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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도입만으론 성과 없다"…삼성SDS, 오픈AI·엔트로픽과 AX 해법 제시
[경제일보] 삼성SDS가 인공지능(AI)을 단순히 업무 효율화에 활용하는 것을 넘어 업무 프로세스 자체를 바꾸는 'AX' 전환에 속도를 낸다. AI 데이터센터와 플랫폼을 기반으로 기업의 AI 도입부터 운영까지 지원하고, 제조 현장에서는 로봇과 설비를 통합하는 피지컬 AI로 사업 영역을 확대한다. 8일 삼성SDS는 서울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 엔터프라이즈 AX 콘퍼런스 '리얼 서밋 2026'을 열고 삼성SDS의 '다차원 AI 풀스택' 전략을 기반으로 AI 도입과 실제 비즈니스 성과 창출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 전략과 로드맵을 공개했다. 이날 삼성SDS는 기업들의 AI 활용이 늘고 있지만 실제 성과로 이어지는 비율은 낮다고 진단했다. 삼성SDS가 인용한 맥킨지 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88%가 최소 한 개 이상의 업무에 AI를 활용하고 있지만, AI가 영업이익에 영향을 줬다고 답한 기업은 39%, 영업이익의 5% 이상에 기여했다고 답한 기업은 6%에 불과했다. 이에 삼성SDS는 AI 성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기존 업무에 AI를 덧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업무 프로세스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SDS는 이를 위해 자체적으로 7개 메가 프로세스에 AX를 적용하는 '클라이언트 제로' 전략을 추진하고 있으며, 올해 말까지 약 200명의 AX 전문 인력을 양성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AI 인프라 확대도 추진한다. 삼성SDS는 국내 최초 AI 전용 데이터센터인 동탄센터를 기반으로 기업들의 AX를 지원하고 있으며, 오는 2028년 국가 AI 컴퓨팅센터와 오는 2029년 구미센터 구축을 통해 AI 인프라 역량을 확대할 방침이다. 글로벌 AI 기업과의 협력도 강화한다. 오픈AI, 앤트로픽, 구글 등과 협력을 확대하고 AI 인프라부터 플랫폼, 컨설팅·개발·구축·운영까지 제공하는 '다차원 AI 풀스택'을 통해 기업별 AX 수요에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삼성SDS는 AX를 디지털 영역에서 제조 현장으로 확대한다. 지난 25년간 반도체·2차전지·바이오·자동차·소재·부품·식음료 등 430여개 기업의 제조 자동화를 지원하며 축적한 데이터와 경험을 피지컬 AI 사업에 활용한다. 삼성SDS는 실제 제조 환경에서 로봇 기반 자동화 기술을 검증하고 있으며, 오는 2027년 생산설비와 로봇을 하나로 묶어 운영하는 '로봇 오케스트레이션 플랫폼'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준희 삼성SDS 대표이사는 "AX는 단순히 AI를 도입해서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로, AI를 중심으로 업무 방식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날 연사로 참가한 김경훈 오픈AI 한국 총괄대표는 기업의 AI 전환이 단순한 도입을 넘어 실제 업무 방식과 사업 성과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전기가 공장에 처음 도입됐을 당시 동력원만 바꾸는 데 그친 공장보다 기계 배치와 작업 순서를 새롭게 설계한 공장에서 생산성 향상이 본격화됐다는 사례를 예시로 들며 지금 AI의 발전 상황과 비교했다. 김 대표는 오픈AI의 '엔터프라이즈 시그널스' 보고서를 인용해 AI를 깊게 활용하는 상위 10% 기업과 중간 수준 기업 간 격차가 올해 1월 2.6배에서 6월 8.6배로 확대됐으며, 제조업에서도 이 격차가 5.3배에 달했다고 공개했다. 그는 기업 내부 데이터와 업무 시스템을 AI와 연결해 업무 맥락을 제공하고, 가장 중요한 업무를 선정해 처음부터 끝까지 AI를 중심으로 재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AI가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수준을 넘어 자료 검색과 시스템 확인, 결과물 작성 등 여러 단계를 직접 수행하는 '에이전트'로 발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픈AI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업 고객이 생성한 전체 출력 토큰 가운데 코딩 에이전트 '코덱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64%까지 증가하며 법무·영업·채용·마케팅 등 다양한 업무에서도 AI에게 실제 일을 맡기는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AI 활용의 최종 목표는 토큰 사용량이나 도입률이 아니라 실제 사업 성과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조기업이 AI를 활용해 견적 작성 시간을 최대 6시간에서 20분으로 줄이고 연간 3000만 달러(약 400억원)의 매출 총이익 증가를 기대하는 사례 등을 소개했다. 김경훈 대표는 "AI가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연구, 개발, 제조, 관리, 영업, 마케팅 등 여러 분야에서 여러분의 발전을 크게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100년 전 공장을 어떻게 바꾸느냐가 그 회사의 미래를 결정한 것처럼 지금 우리도 이 AI를 어떻게 쓸 것인가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기영 엔트로픽 코리아 대표는 AI를 활용한 기업의 변화가 직원 생산성 향상을 넘어 업무 프로세스와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바꾸는 방향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 대표는 기업의 AI 전환을 직원 생산성 향상, 기존 업무 프로세스·워크플로우 개선, AI 네이티브 제품 및 비즈니스 모델 구축 등 3단계로 구분하며, 궁극적으로는 AI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내는 단계까지 나아갈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 사례로는 글로벌 자동차 기업의 도장 공정 문제 해결 사례를 소개했다. 수년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에 관련 데이터를 연결하고 AI의 추론 기능을 활용한 결과 10분 만에 해결책을 도출했다고 설명하며, 향후에는 AI 모델의 발전과 함께 기업의 문제 해결 방식 자체가 달라질 것으로 분석했다. 엔트로픽 내부의 개발 방식도 AI를 통한 업무 전환 사례로 제시했다. 한 명의 엔지니어가 주말 동안 AI를 활용해 초기 프로토타입을 만든 뒤 3명이 8주 동안 베타 제품을 개발했으며, 이후 사용자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반영해 48시간 만에 62개 기능을 개선했다고 설명했다. 현재도 피드백을 받은 기능을 24시간 안에 반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최 대표는 이 같은 변화가 기업의 조직 규모와 제품 개발 방식까지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많은 인력과 긴 개발 기간이 필요했던 작업도 AI 에이전트를 활용하면 소수 인원으로 빠르게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AX를 위해서는 명확한 비즈니스 목표와 성과 지표를 먼저 정하고, 도메인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AI를 반복적으로 활용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최기영 대표는 "과거에는 팀 사이즈에서 인원수가 소프트웨어 개발 경쟁력이 됐지만 이제는 소수의 인원이 AI를 통해 개발을 빠르게 해 나갈 수 있다"며 "적은 인원을 갖고도 규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AI 내부의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할 수 있는 성공적인 AX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에서 삼성SDS와 오픈AI, 엔트로픽은 기업의 AI 전환이 단순한 기술 도입이나 개별 업무의 효율화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데 공통된 메시지를 내놨다. AI를 기존 업무에 추가하는 것을 넘어 데이터와 시스템을 연결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재설계하는 동시에 AI 에이전트에게 실제 업무를 맡기고 이를 매출과 생산성 등 구체적인 사업 성과로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업의 AI 경쟁력도 어떤 모델을 도입했느냐를 넘어 AI를 실제 업무와 조직에 얼마나 깊게 내재화하느냐에 따라 갈릴 전망이다. 이준희 삼성SDS 대표이사는 "진정한 AI 풀스택이라면 AX 실행을 돕기 위한 컨설팅은 물론 개발과 구축 그리고 운영에 대한 전문적 역량을 반드시 제공해야 하고, 이런 역량은 고객의 업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뒷받침돼야 한다"며 "삼성SDS는 AI 인프라 플랫폼 솔루션에 걸친 모든 영역에서 글로벌 최고 수준의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6-09-08 11: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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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컴퓨팅의 다음 무대…Arm, '에이전틱·엣지·피지컬 AI' 정조준
[경제일보] 인공지능(AI) 컴퓨팅 시장의 무게중심이 데이터센터에서 엣지와 물리적 세계로 확장되면서 Arm이 에이전틱 AI와 피지컬 AI를 새로운 성장축으로 제시했다. AI 에이전트가 PC와 스마트폰을 넘어 자동차·로봇 등 다양한 기기에서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직접 행동하는 시대가 다가오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저전력·고성능 컴퓨팅 생태계 선점에 나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7일 Arm은 온라인 기자간담회를 통해 클라우드 AI, 엣지 AI, 피지컬 AI 등에 대한 전략을 공개했다. 아미 바다니 Arm 최고마케팅책임자(CMO)는 이날 "에이전틱 워크로드가 데이터센터를 넘어서고 있다"며 "앞으로 더 많은 에이전트가 엣지에서 실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Arm은 AI 에이전트가 클라우드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과 PC, 자동차, 로봇 등 엣지 기기로 확산되면서 컴퓨팅 수요가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에이전트가 단순히 정보를 생성하는 것을 넘어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판단한 뒤 실제 행동까지 수행하는 형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Arm은 자체 생태계를 통해 자사의 전략을 확장하고 있다. Arm에 따르면 현재 Arm 아키텍처를 사용하는 개발자는 약 2200만명으로, Arm은 개발자 생태계를 기반으로 AI 컴퓨팅 수요가 엣지와 다양한 디바이스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아미 바다니 CMO는 "궁극적으로 에이전트가 물리 세상에서 주변을 인식하고 조치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 컴퓨팅 워크로드가 어디로 가는가 생각했을 때 그 목적지들을 보면 Arm이 모두 지원할 수 있는 목적지"라고 강조했다. Arm은 모바일과 엣지 환경에서 그래픽 처리 방식도 AI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I가 그래픽 제작 과정에 직접 활용되면서 GPU의 역할도 기존 그래픽 연산 중심에서 AI 연산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Arm은 신경망 가속기와 모션 엔진을 GPU 셰이더에 통합하는 방식으로 그래픽과 AI 연산의 결합을 강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해상도로 렌더링한 이미지를 AI를 활용해 고해상도로 끌어올리는 방식 등 모바일 기기에서도 고품질 그래픽을 구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Arm은 새롭게 설계한 7세대 아키텍처를 통해 기존 데스크톱 환경에서만 가능했던 고급 그래픽 기능을 모바일에서도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과거에는 모바일 게임 개발자가 고급 그래픽 기술을 적용하기 위해 성능과 전력 사이에서 상당한 제약을 감수해야 했지만, AI와 GPU 기능이 결합되면서 이런 제약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Arm은 모바일 환경에서도 최대 1000개의 레이트레이싱 적용이 가능해졌다고 강조했다. Arm에 따르면 불과 한 세대 만에 동일한 전력에서 모든 기능의 성능이 4배 이상 향상됐고, AI를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인 게임이나 기존 벤치마크에서도 성능 개선이 나타났다. 이를 통해 Arm은 단순히 그래픽 성능을 높이는 것을 넘어 개발자가 하드웨어 제약에 맞춰 콘텐츠를 축소하기보다 게임의 그래픽과 스토리 구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구상이다. 크리스 버기 Arm 엣지 AI 부문 총괄 부사장은 "예전에는 개발자들이 모바일 게임을 개발할 때 첨단 기술 적용이 어려웠다"며 "이제 모바일에서는 불가능했던 1000개의 레이트레이싱 적용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모든 것들이 개발자 친화적인 시스템과 생태계 기반으로 개발됐다"며 "이제 그래픽 아티스트들은 게임을 온라인, 모바일, 전력, 예산에 맞추는 것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멋진 비주얼과 스토리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Arm이 엣지 AI를 넘어 주목하는 분야는 피지컬 AI다. 현재 피지컬 AI 관련 컴퓨팅 시장이 이미 상당한 규모를 형성하고 있으며, 향후 AI의 물리적 세계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시장 규모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피지컬 AI는 로봇과 자율주행차 등 물리적 공간에서 AI가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실제 움직임까지 수행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생성형 AI가 텍스트와 이미지 등 디지털 콘텐츠를 중심으로 확산됐다면, 피지컬 AI는 AI의 판단 결과가 실제 공간에서 움직임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새로운 컴퓨팅 수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Arm은 이 시장을 겨냥해 단순히 CPU 아키텍처를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태계 확장에도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전략이 'Arm 토탈 디자인'이다. Arm 토탈 디자인은 반도체 설계 기업과 파트너들이 Arm 기반의 컴퓨팅 플랫폼을 활용해 특정 목적에 최적화된 칩을 보다 빠르게 개발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AI가 데이터센터에서 엣지, 로봇과 자동차 등 피지컬 영역으로 확산될수록 다양한 형태의 맞춤형 컴퓨팅 수요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이를 Arm 생태계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헨리 부사장은 "작년 피지컬 AI 분야의 컴퓨팅 전체 시장 규모가 250억 달러로 보고 있다"며 "전환이 가속됨에 따라 컴퓨팅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시장 중 하나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6-09-0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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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부터 수주하고 조선소 만든 HD현대…54년 '선행투자 DNA'
[경제일보] HD현대의 출발은 일반적인 순서와 거리가 멀었다. 공장을 지은 뒤 제품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지만 현대중공업은 조선소가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배부터 수주했다. 1971년 10월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로부터 26만톤급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2척을 따냈고, 이듬해 3월 울산 미포만에서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조선소 공사와 선박 건조가 동시에 진행됐다. 1974년 2월 첫 선박을 진수했고 같은 해 6월 조선소 1단계 준공과 VLCC 2척 명명식을 열었다. 시장과 공장이 갖춰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수주부터 한 뒤 생산기반을 동시에 만드는 방식이었다. 1983년 현대중공업은 선박 수주와 건조량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이 경험은 이후 HD현대 경영에서 반복됐다. 필요하다고 판단한 생산능력과 기술을 시장이 충분히 커지기 전에 확보하고, 부족한 사업은 직접 만들거나 인수했다. 성공할 경우 시장 선점 효과가 컸지만 판단이 빗나가면 대규모 손실도 감수해야 했다. HD현대의 54년은 이른바 ‘선행투자 DNA’의 성공과 실패가 교차한 역사다. 배 만들다 엔진·전력·건설기계까지…필요한 것은 직접 확보 HD현대의 사업 확장은 조선소 안에서 시작됐다. 배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선박의 심장인 엔진이 필요했다. 현대중공업은 1976년 엔진사업부를 발족했고, 1978년 대형엔진공장을 완공했다. 1977년에는 중전기사업부를 세워 변압기와 전력기기 분야에도 뛰어들었다. 건설장비와 로봇도 같은 흐름이었다. 1982년 건설장비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로봇 분야에서는 1984년 용접기술연구소에 로봇 전담팀을 만들고, 1985년 산업용 로봇사업에 진출했다. 1987년 국내 최대 규모 로봇공장을 준공해 생산을 시작했고, 1988년에는 현대로보트산업을 별도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조선에 필요한 기술을 밖에서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확보한 것이다. 축적된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소 밖 시장으로 뻗었다. 2000년에는 약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자체 중형 디젤엔진인 ‘힘센엔진’을 개발했다. 선박용에서 시작한 중전기 사업은 현재 HD현대일렉트릭으로 성장해 글로벌 전력망과 AI 데이터센터에 변압기와 전력기기를 공급한다. 사업 확장은 인수합병으로도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2010년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IPIC)가 갖고 있던 현대오일뱅크 지분 70%를 넘겨받아 지분율을 91.13%까지 높였다. 11년 만의 경영권 재확보였다. 2021년에는 당시 현대중공업그룹이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했다. 조선과 에너지에 건설기계를 더하면서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넓혔다. 방식은 달라도 공통점은 분명했다. 기존 주력사업이 성숙한 뒤 새로운 산업을 찾은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쌓은 대형 제조·설비 운영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미리 확보했다. 해양플랜트 3조 적자 쇼크…선행투자의 수업료 먼저 뛰어드는 경영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실패가 2010년대 해양플랜트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선시장이 침체하자 국내 조선사들은 해양플랜트를 새로운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봤다. 현대중공업 역시 대형 해양 프로젝트 수주를 확대했다. 하지만 선박과 해양플랜트는 사업구조가 달랐다. 해양플랜트는 발주처 요구에 따른 설계 변경이 잦았고 제작·설치 과정도 복잡했다.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저가 수주와 공정 지연이 겹쳤다. 여기에 국제유가 급락까지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2014년 연결 기준 3조2495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창립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 손실 전체가 해양플랜트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세계 조선경기 부진과 조선·플랜트 등 여러 사업의 원가 상승이 함께 영향을 미쳤지만 해양플랜트의 대규모 부실이 실적 악화의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2015년에도 해양플랜트 부문에서 약 1조3000억원 규모의 손실이 반영됐다. 현대중공업은 2014~2015년 2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뒤 2016년 전사 기준 흑자로 돌아섰다. 해양플랜트 실패는 HD현대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시장에 먼저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술과 설계 역량, 계약조건, 원가와 공정 위험을 함께 통제하지 못하면 선행투자가 오히려 대규모 부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HD현대의 선행투자는 과거의 ‘속도 우선’에서 수익성과 현금흐름, 데이터에 기반한 ‘관리형 선행투자’로 성격이 달라졌다. 사람보다 AI가 먼저 판단하는 조선소…54년 DNA의 2막 HD현대는 현재 다시 미래 시장보다 앞서 설비와 기술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대상은 선박이 아니라 조선소 자체다. HD한국조선해양과 조선 계열사들은 2021년부터 ‘FOS(Future of Shipyard)’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빅데이터와 디지털트윈, 로봇, AI를 이용해 노동집약적인 조선소를 지능형 생산시설로 바꾸는 작업이다. 2023년에는 디지털트윈을 기반으로 작업과 장비 상황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1단계 ‘눈에 보이는 조선소’를 구축했다. 2026년까지 생산 데이터를 연결해 공정을 예측·최적화하는 2단계를 거쳐 2030년에는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한 ‘지능형 자율 운영 조선소’를 완성한다는 목표다. 회사가 제시한 목표는 생산성 30% 향상과 건조기간 30% 단축이다. 이는 실제 달성 실적이 아닌 2030년 목표치다. 로봇도 조선소에 투입한다.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로보틱스는 미국 페르소나AI 등과 조선 용접용 휴머노이드를 개발하고 있다. 2026년까지 시제품 개발을 끝내고 2027년부터 현장 실증과 상용화를 진행하는 계획이다. 조선업의 고질적인 숙련인력 부족과 안전 문제를 AI와 로봇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다. 과거에는 새로운 도크를 만들어 생산량을 늘렸다면 앞으로는 같은 조선소에 AI와 로봇을 넣어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선행투자가 바뀌고 있다. 조선 밖에서는 전력기기가 새로운 성장축으로 떠올랐다. HD현대일렉트릭은 미국과 국내에서 변압기 생산능력을 확대해 왔다.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증가, 미국의 노후 전력망 교체가 맞물리면서 세계적으로 변압기 공급부족이 심해진 데 따른 것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HD현대일렉트릭의 올해 6월 말 수주잔고는 85억 달러로 6개월 전보다 23% 증가했다. 3년 이상의 물량을 확보했고 일부 고객과는 2030년 인도 물량까지 협의하고 있다. 과거 중전기사업부로 시작한 사업이 반세기 뒤 AI 인프라의 핵심 공급망으로 성장한 셈이다. HD현대는 지난해 세계 조선업계 최초로 누적 선박 5000척 인도 기록도 세웠다. 1974년 첫 VLCC를 시작으로 68개국 700여 선주사에 선박을 공급한 결과다. 54년 전 미포만에서는 배를 지을 조선소조차 없는 상태에서 먼저 선박을 수주했다. 지금은 AI가 스스로 공정을 판단하는 조선소와 아직 수요가 더 커질 전력 인프라에 미리 투자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투자 방식이다. 1970년대 선행투자가 창업자의 결단과 실행력에 의존했다면 현재는 수주잔고와 데이터, 자동화 기술, 글로벌 수요 전망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HD현대의 DNA는 무조건 남보다 빨리 뛰어드는 데 있지 않다. 앞으로 필요할 기술과 생산능력을 먼저 정하고,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전에 이를 실제 산업으로 만드는 능력에 가깝다.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었던 승부수는 HD현대를 세계 최대 조선사로 키웠다. 해양플랜트는 같은 DNA가 얼마나 큰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도 보여줬다. 업계 관계자는 “2030년 AI 자율조선소와 전력기기가 또 하나의 ‘미포만 신화’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면서 “다만 분명한 것은 HD현대가 54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장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생산기반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어 “선행투자는 여전히 HD현대의 가장 강력한 성장 DNA이자 가장 엄격하게 관리해야 할 위험”이라고 강조했다. [아주경제 2026년 09월 08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9-08 09: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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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데이터센터 특별법, '누구를·얼마까지' 지원하나…시행령이 성패 가른다
[경제일보] 내년 3월 시행되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특별법의 실효성을 좌우할 세부 기준 마련이 본격화한다. 법률이 인허가 기간 단축과 전력·용수 지원, 비수도권 전력계통영향평가 면제라는 큰 틀을 열어놨다면 시행령은 어떤 데이터센터에 어느 수준까지 특례를 적용할지를 결정한다. 지원 대상과 전력용량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투자 촉진법’이 될 수도, 선언적인 지원법에 머물 수도 있다는 평가다. 7일 정보통신기술(ICT)업계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오는 9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누리꿈스퀘어에서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과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특별법 하위법령 공개토론회’를 연다. 과기정통부는 시행령 초안을 설명하고 산업계와 학계의 의견을 수렴한 뒤 입법예고안을 보완할 예정이다. 특별법은 지난 6월9일 공포됐으며 9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2027년 3월10일 시행된다. 관건은 특별법상 AI 데이터센터의 범위다. 특별법 제2조는 AI 데이터센터를 AI기본법에 따른 데이터센터 가운데 ‘설비 및 규모 등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시설’로 규정했다. 구체적인 서버·연산장치 구성과 전력용량 등은 시행령에 넘긴 셈이다. 기준을 지나치게 높이면 중소·중견 사업자가 지원 대상에서 배제될 수 있고, 반대로 낮게 잡으면 일반 데이터센터가 일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설치한 뒤 AI 데이터센터로 신고해 지원을 받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전체 서버에서 AI 연산장치가 차지하는 비중이나 실제 가동률, AI 서비스 제공 실적 등을 확인할 증빙 기준이 필요한 이유다. ◆ 개방형 AI DC 포함 추진…“누가 쓰나보다 어떻게 쓰나” 정부가 방향을 분명히 한 부분은 개방형 AI 데이터센터다. 개방형 AI 데이터센터는 사업자가 직접 사용하는 자가용 센터와 달리 외부 기업과 연구기관에 GPU·신경망처리장치(NPU), 공간과 전력 등을 임대하거나 공유하는 시설이다. 장기철 과기정통부 AI데이터진흥과장은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AI 시대 네트워크 고도화 방안’ 정책간담회에서 “지금은 디테일이 필요한 시기”라며 자가용뿐 아니라 개방형 AI 데이터센터도 특별법의 정의와 적용 대상에 포함하는 방향으로 시행령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모정훈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당시 국내 AI 데이터센터의 91.3%가 여러 기업이 이용하는 개방형 구조라며, 이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AI 활용 기회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시설을 누가 소유하거나 직접 쓰는지보다 국내 AI 산업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기준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만 개방형 센터를 포함하는 것과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특별법 자체가 AI 데이터센터 전체에 일률적인 세액공제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른 공제를 받으려면 해당 시설이 국가전략기술인 AI 개발과 서비스에 실제 활용된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이에 따라 GPU 보유량이나 임대계약만으로 인정할지, 국내 기업의 이용 비중과 AI 연산 실적까지 요구할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해외 빅테크에 컴퓨팅 자원을 전량 제공하는 센터까지 국내 산업 지원 대상으로 볼 것인지도 시행령과 세제 운용 과정에서 정리해야 한다. 기존 AI 데이터센터의 적용 범위도 불분명하다. 법 부칙은 AI기본법 제25조에 따라 정부가 이미 진행한 처분과 절차는 특별법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법 시행 전에 민간이 자체적으로 구축한 모든 AI 데이터센터를 자동으로 지원 대상에 포함한다는 규정은 없다. 비수도권에서 운영 중인 센터를 확장하거나 일반 데이터센터를 AI 데이터센터로 전환하는 사업은 전력계통영향평가 특례 대상에 포함됐다. 반면 별도의 증설이나 전환 없이 가동 중인 센터가 금융·기반시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는 시행령의 정의와 신고·경과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법 시행 전 투자와 시행 후 신규 투자 사이의 형평성을 위해 기준일과 인정 서류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 계통평가 면제는 비수도권만…‘몇 MW까지’가 핵심 전력 특례의 실효성은 면제 용량에 달렸다. 특별법 제19조는 비수도권에서 AI 데이터센터를 신축·확장하거나 기존 데이터센터를 AI 데이터센터로 전환할 때 전력계통영향평가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했다. 수도권 데이터센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현행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 시행령상 전력계통영향평가는 지정 지역에서 10메가와트(MW) 이상의 전력을 새로 사용하거나 추가하는 사업자에게 적용된다. AI 데이터센터 특별법은 면제 가능한 전력용량을 다시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했다. 면제 상한을 현행 평가 대상 기준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낮게 정하면 특례의 체감 효과가 크지 않다. 반대로 대규모 센터까지 폭넓게 면제하면 비수도권 전력망의 보강 비용과 계통 안정성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센터 규모뿐 아니라 지역별 전력 여유와 자체 발전·에너지저장장치(ESS) 확보 여부 등을 함께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별법 제20조는 재생에너지 전기공급사업자가 전력시장을 거치지 않고 AI 데이터센터에 전기를 직접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입법 과정에서 거론됐던 액화천연가스(LNG) 직접전력구매계약(PPA)은 최종 법률에서 빠졌다. 전력 조달의 선택 폭을 넓히면서도 탄소 감축 기조를 훼손하지 않아야 하는 과제가 시행 단계에 남았다. ◆ 인허가 ‘타임아웃제’ 법에 명시…접수 전 지연 막아야 인허가 처리기간은 법률에 이미 구체적으로 담겼다. 전력계통영향평가는 150일, 에너지사용계획 협의와 교통·경관·건축위원회 심의는 90일, 건축허가와 소방 동의 등은 40일 안에 검토 결과를 통지해야 한다.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한 차례에 한해 최대 30일 연장할 수 있다. 관계기관이 해당 기간 안에 거부 통지를 하지 않으면 기간이 끝난 다음 날 인허가 처리가 완료된 것으로 보는 ‘타임아웃제’도 도입됐다. 다만 사업자는 과기정통부의 사전 검토와 국가AI전략위원회 심의·의결을 거쳐야 일괄처리 절차에 들어갈 수 있다. 결국 신청서 보완과 관계기관 협의, 국가AI전략위원회 심의에 걸리는 시간이 별도로 길어지면 법정 처리기간을 단축한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시행령에서는 신청 접수 여부를 결정하는 기한과 보완 요구 횟수, 관계부처 이견 조정 절차까지 구체화해야 한다. 지원 재원을 누가 부담할지도 남은 문제다. 특별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전력·용수·도로·통신시설을 우선 설치하고 GPU 등 연산장비의 구입·임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자금 융자와 투자, 보조금 지급 근거도 마련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지원할 수 있다’는 임의규정이어서 예산과 비용 분담 기준이 뒤따르지 않으면 사업자가 체감하기 어렵다. 장 과장은 “업계 의견을 적극 반영해 AI 데이터센터 특별법 시행령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는 9일 공개될 초안에서는 AI 데이터센터의 설비·규모 기준과 개방형 센터의 증빙 요건, 비수도권 계통영향평가 면제 전력용량, 기존 센터에 대한 경과조치가 핵심 검증 대상이 될 전망이다.
2026-09-07 09: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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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포스코, 美에 8조원 '철강 전진기지'…50% 관세 넘어 모빌리티 공급망 완성
[경제일보] 현대자동차그룹과 포스코가 미국 루이지애나에 총 58억 달러(한화 약 8조원)을 투입하는 대형 전기로 제철소 건설에 들어갔다. 미국의 수입 철강 50% 관세 장벽을 현지 생산으로 넘고, 자동차강판부터 로봇·로켓 등 첨단산업용 특수강까지 공급하는 북미 생산거점을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현대제철, 현대차·기아, 포스코는 4일(현지시간) 미국 루이지애나주 도널드슨빌에서 ‘현대제철-포스코 루이지애나 전기로 제철소(HPLS)’ 기공식을 열었다. HPLS 부지는 약 223만평, 737만㎡ 규모다. 과거 사탕수수밭이었던 이곳에는 2029년까지 연산 270만톤 규모의 전기로 기반 일관제철소가 들어설 예정이다. 현대차그룹은 HPLS를 통해 북미에서 원료와 철강 생산부터 완성차 제조·판매까지 연결되는 현지 공급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날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강은 차세대 모빌리티를 만들어가는 현대차그룹은 물론 현지 다른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들을 지원하는 튼튼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했다. 50% 철강관세 ‘현지 생산’으로 대응…美 특수강 수요 직접 겨냥 HPLS 투자의 가장 직접적인 배경 중 하나는 미국의 강화된 철강 무역장벽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 철강 수입시장 중 하나지만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수입 철강에 50% 관세를 부과하고 반덤핑 조치도 강화하고 있다. 한국에서 생산한 철강을 미국에 들여오는 방식의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현대차그룹과 현대제철은 아예 미국 현지에서 자동차용 특수강을 생산해 관세 영향을 낮추고 완성차 공급망의 안정성을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정 회장은 “미국은 매년 1000만 톤의 고부가 특수강을 수입하는데 현지에서 이를 커버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현대차·기아뿐 아니라 미국 내 다른 자동차 제조사에 철강을 공급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은 “HPLS 철강을 모든 차종에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며 “다른 완성차 업체들과도 실제 (철강 공급)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HPLS가 자리 잡는 도널드슨빌은 미국 남부 자동차 산업벨트와 연결하기에도 유리한 입지로 평가된다.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과 기아 조지아 공장은 물론 GM의 텍사스, 폭스바겐의 테네시, 혼다의 앨라배마 생산거점과 접근성이 높다. 대형 철도망이 인접해 있는 데다 미시시피강을 통해 약 7만톤급 파나막스 선박의 접안이 가능해 원료 반입과 제품 출하에도 유리하다. 미국의 상대적으로 낮은 천연가스와 전력 비용도 전기로 생산의 원가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자동차강판 넘어 로봇·로켓까지…‘첨단소재 생산기지’로 확장 현대차그룹이 HPLS에 기대하는 역할은 자동차강판 생산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 회장은 “HPLS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부터 발전 분야까지 주요 산업의 기초를 지지하고 한미 양국의 미래 세대를 위한 새 기회를 창출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향후 HPLS에서 생산하는 고부가 특수강의 사용처를 자동차뿐 아니라 로봇과 로켓 등 첨단산업으로 확대하겠다는 의미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자동차 제조업을 넘어 로봇·AI·미래 모빌리티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히는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철강 생산부터 첨단 모빌리티에 필요한 소재까지 현지 공급망 안에 포함시키겠다는 것이다. HPLS는 탄소저감형 자동차강판 생산거점 역할도 맡게 된다. 업계에서는 현지에서 생산한 특수강판을 현대차·기아 차량에 직접 적용할 경우 물류와 통상 리스크를 낮추는 동시에 소재 단계의 품질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제철과 포스코의 협업도 주목할 대목이다. HPLS의 지분구조는 현대제철이 50%로 가장 많고 포스코가 20%, 현대차와 기아가 각각 15%를 보유한다. 국내 철강시장에서 경쟁해 온 현대제철과 포스코가 미국 대형 프로젝트에서는 공동 투자자로 손을 잡은 것이다. 두 회사는 앞서 수소환원제철을 비롯한 친환경 철강기술 분야에서도 장기적인 협력 가능성을 논의해왔다.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은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국내에서는 경쟁자의 입장이지만 글로벌로 보면 둘 다 한국의 기업”이라며 “(HPLS 구축은) 한국 기업이 세계로 나가 서로 협력하고 우리 기업의 위상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HPLS는 양사의 차세대 제철기술을 실제 생산현장에 적용하는 공동 실증무대 역할도 할 전망이다. 5400명 고용 효과…한미 제조업 협력의 새 상징 대규모 고용과 지역경제 효과도 예상된다. 현대차그룹은 HPLS 가동을 통해 직접 고용 약 1300명, 간접 고용 약 4100명 등 총 5400여명의 고용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지방정부 역시 한국 기업의 대형 제조업 투자에 기대를 나타냈다. 제프 랜드리 루이지애나 주지사는 “현대차그룹의 투자로 루이지애나 지역 사회는 일하고 배우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할 기회를 얻게 됐다”고 평가했다. 한국 정부도 이번 투자를 한미 산업협력의 대표 사례로 보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 제철소 건설이 아닌 한미 협력의 상징”이라며 “미 주정부와 연방 정부에 이 같은 모멘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지원을 요청드린다”고 했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자동차시장에서 GM과 도요타그룹, 포드에 이어 점유율 4위에 올라 있다. HPLS가 본격 가동되면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핵심 소재까지 미국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게 돼 북미 사업의 수직계열화 수준은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는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에 한국 기업이 단순한 수출 축소가 아니라 현지 생산·투자 확대로 대응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58억 달러 규모의 HPLS가 계획대로 2029년 생산을 시작하면 현대차그룹의 미국 사업은 완성차 현지생산을 넘어 철강과 첨단소재까지 품는 구조로 확장된다. 동시에 현대제철과 포스코 역시 자동차강판을 넘어 미국의 로봇·우주·AI·에너지 산업을 겨냥한 고부가 특수강 시장에 직접 진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2026-09-06 18: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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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호 주한 베트남대사 "한·베, 투자 넘어 반도체·AI 공동성장 시대로"
[경제일보] 쩐 타인 먼 베트남 국회의장이 한국 국회의장의 초청으로 부인과 정부 관계자들을 이끌고 오는 6일부터 9일까지 한국을 공식 방문한다. 이번 방문은 한국과 베트남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가 역대 가장 활발하고 실질적인 단계로 발전하는 가운데 이뤄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의회 외교와 제도 정비가 양국 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핵심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양국 경제 협력도 전통적인 투자·무역 영역을 넘어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녹색전환 등 신산업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경제일보는 쩐 타인 먼 의장의 방한을 앞두고 부 호 주한 베트남대사를 지난 4일 만나 양국 관계의 향후 전략과 교역 1000억달러 달성 방안, 경제·기술 협력 확대 방향 등을 들었다. ◆“한·베 외교, 더 깊고 실질적이며 지속가능하게” 부 호 대사는 현재 한·베 관계의 가장 큰 특징으로 정치적 신뢰의 심화를 꼽았다. 그는 “2025년 8월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첫 국빈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2026년 4월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베트남의 새 지도부 출범 이후 첫 국빈으로 베트남을 찾았다”며 “양국 모두에서 ‘첫 번째’라는 상징은 단순한 의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양국 관계가 당과 정부, 국회는 물론 국방·안보·경제·과학기술·문화·인적교류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한반도 평화와 안정, 아세안(ASEAN),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유엔 등 지역·국제 문제에 대한 협의도 이전보다 깊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부 대사는 앞으로 양국 외교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세 단어로 압축했다. “더 깊게, 더 실질적으로, 더 지속가능하게”다. 그는 “정치적 신뢰는 더 깊어져야 하고 경제·기술·공급망 안보 협력은 더 실질적이어야 하며, 국민 간 교류와 양국 젊은 세대의 연결은 더욱 지속가능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정상 방문 횟수나 체결한 문서의 숫자보다 두 나라가 오늘의 문제를 얼마나 함께 해결하고 내일을 얼마나 잘 준비하느냐로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2026년 교역 1000억달러…2030년 1500억달러 목표” 양국은 올해 교역액 1000억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부 대사는 “2025년 한·베 교역액이 약 946억달러를 기록했고, 올해 상반기에만 약 624억달러에 달했다”며 “당장의 목표는 2026년 1000억달러지만, 2030년에는 균형 있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1500억달러까지 확대하는 것이 양국의 비전”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단순히 교역 규모를 키우는 것보다 협력의 질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기업들은 전자·제조·기계·부품산업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산업화에 큰 역할을 했다. 앞으로는 ‘투자-생산’ 관계를 넘어 ‘공동 연구-공동 개발-공동 가치사슬 참여’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가 대표적인 분야다. 부 대사는 “베트남은 젊은 인력과 시장, 확대되는 전자제품 생산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고 한국은 기술·자본·경영 경험과 세계적인 기업을 갖고 있다”며 “인력 양성에서 설계·패키징·검사, 연구개발(R&D), 베트남 공급업체 육성까지 연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AI와 에너지 협력도 강조했다. AI와 데이터센터, 첨단 제조업이 안정적이고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는 만큼 청정에너지, 스마트그리드, 에너지저장장치, AI 기반 에너지 관리 등이 양국 협력의 새로운 축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지난 4월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AI와 반도체, 디지털 분야, 차세대 배터리와 미래산업 공동 연구를 확대하기로 합의했다고 소개했다. 부 대사는 “앞으로 양국 경제 관계의 새로운 ‘앵커’가 필요하다”며 “대형 R&D센터나 반도체 생태계, 스마트 산업단지, 수백 개 기업을 끌어들일 수 있는 에너지·기술 프로젝트가 등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는 한국이 베트남에 얼마나 투자했는지만이 아니라 양국이 함께 얼마나 많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026-09-05 11: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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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에서 AI가 일한다"…카카오 컨소시엄, 생활형 AI 플랫폼 구축
[경제일보] 카카오가 LG그룹과 손잡고 카카오톡을 국민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서비스의 핵심 접점으로 키운다. 자체 AI 모델 개발에 그치지 않고 카카오의 플랫폼과 LG의 AI 모델·통신·가전·공공 시스템 역량을 결합해 국민이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AI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4일 카카오가 주관하는 컨소시엄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모두의 AI' 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돼 국민 누구나 일상에서 쉽고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AI 플랫폼을 개발한다고 밝혔다. 컨소시엄에는 LG유플러스, LG AI연구원, LG전자, LG CNS, 카카오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 금융·의료 등 분야별 전문 기업·기관이 참여한다. 카카오는 서비스 기획과 개발·운영을 총괄하고 카카오톡이라는 이용자 접점을 제공한다. 카카오엔터프라이즈는 AI 클라우드와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를 맡는다. LG AI연구원은 'K-엑사원'을 제공하고 LG유플러스는 통신 기반 서비스 확산, LG전자는 가전 연계, LG CNS는 공공 데이터와 시스템 연계를 지원한다. 카카오의 자체 AI 모델 '카나나'도 서비스에 적용된다. 국산 AI 모델과 플랫폼, 통신, 가전, 공공 시스템을 결합해 단순한 AI 모델 경쟁을 넘어 실제 국민 서비스로 연결하는 것이 컨소시엄의 핵심이다. 서비스 접점은 카카오톡을 중심으로 마련한다. 별도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지 않아도 대화하듯 AI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진입장벽을 낮추고, 전화 AI 등 다른 채널도 함께 활용해 디지털 서비스에 익숙하지 않은 이용자까지 포괄한다. 특히 '모두의 AI'는 단순 질의응답을 넘어 AI가 필요한 정보를 찾고 관련 서비스의 신청과 실행까지 지원하는 형태로 구축된다. 초기에는 일자리·금융·건강·의료·라이프케어 등을 중심으로 특화 AI 서비스를 제공하고 정부24, AI국민비서 등 공공서비스도 연계할 예정이다. 카카오에게는 이번 사업이 카카오톡을 메신저에서 AI 플랫폼으로 확장할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카카오톡 안에서 AI가 이용자의 질문에 답하고 필요한 서비스를 연결하는 수준을 넘어 전문 서비스와 외부 사업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할 경우 카카오 생태계의 활용 범위도 넓어질 수 있는 것이다. 향후에는 외부 기업과 개발자에게도 생태계를 개방할 계획이다. 카카오는 'PlayMCP' 등을 활용해 외부 기업과 개발자가 AI 서비스를 등록·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초기 특화 서비스를 바탕으로 국민 생활과 밀접한 AI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카카오 관계자는 "카카오 컨소시엄은 국민이 매일 사용하는 생활 접점과 국내 기업의 AI 역량을 결합해 AI의 편익을 국민 누구나 체감할 수 있도록 하고, 공공과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지속 가능한 국내 AI 생태계 확산에 기여할 계획"이라며 "컨소시엄은 2026년 플랫폼 기반 구축과 베타 검증을 시작으로, 이용자 개인의 필요에 맞춰 서비스를 구성하는 '1인 1 AI 에이전트'로 발전시킬 예정"이라고 말했다.
2026-09-04 15: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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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 20조 선납 제안…전력망 책임은 누구 몫인가
[경제일보] 수백조원을 들여 반도체 공장을 지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첨단 팹은 거대한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반도체 경쟁이 기술과 자본의 싸움인 동시에 전력망 경쟁인 이유다. 하지만 그 전력망을 깔 돈이 부족해지자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5년치 전기요금을 먼저 내달라는 카드를 꺼냈다. 한전이 제안한 규모는 삼성전자 20조원, SK하이닉스 5조원이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낸 전기요금 약 4조1000억원과 9000억원을 기준으로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치를 계산했다. 선납금은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 등에 투입하고, 기업에는 국고채 금리보다 높은 수준의 이자를 제공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다만 참여 여부와 금리, 금액과 기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한전도 ‘제안’ 단계임을 분명히 했다. 전기요금 선납제 자체도 새로운 제도는 아니다. 지난해 선납액은 약 3900억원이었고, 대부분 공공기관이 이용했다. 기업이 미래에 낼 전기료를 먼저 내고 한전은 그 돈을 필요한 설비에 투자하며 기업은 이자를 받는 구조라면 금융거래로서 성립할 여지는 있다. 적기에 전력망이 완공되지 못해 수십조원짜리 공장이 서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이해관계가 있다. 문제는 규모와 목적이다. 3900억원 수준이던 선납제도를 단숨에 25조원짜리 전력망 조달수단으로 바꾸면 제도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 25조원은 한전 연간 매출의 4분의 1에 가까운 돈이다. 전기요금 납부 편의를 위한 제도가 사실상 국가 핵심 인프라를 조달하는 금융수단으로 변하는 셈이다. 한전이 이 방안을 고민하는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기 가동과 호남 클러스터 건설 등에 따른 추가 전력수요는 20.6GW로 추산되고, AI 데이터센터까지 더하면 필요한 전력이 더 늘어난다. 한전은 당초 2038년까지 전력망에 72조8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었지만 투자 수요는 더 커졌다. 반면 한전의 연결 기준 부채는 지난 6월 말 210조7000억원에 달한다. 올해 상반기에만 이자비용으로 2조1000억원을 썼다. 공기업의 재무제표와 국가 산업정책의 시간표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삼성과 하이닉스가 쓰는 전기니 두 회사가 망을 깔면 된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된다. 전력망은 공장 안의 생산설비가 아니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산업단지와 도시로 실어 나르는 국가 기간시설이다. 지난 7월 시행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도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 전기를 공급하는 주요 송·변전설비를 ‘국가기간 전력망 설비’로 규정하고 있다. 법의 목적부터 전기에너지의 안정적 공급과 국가 주요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력망을 조기에 확충하는 데 있다. 국가가 스스로 ‘기간망’이라고 이름 붙인 인프라의 책임을 특정 기업의 현금 여력에 의존해 해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반대편 원칙도 분명하다. 막대한 전기를 사용하는 대기업이 자신 때문에 추가로 발생하는 인프라 비용을 한 푼도 부담하지 않겠다는 논리 역시 설득력이 없다. 10GW, 20GW의 새로운 수요가 생기면 발전설비뿐 아니라 송전선과 변전소, 계통보강 비용이 따라온다. 그 비용을 일반 가정과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전기 소비자에게 똑같이 떠넘기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제5편에서 개인이나 소수에게 맡길 수 없는 공공사업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을 국가의 책무로 봤다. 동시에 도로와 교량 같은 시설의 비용은 이용자에게 받는 통행료로 충당할 수 있다고 했다. 250년 전에도 공공 인프라의 책임과 이용자의 비용부담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었던 셈이다. 지금 필요한 것도 ‘국가가 전부 낼 것이냐, 기업이 전부 낼 것이냐’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누가 어느 비용을 왜 부담하는지에 대한 원칙이다. 국가 전체가 이용하는 기간 송전망과 장거리 간선망은 국가와 한전이 책임지는 것이 맞다. 반면 특정 산업단지나 초대형 수요처 때문에 추가로 필요한 전용선로와 변전소, 접속설비에는 원인자·수익자 부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여러 기업과 지역이 함께 혜택을 보는 계통보강 비용이라면 수익 범위에 따라 분담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 선이 먼저 그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한전이 재무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현금이 많은 기업을 찾아가 몇 년 뒤 받을 전기료를 미리 달라고 하는 방식이 관행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오늘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지만 내일은 데이터센터, 배터리, 철강·석유화학 기업이 대상이 될 수 있다. 국가 인프라 투자비가 전력 수요자의 현금 보유액이나 협상력에 따라 결정되는 구조는 산업정책도, 요금정책도 아니다. 더구나 한전은 독점적인 송·배전망 사업자다. 기업 입장에서는 “싫으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으로 거래의 자발성이 완전히 확보됐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새 공장에 제때 전기를 공급받아야 하는 기업과 그 전력을 공급할 사실상의 유일한 사업자가 20조원 규모의 선납을 협상한다면 일반적인 금융거래보다 훨씬 엄격한 절차와 기준이 필요하다. 따라서 선납제를 확대하려면 세 가지 안전장치가 먼저다. 선납금은 해당 전력망 건설에만 쓰도록 별도 관리해야 한다. 기업별 부담액은 전력 사용량과 추가 계통투자 비용 등에 따른 객관적 산식으로 정하고 동일한 조건의 대규모 수요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공사가 늦어지거나 전력 공급 일정이 어긋났을 때 선납기업이 부담할 위험과 보상 원칙도 계약 단계에서 명확히 해야 한다. 한전의 재무문제와 전력망 투자 문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선납금으로 한전채 발행을 줄이는 효과가 생길 수는 있다. 하지만 과거 전기요금 정책과 연료비 급등으로 쌓인 210조원대 부채를 반도체 기업의 미래 전기료로 메우는 것이 목적이 돼서는 곤란하다. 반도체 전력망에 들어갈 돈과 한전의 누적 재무부담을 한 통장에 넣는 순간 비용 부담의 원칙은 흐려진다. 정부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정부는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용인과 호남에 대규모 클러스터를 추진하고 있다. 기업에는 수십조원, 수백조원 규모의 투자를 주문하면서 정작 공장을 돌릴 전력망은 한전과 기업이 돈을 마련해 알아서 깔라는 식이어서는 산업정책이라 하기 어렵다. 공장 유치는 국가전략이고 송전망은 기업 사정이라는 식의 역할 분담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의 속도는 전력망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 주민 수용성 문제와 송전선로 인허가를 풀고 장기 전력수요를 예측해 기간망을 미리 확보하는 일은 개별 기업이 대신할 수 없는 국가의 몫이다. 올해 시행된 국가기간전력망법이 5년마다 30년 단위의 장기 전망을 담은 전력망 기본계획을 만들도록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혜자가 되는 전력설비 비용을 일정 부분 부담하는 방안은 검토할 수 있다. 조건이 합리적이고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면 전기료 선납도 하나의 재원조달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순서는 분명해야 한다. 먼저 국가가 어떤 전력망을 언제까지 책임질 것인지 정하고, 그 다음 특정 수요자가 추가로 발생시킨 비용의 몫을 투명하게 계산해야 한다. 한전의 재무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 순서를 거꾸로 세워서는 안 된다. 전기는 기업이 돈을 내고 사는 상품이지만, 그 전기가 흐르는 국가기간망은 대한민국 산업의 기반이다. 상품의 값을 기업에 받을 수는 있다. 더 많이 쓰는 기업에 더 많은 인프라 비용을 부담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가 제때 준비하지 못한 기간망의 책임까지 ‘5년치 전기료 선납’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에 청구해서는 안 된다. 25조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보다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은 그것이다. “한국의 전력망은 누구의 책임인가.”
2026-09-04 13: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