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정부가 편성한 2027년도 예산안이 총지출 820조9000억원 규모로 국회 심사에 들어갔다. 올해 본예산보다 93조원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의 수출 호조로 세수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는 여전히 어렵다. 고물가와 내수 부진에 시달리는 서민과 소상공인의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성장의 과실이 일부 산업과 계층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국민이 낸 세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는 국가 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문제다.
재정은 정부의 쌈짓돈이 아니다. 국민이 낸 세금이며 잘못 쓰면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예산 심사의 기준은 정치적 유불리가 아니라 사업의 필요성과 효과, 재정 투입에 따른 책임이어야 한다. 그러나 국회의 예산 심사는 해마다 지역구 민원성 사업 끼워 넣기와 여야의 정쟁, 생색내기식 증액 요구로 얼룩졌다. 정부는 재정 확대를 내세우고 국회는 표심을 겨냥한 예산을 챙기는 관행이 반복된다면 재정 개혁은 말뿐이다. 국민의 혈세를 쓰면서 성과에 책임지지 않는 정치권의 행태부터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세출 구조조정이다. 예산 규모가 커졌다고 국가 경쟁력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관행적으로 편성되는 중복·유사 사업, 성과가 부진한 보조금, 집행률이 낮은 사업, 목적을 잃은 위원회와 출연금부터 정리해야 한다. 특정 단체나 이익집단의 요구에 밀려 존속하는 사업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한 번 편성된 예산은 다음 해에도 당연히 유지된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정부는 2027년도 예산안에서 107조6000억원 규모의 지출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100여개 세부 사업을 폐지하고 재량지출에서 38조6000억원을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국회는 이 숫자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사업을 없애고 얼마를 절감하는지 따져야 한다. 사업 명칭이나 회계 항목만 바꿔 기존 지출을 이어가는 것은 구조조정이 아니다. 사업별 집행률과 성과를 확인하고 중복 지원과 실효성 없는 사업은 예산을 삭감하거나 폐지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요구하는 지역구 증액 사업도 필요성과 수혜 효과, 사후 관리 방안을 공개하고 검증받도록 해야 한다.
재정 구조조정의 목적은 무조건 지출을 줄이는 데 있지 않다. 불필요한 비용을 걷어내 미래에 필요한 곳으로 재원을 옮기는 일이다. 취약계층과 소상공인, 청년의 자립을 돕는 사업에는 충분한 예산을 배정해야 한다. 복지는 선거 때마다 현금을 나눠주는 정책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국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사회안전망이어야 한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이차전지 등 미래 산업의 기술 경쟁력 확보와 핵심 인재 양성에도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면 성장 잠재력뿐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와 경제 안보까지 위협받는다. 미래 투자는 줄일 대상이 아니라 낭비를 걷어낸 재원으로 뒷받침해야 할 분야다.
정부가 마련한 미래대응기금의 운용도 꼼꼼히 따져야 한다. 정부는 반도체 호황 등으로 늘어날 추가 세수 162조3000억원을 바탕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이 가운데 45조4000억원을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인재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12조5000억원은 국채 신규 발행을 줄이는 데 활용하고 나머지는 여유자금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세수가 늘었다고 무조건 지출부터 확대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 경기와 세수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일시적인 세수 증가에 기대어 장기간 유지해야 할 사업을 무리하게 늘리면 경기가 꺾였을 때 재정 부담이 커진다. 미래대응기금도 투자 대상과 집행 기준, 성과 평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정부는 관리재정수지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0.1%, 국가채무 비율이 48.3%로 개선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국가채무 절대액은 1519조8000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재정수지와 채무 비율이 좋아진다는 전망만으로 안심할 수 없는 이유다. 세수 증가가 둔화하더라도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지출 구조인지 따져봐야 한다. 재정 확대를 주장하는 정부도 세입 전망을 낙관적으로 잡거나 성과가 불투명한 사업을 밀어붙였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국회 역시 정부 예산을 무조건 삭감하거나 지역구 사업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 예산을 늘릴 사업과 줄일 사업을 구분하고, 증액과 감액의 근거를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예산 낭비가 확인되면 소관 부처 장관과 사업 책임자에게 집행 경위와 성과를 따져 물어야 한다. 고의적인 부실 집행과 방만한 예산 운용에는 징계와 환수 등 실질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예산을 편성한 정부와 이를 심사하는 국회 모두 재정 운용에 공동 책임이 있다.
821조원은 거대한 숫자지만 그 안에는 국민의 오늘과 미래 세대의 부담이 함께 들어 있다. 정부는 불필요한 지출을 걷어내고 국가 경쟁력을 높일 사업에 재원을 집중해야 한다. 국회는 지역구 챙기기와 정쟁을 멈추고 한 푼의 예산도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심사해야 한다. 예산을 늘리는 일보다 잘못된 지출을 찾아내고 고치는 일이 더 어렵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피한다면 재정 확대는 성장의 밑거름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부담이 될 수 있다. 821조원이라는 역대 최대 예산 앞에서 정부와 국회가 보여줘야 할 것은 증액 경쟁이 아니라 지출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는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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