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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베트남 국회의장에 '반도체 인재·공급망 육성' 청사진 제시…정부 지원 요청
[경제일보] 삼성전자가 베트남에서 현지 부품·소재 기업의 공급망 편입과 반도체 전문인력 육성을 양대 축으로 한 현지 산업 생태계 강화에 나선다. 단순 생산기지 투자를 넘어 현지 기업의 생산성 혁신과 스마트공장 구축을 지원하고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 인재를 직접 육성하는 방식이다. 특히 올해부터 현지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 ‘삼성 이노베이션 캠퍼스(SIC)’에 반도체 교육과정을 처음 도입하고 관련 교육 거점을 베트남 주요 지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삼성은 이 같은 현지 산업·인재 육성 전략을 베트남 최고위급에 설명하고 국회와 중앙·지방정부에 지속적인 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8일 경제일보가 베트남 당국 자료와 삼성전자 측이 지난 6일 쩐 타인 먼(Trần Thanh Mẫn) 베트남 국회의장의 방한 간담회에서 밝힌 내용을 분석한 결과, 삼성은 베트남 현지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첨단기술 인재 육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쩐 의장은 지난 6일 서울에서 한국 내 비정부기구(NGO)와 한·베 우호단체, 기업·학계 관계자 등 70여명과 만났다. 이 자리에는 나기홍 삼성베트남 법인장도 참석했다. 삼성은 이 자리에서 베트남 현지기업 육성과 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중장기 전략을 설명했다. 베트남이 외국인직접투자(FDI)의 양적 확대에서 질적 고도화로 정책 방향을 전환하는 상황에서 현지 공급망과 인적자본을 함께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 삼성 공급망에 베트남 기업 키운다…2015년부터 현지기업 발굴 삼성이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베트남 부품산업의 경쟁력 강화다. 삼성은 베트남 투자 이후 현지 기업 육성과 기술 이전, 고급 기술인력 양성에 지속적으로 자원과 예산을 투입해 왔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베트남 기업들이 단순한 현지 협력업체에 머무르지 않고 생산성과 기술 경쟁력을 높여 삼성의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삼성은 2015년부터 베트남 산업통상부와 각 지방 산업통상 당국 등과 협력해 잠재력을 갖춘 현지 공급업체를 발굴해 왔다. 부품산업 관련 워크숍을 열어 현지 기업과 삼성의 접점을 만들고 한국의 제조 전문가들이 직접 기업 현장을 찾아 생산공정과 품질관리 등을 개선하는 컨설팅도 진행했다. 스마트공장 구축 지원도 이 같은 현지기업 육성 전략의 하나다. 베트남 기업의 제조 현장에 한국의 생산관리 노하우와 스마트 제조기술을 접목해 생산성과 품질 경쟁력을 높이는 방식이다. 삼성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베트남 기업들이 현지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삼성의 베트남 사업 전략이 완제품 생산 중심에서 현지 부품·소재기업과 기술인력을 함께 육성하는 산업 생태계 구축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베트남 국회 역시 6일 공식자료를 통해 나 법인장이 삼성의 베트남 기업 지원을 소개하면서 이들이 베트남뿐 아니라 삼성의 글로벌 공급망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 ‘삼성 이노베이션 캠퍼스’에 반도체 교육 첫 도입 인재 육성 전략에서는 반도체가 전면에 등장했다. 삼성은 전문대·대학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SIC를 통해 AI와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첨단기술 분야의 실무교육을 제공해 왔다. 올해부터는 여기에 반도체를 추가했다. 특히 교육 수준에 따라 입문·기본·심화 등 3단계로 구성된 반도체 교육과정을 처음 도입했다. 베트남 정부가 2030년까지 반도체 전문인력 5만명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추진하는 데 맞춰 현지 반도체 인력 기반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교육 인프라도 확대한다. 삼성은 2026년부터 베트남 주요 지역을 대상으로 ‘SIC Lab’ 모델을 확산·고도화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SIC Lab은 하노이와 다낭, 박닌, 타이응우옌 등에서 구축·운영되고 있다. 삼성의 올해 SIC 프로그램에 반도체 교육이 처음 포함됐다는 사실은 지난 4월 삼성베트남이 공개한 사업계획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삼성은 AI·IoT·빅데이터와 함께 반도체 교육을 도입하고 올해 약 2200명의 학생에게 첨단기술 교육을 제공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는 것만으로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없는 만큼 현지 전문인력을 선제적으로 양성해 베트남의 반도체 산업 기반을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 대학·대학원까지 연결…산학협력에 1800억동 투자 삼성은 대학과 대학원으로 이어지는 산학협력도 강화한다. 삼성베트남은 2012년부터 베트남 주요 대학 및 기관과 협력해 첨단기술 연구개발(R&D)과 인재 양성을 지원하고 삼성 인재 장학금(STP)을 지급해 왔다. 삼성이 이날 밝힌 관련 누적 투자액은 약 1800억동이다. 초·중·고교생부터 대학생과 대학원생까지 단계별로 이어지는 인재 육성 체계를 구축해 장기적으로 베트남 첨단산업을 뒷받침할 기술인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개별 대학이나 기업 중심의 인재 육성을 넘어 베트남 정부와 대학,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산·학·연 협력 모델을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삼성은 이를 베트남의 지속가능한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고 새로운 산업에 필요한 고급 기술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핵심 축으로 보고 있다. 청소년 단계에서는 ‘솔브 포 투모로우(Solve for Tomorrow)’가 가교 역할을 한다. 2019년 베트남에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중·고등학생들이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지식을 활용해 사회문제 해결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방식이다. 올해는 베트남 국가혁신센터(NIC)와 처음 협력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은 이를 전국 수천개 학교로 확산시켜 STEM 교육과 과학기술·혁신·디지털 전환을 촉진한다는 계획이다. ◆ 저소득층부터 반도체 인재까지…‘인재 파이프라인’ 구축 삼성의 베트남 인재 육성 전략은 취약계층 청소년까지 포괄한다. 대표적인 사업이 ‘삼성 희망학교’다. 삼성 사업장과 협력회사 인근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방과 후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2013년 박닌 지역에서 시작해 현재 박닌 2곳과 타이응우옌, 랑선 등 총 4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누적 5000명 이상의 학생이 방과 후 교육 기회를 제공받았다. 삼성의 베트남 사회공헌 전략을 연결하면 저소득층 아동의 교육 지원에서 중·고교 STEM 교육, 대학생 AI·반도체 교육, 대학·대학원 R&D 지원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사회공헌과 산업인재 육성을 분리하기보다 장기적인 ‘인재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 삼성, 베트남 국회·정부에 “지속적인 지원 필요” 삼성은 이번 방한을 계기로 베트남 국회와 중앙·지방정부에도 협력을 요청했다. 베트남이 새로운 성장 단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미래 세대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삼성의 사회공헌 및 인재 육성 사업이 안정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특히 각 교육·사회공헌 프로그램의 수혜자를 발굴하고 지역 현장에서 사업을 확대하려면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정부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삼성전자 측은 “베트남의 발전이 삼성의 발전이고 삼성의 성공이 베트남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앞으로도 가장 신뢰받는 파트너로서 함께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쩐 의장도 한국 기업의 베트남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반도체와 전략적 공급망, 재생·청정에너지, 디지털 전환, AI 등을 양국이 협력을 확대해야 할 분야로 꼽았다. 베트남 국회는 외국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제도와 법률을 지속적으로 정비하고 한국 기업들이 현지에서 장기적으로 투자를 확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방침이다. 삼성이 제시한 공급망 현지화와 반도체 인재 육성 구상이 베트남의 산업 고도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삼성의 베트남 전략도 ‘생산기지’에서 ‘산업 생태계 공동 구축’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모습이다.
2026-09-08 08: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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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 20조 선납 제안…전력망 책임은 누구 몫인가
[경제일보] 수백조원을 들여 반도체 공장을 지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첨단 팹은 거대한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반도체 경쟁이 기술과 자본의 싸움인 동시에 전력망 경쟁인 이유다. 하지만 그 전력망을 깔 돈이 부족해지자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5년치 전기요금을 먼저 내달라는 카드를 꺼냈다. 한전이 제안한 규모는 삼성전자 20조원, SK하이닉스 5조원이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낸 전기요금 약 4조1000억원과 9000억원을 기준으로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치를 계산했다. 선납금은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 등에 투입하고, 기업에는 국고채 금리보다 높은 수준의 이자를 제공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다만 참여 여부와 금리, 금액과 기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한전도 ‘제안’ 단계임을 분명히 했다. 전기요금 선납제 자체도 새로운 제도는 아니다. 지난해 선납액은 약 3900억원이었고, 대부분 공공기관이 이용했다. 기업이 미래에 낼 전기료를 먼저 내고 한전은 그 돈을 필요한 설비에 투자하며 기업은 이자를 받는 구조라면 금융거래로서 성립할 여지는 있다. 적기에 전력망이 완공되지 못해 수십조원짜리 공장이 서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이해관계가 있다. 문제는 규모와 목적이다. 3900억원 수준이던 선납제도를 단숨에 25조원짜리 전력망 조달수단으로 바꾸면 제도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 25조원은 한전 연간 매출의 4분의 1에 가까운 돈이다. 전기요금 납부 편의를 위한 제도가 사실상 국가 핵심 인프라를 조달하는 금융수단으로 변하는 셈이다. 한전이 이 방안을 고민하는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기 가동과 호남 클러스터 건설 등에 따른 추가 전력수요는 20.6GW로 추산되고, AI 데이터센터까지 더하면 필요한 전력이 더 늘어난다. 한전은 당초 2038년까지 전력망에 72조8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었지만 투자 수요는 더 커졌다. 반면 한전의 연결 기준 부채는 지난 6월 말 210조7000억원에 달한다. 올해 상반기에만 이자비용으로 2조1000억원을 썼다. 공기업의 재무제표와 국가 산업정책의 시간표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삼성과 하이닉스가 쓰는 전기니 두 회사가 망을 깔면 된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된다. 전력망은 공장 안의 생산설비가 아니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산업단지와 도시로 실어 나르는 국가 기간시설이다. 지난 7월 시행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도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 전기를 공급하는 주요 송·변전설비를 ‘국가기간 전력망 설비’로 규정하고 있다. 법의 목적부터 전기에너지의 안정적 공급과 국가 주요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력망을 조기에 확충하는 데 있다. 국가가 스스로 ‘기간망’이라고 이름 붙인 인프라의 책임을 특정 기업의 현금 여력에 의존해 해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반대편 원칙도 분명하다. 막대한 전기를 사용하는 대기업이 자신 때문에 추가로 발생하는 인프라 비용을 한 푼도 부담하지 않겠다는 논리 역시 설득력이 없다. 10GW, 20GW의 새로운 수요가 생기면 발전설비뿐 아니라 송전선과 변전소, 계통보강 비용이 따라온다. 그 비용을 일반 가정과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전기 소비자에게 똑같이 떠넘기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제5편에서 개인이나 소수에게 맡길 수 없는 공공사업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을 국가의 책무로 봤다. 동시에 도로와 교량 같은 시설의 비용은 이용자에게 받는 통행료로 충당할 수 있다고 했다. 250년 전에도 공공 인프라의 책임과 이용자의 비용부담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었던 셈이다. 지금 필요한 것도 ‘국가가 전부 낼 것이냐, 기업이 전부 낼 것이냐’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누가 어느 비용을 왜 부담하는지에 대한 원칙이다. 국가 전체가 이용하는 기간 송전망과 장거리 간선망은 국가와 한전이 책임지는 것이 맞다. 반면 특정 산업단지나 초대형 수요처 때문에 추가로 필요한 전용선로와 변전소, 접속설비에는 원인자·수익자 부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여러 기업과 지역이 함께 혜택을 보는 계통보강 비용이라면 수익 범위에 따라 분담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 선이 먼저 그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한전이 재무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현금이 많은 기업을 찾아가 몇 년 뒤 받을 전기료를 미리 달라고 하는 방식이 관행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오늘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지만 내일은 데이터센터, 배터리, 철강·석유화학 기업이 대상이 될 수 있다. 국가 인프라 투자비가 전력 수요자의 현금 보유액이나 협상력에 따라 결정되는 구조는 산업정책도, 요금정책도 아니다. 더구나 한전은 독점적인 송·배전망 사업자다. 기업 입장에서는 “싫으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으로 거래의 자발성이 완전히 확보됐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새 공장에 제때 전기를 공급받아야 하는 기업과 그 전력을 공급할 사실상의 유일한 사업자가 20조원 규모의 선납을 협상한다면 일반적인 금융거래보다 훨씬 엄격한 절차와 기준이 필요하다. 따라서 선납제를 확대하려면 세 가지 안전장치가 먼저다. 선납금은 해당 전력망 건설에만 쓰도록 별도 관리해야 한다. 기업별 부담액은 전력 사용량과 추가 계통투자 비용 등에 따른 객관적 산식으로 정하고 동일한 조건의 대규모 수요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공사가 늦어지거나 전력 공급 일정이 어긋났을 때 선납기업이 부담할 위험과 보상 원칙도 계약 단계에서 명확히 해야 한다. 한전의 재무문제와 전력망 투자 문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선납금으로 한전채 발행을 줄이는 효과가 생길 수는 있다. 하지만 과거 전기요금 정책과 연료비 급등으로 쌓인 210조원대 부채를 반도체 기업의 미래 전기료로 메우는 것이 목적이 돼서는 곤란하다. 반도체 전력망에 들어갈 돈과 한전의 누적 재무부담을 한 통장에 넣는 순간 비용 부담의 원칙은 흐려진다. 정부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정부는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용인과 호남에 대규모 클러스터를 추진하고 있다. 기업에는 수십조원, 수백조원 규모의 투자를 주문하면서 정작 공장을 돌릴 전력망은 한전과 기업이 돈을 마련해 알아서 깔라는 식이어서는 산업정책이라 하기 어렵다. 공장 유치는 국가전략이고 송전망은 기업 사정이라는 식의 역할 분담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의 속도는 전력망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 주민 수용성 문제와 송전선로 인허가를 풀고 장기 전력수요를 예측해 기간망을 미리 확보하는 일은 개별 기업이 대신할 수 없는 국가의 몫이다. 올해 시행된 국가기간전력망법이 5년마다 30년 단위의 장기 전망을 담은 전력망 기본계획을 만들도록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혜자가 되는 전력설비 비용을 일정 부분 부담하는 방안은 검토할 수 있다. 조건이 합리적이고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면 전기료 선납도 하나의 재원조달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순서는 분명해야 한다. 먼저 국가가 어떤 전력망을 언제까지 책임질 것인지 정하고, 그 다음 특정 수요자가 추가로 발생시킨 비용의 몫을 투명하게 계산해야 한다. 한전의 재무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 순서를 거꾸로 세워서는 안 된다. 전기는 기업이 돈을 내고 사는 상품이지만, 그 전기가 흐르는 국가기간망은 대한민국 산업의 기반이다. 상품의 값을 기업에 받을 수는 있다. 더 많이 쓰는 기업에 더 많은 인프라 비용을 부담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가 제때 준비하지 못한 기간망의 책임까지 ‘5년치 전기료 선납’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에 청구해서는 안 된다. 25조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보다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은 그것이다. “한국의 전력망은 누구의 책임인가.”
2026-09-04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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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9조 '슈퍼예산' 국회로…성장 투자냐, 재정 재량 확대냐
[경제일보] 정부가 820조9000억원 규모의 2027년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국회 심사의 막이 오른다. 올해 본예산보다 93조원, 12.8% 늘어난 사상 최대 규모다. 총지출이 800조원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반도체 호황으로 총수입이 200조원 넘게 늘어나는 특수한 세수 여건을 바탕으로 인공지능(AI), 반도체, 미래산업, 청년, 지방, 민생 분야에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겠다는 게 정부 구상이다. 관전 포인트는 분명하다. 정부는 이번 예산안을 잠재성장률 반등과 양극화 완화를 위한 ‘성장 투자 예산’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국회 심사 과정에서는 162조원 규모 미래대응기금의 운용 방식, 100조원대 지출 구조조정의 타당성,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교부세 개편의 파장, 2030년 총지출 1000조원 시대의 재정 지속 가능성이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정부는 1일 청와대에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2027년 예산안’과 ‘2026~2030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심의·의결했다. 내년도 총수입은 880조8000억원으로 올해보다 205조6000억원, 30.4%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세수입은 584조4000억원으로 49.8% 늘어날 것으로 봤다. 법인세와 소득세 증가,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입 개선이 수입 확대의 핵심 배경이다. 수입 증가 폭이 지출 증가 폭을 웃돌면서 재정지표는 일시적으로 개선될 전망이다.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이 올해 본예산 기준 3.9%에서 내년 0.1%로 낮아지고, 국가채무비율도 51.6%에서 48.3%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확장 재정 기조가 이어지면서 2030년 총지출은 1005조2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첫 쟁점은 162조 미래대응기금 가장 큰 쟁점은 미래대응기금이다. 정부는 최근 10년 내국세 증가 추세선을 웃도는 추가세수를 기금에 적립해 경기 변동과 세수 급감에 대비하는 ‘재정 댐’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내년 추가세수 162조3000억원을 기금에 적립하고, 이 가운데 45조4000억원은 청년, 성장동력, 지방, 교육·인재 등 4대 분야에 투입한다. 또 12조5000억원은 국채 신규 발행 물량을 줄이는 데 활용하고, 104조4000억원은 여유자금으로 비축한다. 정부는 세수가 급격히 줄거나 경기 대응이 필요할 때 추가경정예산 편성 없이 기금 변경으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국회 심사에서는 기금 운용의 투명성과 국회 통제 문제가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금은 일반 예산보다 행정부 재량이 크다. 정부가 미래대응기금의 주요 항목 지출 금액을 일정 범위 안에서 대통령령으로 변경할 수 있도록 국가재정법 개정을 추진하는 점도 논란거리다. 야당과 재정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세수 호황기에 여윳돈이 생기면 우선 국가채무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AI·반도체에 21조원…미래산업 투자 확대 정부는 잠재성장률 반등을 위해 3대 메가프로젝트와 AI 분야에 21조3000억원을 배정했다. 올해 10조8000억원보다 97.2% 늘어난 규모다. 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 등 국가 전략 프로젝트를 집중 지원해 한국 경제의 차세대 성장축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2조6000억원 규모의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회계’를 신설한다. 용인·평택 반도체 생산기지 조기 가동을 위한 기반시설 투자에 1000억원을 배정하고,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신속한 착공을 위해 1조5000억원을 지원한다. 반도체 산업단지 전력 공급을 위한 지중 송전망과 고압 변전소 등 전력 인프라에도 881억원을 투입한다. 서남권·충청권 산업단지 용수 공급과 수자원시설 확충에는 1277억원이 배정됐다. AI 분야에는 4조7000억원을 투입한다. 정부는 그래픽처리장치(GPU) 1만 장과 데이터, 인재를 집중 지원해 독자 AI 모델 고도화에 나선다. 이를 기반으로 ‘모두의 AI’를 개발해 대국민 서비스에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미래 성장엔진 확충 예산은 올해 51조2000억원에서 내년 62조8000억원으로 늘어난다. 정부는 우주항공, 바이오, 모빌리티, 원자력, 방산 등 10대 전략기술 분야에 15조원을 투입하고, 소형모듈원자로(SMR), 핵융합, 양자, 우주항공, 첨단바이오 등 미래선도기술 분야 연구 기반도 강화한다. 재생에너지 보급 예산은 9000억원에서 1조8000억원으로 두 배 늘어난다. ◆청년·지방 예산 급증…양극화 대응 전면에 청년 지원 예산은 올해 28조2000억원에서 내년 43조3000억원으로 53.5% 확대된다. 교육, 일자리, 자산, 주거, 혼인·출산·양육, 생활·문화 등 성장단계별 종합 지원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첨단산업 인재양성 부트캠프를 두 배로 늘리고, 대학생 6만 명에게 졸업 전 현장 경험을 제공하는 인턴학기제를 추진한다. K-뉴딜아카데미 등 첨단 분야 직업훈련도 확대한다. 창업안심보험을 신설해 취업 초기 청년에게 보험료의 최대 80%를 지원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자산 형성 지원도 강화된다. 출생부터 18세까지 연 최대 120만원을 지원하는 ‘우리아이자립펀드’를 신설하고, 청년미래적금은 소득요건을 없애 모든 청년이 가입할 수 있도록 개편한다. 주거 분야에서는 청년 공공임대주택 10만6000호를 공급하고, 비아파트 구매 시 월세 수준으로 내 집 마련이 가능한 청년미래보금자리론을 도입한다. 혼인지원금, 출산지원금, 아동기본수당을 묶은 저출생 대응 3종 패키지도 신설한다. 지역균형발전 예산도 대폭 늘어난다. 국토 대전환과 지방주도 성장 예산은 올해 16조1000억원에서 내년 33조원으로 확대된다. 정부는 5극3특 성장엔진특별보조금을 신설해 앵커기업이 지방에 대규모 투자를 할 경우 설비투자액의 최대 50%를 지원할 계획이다. 지방 의료공백 해소를 위한 지역 필수의료 지원 예산은 8000억원에서 1조3000억원으로 늘어난다. 2027년 신입생부터 지방 국립대에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소상공인과 취약계층 민생 안정 예산은 10조원에서 15조4000억원으로 늘고, 코로나 피해 소상공인의 장기연체 채무 특별조정에는 7000억원이 투입된다. ◆지출 구조조정 107조…교부금 개편 충돌 가능성 정부는 대규모 확장 재정과 함께 107조6000억원 규모의 지출 구조조정도 병행한다. 소규모·관행적 사업과 불요불급한 경상비, 저성과·유사·중복 사업을 줄여 38조6000억원을 절감하고, 의무지출 조정으로 69조원을 줄인다는 계획이다. 국회 심사에서 특히 논란이 예상되는 부분은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교부세 개편이다. 정부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내국세 연동제 폐지로 32조5000억원을 줄이고, 교부세 산정 방식 개편으로 30조5000억원을 절감한다는 방침이다. 저출생으로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교육재정 구조를 조정해야 한다는 게 정부 논리다. 그러나 교육계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반발이 나올 수 있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지역 교육재정의 핵심 재원이고, 교부세는 지방정부의 재정 운영과 직결된다. 정부가 지방 투자 예산을 대폭 늘리면서도 기존 지방·교육 재정 배분 방식을 바꾸겠다고 한 만큼, 국회에서는 재원 배분의 형평성과 지역별 영향이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국회 심사 본격화…12월 2일 법정 시한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회계연도 개시 120일 전인 9월 3일까지 국회에 제출한다. 국회는 상임위원회 예비심사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심사, 본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예산안을 확정한다. 국회가 예산안을 의결해야 하는 법정 시한은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인 12월 2일이다. 이번 예산안은 반도체 호황이라는 특수한 세수 여건을 바탕으로 성장과 분배, 미래 투자와 재정 안정성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 정부는 적극 재정을 통해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양극화를 완화하겠다는 입장이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내년도 적극적인 재정 투자를 통해 V자형 경제 회복을 보다 공고히 견인하고, 성장주도형 재정 선순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반면 국회에서는 ‘슈퍼예산’의 방향과 재정 운용 방식에 대한 검증이 불가피하다. 820조9000억원이라는 지출 규모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돈이 어디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이느냐다. AI·반도체·청년·지방 투자처럼 미래 성장과 사회 구조 개선에 필요한 예산은 힘을 받을 수 있지만, 미래대응기금의 행정부 재량 확대와 지방교육재정·교부세 개편은 치열한 공방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2027년도 예산안 심사는 정부가 내세운 ‘성장 투자’ 논리가 국회에서 얼마나 설득력을 얻느냐의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반도체 호황이 만들어낸 일시적 세수 여력을 미래 성장의 마중물로 쓸 것인지, 재정 건전성과 국회 통제를 우선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정기국회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2026-09-01 1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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