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반도체 공장 하나를 짓는 데 필요한 것은 돈과 기술만이 아니다. 생산장비를 들여올 수 있어야 하고 원자재도 제때 확보해야 한다. 어느 한쪽이 막히면 수조원을 투자한 공장도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세계 각국이 반도체와 핵심 광물의 수출을 통제하면서 기업의 생산과 투자 결정에 정치가 개입하는 일이 잦아졌다. 공급망은 더 이상 기업의 구매 부서에만 맡겨둘 문제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어디까지 준비하고 있는지 따져볼 때다.
최근 SK하이닉스의 미국 투자 구상을 둘러싼 논란은 이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지난 3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SK하이닉스 측이 중국 다롄 공장에 미국산 반도체 장비를 설치하기 위해 수출 허가를 추진하고 있지만 미국 상무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사업에서 확보할 수익이 미국 내 신규 투자 재원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규제 문제가 투자 계획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내용이다. 다만 미국 투자 규모와 입지는 확정되지 않았고, 회사는 다롄 공장의 기존 생산공간 활용이 생산능력 확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투자를 확대하려 하면서도 중국에 대한 첨단기술 이전은 제한하고 있다. 한국 기업은 미국과 중국 양쪽에 생산시설과 고객사를 두고 있다. 어느 한 시장을 포기하기도, 양국의 규제를 모두 피하기도 쉽지 않다. 기업의 투자 판단에 외교와 안보 문제가 깊숙이 들어온 셈이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도 같은 문제를 드러낸다. 희토류는 전기차 모터와 첨단 전자제품, 방위산업 등에 쓰인다. 광물이 매장돼 있다고 곧바로 산업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채굴한 광물을 분리·정제하고 필요한 소재로 가공하는 시설과 기술까지 갖춰야 한다. 중국에 대한 의존을 낮추려면 광산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다른 나라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5일 파이낸셜타임스는 프랑스 화학기업 솔베이가 호주 기업과 브라질산 희토류의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했다고 보도했다. 광산 개발과 프랑스 내 정제시설을 연결하고 일부 가공기술 협력까지 추진하는 내용이다. 공급망 다변화가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에 머물지 않고 구매계약과 설비투자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급망안정화법을 시행하고 경제안보품목 관리와 공급망안정화기금 등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정부 차원의 조정기구도 운영하고 있다. 문제는 제도의 유무가 아니다. 실제 수출 제한이나 물류 차질이 발생했을 때 대체 물량을 얼마나 빨리 확보하고 기업의 생산 중단을 막을 수 있느냐다. 공급망 관리의 성과는 법률과 계획의 숫자가 아니라 위기 대응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품목별 위험을 구체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특정 국가에서 대부분을 수입하는 원료가 무엇인지, 국내 재고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다른 공급처로 전환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파악해야 한다. 정부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도 부처별로 따로 관리한다면 위기 때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이미 구축한 공급망 관리체계의 정보 공유와 의사결정 절차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
자원 외교도 실적을 따져야 한다. 해외 광산 지분을 확보했다고 안정적인 공급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채굴 이후 정제와 가공, 운송, 국내 반입까지 이어져야 비로소 산업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다. 호주와 중남미, 아프리카 등 자원 보유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되 실제 구매 물량과 계약 기간, 공급 비용을 함께 살펴야 한다. 정부는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초기 투자 위험을 합리적으로 분담하고, 기업은 사업성과 경제성을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 과거 해외 자원개발에서 나타난 부실투자의 교훈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술 경쟁력 역시 공급망 안정의 중요한 조건이다. 첨단 반도체와 배터리, 소재·장비 분야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기술을 보유할수록 기업의 협상력은 높아진다. 그러나 기술력만으로 원료 부족이나 수출통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연구개발과 인력 양성, 핵심 소재의 확보를 함께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정부가 할 일은 기업에 초격차 기술을 주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 투자를 지속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산업정책의 우선순위가 크게 흔들리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반도체 공장과 광물 정제시설은 단기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기술 개발과 전문인력 양성에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세제 지원과 연구개발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중요한 까닭이다. 기업이 수년 뒤의 투자 조건조차 가늠하기 어렵다면 국가 전략산업의 경쟁력을 안정적으로 키우기 힘들다.
정부 부처의 역할도 명확해야 한다. 산업정책과 통상협상, 자원 외교, 기술 보호는 서로 연결돼 있다. 그렇다고 새로운 조직을 하나 더 만든다고 조정 능력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기존 공급망안정화위원회와 관계 부처가 어떤 정보를 공유하고, 위험이 발생하면 누가 대응을 총괄하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국회 역시 예산을 편성하고 법률을 만드는 데 그치지 말고 실제 집행 성과를 점검해야 한다.
<손자병법> ‘구변편’에는 ‘상대가 오지 않을 것만 믿지 말고, 내가 대비돼 있음을 믿으라(無恃其不來 恃吾有以待也)’는 구절이 있다. 공급망 관리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강대국이 수출통제를 하지 않기를 바라거나 국제정세가 안정되기만 기다려서는 산업을 지킬 수 없다. 평상시에 대체 공급선을 확보하고 기술과 생산 기반을 갖춰야 위기가 닥쳤을 때 선택할 여지가 생긴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한국이 단기간에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 경쟁이 국내 산업에 미칠 충격을 줄이는 일은 우리 몫이다. 정부는 공급망 정책이 현장에서 얼마나 작동하는지 검증하고, 기업은 조달과 생산 구조의 취약한 부분을 점검해야 한다. 자원 외교와 기술 개발에도 지속적인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
경제안보는 위기가 터진 뒤 대책을 발표하는 능력이 아니라 위기가 닥쳐도 산업이 멈추지 않게 하는 능력이다. 정부의 책임은 바로 그 준비를 결과로 입증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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