만의 무대가 아니었다. 중국과 인도, 이슬람 세계에는 발전된 기술과 상업망, 학문적 전통이 존재했다. 유럽은 그들과 경쟁하고 교역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왕실의 지원으로 대양에 진출했다.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는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상업과 금융, 군사력을 결합했다. 프랑스 역시 해외 교역과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들이 바다를 건넌 동기는 다양했다. 향신료와 귀금속, 무역 이익, 종교적 열망, 국가 간 경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공통점은 분명했다. 기존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바깥에서 기회를 찾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유럽의 팽창을 모험 정신만으로 찬양해서는 안 된다. 식민지 침략과 노예무역, 자원 수탈은 그 과정의 어두운 실체였다. 유럽의 번영에는 다른 대륙이 치른 막대한 희생도 포함돼 있다.
그럼에도 유럽의 역동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외부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진출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지적 스폴리아,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의 숨은 동력
떠남이 유럽 팽창의 공간적 조건이었다면 지적 스폴리아는 그들의 경쟁력을 강화한 지적 조건이었다.
스폴리아는 원래 오래된 건축물의 기둥과 석재 등을 다른 건축물에 재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문명사적으로 확장한 지적 스폴리아는 외부에서 형성된 지식과 기술을 수용하고 새로운 체계로 재구성하는 능력이다.
유럽의 과학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학문, 이슬람 세계가 발전시킨 수학과 천문학, 중국에서 유래한 제지술과 인쇄술·화약·나침반 등이 장기간의 교류를 거쳐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
유럽은 이 유산을 바탕으로 관찰과 실험, 수학적 검증을 체계화했다. 대학과 학술단체, 출판과 금융제도의 발전도 혁신을 촉진했다. 산업혁명에는 이러한 지적 축적과 함께 석탄, 자본, 노동시장, 식민지 경제 등 다양한 조건이 작용했다.
중요한 것은 유럽이 외부의 지식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지식을 재해석하고 결합해 새로운 생산방식과 과학적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문명의 힘은 무엇을 처음 발명했는가에만 달려 있지 않다.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얼마나 개방적으로 받아들이고 독창적으로 발전시키느냐에도 달려 있다.
다만 지적 스폴리아는 모든 성취를 설명하는 만능 열쇠가 아니다. 지식의 교류와 창조적 학습을 강조하는 역사 해석의 틀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자발적 학습과 강제적 약탈은 엄격하게 구분돼야 한다.
◆유럽의 경쟁력은 왜 흔들리는가
유럽이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확보했던 압도적인 우위는 오늘날 상당 부분 분산됐다.
미국은 현대 과학기술과 디지털 혁신의 중심으로 성장했고, 일본과 한국, 중국은 제조업과 첨단산업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성과가 세계 곳곳으로 확산된 것이다.
유럽은 여전히 기초과학과 정밀기계, 항공우주, 제약 분야에서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 자유와 인권의 전통도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생산성 정체와 고령화, 재정 부담, 에너지 비용, 산업 경쟁력 약화는 심각한 도전이다. 영국의 공공서비스와 재정 압박, 프랑스의 정치·재정 갈등은 과거의 제도적 성취만으로 미래의 번영을 보장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자유·평등·박애라는 가치 자체가 낡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가치를 현실에서 구현할 경제적 활력과 혁신 능력을 유지하느냐다.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는 순간 문명은 정체한다. 끊임없이 배우고 변화했던 유럽이 스스로 그 역동성을 잃어버린다면 역사적 우위도 지속되기 어렵다.
◆대한민국과 BTS, 새로운 문명적 성공의 원리
대한민국의 산업화 역시 떠남과 지적 스폴리아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전쟁의 폐허에서 출발한 한국은 세계시장으로 나아갔다. 해외에 상품을 팔고 기술을 배우며 국제 경쟁에 뛰어들었다. 수출은 단순한 경제정책을 넘어 세계를 향해 떠나는 국가적 도전이었다.
한국 기업들은 외국의 기술과 설비를 도입한 뒤 생산기술을 축적하고 개선했다. 철강과 조선, 자동차, 반도체에서 독자적인 경쟁력을 구축한 것은 창조적 학습의 결과였다.
한국의 성공은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정체성과 발전 의지를 잃지 않았다는 데 있다.
BTS의 성공 역시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힙합과 랩, 글로벌 대중음악의 형식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어와 독자적인 정서, 음악적 서사를 결합했다. 세계의 음악을 배웠지만 단순한 복제품을 만들지 않았다. 세계시장으로 나아갔지만 자기 문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산업화와 한류는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하나의 교훈을 공유한다.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사회, 남의 장점을 배우면서 자기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사회가 경쟁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AI 시대, 대한민국은 다시 떠나야 한다
이제 인류는 또 하나의 문명사적 전환기에 서 있다. 인공지능은 과학과 산업, 문화와 일상생활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15세기 유럽이 바다로 떠났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은 AI와 디지털 문명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야 한다.
이 시대의 지적 스폴리아는 세계의 첨단기술과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학습하면서 이를 한국의 산업적 강점과 결합하는 능력이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로봇, 바이오, 문화콘텐츠에 AI를 접목해야 한다.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독자적인 플랫폼과 산업 생태계, 새로운 국제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과 연구의 개방성, 세계 인재의 유입, 창업과 혁신을 장려하는 제도, 실패를 허용하는 문화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미래의 지적 스폴리아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약탈과 달라야 한다. 지식재산권을 존중하고 공정한 협력을 바탕으로 인류 공동의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문명적 리더십이다.
떠남은 지리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낡은 사고와 제도를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하는 정신적 도전이다. 지적 스폴리아 역시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인류의 지적 유산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이다. 떠남 없는 사회는 고립되고, 배움 없는 사회는 정체하며, 창조 없는 사회는 영원한 추격자로 남는다.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를 배우는 나라에서 세계가 배우는 나라로 도약해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미지의 바다를 항해했고, 유럽의 항해자들이 대양을 건넜으며, 한국의 기업과 BTS가 세계시장과 문화의 경계를 넘었다. 그 역사를 관통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용기와 타자의 성취를 자기 것으로 발전시키는 지혜다.
떠남이 문명의 지평을 넓혔다면, 지적 스폴리아는 그 문명의 깊이를 더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이 두 힘을 독자적인 창조로 완성해야 한다. 그것이 AI 시대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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