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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개헌은 사람 아닌 제도를 보고 해야 한다
헌법에는 권력을 주는 조항만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을 자신을 위해 고치지 못하도록 막는 조항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28조 2항이 그렇다.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은 그 헌법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 짧은 한 문장이다. 그러나 이 조항에는 권력과 헌법의 관계에 대한 무거운 원칙이 들어 있다. 헌법을 고칠 수는 있어도 자신을 위해 고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프랑스를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9일 파리 동포간담회에서 자신의 임기를 직접 언급했다. 취임 초 정상외교 일정을 많이 잡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저의 임기는 헌법상 명확하게 제한돼 있기 때문에” 정상외교를 빨리 시작해야 효과를 오래 누릴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정상외교에 관한 설명이었지만 정치권에서 대통령 4년 중임·연임제 개헌과 현직 대통령의 향후 거취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라 주목받았다. 대통령의 말은 원칙적으로 옳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하고 중임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더 중요한 것은 앞서 말한 제128조다. 대통령 임기 연장이나 중임 변경을 위한 개헌은 개헌 제안 당시 대통령에게 효력이 없도록 못 박았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개헌이 현직 권력자의 집권 연장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그런데 최근 개헌 논의는 이 단순한 원칙에서 자꾸 벗어난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 또는 연임제로 바꾸는 권력구조 개편을 언급하면서 개헌을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임기를 단축할 수 있다는 기존 입장도 재확인했다. 야권에서는 중임제와 임기 단축이 결합할 경우 현직 대통령의 향후 재출마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반대편에서는 연임제 개헌의 경우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반론이 나온다. 개헌의 필요성보다 ‘이재명 대통령이 다시 출마할 수 있느냐’가 정치적 관심사가 돼버린 셈이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개헌은 대통령 한 사람의 임기를 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대통령과 국회, 정부와 사법부가 어떤 관계를 맺고 국가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결정하는 국가의 기본설계다. 지금 개헌한다면 그 기준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가 아니라 2030년, 2040년의 대한민국에 어떤 권력구조가 필요한가여야 한다. 1987년 헌법이 만들어진 지 거의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크게 변했다. 경제 규모도, 인구 구조도, 지방의 현실도 달라졌다.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 역시 1987년과 같지 않다.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장단점도 충분히 경험했다.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다음 선거를 의식해야 하고 임기 후반에는 급격한 레임덕이 나타나는 문제, 국회의원 임기와 대통령 임기가 엇갈리면서 선거가 사실상 상시화되는 문제도 있다. 반대로 4년 중임제는 국민에게 대통령을 한 번 더 평가할 기회를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권력 집중이 장기화할 위험도 있다. 그러니 논의할 것은 많다. 대통령 임기만 고칠 일도 아니다. 대통령의 권한을 어디까지 조정할 것인지, 국회의 견제 기능은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 국무총리의 역할은 어떻게 할 것인지, 감사원과 검찰·경찰 등 권력기관의 독립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지방분권과 기본권, 국민투표와 개헌 절차도 논의 대상이다.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4년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대한민국의 권력구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개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람을 먼저 놓고 제도를 설계하는 일이다. 동양 고전 <한비자>에는 “법불아귀(法不阿貴)”라는 말이 나온다. 법은 귀한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법의 적용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2000여 년 전의 말이지만 헌법 논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좋은 헌법은 좋은 지도자를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권력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좋은 헌법이다. 그래서 헌법 제128조 2항의 정신은 중요하다. 헌법을 고치는 사람이 그 결과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개헌의 정당성을 지키는 일종의 ‘이해충돌 방지장치’다. 헌법을 바꾸는 정치세력과 그 헌법의 혜택을 받는 정치세력을 분리해야 개헌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생긴다. 여야 모두 이 원칙 앞에서는 한발 물러서야 한다. 여권은 개헌 논의를 현직 대통령의 정치 일정과 연결할 여지를 스스로 차단해야 한다. 야권 역시 모든 개헌 논의를 ‘집권 연장 시도’라고 규정하며 정치적 의심부터 앞세우는 태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실제 현행 헌법에는 현직 대통령의 임기 연장과 중임 변경을 제한하는 조항이 존재한다. 개헌 논쟁은 그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대통령도 이번 발언을 한 걸음 더 분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임기는 헌법상 제한돼 있다”는 언급에서 그칠 게 아니라 개헌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권력구조가 자신의 정치적 거취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불필요한 논란을 줄이고 개헌 논의를 제도의 문제로 되돌릴 수 있다. 개헌에는 더 중요한 관문도 있다. 헌법 제130조에 따르면 개헌안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고, 이후 국민투표에서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가 투표해 투표자 과반수가 찬성해야 확정된다. 어느 한 정당이나 대통령 혼자 밀어붙일 수 없는 구조다. 헌법 자체가 개헌을 ‘합의의 정치’로 설계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누가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갈 수 있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떤 대통령제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4년 연임제와 중임제의 장단점을 공개적으로 비교하고 대통령·국회·사법부 사이의 권력 배분 방안을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여야와 헌법학자,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개헌 논의기구를 만들어 쟁점을 정리할 수도 있다. 개헌은 정치공학이 되는 순간 실패한다. 현직 대통령에게 유리하도록 설계해도 안 되고, 현직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해서도 안 된다. 헌법은 특정 정치인을 위한 계약서가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까지 적용받을 국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파리에서 말한 대로 대통령의 임기는 헌법에 의해 제한된다. 그렇다면 이제 정치권도 그 헌법의 정신을 받아들일 차례다. 사람은 임기가 끝나면 떠난다. 헌법은 남는다. 개헌의 출발점은 바로 그 단순한 사실이어야 한다.
2026-09-10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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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경찰에 더 큰 수사권 줬다면 통제장치도 함께 세워야
수사권 조정의 핵심은 권한을 나누는 데 있었다. 검찰에 집중됐던 수사·기소 권한을 분산하고 경찰의 독립적 수사 역량을 키우자는 취지였다.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권한을 넘긴 만큼 책임과 통제 장치도 함께 세웠느냐다. 최근 제주에서 벌어진 실종사건 허위 종결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제주서부경찰서 실종팀에서 근무한 한 경찰관은 자신이 처리한 실종사건 298건 가운데 27건을 부적절하게 처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11건은 허위 종결로 확인됐다. 실제로 연락하지 않고 소재가 확인된 것처럼 처리하거나, 실종자가 사망했다는 허위 내용을 시스템에 입력해 관리 대상에서 해제한 사례도 드러났다. 기존 허위 종결 사건 당사자 2명은 이후 숨진 채 발견됐다. 다만 이 사건에서 말하는 ‘실종사건 종결’과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이 행사하는 형사소송법상 ‘불송치 결정’은 같은 제도가 아니다. 전자는 실종신고 관리와 관련된 경찰 업무이고, 후자는 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단한 형사사건을 검찰에 송치하지 않는 절차다. 두 제도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이 형사사법 개혁과 맞닿는 지점은 분명하다. 경찰의 판단 영역이 넓어지는 만큼 그 판단을 점검하고 바로잡는 장치도 정교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가 된 초기 사건들은 해당 경찰관의 야간 1인 당직 때 처리됐다. 당시 별도의 보고·검토 절차가 있더라도 전산상 실종 해제는 담당자가 직접 할 수 있었다. 경찰은 논란 이후 관리자가 해제 사유와 입력 내용을 다시 확인한 뒤 최종 승인하도록 이중장치를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개인의 일탈로만 정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찰은 수사기관이면서 거대한 행정조직이다. 내부 위계와 동료 관계가 강한 조직에서는 부실 판단이나 잘못된 관행이 내부에서 충분히 걸러지지 않을 위험이 존재한다. 실제 더불어민주당 경찰개혁추진단도 제 식구 감싸기, 사건 암장, 무단 종결, 증거 은폐·조작, 수사정보 유출, 개인정보 침해를 ‘6대 폐단’으로 지목했다. 외부 감사 확대와 수사 제척사유 강화, 피해자 설명 책임, 부실 수사의 법적 책임 강화도 대책으로 거론되고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거치면서 경찰은 일반 형사사건의 1차 수사에서 훨씬 큰 역할을 맡게 됐다. 앞으로 검찰의 직접수사 영역이 더 줄어들수록 경찰 판단의 무게는 커진다. 수사를 시작할지, 더 이어갈지, 불송치할지에 대한 결정 하나가 국민의 권리와 직결된다. 물론 형사사건에는 이미 통제 장치가 있다.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하면 고소인이나 피해자 등은 이의를 신청할 수 있고, 검사는 위법하거나 부당한 불송치에 대해 재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제도가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충실히 작동하느냐와, 실종사건처럼 형사 불송치 절차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영역의 공백이다. 그래서 논의의 초점은 ‘경찰에게 권한이 많다’는 데서 멈춰서는 곤란하다. 어떤 판단을 내렸고, 그 판단이 어떻게 기록되며, 누가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지를 촘촘하게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사건 종결에는 충분한 이유가 남아야 한다. ‘혐의 없음’이나 ‘소재 확인’ 같은 결과만 기록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자료를 확인했고, 어떤 절차를 거쳤으며, 왜 추가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남겨야 한다. 특히 실종·성범죄·아동·가정폭력처럼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사건은 종결 기준을 더 엄격하게 둘 필요가 있다. 둘째, 고위험 사건에는 내부 결재를 넘어선 점검 장치가 필요하다. 모든 사건을 외부기관이 다시 심사하는 방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장기 실종이나 중대한 피해 사건, 담당자 단독 판단 비중이 큰 사건은 일정 비율을 표본 감사하거나 외부위원회가 사후 검증하는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셋째, 신고자와 피해자에게 종결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는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 형사사건의 불송치에는 법정 이의신청 절차가 있지만 실종사건 등 다른 경찰 업무에서는 재검토 요구 통로가 상대적으로 약한 경우가 있다. 사건이 왜 끝났는지 설명하고, 이의가 있을 때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다시 판단을 요구할 수 있는지 명확히 알려야 한다. 넷째, 부실 처리의 책임도 분명히 해야 한다. 단순 실수와 고의적 은폐는 구분해야 하지만 허위 기록, 사건 암장, 증거 삭제처럼 중대한 행위는 징계만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형사책임과 지휘 책임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조직도 긴장한다. 고대 로마 공화정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다. 집정관을 두 명으로 두고 임기를 제한한 것도 상호 견제를 제도화하려는 장치였다. 권력은 선의만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경험에서 나온 제도였다. 현대 형사사법 역시 다르지 않다. 좋은 경찰관이 많다는 믿음과 경찰 권한을 제도적으로 통제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견제 장치는 경찰을 불신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경찰의 판단을 더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다. 이번 제주 사건을 계기로 ‘성인실종법’ 제정 필요성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일반 성인 실종은 아동·치매환자 등에 적용되는 별도 법률의 보호 대상에서 빠져 있어 제도적 공백이 있다는 지적이 이어져왔다. 실종사건 종결 때 객관적 증빙을 남기고 제3기관이 수사·수색 과정을 점검하는 방안도 논의할 만하다. 검찰의 과도한 권한을 줄였다는 이유로 경찰의 역할 확대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권력분산의 목적은 한 기관의 힘을 다른 기관에 옮겨 싣는 데 있지 않다. 국민의 기본권이 어느 한 조직의 자의적 판단에 좌우되지 않도록 견제와 책임의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경찰개혁은 경찰을 약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정당한 수사는 흔들림 없이 할 수 있게 하고, 잘못된 판단은 조직 내부와 외부에서 신속하게 걸러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검찰 권한을 줄이고 경찰의 역할을 키웠다면 책임의 기준 역시 달라져야 한다. 사건을 왜 끝냈는지 기록이 남고, 그 판단이 잘못됐을 때 다시 들여다볼 통로가 작동해야 국민도 경찰의 판단을 신뢰한다. 제주 실종사건이 보여준 것은 한 경찰관의 일탈만이 아니다. 담당자의 잘못된 판단을 제때 걸러내지 못한 시스템의 허점이다. 경찰권이 커지는 시대라면 개혁의 다음 순서는 분명하다. 더 많은 권한에 걸맞은 더 촘촘한 책임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2026-09-09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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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삼성, 베트남 국회의장에 '반도체 인재·공급망 육성' 청사진 제시…정부 지원 요청
삼성전자가 베트남에서 현지 부품·소재 기업의 공급망 편입과 반도체 전문인력 육성을 양대 축으로 한 현지 산업 생태계 강화에 나선다. 단순 생산기지 투자를 넘어 현지 기업의 생산성 혁신과 스마트공장 구축을 지원하고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 인재를 직접 육성하는 방식이다. 특히 올해부터 현지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 ‘삼성 이노베이션 캠퍼스(SIC)’에 반도체 교육과정을 처음 도입하고 관련 교육 거점을 베트남 주요 지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삼성은 이 같은 현지 산업·인재 육성 전략을 베트남 최고위급에 설명하고 국회와 중앙·지방정부에 지속적인 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8일 경제일보가 베트남 당국 자료와 삼성전자 측이 지난 6일 쩐 타인 먼(Trần Thanh Mẫn) 베트남 국회의장의 방한 간담회에서 밝힌 내용을 분석한 결과, 삼성은 베트남 현지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첨단기술 인재 육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쩐 의장은 지난 6일 서울에서 한국 내 비정부기구(NGO)와 한·베 우호단체, 기업·학계 관계자 등 70여명과 만났다. 이 자리에는 나기홍 삼성베트남 법인장도 참석했다. 삼성은 이 자리에서 베트남 현지기업 육성과 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중장기 전략을 설명했다. 베트남이 외국인직접투자(FDI)의 양적 확대에서 질적 고도화로 정책 방향을 전환하는 상황에서 현지 공급망과 인적자본을 함께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 삼성 공급망에 베트남 기업 키운다…2015년부터 현지기업 발굴 삼성이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베트남 부품산업의 경쟁력 강화다. 삼성은 베트남 투자 이후 현지 기업 육성과 기술 이전, 고급 기술인력 양성에 지속적으로 자원과 예산을 투입해 왔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베트남 기업들이 단순한 현지 협력업체에 머무르지 않고 생산성과 기술 경쟁력을 높여 삼성의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삼성은 2015년부터 베트남 산업통상부와 각 지방 산업통상 당국 등과 협력해 잠재력을 갖춘 현지 공급업체를 발굴해 왔다. 부품산업 관련 워크숍을 열어 현지 기업과 삼성의 접점을 만들고 한국의 제조 전문가들이 직접 기업 현장을 찾아 생산공정과 품질관리 등을 개선하는 컨설팅도 진행했다. 스마트공장 구축 지원도 이 같은 현지기업 육성 전략의 하나다. 베트남 기업의 제조 현장에 한국의 생산관리 노하우와 스마트 제조기술을 접목해 생산성과 품질 경쟁력을 높이는 방식이다. 삼성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베트남 기업들이 현지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삼성의 베트남 사업 전략이 완제품 생산 중심에서 현지 부품·소재기업과 기술인력을 함께 육성하는 산업 생태계 구축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베트남 국회 역시 6일 공식자료를 통해 나 법인장이 삼성의 베트남 기업 지원을 소개하면서 이들이 베트남뿐 아니라 삼성의 글로벌 공급망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 ‘삼성 이노베이션 캠퍼스’에 반도체 교육 첫 도입 인재 육성 전략에서는 반도체가 전면에 등장했다. 삼성은 전문대·대학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SIC를 통해 AI와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첨단기술 분야의 실무교육을 제공해 왔다. 올해부터는 여기에 반도체를 추가했다. 특히 교육 수준에 따라 입문·기본·심화 등 3단계로 구성된 반도체 교육과정을 처음 도입했다. 베트남 정부가 2030년까지 반도체 전문인력 5만명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추진하는 데 맞춰 현지 반도체 인력 기반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교육 인프라도 확대한다. 삼성은 2026년부터 베트남 주요 지역을 대상으로 ‘SIC Lab’ 모델을 확산·고도화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SIC Lab은 하노이와 다낭, 박닌, 타이응우옌 등에서 구축·운영되고 있다. 삼성의 올해 SIC 프로그램에 반도체 교육이 처음 포함됐다는 사실은 지난 4월 삼성베트남이 공개한 사업계획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삼성은 AI·IoT·빅데이터와 함께 반도체 교육을 도입하고 올해 약 2200명의 학생에게 첨단기술 교육을 제공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는 것만으로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없는 만큼 현지 전문인력을 선제적으로 양성해 베트남의 반도체 산업 기반을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 대학·대학원까지 연결…산학협력에 1800억동 투자 삼성은 대학과 대학원으로 이어지는 산학협력도 강화한다. 삼성베트남은 2012년부터 베트남 주요 대학 및 기관과 협력해 첨단기술 연구개발(R&D)과 인재 양성을 지원하고 삼성 인재 장학금(STP)을 지급해 왔다. 삼성이 이날 밝힌 관련 누적 투자액은 약 1800억동이다. 초·중·고교생부터 대학생과 대학원생까지 단계별로 이어지는 인재 육성 체계를 구축해 장기적으로 베트남 첨단산업을 뒷받침할 기술인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개별 대학이나 기업 중심의 인재 육성을 넘어 베트남 정부와 대학,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산·학·연 협력 모델을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삼성은 이를 베트남의 지속가능한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고 새로운 산업에 필요한 고급 기술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핵심 축으로 보고 있다. 청소년 단계에서는 ‘솔브 포 투모로우(Solve for Tomorrow)’가 가교 역할을 한다. 2019년 베트남에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중·고등학생들이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지식을 활용해 사회문제 해결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방식이다. 올해는 베트남 국가혁신센터(NIC)와 처음 협력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은 이를 전국 수천개 학교로 확산시켜 STEM 교육과 과학기술·혁신·디지털 전환을 촉진한다는 계획이다. ◆ 저소득층부터 반도체 인재까지…‘인재 파이프라인’ 구축 삼성의 베트남 인재 육성 전략은 취약계층 청소년까지 포괄한다. 대표적인 사업이 ‘삼성 희망학교’다. 삼성 사업장과 협력회사 인근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방과 후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2013년 박닌 지역에서 시작해 현재 박닌 2곳과 타이응우옌, 랑선 등 총 4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누적 5000명 이상의 학생이 방과 후 교육 기회를 제공받았다. 삼성의 베트남 사회공헌 전략을 연결하면 저소득층 아동의 교육 지원에서 중·고교 STEM 교육, 대학생 AI·반도체 교육, 대학·대학원 R&D 지원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사회공헌과 산업인재 육성을 분리하기보다 장기적인 ‘인재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 삼성, 베트남 국회·정부에 “지속적인 지원 필요” 삼성은 이번 방한을 계기로 베트남 국회와 중앙·지방정부에도 협력을 요청했다. 베트남이 새로운 성장 단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미래 세대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삼성의 사회공헌 및 인재 육성 사업이 안정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특히 각 교육·사회공헌 프로그램의 수혜자를 발굴하고 지역 현장에서 사업을 확대하려면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정부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삼성전자 측은 “베트남의 발전이 삼성의 발전이고 삼성의 성공이 베트남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앞으로도 가장 신뢰받는 파트너로서 함께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쩐 의장도 한국 기업의 베트남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반도체와 전략적 공급망, 재생·청정에너지, 디지털 전환, AI 등을 양국이 협력을 확대해야 할 분야로 꼽았다. 베트남 국회는 외국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제도와 법률을 지속적으로 정비하고 한국 기업들이 현지에서 장기적으로 투자를 확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방침이다. 삼성이 제시한 공급망 현지화와 반도체 인재 육성 구상이 베트남의 산업 고도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삼성의 베트남 전략도 ‘생산기지’에서 ‘산업 생태계 공동 구축’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모습이다.
2026-09-08 08: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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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법에 된다고 다 해도 되나…공직자의 '공정 감수성'이 무너지고 있다
공직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다. 법이 허용한다고 해서 모두 해도 되는 자리도 아니다. 공직자와 공직후보자에게는 법률의 최소 기준을 넘어 국민의 눈높이와 상식이라는 더 높은 잣대가 따라붙는다. 최근 잇따른 논란은 이 당연한 원칙을 다시 묻게 한다. 추미애 경기도지사는 지난달 ‘재정 비상상황’을 선언했다. 경기도는 재정난을 이유로 5465억원 규모의 세출 구조조정에 나섰고, 직원들에게도 고통 분담을 주문했다. 그런데 추 지사가 도청 인근 156㎡ 아파트를 12억2000만원에 전세 계약한 관사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경기도는 업무 효율을 위해 관련 규정에 따라 계약했고, 계약 당시에는 재정 상황의 심각성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규정을 어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상징이다. 직원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하면서 최고 책임자가 상대적으로 넓고 비싼 관사를 사용하는 모습이 국민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재정 비상이 정말 심각하다면 먼저 줄여야 할 비용이 무엇인지 지도자가 보여주는 것이 순리다. 조직은 말보다 행동을 먼저 본다.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비례대표 의원직 겸직 논란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법적으로 겸직이 가능한지 여부와 국민이 이를 공정하다고 받아들이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공직은 가능한 권리를 최대한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 제한할 줄 아는 자리여야 한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치료제 임상시험 승인과 관련해 식약처장에게 신속한 처리를 요청하는 취지의 문자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김 후보자는 민원 전달일 뿐 부정한 로비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현 단계에서 위법을 단정해선 곤란하다. 그렇지만 국회의원의 문자 한 통이 평범한 민원인의 전화 한 통과 같은 무게일 리는 없다. 의원은 법을 만들고 예산을 심사하며 정부기관을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 지위에서 “빨리 처리해달라”는 말은 의도와 무관하게 행정기관을 압박하는 신호로 읽힌다. 이 세 사례의 성격은 서로 다르다. 하나는 관사, 하나는 겸직, 하나는 민원 전달 문제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모두 법 위반 여부를 따지기 전에 공직자의 자기 절제가 충분했는지를 묻게 한다. 정치권은 이런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규정에 따른 것이다” “관행이었다”고 설명한다.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 공직자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논어>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공직 윤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직원들에게 긴축과 희생을 요구한다면 자신부터 절제해야 하고, 국민에게 공정한 절차를 요구한다면 자신도 권력의 지름길을 경계해야 한다. 최근 여론 흐름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한국갤럽의 지난 1~3일 조사에서 이재명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40%, 부정 평가는 51%였다. 20대 긍정 평가는 25%로 전주보다 6%포인트 떨어졌다. 부정평가 이유에서는 ‘인사’가 9%로 올라섰다. 한 번의 조사 결과만으로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근 인사 논란이 특히 청년층의 공정 감수성을 건드렸다는 정치권의 해석에는 귀 기울일 대목이 있다. 2030 세대가 특권 문제에 민감한 이유는 단순하다. 취업과 주거, 자산 형성에서 치열한 경쟁을 겪는 세대에게 ‘누군가는 자리도 갖고, 혜택도 갖고, 인맥도 활용한다’는 인상은 강한 박탈감으로 돌아온다. 공직자가 이를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말로 넘기면 민심과 더 멀어진다. 정치는 법률가의 시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합법인지뿐 아니라 무엇이 적절한지를 판단해야 하는 영역이다. 규정상 가능하더라도 국민의 신뢰를 해친다면 스스로 한 발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장관과 도지사, 국회의원처럼 권한이 큰 자리일수록 기준은 엄격해져야 한다. 권력이 크면 책임도 커진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공직 후보자 검증도 달라져야 한다. 재산과 세금, 전과 여부만 확인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이해충돌 가능성, 특혜의식, 권한 행사 방식, 공적 자원을 대하는 태도까지 함께 봐야 한다. 결국 국민이 묻는 것은 ‘법을 어겼느냐’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공직을 맡을 자세가 돼 있느냐’이기 때문이다. 정권의 인사는 능력만으로 성공하지 않는다. 도덕성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사람인가에 대한 신뢰가 함께 있어야 한다. 지금 공직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해명이 아니다. 법과 규정을 내세우기 전에 스스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선택을 하는 문화다. 특권처럼 보이는 관사는 줄이고 이해충돌의 여지가 있는 자리는 내려놓고 권한 있는 사람의 전화 한 통도 조심하는 것이다. 이런 작은 절제가 쌓여 공직의 신뢰가 만들어진다. 공직은 가능한 것을 모두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절제, 누릴 수 있어도 내려놓는 태도에서 공직의 품격이 드러난다.
2026-09-07 14: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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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의원일 때는 공소취소, 장관 후보 되니 '권한 없다'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러나 임명권자에게만 책임지는 자리는 아니다. 검찰과 교정, 출입국, 인권과 형사사법 행정을 총괄하고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까지 떠맡는 자리다. 그래서 법무부 장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과의 적절한 거리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3일 이재명 대통령 관련 사건의 공소취소 논란에 선을 그었다. 김 후보자는 “법무부 장관으로서 공소취소를 할 직접적인 권한도 없고 검찰총장을 통해 지휘할 생각도 지금 없다”고 밝혔다. 개별 사건의 공소유지는 공판검사의 권한이며 이를 존중하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문제는 과거 발언과의 간극이다. 김 후보자는 의원 시절 이 대통령 사건의 공소취소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해왔다. 관련 의원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았고, 이 대통령 사건은 국가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도 폈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뒤에는 “법과 원칙에 따라 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정치인의 입장이 공직에 따라 달라지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국회의원과 법무부 장관은 역할과 책임이 다르다. 의원은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자리지만 장관은 법과 절차를 집행하는 자리다. 오히려 장관 후보자로서 과거 정치적 주장과 거리를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말 한마디로 우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권한의 유무보다 신뢰의 문제다. 법무부 장관에게 직접 공소를 취소할 권한이 없다는 설명은 맞다. 현행 체계에서 개별 사건의 공소유지와 취소는 검사가 판단한다. 다만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을 지휘·감독하며,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한다. 이 때문에 장관의 과거 정치적 입장과 현재의 태도는 형사사법 시스템의 신뢰와 직결된다. 더욱이 대상이 현직 대통령의 형사사건이라면 기준은 한층 엄격해진다. 법무부 장관이 과거 대통령 사건의 공소취소를 주장했다면 국민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장관이 된 뒤에도 같은 판단을 유지하는가. 검찰이 다른 결정을 내릴 경우 이를 그대로 존중할 것인가. 대통령과 여권의 정치적 이해보다 형사사법 절차를 앞세울 수 있는가. 김 후보자가 답해야 할 대목도 여기에 있다. 공소취소가 법적으로 가능하냐는 논쟁만으로는 부족하다. 장관으로 취임한 뒤 대통령 사건과 관련해 어떤 원칙을 적용할지, 이해충돌 우려가 생길 경우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절제할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법치주의는 법 조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과정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검찰이 대통령 사건의 공소를 유지하든 취소하든 국민이 그 결정을 정치적 압력의 결과로 받아들이면 형사사법의 신뢰는 흔들린다. 장관이 실제로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과거의 정치적 발언이 결정 과정 전체에 의심을 덧씌울 수 있다. 그래서 권력기관의 장에게는 법에 적힌 권한보다 더 넓은 자기 절제가 요구된다. 로마 공화정 시기 법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원칙 가운데 하나가 ‘법은 사람보다 오래가야 한다’는 사고다. 통치자의 이해에 따라 법이 흔들리는 순간 공화정의 토대도 함께 흔들린다고 봤다. 오늘날 법무부 장관에게 요구되는 원칙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대통령과 정치권의 사정이 바뀌어도 형사사법의 기준은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장관은 대통령의 참모이면서 동시에 법치의 관리자다. 두 역할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앞세우느냐가 중요하다.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 법무행정의 목표로 읽히는 순간 장관의 독립성은 약해진다. 반대로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이라도 법과 절차 앞에서는 거리를 둘 수 있다면 신뢰는 유지된다. 우리 정치에서 법무부 장관과 검찰을 둘러싼 논란이 반복된 이유도 이 경계가 자주 흐려졌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검찰 인사와 수사 방향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졌고, 여권은 검찰개혁을, 야권은 권력수사를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검찰과 법무부는 정치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갔다. 정치적 사건이 생길 때마다 장관의 말과 검찰의 판단이 정쟁의 소재로 소비되는 구조가 굳어진 셈이다. 이제는 이 악순환을 줄여야 한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과거 정치적 발언을 문제 삼는 데서 멈출 일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취임 이후 대통령 사건을 비롯한 정치적 사건에서 어떤 원칙을 적용하느냐다. 구체적 사건에 대한 불필요한 발언을 자제하고 검찰의 법적 판단을 존중하며, 지휘권 행사 기준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태도가 관건이다. 국회 인사청문회도 같은 기준에서 접근하는 편이 낫다. “공소취소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단답형 공방보다 대통령 사건에서 장관의 이해충돌을 어떻게 관리할지, 수사지휘권 행사의 기준은 무엇인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떻게 보장할지를 묻는 편이 생산적이다. 김 후보자가 “지휘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것은 방향 자체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국민이 궁금한 것은 현재의 말보다 취임 이후의 행동이다. 의원 시절의 정치적 주장을 장관이 된 뒤에도 법과 원칙보다 앞세운다면 우려는 현실이 된다. 반대로 정치적 이해와 거리를 두고 형사사법 절차를 존중한다면 과거 발언과의 간극도 설명력을 얻는다.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대통령의 법률대리인이 아니다. 정권의 이해를 지키는 자리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으로 형사사법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관리하는 것이 본래의 책무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봐야 할 것도 결국 그 점이다. 과거의 발언 자체보다 앞으로 어떤 기준을 지킬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대통령과의 정치적 거리를 스스로 확보하고, 법과 절차를 흔들지 않는 태도로 국민에게 답해야 한다. 법무부 장관에게 요구되는 신뢰는 강한 권한 행사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통령과 가까울수록 법 앞에서는 더 멀리 서는 절제에서 나온다.
2026-09-04 16: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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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멕시코선 '불만족'·카자흐선 '반복 위반'…신한은행 해외법인 경고등
신한은행의 멕시코·카자흐스탄 현지법인이 현지 정부의 은행 평가와 금융당국의 규제 준수 측면에서 잇따라 낮은 성적표를 받아든 것으로 나타났다. 신한은행 멕시코법인은 정부 평가에서 2년 연속 ‘불만족’ 판정을 받은 반면 같은 한국계인 하나은행 현지법인은 2년 연속 ‘만족’을 받았다. 또 신한은행 카자흐스탄법인은 외환규정 위반으로 벌금을 부과받았으며, 현지 당국은 일부 사안을 과거 행정제재 이후 1년 이내 다시 발생한 반복 위반으로 적시했다. 3일 경제일보가 멕시코 재무부(SHCP)의 2024·2025년도 은행 성과평가와 카자흐스탄 중앙은행(NBRK)의 행정제재 자료, 신한금융지주의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제출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 멕시코 재무부가 지난 7월29일 발표한 ‘2025년도 복수은행 성과평가(EDB)’ 최종 결과에 따르면 Banco Shinhan de México는 ‘No satisfactorio(불만족)’ 판정을 받았다. 평가 대상 49개 은행 가운데 46곳이 만족 판정을 받았으며 불만족은 멕시코신한은행과 Banco Bancrea, Banco Credit Suisse (México) 등 3곳이었다. 반면 Banco KEB Hana México는 ‘Satisfactorio(만족)’ 판정을 받았다. ◆신한 2년 연속 ‘불만족’…하나는 연속 ‘만족’ 멕시코신한은행의 불만족 평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멕시코 재무부가 지난해 7월30일 발표한 2024년도 평가에서는 49개 은행 가운데 45곳이 만족, 3곳이 ‘조건부 만족’을 받았다. 멕시코신한은행은 당시 49곳 가운데 유일하게 ‘불만족’ 판정을 받았다. KEB하나멕시코은행은 만족 평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멕시코신한은행은 2024·2025년도 2년 연속 불만족, KEB하나멕시코는 2년 연속 만족이라는 엇갈린 성적표를 받았다. 다만 멕시코 정부의 불만족 판정을 은행의 재무 부실이나 건전성 문제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멕시코 재무부는 EDB가 개별 은행의 재무상태나 유동성, 지급능력을 평가하는 제도가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다. 은행이 생산활동과 국가 경제성장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살펴보는 평가로 신용중개·예금, 금융상품·서비스와 인프라, 서비스 품질, 투자·외환업무, 지속가능금융 등이 평가 대상이다. 따라서 불만족 판정만으로 멕시코신한은행의 자본적정성이나 지급능력 등에 문제가 있다고 볼 근거는 없다. 다만 같은 평가를 받은 KEB하나멕시코은행은 2년 연속 만족 판정을 받은 것과 대조된다. 신한금융의 SEC 제출자료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Banco Shinhan de Mexico 지분 99.99%를 보유하고 있다. ◆카자흐서는 외환규정 위반…당국 “1년 내 반복” 카자흐스탄에서는 구체적인 외환규정 위반에 따른 행정제재가 확인됐다. 카자흐스탄 중앙은행의 공식 제재 자료에 따르면 Shinhan Bank Kazakhstan은 지난 3월12일 비현금 외화 매매 과정에서 관련 절차를 위반해 6120만1585텡게의 행정벌금을 부과받았다. 특히 중앙은행은 해당 행위를 앞선 행정제재 이후 1년 이내 다시 발생한 반복 위반으로 적시했다. 같은 날 외환 관련 보고 위반에도 별도의 벌금이 내려졌다. 신한은행 카자흐스탄법인은 고객 외환거래와 관련한 현지 외환시장 수요·공급원 모니터링 보고서를 불완전하거나 부정확하게 제출해 19만4626텡게의 행정벌금을 받았다. 당국은 이 사안 역시 앞선 행정제재 이후 1년 이내 반복된 위반으로 명시했다. 이틀 전인 3월10일에도 외환거래 통지 및 외환시장 수급보고, 수출입 외환계약 보고, 비현금 외화 매매 절차 등과 관련한 경고 조치가 잇따른 것으로 중앙은행 자료에서 확인됐다. 신한금융의 SEC 제출자료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Shinhan Bank Kazakhstan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신한은행 측은 멕시코법인 평가와 카자흐스탄법인 제재에 대한 질의에 “관련 내용을 부서에 전달해 확인 중이며 현지 확인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시차 때문에 확인에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법인 확대만큼 중요해진 현지 규제 대응 멕시코와 카자흐스탄 사안은 성격이 다르다. 멕시코는 은행의 경제 기여와 금융서비스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정부 평가인 반면 카자흐스탄은 외환규정 위반에 따른 행정제재다. 두 사안을 동일한 규제 위반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두 국가에서 신한은행이 사실상 전부를 소유한 현지법인을 둘러싸고 부정적인 평가와 규정 위반 사례가 각각 확인됐다는 점은 해외법인 관리 측면에서 주목할 대목이다. 국내 금융그룹들이 해외사업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확대하면서 현지 규제에 대응하는 컴플라이언스 역량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특히 외환거래와 금융당국 보고는 은행 영업의 기본적인 규제 준수 영역이다. 신한금융의 SEC 자료를 보면 신한은행은 미국·일본·유럽·캄보디아·카자흐스탄·중국·캐나다·베트남·멕시코·인도네시아 등에 해외 은행 자회사를 두고 있다. 해외 네트워크가 넓어질수록 본사가 관리해야 할 현지 법률과 감독규정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사안의 핵심 역시 해외법인의 재무건전성보다는 현지화와 규제 대응 역량에 있다. 멕시코에서 2년 연속 불만족 평가를 받은 원인이 무엇인지, 카자흐스탄에서 앞선 행정제재 이후 외환규정 위반이 반복된 이유가 무엇인지가 관건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해외사업의 경쟁력은 자산과 이익을 얼마나 늘리느냐뿐 아니라 현지 금융회사로서 규제를 얼마나 충실히 준수하고 감독당국의 요구에 대응하느냐에도 달려 있다”며 “신한은행이 해외 영토 확대와 함께 현지법인 관리·감독 체계를 얼마나 정교하게 다듬을지가 과제로 남는다”고 말했다.
2026-09-03 1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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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국회의원의 전화 한 통, 민원인가 압력인가
국회의원에게 민원은 일상이다. 지역 주민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행정기관에 전달하고, 기업의 규제 애로를 정부에 설명하는 것도 의원의 역할이다. 문제는 어떤 사안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국회의원 시절 코로나19 치료제 임상시험 승인을 추진하던 업체와 관련해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처장에게 신속한 처리를 요청하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보도된 문자에는 식약처 내 담당 부서가 언급됐고, “담당 실무자들이 좀 빠르게 처리할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는 취지의 내용도 포함됐다. 김 후보자는 민원을 전달했을 뿐 부정한 로비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관련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김 후보자가 업체 측으로부터 직접 뇌물을 받은 것은 아니라며 2024년 기소유예 처분을 한 것으로 보도됐다. 법원 판결문에도 해당 행위를 곧바로 부정한 청탁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판단이 담겼다. 현 단계에서 위법성을 단정할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법적 처벌 여부와 공직자로서 적절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핵심은 국회의원의 민원 전달이 어디까지 허용되고, 어느 지점부터 권력의 압력으로 작동하느냐다. 의약품 임상시험은 일반 민원과 다르다. 국민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고 전문적인 과학 판단이 요구된다. 승인 여부와 자료 보완은 정치권이 아니라 규제기관과 전문가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결정할 사안이다. 국회의원이 식약처장에게 직접 ‘빨리 처리해달라’고 요청하면 무게가 달라진다. 의원은 정부를 국정감사하고 예산을 심사하며 법률을 만드는 권한을 가진다. 형식은 민원 전달이라 해도 행정기관에는 압박으로 읽힐 여지가 크다. ‘승인해달라’와 ‘빨리 검토해달라’는 표현도 다르지만 처리 속도 자체가 행정 판단의 일부다. 특정 사건을 먼저 챙기게 하는 순간 공정성 논란은 피하기 어렵다. 물론 신속한 행정은 필요하다. 규제 때문에 기술개발과 사업화가 지연되는 문제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특정 의원의 전화로 속도를 높일 것이 아니라 모든 기업에 동일한 기준과 처리 시한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고쳐야 한다. 그것이 규제 혁신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관행이 기업에 잘못된 신호를 준다는 점이다. 정상 절차와 기술력보다 정치권과의 연결이 문제 해결에 더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기업은 연구개발보다 인맥과 로비에 비용을 쓰게 된다. 정치권 주변에는 내가 의원과 장관을 안다는 브로커가 몰려든다. 대관과 로비 논란이 반복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기업은 정부기관에 직접 설명하기 어렵다고 느끼고 정치인이나 전직 관료를 찾는다. 이들이 고위공직자에게 연락하면 해당 민원을 다른 민원과 똑같이 취급하기 어려워진다. 정치와 행정 사이의 회색지대가 그렇게 생긴다. 현행 청탁금지법과 이해충돌방지법만으로 이 문제를 모두 가려내기도 어렵다. 금품이 오가지 않고 노골적으로 허가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부정청탁 여부가 쉽게 갈리지 않는다. 그래서 접촉의 투명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국회의원이 특정 기업이나 개인의 인허가·제재 관련 민원을 전달할 경우 접촉 사실과 주요 내용을 기록하는 방식이다. 의약품 허가, 금융 인허가, 공정거래 조사, 세무조사, 수사처럼 독립적 판단이 중요한 분야에는 더 엄격한 기준이 요구된다. 국회의원에게도 선은 분명해야 한다. 민원을 전달한다면 ‘규정과 절차에 따라 검토해달라’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적절하다. 특정 기한이나 담당자를 찍어 속도를 요구하면 행정기관에는 다른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번 사건에서 정치후원금 제공 시도와 주변 인물들의 금전 관계를 둘러싼 주장도 나오고 있지만 확인된 사실과 정치권 주장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김 후보자가 업체로부터 직접 뇌물을 받았다고 단정할 근거는 현재 확인된 내용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문에 이번 논란을 개인의 유무죄 공방으로만 끝내서는 곤란하다. 같은 구조가 남아 있으면 또 다른 의원과 기업, 정부기관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논어>에는 군자는 말에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의 가르침이 반복된다. 권력자의 말은 명령이 아니어도 주변의 행동을 바꾼다. 오늘날 국회의원의 문자 한 통, 기관장에게 건 전화 한 통도 다르지 않다. 공직자의 영향력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 ‘한번 봐달라’는 말이 실무자에게는 ‘반드시 챙겨라’는 지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 무게를 먼저 계산해야 한다. 정치인이 기업의 어려움을 듣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민과 기업의 목소리를 행정부에 전달하는 것은 국회의 기능이다. 다만 그 과정이 특정인의 절차를 앞당기는 통로로 변질되는 순간 민원은 특혜 논란으로 바뀐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치권과 행정기관 사이의 접촉을 더 투명하게 만들고 전문 규제기관이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회의원의 전화 한 통은 가볍지 않다. 그 무게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평범한 국민의 민원은 뒤로 밀리고 행정의 공정성도 흔들린다. 권력에 가장 먼저 필요한 덕목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영향력을 절제하는 태도다.
2026-09-03 09: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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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정부는 821조 풀고 한은은 금리 올린다…한국경제 어디로 가나
내년 나라살림 규모가 821조원에 이른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7년도 예산안은 올해보다 12.8%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청년, 국방·미래산업에 대규모 재정을 투입한다는 구상이다. 반도체 호황 등에 힘입어 세수가 크게 늘면서 정부는 미래투자에 속도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보고 있다. 같은 시기 한국은행은 반대 방향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지난달 27일 기준금리를 2.75%에서 3.00%로 올렸다. 수출 호조와 내수 회복으로 성장세가 예상보다 강한 데다 물가가 상당 기간 목표 수준을 웃돌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가계부채와 부동산시장 등 금융안정 위험에도 계속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금리 인상이 불가피할 수 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물론 금리 결정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독립적 권한이다. 대통령이 금리의 방향을 미리 제시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는 발언은 중앙은행 독립성 측면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금 한국경제가 확장재정과 긴축통화를 동시에 요구받는 복잡한 상황에 놓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겉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정부는 821조원의 재정을 풀어 경기를 떠받치고 미래산업에 투자한다. 한국은행은 금리를 올려 소비와 대출, 투자 등 총수요와 신용 팽창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쪽에서는 액셀을 밟고 다른 쪽에서는 브레이크를 밟는 모양새다. 하지만 재정 확대와 금리 인상이 항상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어디에 돈을 쓰느냐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인프라, 전력망, 연구개발, 인재 양성처럼 경제의 공급능력을 높이는 분야에 투자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지출은 단기적으로 수요를 늘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산성과 공급능력을 높여 물가 압력을 완화하고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반대로 현금성 지원과 소비 진작, 효과가 불분명한 지역 사업처럼 즉각적인 수요를 키우는 지출이 대규모로 늘어난다면 한국은행의 긴축 효과와 충돌할 수 있다. 정부가 재정으로 수요를 끌어올리고 중앙은행은 금리로 이를 억제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다. 결국 821조원이라는 총액보다 구성표를 봐야 한다. 정부는 이번 예산을 ‘생산적 재정’이라고 설명한다. 그 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미래투자와 소비성 지출을 명확히 구분해 보여줘야 한다. AI와 반도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모두 생산적 투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정부 지원이 민간투자를 끌어냈는지, 기술 경쟁력을 높였는지,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만들었는지가 기준이 돼야 한다. 더구나 지금 물가 상황도 편하지 않다. 8월 소비자물가는 전년보다 3.1% 올랐다. 휴대전화 요금의 기저효과라는 일회성 요인이 크게 작용했지만 식료품·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도 3.4% 상승했다. 국제유가 상승까지 겹치면서 물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기 어렵다. 세계 금리 환경도 달라지고 있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장기 국채금리가 함께 상승하면서 정부와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이 높아지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와 재정 상황, 국채 공급 확대, 에너지 가격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한국만 저금리 환경으로 쉽게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까지 빠르게 팽창하면 통화정책의 부담이 커질 위험이 있다. 정부 지출 확대가 총수요와 물가를 추가로 자극한다면 한국은행이 높은 금리를 더 오래 유지하거나 추가 인상을 검토해야 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 비용은 가계와 기업이 먼저 체감한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이자가 높아지고 자영업자의 금융비용도 늘어난다. 기업은 설비투자를 할 때 더 높은 자금조달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정부가 재정을 확대해 경기와 투자를 살리려는데 높은 금리가 민간의 투자와 소비를 누르는 역설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지난 6월 말 가계신용이 2019조8000억원에 달한 한국에서는 금리 상승이 가계의 이자 부담과 소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줄 수 있다. 재정이 만들어내는 경기 부양 효과의 상당 부분이 가계의 이자 부담 증가로 상쇄되는 상황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정책 효과가 충돌하지 않도록 조율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정부와 한국은행이 같은 방향으로만 움직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통화정책은 물가와 금융안정을 보고 움직이고, 재정은 성장잠재력과 사회적 필요까지 고려한다. 역할이 다르다. 문제는 서로의 정책 효과를 무력화할 정도로 강도가 엇갈릴 때다. 정부가 할 일은 명확하다. 재정 확대를 선택한다면 공급능력을 늘리는 투자에 더 집중해야 한다. AI·반도체·전력망·국방기술·연구개발처럼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분야에는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다. 대신 단순 소비성 지출과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지원사업은 줄이는 편이 맞다. 기존 사업 구조조정도 함께 가야 한다. 총지출이 12.8% 늘어난 상황에서 정부가 정말 불요불급한 사업을 얼마나 덜어냈는지 국민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새 사업은 늘리고 기존 사업은 그대로 남겨둔다면 ‘생산적 재정’은 결국 확장재정을 포장하는 이름으로 끝날 수 있다. 한국은행 역시 금리 인상의 속도를 세밀하게 조절해야 한다. 7월과 8월 두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올린 만큼 물가와 가계대출, 부동산시장뿐 아니라 자영업과 중소기업의 자금 사정도 함께 살펴볼 시점이다. 또 하나 짚을 것은 대통령의 역할이다. 정부는 재정과 산업정책을 책임지고, 금리는 한국은행이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대통령이 금리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할수록 시장은 중앙은행이 정치적 압력을 받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금리 결정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은행이 물가를 안정시키는 동안 재정정책이 불필요하게 물가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821조원 예산과 3% 기준금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경제 상황에 따라 이런 정책 조합이 필요할 수도 있다. 관건은 821조원이 어디로 가느냐다. 생산성을 높이고 민간투자를 끌어내는 지출이라면 높은 금리의 부담을 이겨내며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자산이 될 수 있다. 반면 소비와 단기 부양에 재정이 집중되면 금리 인상 압력을 키우고 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을 높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경제정책은 액셀과 브레이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둘을 함께 써야 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운전자가 어디로 가려는지 분명히 알고 두 장치를 정교하게 조절하는 일이다. 지금 한국경제가 확인해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다. 821조원을 쓰면서 물가는 잡고 성장잠재력은 높이며 가계와 기업의 금융 부담까지 관리할 수 있느냐다. 확장재정과 긴축통화의 동시 운용이 성공하려면 돈의 규모보다 쓰임새, 금리의 수준보다 정책 간 조율이 먼저다.
2026-09-02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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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상장 안 한 OpenAI도 ETF로 산다…월가, 비상장 AI 투자 장벽 허문다
기업공개(IPO)를 하지 않은 OpenAI와 Anthropic에 개인투자자가 상장지수펀드(ETF)를 통해 투자할 수 있는 길이 미국에서 열렸다. 비상장주식을 직접 사들이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해당 기업의 가치 변동을 추종하는 파생상품을 ETF에 편입하는 구조다. 그동안 일부 기관과 초고액 자산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글로벌 유니콘 투자가 ETF 시장으로 확산할 경우 미국 자산운용업계의 상품 경쟁은 물론 국내 ETF 시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1일 본지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와 Yorkville America의 상품 자료 등을 확인한 결과, 미국 자산운용사 Yorkville America Equities는 지난달 31일 ‘Yorkville America MANGOS Plus Index ETF’를 출시했다. 티커는 ‘FRUT’이며 NYSE Arca와 NYSE Texas에 상장된다. 총보수는 연 0.50%다. 이 상품이 기존 인공지능(AI) ETF와 다른 점은 포트폴리오 안에 비상장 AI 기업인 OpenAI와 Anthropic을 사실상 투자 대상으로 포함했다는 점이다. ◆OpenAI·Anthropic, 주식 대신 파생상품으로 투자 FRUT의 핵심 투자 대상은 Yorkville America가 이른바 ‘MANGO Companies’로 분류한 6개 기업이다. 메타플랫폼스와 엔비디아, 알파벳, SpaceX, OpenAI, Anthropic이다. 여기에 샌디스크와 마벨테크놀로지, 마이크론, 인텔, 델테크놀로지, AMD, 브로드컴 등 AI 반도체·메모리·데이터센터 관련 기업 7곳을 ‘Parabolic 7’으로 묶었다. 전체 순자산의 최소 80%를 이들 ‘MANGO Plus’ 기업에 직·간접적으로 노출하도록 설계했다. 눈에 띄는 것은 OpenAI와 Anthropic을 편입하는 방법이다. 두 회사는 아직 증시에 상장하지 않아 일반 ETF가 주식을 시장에서 사들일 수 없다. Yorkville America는 이 문제를 퍼페추얼 선물(perpetual futures)과 총수익스왑(TRS) 등 파생상품을 활용해 우회했다. SEC에 제출된 투자설명서에 따르면 이 펀드는 OpenAI와 Anthropic에 대한 경제적 노출을 주로 퍼페추얼 선물을 통해 확보할 예정이다. 직접 비상장주식을 보유할 수도 있지만 두 회사 비상장주식 직접 투자 규모는 합산 순자산의 5% 이하로 제한한다. 퍼페추얼 선물은 일반 선물과 달리 만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파생상품이다. 투자자가 실제 OpenAI 주식을 보유하지 않아도 OpenAI의 평가가치 움직임을 반영하도록 계약을 설계하면 가격 상승과 하락에 투자할 수 있다. 상품 출시 자료에는 비상장기업에 대한 노출을 주로 스왑 계약을 통해 확보한다고 명시돼 있다. 지수 자체에는 OpenAI와 Anthropic을 참조하는 퍼페추얼 선물을 활용한다. 쉽게 말해 ‘OpenAI 주식을 가진 ETF’라기보다 ‘OpenAI 기업가치 움직임에 투자하는 ETF’에 가깝다. 이는 개인투자자가 접근하기 어려웠던 비상장 유니콘 투자의 문턱을 낮추는 새로운 시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IPO 기다리지 않는다’…비상장 기업 ETF 시대 열리나 지금까지 개인투자자가 OpenAI나 Anthropic 등 대형 비상장기업에 투자하려면 비상장주식 거래 플랫폼이나 사모펀드, 특수목적기구(SPV) 등을 이용해야 했다. 거래 가능한 물량이 제한적이고 최소 투자금액도 높은 경우가 많아 일반 투자자에게는 사실상 접근이 어려웠다. 그러나 ETF가 비상장기업 가격을 추종하는 파생상품을 담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증권시장에서 주식처럼 ETF 한 주를 매수하는 것만으로도 비상장기업의 가치 상승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가에서는 이미 비상장 AI 기업을 ETF에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SEC에는 최근 Anthropic을 기초로 한 Direxion의 일일 2배 레버리지·인버스 ETF가 신고됐고, Tuttle Capital은 SpaceX와 Anthropic 등을 활용한 커버드콜 ETF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 Harbor ETF Trust도 OpenAI와 Anthropic을 각각 테마로 한 ‘AI Lab Ecosystem ETF’를 등록했다. ETF 시장의 경쟁축이 기존 상장주식에서 ‘누가 먼저 유망 비상장기업의 경제적 가치를 상품화하느냐’로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다만 당초 일부 자료에서 비상장기업으로 분류됐던 SpaceX는 현재 상황이 다르다. SpaceX는 올해 6월 IPO를 마쳤기 때문에 현재 FRUT에서는 상장기업으로 투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상품에서 파생상품을 통한 비상장기업 투자라는 의미가 가장 큰 대상은 OpenAI와 Anthropic이다. ◆트럼프 테마 ETF에서 종합운용사로…12개 상품 추가 예고 FRUT를 출시한 Yorkville America의 행보도 주목된다. 이 회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소셜미디어 플랫폼 Truth Social 브랜드를 활용한 ETF를 운용하며 이름을 알렸다. ‘America First’ 투자철학을 앞세워 미국 방산과 에너지, 미국 대표기업 등에 투자하는 ETF를 잇따라 내놨다. 하지만 최근에는 정치 테마를 넘어 AI와 디지털자산, 거시경제 등으로 상품군을 빠르게 넓히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Yorkville America는 앞으로 수개월 동안 약 12개의 ETF를 추가로 출시할 계획이다. 별도계좌(SMA)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 자산운용사 인수도 추진하고 있으며 거래는 9월 중 마무리될 전망이다. SEC에 제출된 자료에는 MANGOS Plus ETF 이외에도 2배 레버리지와 2배 인버스 MANGOS 상품, 프리미엄 인컴 상품, 차세대 메모리 ETF, 우주산업 ETF 등 다수의 상품이 포함돼 있다. Yorkville America가 단순한 ‘트럼프 테마 운용사’에서 종합 ETF 운용사로 외연을 넓히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가격…OpenAI ‘진짜 가치’ 누가 정하나 비상장기업 ETF가 새로운 투자 기회를 제공하는 만큼 위험도 적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가격 발견이다. 상장기업은 증권시장에서 매 순간 주가가 형성되지만 OpenAI나 Anthropic 같은 비상장기업은 그렇지 않다. 최근 투자유치 가격이나 비상장주식 장외거래, 기업가치 평가모델 등을 토대로 적정 가격을 계산해야 한다. SEC에 제출된 FRUT 투자설명서도 비상장기업 가격 산정에 상당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경고한다. 비상장기업은 상장사보다 정보공개 의무가 적고 재무·경영정보도 제한적이어서 실제 IPO나 인수·합병 시 실현되는 가치와 파생상품에 반영된 가치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동성도 문제다. OpenAI나 Anthropic을 기초로 한 퍼페추얼 선물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다. 거래가 충분하지 않으면 ETF가 원하는 가격에 포지션을 만들거나 청산하기 어렵다. 기초기업의 가치와 파생상품 가격 사이에 괴리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Yorkville America 역시 투자설명서에서 비상장기업을 참조하는 퍼페추얼 선물시장이 기존 상장주식이나 전통적인 선물시장보다 유동성이 낮고 가격 투명성이 떨어지며 변동성이 높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 ◆국내 ETF 시장도 ‘비상장 빅테크’ 압력 커질 듯 국내 자산운용업계에도 이번 상품은 관심 대상이 될 전망이다. 금융위원회는 올해 국내 ETF와 해외 ETF 사이의 상품 규제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제도를 잇따라 손질하고 있다. 지난 4월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개정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일정 요건을 갖춘 우량주를 대상으로 단일종목 레버리지·인버스 상품 도입의 길을 열었다. 국내 투자자의 해외 ETF 쏠림을 줄이고 상품 경쟁력을 높이려는 취지다. 그러나 OpenAI처럼 공식 시장가격이 존재하지 않는 해외 비상장기업을 기초로 한 파생상품을 국내 ETF가 편입하는 문제는 한 단계 더 복잡하다. 기초자산의 적정가격 산출과 공정가치 평가, 파생상품 거래상대방 위험, 유동성 관리, ETF 기준가격(NAV) 산정 등 투자자 보호와 직결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상장기업의 평가가치와 파생상품 시장가격 간 괴리가 커질 경우 ETF 가격이 실제 기업가치를 제대로 반영하는지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식 상품을 국내에 그대로 도입하기보다는 기초자산의 가격 투명성과 파생상품시장 유동성, 공시체계 등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비상장기업 투자와 ETF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는 점은 국내 운용업계에도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ETF의 경쟁력은 낮은 보수와 지수 추종 능력에서 갈렸다. 최근에는 레버리지, 커버드콜, 가상자산 등으로 영역이 확대됐다”며 “이제 월가는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아직 상장하지 않은 미래의 초대형 기업을 얼마나 빨리 투자상품으로 만들 수 있느냐’를 놓고 경쟁을 시작한 모습이다”고 말했다. 이어 “OpenAI와 Anthropic이 상장하기 전에 이미 이들의 기업가치를 사고파는 ETF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ETF 시장의 경계가 다시 한번 넓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2026-09-02 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